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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수필선 [☆향촌 사계☆]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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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촌 사계]
윤병화 수필선집 / 도서출판 용의숲(2018.09.30) / 값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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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촌 사계
윤병화
고향 마을에는 내 귀를 씻는 맑은 소리들이 있다. 그 정담(情談)처럼 들려오던 소리. 그러나 이제는 점점 멀어져 가는 소리들. 그렇기에 더욱 애틋이 귀 기울여 보는 소리들이 있다.
봄
소리는 버들개지 피어나는 시냇가 두터운 얼음장 밑으로부터 물방울을 튀기면서 온다. 물방울은 실로폰 소리, 물줄기는 피아노 소리를 낸다. 그것은 겨울이 한동안 묶어 두었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는 자유의 외침과도 같이 약동하는 환희에 차 있다.
따사한 봄날, 봄볕을 받으며 밖으로 나와 잠시 뜰에라도 서보면 들려오는 소리. 담장 가까운 매화나무 가지 위에서 집안을 기웃거리며 물 흐르듯 ‘쪼로롱-쪼로롱-’ 흘러오는 소리가 있다. 방울새 소리다. 소리는 그처럼 더욱 가까이 다가오며 봄을 알린다.
벌써 풀내음이 바람에 묻어온다. 뒷산을 스쳐 오는 솔바람이 향긋하고, 한낮의 뻐꾸기 소리가 내 마음을 따스하게 풀어헤친다. 둥지 속 같은 시골 마을, 그 아늑한 공간을 따뜻한 울림으로 채워 넣는다. 어디 그뿐이랴! 이따금 밭둑이나 풀숲에서 일어나 건너 산으로 날아가며 한가로이 울어 대는 꿩, 꿩 소리를 듣는다. 요즘은 좀에 들어 볼 수가 없지만, 이런 봄날 보리밭 맑은 하늘로 떠오르며 자지러지게 우짖던 종달새 소리가 있었다. 정말 다시 듣고 싶은 소리다.
봄비 내린 뒤 밤이면 무논에서 일제히 퍼부어 대는 개구리 소리를 듣는다. 깊어가는 밤 끊어질 듯 이어지며 들려오는 그 애절한 소쩍새 소리가 외롭다. 봄밤은 그렇게 한없이 깊어가고 봄날 또한 깊어간다.
바람 줄기가 스쳐 갈 적마다 처마 끝에서 이따금씩 울려오는 풍경 소리를 듣는다. 뒷문을 통해 흘러드는 대바람 소리, 또는 외양간에서 잊힐 듯 들려오는 그 느릿한 몸짓의 일소가 내는 워낭소리를 듣는다. 그런 소리들은 때로 나를 권태롭게도 하지만, 나는 또한 그런 소리 듣기를 즐겨한다.
여름
여름 한낮 저만치 나무 밑에 놓여 있는 평상 위에 누워 보면, 자연스레 들려오는 소리, 주위는 풀밭, 어디선가 들릴 듯 말 듯 다가오는 소리들. 하나인 듯하지만 하나가 아닌, 둘인 듯 셋인 듯 하지만 하나로 들리는 소리, 마치 가위질하듯 경쾌한 베짱이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그런가 하면 어느덧 모래톱을 쓸어 오는 밀물처럼 시원스런 쓰르라미 소리가 끼어들고, 청아한 여치 소리가 섞여 온다. 이 소리 저 소리로 구분 짓다 보면, 어느덧 한줄기 하모니를 이루어 오는 풀벌레들의 합주(合奏). 이 기막힌 선율에 빠져 들고 보면, 나 또한 풀잎 되어 그 가운데 함께 있는 듯하다.
한여름의 문턱을 넘어 길고 긴 장마철이 다가온다. 질척거리는 길바닥은 잠시 밖으로의 외출을 차단시키고, 자연스럽게 방안에 틀어박혀 공상을 즐기며 홀로 누운 어느 오후, 눅눅해진 방에 불을 지피고 학창 시절에 읽었던 색 바랜 책을 다시 꺼내 읽는다. 옛정을 느끼면서…….
열려 있는 문밖, 담장의 호박잎을 때리며 후드득거리던 빗방울도 잠시 멎은 어느쯤, 추녀 끝에서 끊어질 듯 이어지는 낙숫물 소리가 들려온다. 이 소리처럼 운치 있는 소리가 또 있을까? ‘똑-똑-’, 또는 ‘퐁-폭-’하면서 떨어져 내리는 청량한 물방울 소리는 언제 들어도 내 가슴을 친다. 그리 심취하다 보면, 나 또한 나를 잊고 물방울 되어 물속에 하나로 잠기는 듯하다. 그것은 엄청난 거리의 대양(大洋)과 대륙을 건너온 구름의 언어이며, 대자연의 언어로서 하늘과 땅이 이어 닿으면서 내는 생명의 소리이다.
이렇듯 끊어질 듯 이어지며 내 가슴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소리, 그 소리는 들을 때마다 내 마음을 빼앗는다. 장마철 방안 생활의 답답함과 지루함을 깨친다. 맑고 깨끗한 소리-그런 소리를 듣지 않은 사람을 어찌 한국인이라 이를까? 마음 한 자락 촉촉이 물기 머금는 이런 날, 나는 어머니가 해주시던 호박부침개라든가 또는 손국수인 뜨뜻한 누른국 따위를 그리워한다.
아, 이제 무거운 빗방울에 누웠던 풀잎들이 다시 일어난다. 이어 고운 무지개라도 뜨는 때면, 들판의 풀잎은 더욱 푸르고 청명한 하늘은 어느덧 가을을 예고한다. 그러면 나는 마루에 걸터앉아 앞 개울을 흘러내리는 물소리를 다시 듣거나, 그 해맑을 가을을 꿈꾸어도 본다.
