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서는 막걸리 심부름 자주 시키셨다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이면 노란 양은 주전자에 막걸리를 가득 담아주시고
심부름 값으로 막대 사탕도 입에 물고 다닐수 있어 좋았다 작은 걸음으로 조심스레 걸어도 발걸음 옮길 때마다 출렁이는 막걸리는 주전자 꼭지를 넘어 종아리를 흠뻑 적셨다
처음엔 넘치는 게 아까워 주전자 꼭지에 살며시 입을 대고 한 모금씩
맛보기 하다가 한두 번. 심부름하다 보니 막걸리 맛에 빠져들었다 학교 다녀오면 엄마 보고 싶어 가방을 대청마루에 팽개치고 들과 산으로 엄마를 찾아 나서면 아버지께서는 어김없이 술 심부름을 시키셨다.
모퉁이를 돌아 지름길 꼬부랑 논둑길을 걸을 때마다 주전자 꼭지에
넘치는 막걸리가 아까워 입을 대고 한 모금씩 먹다보면 특유의 맛에 빠져버린다
아버지께 도착할 무렵이면, 뚜껑에 찰랑찰랑 넘쳤던 막걸리가
중간선을 넘어 절반으로 줄 때면 발갛게 물든 내 얼굴
저 멀리 일하는 아버지 모습을 보고 나는 얼른 몸을 숨기고 봇도랑 흐르는 물에
세수하고 주전자 뚜껑으로 물 받아 주전자에 물 부어 주전자 속을 채우고
아무 일 없는 듯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아버지께 주전자를 내밀면
목에 핏대 세우고 소와 승강이 벌이며 밭갈이하시다가 잠시 소를 멈추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주전자 꼭지에 입을 가져다 대시고
쭉 들이키며 갈증을 달래시던 아버지께서 갑자기
"막걸리 맛이 왜 이리 싱겁냐" 그 말에 콩닥콩닥 방망이질하던 가슴
주전자 뚜껑을 열어 보시고 무섭게 나를 노려보며
"막걸리에 개구리밥이 왜 들어있냐 이놈의 계집애 " 하시며 무섭게 흘겨보시면 논두렁을 타고 죽기 아니면 살기로 달아나다가 논 둑길에 미끄러져 굴러떨어지면
앞산이 울리도록 호통치시던 아버지
그날 밤, 물싸리 회초리로 종아리 피멍 들도록 두들겨 맞고 잠든 내 종아리 호호 불며 안티푸라민 약을 발라 주시며 흐느껴 울던 엄마 다음 날도 여전히 막걸리 심부름을 시키신 아버지 "오늘은 집에 손님이 오시니 막걸리 받아서 살강 (선반) 위에 잘 올려놓아야 한다."
막걸리 받아서 집에 오니 아무도 안 계셨다
어제는 개구리밥 때문에 들통이 났지만, 오늘은 깨끗한 물을 부으면 모르실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표시 안 나게 스덴 그릇에 반 그릇을 비우고 수돗물을 부어 채웠다 막걸리에 설탕을 넣어 휘~ 저어 먹으면 달짝지근 참 맛있었다 때마침 옆집 친구 옥이가 와서 둘이 같이 설탕 타서 먹다 보니 절반은 마셨나 보다
그 후, 우리 둘은 기억이 끊어져 아무것도 모른다
10살짜리 아이 둘이서 안방에 피투성이 되어 온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재봉틀에 머리를 박고 벽에 쿵~ 찧고 장롱과 화장대 서랍 등 방안을 뒹굴며 부딪혀 입술 터지고 머리에 피 나고 친구 옥이는 재봉틀에 끼여 몸부림치다 온몸 멍들고 잡고 일어서려다 넘어져 무릎에서 피가 나 안방 자리가 붉게 물들었었다.
그날, 이후 아버지께서 내게 막걸리 심부름은 시키지 않으셨다 가끔 줄어드는 주전자 속 막걸리를 보시며 " 이놈의 계집애 " 하시며 싸리비를 드시면 무조건 뒤도 안 보고 달아났다 정말 이번엔 나 아닌데 언니가 먹는 거 보았지만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지금은 울 아버지 하늘여행 떠나셨지만 모내기철 가까워 오는 이맘때면 그립다 막걸리만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아버지, 그리고 내 친구 옥이가 생각난다 가끔 만날 때면 어린 시절, 추억 서린 막걸리 이야기는 오래도록 익어간다.
도갓집 : 도매로 물건을 파는 가게
탁배기 : 막걸리의 방언 봇도랑 : 봇물을 끌어들이거나 빼게 만든 도랑 개구리밥 : 연못이나 논의 물 위에 떠서 자라는 물풀 살강 : 그릇 같은 것을 얹어 놓기 위하여 부엌의 벽 중턱에 가로 드린 선반
첫댓글 도갓집에서 향기도 탁주 맛 보았지요
왕소금에 굵은 깨 썩어 놓은 안주 한 줌..
막걸리 독을 땅 속으로 파 묻어 놓고
손잡이 있는 댓박으로 퍼 올려 노오란
주전자에 담아 주는 도갓집의 추억들,,,,
한 말 통을 어깨에 매고 배달하는 그 아저씨들....
지금은 옛날 막걸리
그 맛이 안나네요
폰으로 잠시 들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