1995년 11월 1일에 발행된 <도서출판 솟대>의 일명 “쉰 놈 쉰 소리”에 실린 내 수필은 그 제목이 [주영숙인]이다.
“제주가 여럿인 사람은 한 가지도 제대로 하는 게 없다면서요?”
나를 두고 비아냥거리는 이 말은 내가 발전하는데 있어서 지대한 공을 세운다. 어느 신문의 신춘문예에 단편을 당선시킨 당당한 그 문우는, 어느 날 내게 그런 충고를 하고는 그 몇 개월 뒤엔 자기가 실수했노라고 전해왔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의 말을 약으로 쓰고 있는 중이어서 여유작작한 대답을 했다.
“그 중에 하나만 뛰어나 보이면 되는 게 아니겠어요?”
물론 어떤 분의 권고로 시작한 작품이지만 내가 이것에 도전하게 된 경위는 그 문우의 비아냥거림이 크게 작용했음이다. ‘한국전통공예대전’이라는 이 대전은 대통령, 국무총리, 문화체육부장관 등등의 상이 걸려있는데, 나는 여기에 이당 김은호의 백학도를 바탕으로 하여 동양자수를 하게 된 것이었다. 삼풍백화점이 붕괴되는 날 시작한 이 60호짜리 작품은 꼭 두 달을 채웠다. 처음 시작 할 때 ‘일천구백구십오년팔월이십팔일 주영숙인’이라고 먼저 새겼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예정대로 끝난 것이다. 물론 수상을 해야겠지만 나는 이 작품을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희열감을 맛본다.
한계에 도전하기 육십일. 그렇다. 나는 내 한계를 시험해본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내게 그런 말을 한다. 언제 그리고 언제 쓰며 살림은 또 언제 하느냐고. 그리는 것에는 화선지에 그리기, 한복에 그리기, 도자기에 그리기가 있다. 쓰기에는 장편 단편의 소설과 시가 있다. 이 모든 것을 도대체 어느 시간에 하느냐고 감탄 반 질투 삼십 프로, 비웃음 이십 프로를 섞어서들 말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내가 지금 막 끝낸 60호짜리 자수작품 이야기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뜬금없는 고민이 생긴다. 하지만 나는 악착같이 해냈다. 그림이 담겨있고, 시가 흐르며, 조선시대 궁중비화들이 올올이 스며있는 작품을 완성해낸 것이다.
열한마리의 학이 날아들고 앉아 노니는 이곳엔 늙은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바다 물결 위엔 기암괴석들이 물보라를 토해낸다. 달과 구름 또한 신비롭다. 내가 시를 짓고 소설을 쓰며 그림을 그리고 수를 놓는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남들과 똑같이 분배받은 ‘시간’ 안에 해낸다.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가능하며 해보니까 재미가 있었고, 깊이 파고들었다. 그것이 잘못일까? 나는 왜 한 가지라도 뛰어나 보이려고 발악(?)하고 있을까? 왜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걸까? 우습다. 한 가지라도 뛰어나 보이면 되잖겠느냐며 두 달 꼬박 눈을 파고 손가락을 피범벅으로 만들고........ 그러고 보니 참으로 우습다. 내 꼴이 이렇게 우습다. 내 희열감을 무색하게 할 지경이다. 그러나 오년 전만 하더라도 눈이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 바늘은커녕 독서도 제대로 못했던 나는 형편없는 시력으로 수를 새겨냈다는 이 사실 하나만 가지고서 춤을 추어야겠다. 어차피 기증하지도 못할 눈. 나는 이 눈을 실컷 쓰고 가리라. 더 늙어서 앞을 보지 못하게 되더라도 나는 나의 작품들을 모두 내 눈앞에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그림 속에서 나는 기쁜 내 마지막을 맞을 수 있으리라 예감한다. 보아라, 학이 살아서 날아들지 않으냐. 물결이 살아서 출렁이지 않으냐. 사랑도, 미움도, 증오도....... 그래, 모두 털어버리자. 다른 이에겐 여럿 재주로 보이는 내 한 가지의 가능성을 그래, 갈고 닦고 소중히 보듬자.