가을
가을의 소리는 무엇보다도 적막을 바탕으로 해서 좋다. 그렇기에 가을 맑은 한낮, 텃밭에서 정적 속에 콩깍지 터지는 소리까지도 어렴풋이 들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가을 고요 속에 마당을 건너 마루로 올라서는 달빛! 달빛이 지창紙窓을 통해 슬금슬금 문지방을 넘어든다. 뜰인 듯 마루인 듯 방안인 듯 가까이 들려오는 귀뚜라미의 애달픈 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든다. 이 밤을 새워 울어대는 귀뚜라미 소리처럼 내 마음속 가을을 무르익게 하는 것이 있을까? 어디선가 다듬이질하는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은 밤, 결국 세상사의 모든 것들을 잊고 깊디깊은 정적의 세계로 빠져 든다. 이는 가을이 내게 가져온 청복淸福이다.
밤은 깊어지고 가끔 뒤뜰에서 ‘툭-’하며 알밤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에 나는 아득한 추억의 세계로 빠져든다. 어린 시절, 이런 계절이면 새벽같이 일어나 종다래끼를 들고 쿵쿵쿵 소리를 내며 밤나무 숲으로 달려가곤 했었다. 어둠이 채 가시기도 전, 숲 속에서 이슬 차며 줍던 붉게 여문 알밤들이 생각난다.
가을의 끝, 다육질의 감나무 잎새들이 마지막 가을 햇살 속에 살랑 내 가슴께로 떨어져 내린다. 가슴이 저리도록 지친 소리, 그 소리를 들을 때-이 말을 나는 중시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목소리나 몸가짐을 낮게 드리울 때만이 가능해지는 소리기에, 머지않아 낙엽을 밟고 가는 고양이의 발소리가 들리리라.
바람이 추수한 가을 벌판을 달려와 문풍지를 흔든다. 엷푸른 서녘 하늘에서 끼-륵 끼-륵 쇠기러기 날아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겨울을 실어 오는 소리다.
겨울
해 밝은 아침에 까치 소리를 듣는다. 언제 들어도 반가운 소리다. 저야말로 살아 마을을 지켜 온 고향의 소리다.
나는 뒷산 가까운 곳에서 가랑잎에 싸락눈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아니 귀를 기울인다. 정겹기 그지없는 알갱이 눈송이가 오목한 가랑잎 속을 채운다. 군불을 넣은 사랑방 아궁이에서 타닥타닥 장작불 타는 소리도 따습다.
아침나절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저녁이 가까워 오도록 그칠 줄을 모른다. 이런 때 저녘은 보다 일찍 다가오는 법인데, 약간 어둑한 방안에 배를 깔고 누워 밖의 소리를 듣는다. 따뜻이 전해져 오는 온돌의 온기를 느끼며, 문 쪽으로 책을 놓고 느긋하게 책장을 넘긴다. 이것은 여유다. 또한 휴가 받은 시골집에서만이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다.
문창호지에 날아와 부딪치는 눈, 눈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최고의 정적 속에서만이 느낄 수 있는 소리다. 또한 마루 밑에서 맞고 온 눈을 터는 강아지의 방울 소리를 듣는다. 어디선가 ‘찌-찌-’하며 들려오는 동물체의 소리도 있다. 다름 아닌 새소리다. 그들은 눈을 피해 또는 먹이를 찾아 여물간이나 헛간으로 날아든 산에서 내려온 멧새들이다.
뽀드득 뽀드득 눈을 밟고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낯모르는 소리에 반갑고, 지나쳐 아득히 멀어지는 소리에 또다시 기다림을 키운다. 먼 곳에 떨어져 있는 아내에게, 비로소 ‘사랑하는 아내여!’라고 불러보고 싶은 밤, 끊기지 않고 사륵사륵 문살에 날아와 앉는 눈 소리를 듣는다. 고요한 향촌鄕村의 겨울밤은 이렇게 한없이 깊어간다.
이렇듯 사계四季를 두고 고요한 적막을 기다려 들려오는 소리들. 적막 속에 고요히 살아나는 소리들. 낮게 숨죽여 갈 때 비로소 들을 수 있는 소리들처럼 내 마음의 고향인 것도 없다. 그들 머무르는 곳으로 가고 싶다. 그들 머무르는 곳에 나 또한 그들처럼 머무르고 싶다.(1992)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
윤병화
새소리에 잠 깨어난 아침 시간이 나를 기쁘게 한다.
화단에 돋아나는 새싹, 촛불처럼 피어나는 튤립, 처마 밑에서 들려오는 제비들의 재잘거림, 나비처럼 피어난 하얀 목력, 그 사이를 오가며 짝짓기에 여념이 없는 새들의 자태. 그 꽃그늘 아래에서의 나의 발길이 내 마음을 그들 같은 기쁨으로 이끌어 간다.
구름처럼 피어 있는 벚꽃! 그 아래로 외투를 벗고 나온 좀 추운 것도 같은 늘씬한 다리의 처녀애들. 걸어가는 젊은 여인의 몸매. 대학 캠퍼스 너른 잔디밭에 앉아 있는 동료이거나 연인들의 모습이 내 마음을 즐겁게 한다.
프리지어 향기, 풀 속에 숨어 핀 앙증스런 제비꽃. 홀로 걷는 둑길에서 웃고 있는 민들레의 무리, 겨울을 감내하고 피어난 인동꽃의 내음. 패랭이꽃, 재잘대는 채송화의 웃음, 내가 웃음으로 느낄 때엔 내 마음부터가 벌써 즐거운 것이지만, 그 작은 미소들이 나를 또한 기쁘게 한다.
이슬비 내린 초봄! 거미줄에 매달린 물방울, 단풍나무 잔가지에 맺힌 수많은 물방울들이 보석처럼 빛날 때, 나는 그 순간적 장면을 사랑한다. 호수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 야영을 하며 듣는 계곡물 소리. 고산(高山)에서 보게 되는 저녁노을, 봉우리만 남기고 안개에 묻힌 산. 흰눈에 뒤덮인 산야(山野). 이 모든 것들이 나의 삶을 더없이 신비롭게 한다.
신록의 계절 숲으로 난 오솔길을 천천히 걸어가게 될 때, 내 마음은 시작부터가 행복하다. 양산처럼 펼쳐 내린 나무, 오월의 투명한 햇살 속에 선명히 드러나는 잎맥, 아직 벌레들도 생기지 않은 숲 속 어디선가 휘파람새 소리가 들려오거나, 아주 먼 곳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귓가로 젖어들게 될 때. 그리하여 고요히 발길 멈추고 ‘오! 내 사랑하는 계절이여, 또다시 돌아왔구나!’하고 홀로 외일 때, 나는 흔히 행복한 느낌 속에 머물러 있다.
불빛에 비친 벚꽃나무 길을 걷거나, 차를 타고 산벚나무꽃이 만발한 시골길을 달려가게 될 때, 나는 어느새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하다. 그런가 하면 꽃 핀 때죽나무 그늘아에 앉아 보거나, 커다란 목백합나무가 만개한 꽃송이를 달고 바람에 일렁일 때, 나는 대체로 감동하게 된다. 그런 감동을 느끼며 사는 삶을 나는 또한 사랑한다.
달 밝은 저녁 여울을 흘러내리는 물소리, 싱그러운 봄 숲 속 가까이에서 들여오는 것 같은 뻐꾸기 소리, 사원(寺院)가까운 숲 속에서 후투티의 낢을 다시 보게 될 때, 푸른 벌판 백학(白鶴)의 비행, 바닷가 여행지에서의 아침 잠결에 귓가로 젖어드는 파도 소리. 일몰 후 드넓은 해변에서 보름달의 떠오름을 다시 보게 될 때, 그 또한 나를 더없는 기쁨으로 몰고 간다.
이슬 머금은 장미꽃의 매혹! 저녁 햇살 속에 피어나는 분꽃, 향기 짙은 백합, 못 가득 피어있는 연꽃의 모습, 관심 저만치에 밀려 있다 나팔 불듯 피어난 선인장 꽃잎, 이 모든 것들을 나는 또한 사랑한다.
다시 보게 되는 고향 마을의 느티나무, 청보리밭의 비릿한 풀내음, 찔레꽃 향기, 솔밭을 스쳐오는 바람, 늦가을 논둑길의 풀타는 냄새, 빨갛게 타 들어가는 모닥불, 농가의 저녁연기, 아궁이에서 타닥타닥 불타는 소리, 누룽지 눋는 냄새, 고향집에 누운 밤 ~완숙에 지쳐 뒤란에서 ‘툭~’하고 들려오는 알밤 떨어지는 소리. 뭐 그런 사소한 것들이 나를 또한 기쁘게 한다.
암수 서로 정답게 모이를 쪼아 먹고 있는 토종닭의 무리, 짚으로 싸 묶은 달걀 꾸러미를 보거나, 뽀얗고 갸름한 달걀에 남아 있는 따뜻한 온기를 느껴 보게 될 때, 혹은 물 마시는 새들을 바라보게 될 때, 우연히 알이 담겨 있는 새둥지를 발견하게 될 때, 그것들은 또한 그처럼 다정한 느낌들을 가지게 한다.
뜻하지 않게 만난 옛 친구, 먼 타처(他處)에서 고향 사람을 만나보게 될 때, 그리하여 고향 사투리를 다시 듣게 될 때, 어린 딸내미가 친구들과 놀며 서로 지어내는 작은 미소들, 진열대 위에서 매일 웃고 있는 목각 인형-그것은 러시아의 어느 장인이 만든 일곱 인형, 그 자잘한 미소가 나를 또한 즐겁게 한다. 그런가 하면 맛있게 먹거나 즐겁게 노는 내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게 될 때, 아내의 웃음 띤 얼굴, 이 모든 것들이 나를 또한 행복하게 한다.
비단결이나 벨벳의 감촉! 옥상에 빨아 넌 새하얀 옷가지들. 몸이 약간 불편하여 홀로 잠시 누워 있게 될 때, 그리하여 명상의 자유를 마음껏 누려 보게 될 때, 아니면 놀이터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복도 층계에서 반갑게 나누는 인사하는 소리가 나를 또한 즐겁게 한다.
강을 따라 펼쳐진 누런 갈대밭, 떼 지어 나는 겨울 철새들, 홀로 걷는 길가에 늘어서 있는 플라타너스, 가을 누런 벌판으로 날아내리는 참새 떼. 소국(小菊)의 무리,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 노을 진 저녁 강가 그 잔잔한 물결 위로 뛰어오르는 물고기들을 다시 보게 될 때, 나는 그저 보는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숲 속으로 난 오솔길을 만났을 때, 푸른 들판을 뚫고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 달빛 속의 달맞이꽃, 맑은 물속에서 몰려다니는 피라미 떼, 여름 먼 길에서의 맑은 우물물, 비 온 뒤의 뭉게구름, 밤하늘의 초록 별빛, 안개 걷히는 호수, 새벽 낮달, 단풍으로 붉에 물든 산! 보도(步道)를 뒤덮는 노란 은행잎, 마른 잔디이거나 쌓인 낙엽에 누워 푸른 하늘 우러를 때, 가로등불 밑으로 나뭇잎이 지거나 눈송이가 날릴 때, 내 마음은 또한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크리스마스 무렵 가로수에 설치한 꼬마전구의 휘황한 불빛, 감동 깊은 영화의 한 장면, 불꽃놀이의 밤! 그런가 하면 푸른 잔디밭에서 골프하는 모습, 짝을 이뤄 타는 피겨 스케이팅의 조화로움, 체조 경기에서 완벽한 성공을 거둔 운동선수의 환희에 찬 미소가 나를 또한 기쁨으로 이끌어 간다.