외치고 싶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십시오. 얼마든지 사과드리겠습니다. 어렴풋이 추측컨대 나의 작품에 대한 욕심이 잘못이고, 그러니 할 줄 아는 것이 잘못이다. 그렇다. 나는 죄를 지은 것이다. 대학 사년간이나 동양화를 전공한 친구에게 나는 죄를 지었다. 이제서 그걸 깨달았다.
친구는 대학 사년동안 전공했지만 손바닥만한 작품 하나라도 완성할 수가 없었다. 수년 전이다. 이 돌팔이(사년간 전공한 일이 없으니까)가 그 친구에게 장난기 섞인 선심을 베풀었는데 바로 어떤 방법이었냐 하면 주영숙 자신의 그림에다 그의 낙관을 하게 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 친구의 시댁 친척집이나 자기의 친정집에나 심지어 자기 안방에까지 자기의 낙관을 한 주영숙의 그림을 걸거나 세우게 된 것이다.
나는 그를 도와주느라고 그가 원하는 대로 내 그림을 제공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롯이 나의 죄였다. 죄악이었다. 그는 남편을 속였고, 친정 부모 형제를 속였고, 시댁 식구들을 속였으며 심심찮게 작품을 달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시달림을 받기까지 한다. 그의 남편이 내 화실에 들렀을 때 ‘우리 집사람 그림하고 스타일이 비슷하네요.’ 라고 말하자 나는 내 죄를 깨달았다. 또 ‘나는 우리 집사람을 존경합니다.’ 라고 말할 때 나의 죄는 더욱 깊어졌다.
왜냐면 ‘우리 집사람은 미대 동양화과를 사년간이나 전공했으며 주영숙씨만큼 그림을 잘 그린다. 그런데도 겸손하다. 작품을 많이 내지 않으니까. 그러니 내가 더욱 존경하는 바이다.’ 라고 한 후에 ‘우리 집사람은 참으로 진실합니다.’라고 말함으로서 나를 경악시키기까지 하였기 때문이다.
그 친구가 자기남편에게나 친정식구에게나 심지어 자기 아이들에게조차 ‘그것은 주영숙의 그림이다.’라는 사실을 숨기느라 전전긍긍하는 것을 볼 때 나는 내 자신이 미워서 치를 떨어야 했다.
내 죄책감을 그가 덜어줄 수 있을까? 자기 스스로 고백을 한다면 내 죄가 가벼워질까? 무섭다. 두렵다. 피를 토할 듯한 그의 절규가 아직도 내 귓전을 때리고 있다.
“언니가 잘못했어!”
내가 잘못한 것은 아무래도 그것인 성싶다. 그를 내 피처럼 살처럼 사랑했던, 그래서 나의 그림에 그의 낙관을 하게 한 그것.........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인생사라고 하지 않던가. 돌이킬 수 없다. 사년이나 전공을 하고서도 제대로 못해내는 그 무재능을 재능으로 위장할 수는 없다. 그의 가슴에 화살을 꽂는 짓을 한 나의 잘못도 돌이킬 수가 없다. 그런 대로 작품 속에 털어버리고 나는 모든 고뇌를 감내할 수밖에 없다. 사랑도 미움도 증오도 일천구백구십오년 팔월이십팔일을 기점으로 모두 벗어버려야겠다. 학처럼 솔처럼 바위처럼 살아야겠다.
위의 글은 수를 다 놓나자마자 쓴 수필이다. <달 구름 파도, 그리고 송학도>라는 긴 제목의 이것은 95년도 한국전통공예대전에 입선하였으며, 현재 우리 집의 한 벽면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고 나서 나는 그 친구와의 갈라짐에 대하여 시를 썼는데, 이 역시 내가 대학입학 기념으로 낸 나의 네 번째 시집에 그 치부가 새겨져 있다. 행과 연을 변형시켜 적어본다.
[잘라내기.1]
자매는 실상 부모도 각각인데 끊어내기 너무 아팠다.