글을 쓰다 하얗게 밝힌 밤, 홀로 듣는 새벽 종소리! 늙은 어머니의 기도 소리, 존경한다는 편지글을 받아 보게 될 때, 혹은 고적한 겨울 밤 눈을 밟고 오는 소리, 그리고 기다렸던 노크 소리가 나를 또한 기쁨으로 몰고 간다. 그런가 하면 원고료나 출장에서 남은 몇 푼 가외의 돈이 나를 또한 기쁘게 한다. 그리하여 오랜만에 가족과의 외식이 이루어질 때, 그것은 아내나 아이들을 뜻하지 않게 기쁘게 하는 것! 나는 기쁨으로 다가오는 이러한 매순간들을 사랑한다.
맘에 드는 그림을 바라보게 될 때, 또는 시간적 여유를 갖고 아름다운 음악을 감상하게 될 때, 읽을 만한 좋은 책을 수중에 넣었을 때, 그리하여 편안히 누워 그 속으로 점점 빠져들게 될 때, 나는 정말 행복하다. 사소한 것들과의 만남, 그 접촉을 나는 사랑한다. 그렇기에 그러한 느낌의 순간들을 이렇게 적어 보는 것이다.
시골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그리 불편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복잡하지도 않은 읍내에 사는 것을 행복으로 여긴다. 자연을 몸으로 느낄 수 있고, 느끼며 산다는 것에 우선 행복감을 갖는다. 자그마한 기쁨들을 행복일니 생각하며 사는 삶이 나는 좋다. 말하자면 내가 건강히 살아 있으니 좋고,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좋고, 내가 사랑할 사람과 새로이 만나야 할 사람이 있으니 나는 좋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언제 어디서나 행복에 닿아 있다. 나는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과 함께 살아가고 싶다. 될 수만 있다면 나 또한 그들에게로 가서 그들의 기쁨이고 행복이고 싶다.(1994)
백자 항아리
윤병화
내 서재에는 언제나 넉넉한 크기의 백자 항아리 하나가 놓여 있다. 이것은 거리를 두고 보면 유백색乳白色으로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면 엷푸른 빛이 도는 순백자純白瓷이다. 때때로 작은마누라라고 불려도 지는-내가 애지중지 하니까 아내가 그렇게 이름 붙여주었다.
어떠한 문양도 없는 달항아리 형태의 그것은, 언제 보아도 백색 정갈한 모습으로 완벽한 균형미를 나타내고 있다. 정숙한 여인과도 같이 다소곳이 또는 우아하게 명상에 잠긴 듯 놓여 있다.
그것은 꽃을 담아 두는 경우도 있지만, 때때로 독서대로 이용되고 있는-특히 여름철이면 입구 위에 책을 펼쳐 놓고 끌어안듯 가까이 하고 있으니, 아내가 그렇게 이름 주었지 싶다. 아무튼 앉아서 책을 볼 때면 끈적거리지 않아서 좋다. 그 스치는 매끄러운 감촉이 좋아 더욱 애용하게 된다.
그러나 대개는 비어 있는 것으로써 놓여 있다. 그런데 그렇게 비어 있는 것은 비어 있는 것으로써 제 소임을 다하고 있는 듯 여겨진다. 그것이 그런 자기瓷器가 지닌 또 다른 쓰임이라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빈 것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의 여유 같은 것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비어 있는 충만’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비어 있을 때 더욱 그 넉넉함이 돋보인다고나 할까? 어떻든 나는 그처럼 비어 있는 모습 보기를 더욱 즐겨한다.
고요히, 그것은 언제나 그 자리에 그렇게 있다. 정갈한 몸맵시로 풍만한 곡선의 아름다움을 그려내고 있다. 이처럼 기형器型이 부드러우며, 백자가 흔히 그렇듯 당당한 양감量感과 단정한 자태는 고려자기와는 또 다른 정감을 느끼게 한다. 하여 슬며시 두 팔 벌려 끌어안아도 보면, 턱 안겨오는 느낌에 뿌듯함마저 있다.
언제나 은은한 광택을 내는 것이 이것이다. 이것이 있음으로 해서 나는 부족해도 부족하지 않은 것 같다. 서재에서의 넉넉한 마음과 푸근한 행복감마저 얻어 지닐 수 있다. 이 자기가 어디에서 어떻게 소성燒成되었는지는 몰라도, 어느 얼굴 모를 도공의 섬세한 주의가 숨결처럼 느껴진다. 저토록 우아한 모습이라든가, 저 같은 색택色澤의 아름다움을 얻기까지는 쉼 없는 정성과 아낌없는 노고를 소모하였으리라.
시간을 초월해 백색 무변의 형태로 적지 않은 세월 내 곁에 있어 왔고, 또 앞으로도 이어갈 이 항아리, 백자는 오늘도 지고至高 지순至純한 아름다움을 유지하며 한 점 티끌을 불허하듯 순결한 빛을 고요히 담아 안고 있다. 이런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덧 내 마음도 그에 동화되고 만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내 곁에서 나를 지켜주는 그릇〔기器〕됨의 표상表象이다.
(2015)
풍경 속 길 끝에서
윤병화
지난여름 독일의 로만틱 가도街道를 따라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가도’라고는 하지만 사실 2차선 좁은 시골길이 대부분인 길이었다. 그런데 그 길이 아름답기로 소문이 나 있고, 특히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걸었던 길이라 하여 더욱 유명해진 길이다. 마치 우리의 올래길처럼 낭만적인 이름을 붙여 관광 상품으로 개발한 도로였다. 특히 하절기에 승용차나 자전거로 여행하기에 좋을 듯싶은 지방도로였다. 버스를 타고 가다 보니, 숲이 울창하거나 내가 흐르는 곳곳에 승용차들이 있었다. 그들은 길을 따라가다가 아름다운 곳을 만나면 그렇게 멈추어 가며 목가적인 전원 풍경을 즐기고 있는 듯싶었다. 그런가 하면 가끔씩 배낭을 진 자전거 여행객들이 지나가거나, 그저 맨몸으로 느껴 보고 싶다는 듯 무작정 두 발로 걸어가는 사람도 보였다.
버스를 타고 스쳐 지나가면서 보는 차창 밖 풍경 또한 아름다웠다. 울창한 숲과 어우러진 스쳐가는 파스텔 풍의 몽환적인 전원풍경이 가면 갈수록 점입가경漸入佳境이었다. 기착지인 하이덴하임 소읍小邑이 아득히 바라다보이는 곳에 이르자, 푸른 초원에 한 가닥 흰 시골길이 보였다. 동화 속 같은 걸어 보고 싶은 길이었다. 저 갈을 따라가면 그 끝에는 어떤 풍경이 숨어 있을가 궁금증을 더하는 길이었다. 저런 풍경 속이라면 여기서 내려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산다고 해도 후회스럽지 않을 듯싶었다. 일테면 순간 그 그림 같은 풍경에 홀딱 반해 버렸다고나 할까. 갑자기 그런 기분까지 들게 했다. 버스는 초원을 가르며 내달렸고 얼마 되지 않아 우리는 시골 소읍의 조그마한 호텔에 도착하였다.
피곤하여 저녁에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나는 작정을 하고 새벽에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늘 그렇듯 아내도 따라 나섰다. 예의 어제 지나쳐온 그 아름답던 길을 따라 초원의 목장까지 한번 걸어가 볼 요량이었다. 카메라를 둘러메고 소읍의 텅 빈 골목길을 벗어난 우리는 밝아오기 시작하는 아득히 바라다보이는 그 푸른 초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여름철이었지만 아침 기온은 낮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쌀랑했다. 아름다움의 끝을 보기 위해 그 아름다운 전원 풍경을 더 가까이에서 감상하고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우리는 짧지 않은 그 길을 부지런히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약 한 시간 정도를 걸어 내가 어제 보았던 그곳쯤에 이르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어제는 그렇게 아름답게 보였던 그 길이 왠지 다가가면 갈수로 그렇게 아름답게 다가오지가 않았다.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나 다르게 길은 거친 자갈길로 이어져 있었고, 황금빛으로 빛나던 밀밭과 푸른 초원 역시 다가갈수록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실망스런 풍경이었다. 잡초가 섞여 있는 메마른 밀밭은 듬성듬성 빈 공간을 드러내었고, 농사를 지은 건지 그저 사료작물로 뿌려 놓은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꽃으로 뒤덮여 그렇게 아름답게 보였던 초원 역시 가까이 다가가 보니 쇠똥 퇴비를 뿌려 놓은 평범한 풀밭을 드러내고 있었다. 거름이 뿌려진 초원은 더 이상 꽃향기로 넘쳐 날 것 같던 그런 광경이 아니었다.
초원 위의 그림 같던 농가 역시도 수풀에 가려졌던 너절한 농기구와 생활도구들을 드러내었다. 외양간 앞의 소와 말 그리고 사과나무 밑의 두엄더미 뭐 그런 것들이 아름다운 뒷면을 구성하고 있었다. 노을 사라진 하늘처럼 그곳은 그저 농가가 있는 평범한 들판일 뿐이었다. 나는 아름다움의 끝이라고 생각했던 그곳에 이르러, 가까이에서 들여다보고 또 둘러보고 더 먼 곳까지도 넘겨다보았다. 거기에는 구릉을 넘는 그만그만한 풍경이 이어져 있을 뿐 특별한 아름다움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갑자기 아름다움이란 다가간다고 해서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스쳐왔다. 아름다움의 끝을 보려고 하는 것은 절제할 줄 모르는 미美에 대한 탐욕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움이란 그저 멀리 두고 볼 때, 내 눈을 통해 내 마음속에 들어와 앉는 그런 것이란 말인가. 일테면 우리가 풍경을 보다 가까이서 감상하겠다고 그 안으로 들어간다면, 우리는 이미 그 풍경이 되어 버리는 것이라는 깨달음이었다. 풍경이 되어 그 안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부분을 볼 수밖에는 없는 구조다. 아름다움에는 거리가 있다. 아름다움에는 적당한 거리를 필요로 한다는 그 깨달음을 내 또다시 망각한 결과였다
나와 아내는 그곳에서 실망을 안은 채 돌아섰다. 그리고 걸어온 길을 되짚어 다시 걸었다. 그곳에서 걸어온 소읍을 바라보니, 내가 출발해온 그곳이 보다 더 아름다운 풍경으로 변해 있었다. 푸른 초원에 둘러싸인 소읍의 말끔한 지붕들이 한 폭의 그림이었다.
나는 되돌아 걸어오면서 가끔씩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서 바라보니 다시 하나의 괜찮은 풍경으로 모여들었다.-그렇게 흩어졌던 근경은 거리를 둘수록 점차 하나로 모아지고 한눈에 들어오면서 다시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내었다. 아름다움이란 본래 멀리 있고 가까이 다가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날 아침 머나먼 산책길을 걸어 돌아오면서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멀리 보면 나타나고 다가가면 사라져 가는 것들 속에 아름다움은 숨어 있다고……(2015)
벚나무 아래서
윤병화
나는 오늘도 벚나무 아래 앉아 있다.
교정校庭 한 켠으로 비켜서 있는 이 나무를 나는 은근히 사랑하고 있다. 그래 여유가 생기면, 혼자 또는 슬며시 다가온 동료와 함께 나무 아래 가 앉기를 즐겨한다. 그럴 때면 푸른 하늘이거나 흘러가는 구름에 눈길을 주며, 잠시 한유한 시간을 가져 보기도 한다.