처마 끝 빗물 받아 밥쌀을 씻는 아우에게
펑펑 쏟아지는 지하수를 못 퍼다 주는 형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우 가슴 박힌 못을
외진 곳에 달랑 두 집
둘은 무엇이든 나누었는데
형은 고마웠고 아우는 고까웠다.
간섭 말라며 톡톡 내쏘는 아우의 말투엔 언제나
자존심 상하는 냄새가 났다.
위선을 순정인 줄로 착각했던 형은
천 갈래로 찢겨나갈 위기에서 신음조차 못내는 자존심을
삼차원의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아우를 알아채고 말았다.
그것이 잘못이었다.
형의 미천한 그림에 새긴 아우의 숭고한 낙관
그것이 천추에 길이 남을 한이었다.
형의 그 오만이 이제 둘 사이를 잘라내고 있다.
[잘라내기.2]
이사를 가겠다고... 이웃이 나빠 이사를 가겠다며 아우는 설쳐댔고
그의 부친께서도 덩달아 호령하시길 더런 동네서 살지말고 이사를 하거라!
그래, 이사를 가렴. 찢겨진 자존심을 꿰맬 수가 있다면
더러운 형을 피해서 멀리 가버리렴.
더럽게 질긴 자매인연이라 그렇고 말고 그래야만 끊어지리라.
외진 곳 달랑 두 집에서
사소한 정조차도 이유를 다는 것이 이제는 징그러워
오만 정이 떨어져
형은 싹둑싹둑 가위질을 했다.
이 후에 나는 또 다른 수를 놓음으로서 거듭 태어나고자 몸부림쳤는데, 그 제목은 <베 짜는 여인>이다. 경복궁 전시장에서 무형문화재 80호, 자수장 한상수 선생에게 나의 <달 구름 파도, 그리고 송학도>가 입선에 그친 이유를 물었었는데, 그분 대답이 “첫째 선생이 없었다는 점. 둘째, 작품에 날자와 이름을 새겼고, 낙관이 삐뚤어진 점, 셋째, 뒤 공간을 완전히 채우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해서 나는 여섯 폭짜리 병풍을 시작하였는데, 그것이 <베 짜는 여인>인 것이었고, 나는 이 도안을, 특히 북을 잡은 여인의 손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안동까지 내려가 실제로 베 짜는 여인을 취재해왔다. 그리고 여인의 중요모습이 대부분 나와 있는 셈인 세 번째 폭을 맨 처음 시작한 거였다. 수놓는 일은 나를 정화시키는 효과가 있다. 역시 같은 시집에 있는 [수를 놓다가 문득]이란 시를 펼친다.
철철 피 흘리며 그해 겨울이 지나갔고 상처 다독이며 작년 겨울도 흘러갔고
올해 또 터벅터벅 겨울이 오고 있다.
누가 할퀸 건지 누가 잡아 뜯었는지 우리의 연은 공중에 매달려
높아만 가는 킬로미터를 재는데 나는 차마 널 부르지 못한다
겨울이 창턱을 기웃거리는데도.
네가 떠난 너의 집 문지방에 발기발기 찢겨 너덜거리며 나를 우롱하던 나의 선심
초라한 몰골로 울음 깨물던 내 그림의 파편들........
우리의 연은 이미 네가 불태웠었지 그랬지 우린 정말 낯선
하늘땅만큼이나 멀리 사는 살을 스쳐도 못 알아볼 우린 애당초 타인이었어.
그런데도 헌데도 아무리 그렇더라도 미움의 잿더미 틈새
발긋발긋 타는 불씨가 내 젖무덤을 지진다.
별일이다 모진 맘 독하게 먹었을 네 목소리가 어여쁘게 치장하고
조용조용 내 귓전을 울린다.
그래 맞어 품위있는 옷을 두르듯 자기 영육을 부지런히 다듬어야지
이제사 깨달음 얻은 내 입술이 밑바닥에 남은 씁쓸한 커피를
마저 삼킨다 꿀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