하루 한 번쯤 나와 앉는 이 자리-그 시간 속에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보는 여유를 나는 더없이 즐겨 하고 있다.
바람이 부드럽고 햇볕이 따사롭던 어느 봄날이었다. 푸른 하늘을 바탕으로 꽃들이 화려하게 핀 그날- 꽃무늬 양산 같은 벚꽃나무 아래서 황홀히 꽃가지를 올려다보던 그때, 나는 언제부터인가 벌들의 날개 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것은 너무도 신비로운 것이어서, 나는 옆자리의 동교 직원에게 한번 가 들어 보자는 말까지 던졌었다.
인근에 양봉가養蜂家가 있는 듯싶었다. 다음날부터는 수백 수천 마리의 꿀벌들이 날아와 온종일 북 치고 장구 치며 꿀을 찾아 환호하는 그 날갯소리를 흘렸다. 그것은 가장 확실한 살아 있음의 환희요, 현악 합주의 완전한 하모니였다. 만개한 벚꽃나무 아래서 듣는 그 소리는 어떠한 음악보다도 감미로웠다.
그런 때의 그놈들은 꽃송이 속에 들어가 꽃가루를 온통 뒤집어 쓰고 꿀을 따는 녀석들이 있는가 하면, 잠자듯 안겨 있는 놈, 여기저기 분주히 들락날락하는 놈 등 다양하다. 하늘거리는 그 꽃의 잔잔한 울림 속에 잠겨들 때면, 먼 마을에서 들려오는 농악農樂과도 같이 하나의 흐름을 이루며 리듬처럼 귓가로 흘러든다. 그러는 속에서 꽃들의 가루받이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리라.
돌아보면 정말 따스한 마음으로 숨결 듣듯 가까이 했던 봄날들이 있었다. 나뭇가지마다 갓 벌어진 꽃송이들이 주위를 밝히고, 그 곁에 앉아 추억에 잠긴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열매 맺는 시기에 당도해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꽃 피는 시절은 매우 짧고, 그와의 이별은 상대적으로 너무도 긴 것이기에 차라리 슬픔일 수밖에 없다.
시인 김영랑金永郞도 그 같은 이별의 아쉬움과 기다림을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 시에서 꽃 피는 ‘오륙일’을 제외한 ‘삼백 예순 날’이라는 구체적인 숫자로 나타낸 바 있다. 꽃 피는 봄은 아름답지만 오는 듯 가버리는 것이 봄이다. 이를 두고 미국의 시인 윌트 휘트먼은, “쉰 해를 산다는 것은 그래도 길다. 그러나 벚꽃의 핌을 쉰 번밖에 보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도 짧다라 하여, 꽃 피는 봄날의 아쉬움을 간명히 설파說破한 바 있다.
꽃이 지면 잎이 핀다. 잎이 피면 벌레들이 생긴다. 드디어 먹이들이 마련된 셈이기에 서서히 벌레들이 나오게 된다. 이것 또한 묘한 질서다. 잎이 피기 전에 벌레들이 나온다면, 아마 먹을 것을 마련치 못한 그들은 굶어죽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연은 먼 시간을 두고 이처럼 놀라운 질서 속에 철칙과도 같은 순행馴行을 지속해 가고 있다.
며칠 전, 수업을 하다가 우연히 대여섯 마리의 산비둘기들이 벚나무 사이로 날아드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이상히 여겨 오던 차에, 나는 오늘에야 그 의문을 풀며 다시 한 번 자연 생태계의 놀라운 질서를 체험하고 있다.
점심을 먹은 후 내게 버릇된 장소인 이 벚나무 아래 잠시 앉아있자니, 어디선가 날아오며 나뭇잎을 헤치는 새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움에 나뭇가지를 올려다보니 바로 며칠 전의 그 녀석들이었다. 그때보다도 더 많은 것 같았다. 가만히 살펴보니, 녀석들은 기쁨에 찬 눈동자를 굴리며 도대체 어떻게 알아냈는지 무르익은 버찌를 앞다투어 신바람 나게 따먹고 있었다. 그것은 따스한 어느 봄날 벌들에 의해 자연스레 가루받이가 되고, 그렇게 하여 커온 열매들이었다. 잠시 후, 그들은 다시 산 속으로 한꺼번에 푸르르 날아가 버리는 것이었다.
그들이 사라진 산등성이 그 쪽을 나는 한동안 멀거니 바라보았다. 구름이 흘러갔다. 열매를 먹은 녀석들은 얼마 아니 하여 뒤를 보게 될 것이고, 그 변便으로 하여 산 속에 자연스레 씨를 뿌릴 것이다. 구름이 비 되어 내리고, 그 자리엔 그들 후세들을 위한 산벚나무가 생겨나게 될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들로 하여 이처럼 묘한 자연의 질서를 보았다.
자연은 받은 대로 주고 간다. 자연의 순환과 질서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다람쥐들이 나무 열매를 먹기도 하고 흙 속에 묻어 저장도 하는 과정에서, 잊혀진 열매로 싹을 틔우듯 알게 모르게 그런 것들이 숲의 조화를 이루어 간다. 가만히 살펴보면, 자연은 무엇 하나 불필요한 탄생과 죽음을 내지 않는 것 같다. 다만, 그 순환의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 다름 아닌 우리 인간들일 경우가 많아서이지…….
벚나무 아래서, 나는 그런 것들로 하여 삶의 질서와 조화된 자연의 큰 수레바퀴를 본다.(1995)
백석시를 읽는 밤
윤병화
까닭 없이 외로워지거나 어딘가로 마음을 옮겨 놓고 싶어질 때, 나는 버릇처럼 책을 읽는다. 그때 손에 자주 잡히는 것이『백석전집』이다. 그 원인이 어디에서 오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아마 사라진 옛 고향 같은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음이 그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다.
내가 백석시를 처음 대한 것은 1987년 <창작과 비평사>에서 나온 『白石詩全集(백석시전집)』에서였다. 그 후 나는 무엇에 끌렸던지 그 시가 좋아 가끔 읽어보면서 맛을 들여 나간 것 같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평북방언사전』을 얻어다 다시 꼼꼼히 읽어보기까지 했고, 그런 것으로 하여 94년 대학원에서 석사학위 논문까지 썼다. 물론 지금까지도 그에 관한 자료를 취미 삼아 모으고 있으며, 근래에 <실천문학사>에서 나온 호화 양장『백석전집』은 내가 무척이나 아끼는 책들 중의 하나로 꽂혀 있다.
우리가 시를 읽는 것은 형태상 짧고 운율이 있어 읽기에 부담이 없다는 점도 있지만, 결국엔 마음의 위안을 얻자는 데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런데 백석시는 특이하게도 서사적敍事的 내용을 시적 리듬에 실어 놓음으로써, 흥미로움을 더해 준다는 것이다. 물론 쉽게 풀이되지 않는 방언이 분명한 해석을 가로막는 경우도 있지만, 관념과 추상이 배제돼 있음에 먼저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 그의 시이다.
그래 외로움 깊어진 밤, 「여우난골 족」을 읽다 보면「선우사膳友辭」를 읽게 되고,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읽다 보면 어느덧「흰 바람벽이 있어」내지는「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등등을 읽어 가는 것이다.
낡은 나조반에 흰밥도 가재미도 나도 나와 앉아서
쓸쓸한 저녁을 맞는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은 그 무슨 이야기라도 다 할 것 같다
우리들은 서로 미덥고 정답고 그리고 서로 좋구나
우리들은 맑은 물밑 해정한 모래톱에서 하구 긴 날을 모래알만 헤이며 잔뼈가 굵은 탓이다
바람 좋은 한 벌판에서 물닭이 소리를 들으며 단이슬 먹고 나이들은 탓이다
외따른 산골에서 소리개소리 배우며 다람쥐 동무하고 자라난 탓이다
우리들은 모두 욕심이 없어 희여졌다
착하디 착해서 세팟은 가시 하나 손아귀 하나 없다
너무나 정갈해서 이렇게 파리했다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
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도 없다
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이 같이 있으면
세상 같은 건 밖에나도 좋을 것 같다
-「선우사」
이것은 보다시피 쓸쓸한 저녁을 맞은 여행지에서 반찬을 벗 삼아 쓴 시이다. 시인은 적막한 방 낡은 나무쟁반 앞에 앉아 있다. 밥상에는 흰쌀밥과 반찬으로 나온 가자미 그리고 시적 화자인 내가 있다. 그들 모두는 어질고 순수한 자연 속에서 태어났기에 욕심 없이 희어진 것들이다. 따라서 아무런 세속적 욕망도 지니지 않은 채 정갈한 단일 존재로서의 합일을 이루어 낸다. 그것은 가난해도 외로워도 누구 하나 부러워하지 않는 세계다. 그러다 보니 읽은 이 역시도 하나 되어 어느새 그의 상 앞에 마주하게 됨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시 속에 함께 하는 공간은, 언제나 쓸쓸하면서도 늘 화해로운 곳이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을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을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을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을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니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그런가 하면 이렇듯 눈 내리는 밤, 방안에 홀로 앉아 현실과 이상과의 괴리 속에서, 쓸쓸한 생각에 젖어 있는 한 시인을 만나기도 한다. 연인과 함께 하는 공간은 식민지 시대의 불안한 공간이다. 그렇기에 산골 오두막은 그 시대의 이상향일 수도 있다. 때문에 그런 곳으로의 도피는 현실에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운 현실을 능동적으로 버리는 행위라 자위한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현실 세계와의 단절을 느끼며, 그를 극복하지 못하는 데서 외로움과 슬픔을 토로해 낸다. 이런 비애감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쓰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며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아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 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자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흰 바람벽이 있어」
외진 방에서 보고 싶은 이들을 떠올리며 활동사진처럼 흰 바람벽에 비춰보고 있는 것이 이 시이다. 여기에는 어머니, 그런가 하면 이미 남의 아내가 되어 버린 사랑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다 어느덧 나타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한 자기 자신을 인식한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운명임을 예감한다. 따라서 가장 사랑하는 것은 시적 자아와 같은 처지에 있는 것들이다. 때문에 삶을 고통이나 비참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로 인식하여 자기 구원의 능동적인 자세로 변화시켜 나아간다,
백석시를 읽다 보면 쓸쓸하지만 어느덧 훈훈해짐을 느낄 수 있다. 무한 질주의 속도감에 편승해 있는 요즈음의 우리. 그런 점에서 그의 시는 변치 않는 내 마음의 고향과도 같다.
시가 시다워야 하듯이 그의 시는 무엇보다도 思無邪한 감정을 지니게 함이 좋다. 뿐만 아니라 고담(枯淡)하고 소박한 것이 특징이다. 그를 일러 나는 가장 한국적인 시인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의 시는 오염된 감정을 씻어 주는 정결한 물결과도 같다. 이처럼 백석시를 읽는 밤, 나는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의 회귀를 느껴 보곤 한다.
그런데 마음 아프게도 재북在北이후 이데올로기에 경직된 그의 감정을 확인하는 일은, 노을 스러진 바닷가 풍경만큼이나 비애로운 것임을 또한 떨칠 수가 없다.(1998)
『향촌 사계』에 부쳐
변호사 윤송이
『향촌 사계』는 작가 가족의 이야기이고, 또는 이웃과 친구의 이야기이고, 작가가 사랑했던 장소와 순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간 이야기는 켜켜이 쌓이고 쌓여, 필자가 태어나기도 전에 씌여졌던 작품부터 그의 자녀들이 자라 결혼할 즈음에 쓰인 작품에까지-이『향촌 사계』에서 마치 완행열차에 옹기종기 몸을 싣듯 그렇게 엮어지게 되었습니다.
글이 사람에게 감동을 줄 때, 아니 사람이 무엇인가에 감동을 받게 될 때를 떠올려 봅니다. 벅차오르는 짜릿한 전율과 같은 유類의 감동도 있겠지만, 저는 잔잔한 깨달음에 마음이 공명하는, 때로는 애잔함이 함께 하는 그런 감동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향촌 사계』에 수록된 작품들의 전반적인 첫인상은 정갈하고 깨끗합니다. 하지만, 지긋하게 감상하다 보면 작가가 삶을 눌러 담아오면서 마주친 고뇌와 복잡함을 외면하지 않고 집요하게 응시해 왔을 시간이 함께 떠오릅니다. 작가의 글 쓰는 인생 여정에서 때로는 등장인물로, 때로는 작품의 독자로 오랜 시간 함께 해온 저이지만, 『향촌 사계』를 탈고하게 된 이제야 비로소 작품들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입체적으로 보입니다. 새로운 ‘맛’입니다.
요즘 세상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다양한 소양 갖추기를 요구하는 듯합니다. 작가는 그 와중에 자신의 방식을 고수하며 뒤뚱거리면서 그러나 동시에 의연하게 세상을 걸어 왔습니다. 그래서일까. 작품은 순수하며 시대상에 비추어 보건대 고귀하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작가의 작품을 통해 진정한 의미의 진실함 그 자체가 주는 감동의 색상 보는 법을 깨우칩니다.
작가는 30년이 넘는 교직 생활을 마무리 짓고, 한평생 바라고 원했던 고향 가까운 괴강가 전망 좋은 곳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향촌 사계』는 작가 인생 전반前半의 묶음이며, 이제 작가 인생 후반後半을 위한 새로운 발걸음이 제월대에서 시작됩니다. 오직 낙서樂書 궁리窮理하는, 글만 쓰시는 생활 가운데 맺히게 될 아침 이슬 같은 작품들이 기대됩니다. (딸이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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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머리에
우린 시간 속에 존재한다. 시간時間은 문자 그대로 어디에서 어디까지를 이르는 말이다. 시간은 되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 속에서 살아온 인간의 삶 또한 되돌릴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삶이 소중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삶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 수필이라는 글이다. 희로애락이라는 삶의 여정을 거치면서 평범하나마 나도 여기까지 살아왔다. 보고 느끼고 때로는 깊은 생각도 해보면서…….
나무보다 아름답고 진실한 글을 쓰고 싶었다. 백지보다 깨끗하고 순결한 글을 쓰고 싶었다. 종이가 된 죽은 나무 이상의 글. 그것이 책으로서의 가치라 생각했었다. 그러지 않아도 너저분한 세상. 전보다도 못한 글로 더 오염시키지는 말아야지 결심했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두 번째 수필집을 낸 지 10년을 넘어서게 되었다.
또한 격조가 있고 침묵이 있으며 울림과 감동이 있는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런 까닭에 오랜 기간 수필을 써 왔지만 과작寡作이다. 이것은 나의 능력 탓이기도 하지만, 수필이라는 글의 속성상의 한계이기도 하다. 삶의 이력을 필요로 하는 글이, 정신적 깊이와 품격이 느껴지는 글이, 어찌 뚝딱 뚝딱 써질 수가 있으랴!
정리를 해 놓고 보니, 한 시골 소년이 60평생을 걸어온 부끄러운 내 이력의 일기장이 되어 버렸다. 퇴고를 하는 과정에서 신작이라도 버릴 것은 버리고, 옛 글이라도 이월가치(Over Value)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다듬어서 다시 실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자연 수필선집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기간도 30년이나 되기에 발표년도를 표기해 두었다. 어떻게 보면 한 권의 수필로 정리된 이제까지의 내 삶이요, 인생 철학서라는 느낌이 든다.
돌아보니 내가 써온 글이 나를 가르쳤고, 이런 정도의 나를 만들어 왔다는 생각이 든다. 나 또한 가끔씩 이 책을 다시 꺼내 읽으며, 천천히 지나간 내 삶을 추억해 보리라. 혹 같이 읽어줄 독자들이 있다면, 그는 내 호젓한 산책로의 길벗이 될 것이다.
2018년 8월
樂書齊에서 윤병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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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4의 글 ◆
윤병화의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은 운율감이 작품을 더 아름답게 이끌어 준 보기 드문 수작秀作이다. 이 한 편의 글을 통하여 독자는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생각해 보도록, 자연에 대한 작가의 미적 관조가 경이롭도록 섬세하게 드러나 있다. 그것은 작가가 자연과 인생,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 때문이기도 하다.
― 윤재천. 한국수필문학회 회장
요즘 세상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다양한 소양 갖추기를 요구하는 듯합니다. 작가는 그 와중에 자신의 방식을 고수하며 뒤뚱거리면서 그러나 동시에 의연하게 세상을 걸어 왔습니다. 그래서일까. 작품은 순수하며 시대상에 비추어 보건대 고귀하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작가의 작품을 통해 진정한 의미의 진실함 그 자체가 주는 감동의 색상 보는 법을 깨우칩니다.
― 윤송이.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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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화 수필가∥
∙ 충북 충주 출생
∙ 교원대 대학원 국어교육과 졸업
∙『현대수필』추천으로 등단
∙ 웅진문학상, 원종린수필문학상, 충남문학 대상 등 수상
∙ 한국문인협회 회원
∙ 수필집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조약돌』
∙ 시집『산과 나』등
∙ 현재 괴산 제월대에서 낙서재樂書齋를 짓고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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