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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又山) 손경석의 『韓國登山史』 읽어보기 15
일제강점기 서울근교산의 암릉등반(Ridge등반)에 대하여
조장빈(근대등반사팀)
손경석은 『韓國登山史』 본문의 일제강점기 암릉등반(Ridge등반) 기록표에서 김정태의 『登山 50年』을 참조하여 아래와 같이 정리하였다.
No. | 날짜 | 코스 | 등반자 |
1 | 1937. 10 | 금강산 집선봉 C1~C4 연봉 종주 | 김정태, 엄흥섭 외 3명 |
2 | 1938. 1 | 금강산 집선봉 1351봉 동계, 빙폭~C1·2 | 김정태, 엄흥섭, 주형렬 |
3 | 1938. 10 | 금강산 집선봉 C1~C4 전연봉 순등 | 김정태, 주형렬, 류재선 |
4 | 1938. 10 | 도봉산 오봉 4, 5봉 | 김정태, 엄흥섭 |
5 | 1938. 10 | 도봉산 오봉 전봉 종주등반 | 엄흥섭, 김정태 |
6 | 1940. 10 | 금강산 집선봉 센터피크 C1-C4 연봉 역순으로 초등 | 김정태, 주형렬 |
7 | 1942. 10 | 금강산 집선봉 C1~4 전연봉 역등 | 김정태, 박상현 외 2명 |
8 | 1943. 10 | 집선봉 1351 서북주릉 | 박상현, 김정태 |
*『登山 50年』의 53쪽 <서울근교의 초등연대 기록표>와 92~93쪽 <금강산 동계 및 암벽 등반기록>의 릿지등반 기록 발췌
이어서 『韓國登山史』의 연대표의 릿지등반을 보면, 1934년 5월에 오쿠노(奧野正亥), 가와무라(三村光三) 백운대 서북능선 초등을 하였고, 1935년 4월에 북한산 만경대 병풍암 능선코스를 김정태, 엄흥섭이 초등하였고 위 <표>의 1번 기록에 대해서는 S1~S4인지, C1~C4인지 확실하지 않다고 하였고 2번 기록에 대해서 집선봉 서북능선 설계를 올랐으며, 1,482m봉 동계등반이라 부연 설명하고 있다. 도봉산 오봉등반에 대해서는 “초등(?)”이라하여 초등반에 의문을 제기했고 5번은 S1~S7의 동북릉 전연봉으로 짐작이라고 했으며, 6번 기록은 부록 연대표에 기록이 누락되어 있다. 7번 기록에 대해서도 7연봉 역으로 종주한다는 것이 의문시되고 있다며, 등반자는 김정태, 주형렬, 박상현으로 기록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대부분의 한국인 초등반은 김정태이고 또 개관적인 다른 기록이 없는 상황에서 김정태가 남긴 자전적 기록에 의지하여 할 수 밖에 없다. 제한된 범위의 김정태 정보를 근거로 기록을 검토하며 일부 의문을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면, 여러 차례 언급한 금강산 집선봉 표기 변경(일제강점기 동북릉 표기인 "C"를 김정태가 "S"로 표기)에 따른 등반 의구심이다.
일제강점기의 릿지등반은 주로 금강산에서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서울근교산의 릿지 등반은 오꾸노 일행의 보현봉릿지 그리고 김정태의 오봉릿지 등반이 있다.
『LATERNE』와 『登山百科』 기록
릿지등반에 대해 등반 당사자인 김정태의 기록을 보면, 경기고등학교 회지인 『LATERNE』(1953. 11)의 「白嶺會回顧錄」에서 註에 “1936~6년 원효암~백운대, 만경대종주행” 그리고 “1938~40년간 오봉 전주(全走) 4봉 완등, 오봉 역종주(3봉 완등) 그리고 병풍암~만경대” 등반기록을 말하며 “이들 登攀記錄들은 日政朝鮮山岳會 會報 또는 月例會에서 報告된 것인데 앞으로 이의 紀錄들을 틈틈이 다시 整理해볼 豫定이다.”고 하였다.
이후 정리된 첫 초등반 기록으로 『登山百科』(1962. 6)의 기록(한국산악회등반위원회편)을 보면, 오꾸노 일행(조선산악회)이 원효봉~백운대를 1934년 5월에, 김정태·엄흥섭(조선산악회)이 병풍암능선(용암문~만경대), 만경대능선(병풍암~위문) 1935년 5월에 초등했으며, 또 도봉산 오봉 제3, 제4 감투바위와 전연봉 역종주를 1933년 10월에 초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금강산편에는 김정태, 주형렬, 유재선(백령회)이 1943년 10월에 집선봉 동북릉 순종주 전연봉(自C1~至C7)을 2일간 露營코스로, 1944년 10월에 동북릉 전연봉(自C1~至C7) 역종주를 박상현, 김정태 외 3명(백령회)으로 기록하고 있고 1943년 10월에 Center Peak 집선봉 제1, 2, 3연봉을 김정태와 주형렬(백령회) 그리고 집선봉 주봉(1351봉) 역으로 암탑능선을 1944년 10월 김정태와 박상현(백령회)으로 기록하고 있다.
월간 <등산>, <山>의 기록
월간 <등산>(1970. 5) 김정태의 「한국의 산과 등산」 본문의 <별표 A> ②번 기록은 오꾸노 일행이 1934년 3월에 백운대 서북능선을, ⑤번에서 김정태와 엄흥섭이 1935년 4월에 북한산 만경대 병품암능선을, ⑰번에 김정태, 엄흥섭이 도봉산 제4, 5봉 정상암 초등을 1938년 10월 초등하였고 ⑱번에서 엄흥섭, 김정태가 오봉 전봉을 역종주로 초등하였고 1938년 10월로 적고 있다.
이에 대해, “백운대 서북능선 초등은 일본인 선구자(先騒者)인 飯山씨 다음의 제2기적인 크 라이머이며 능선진출이라 할 수있는 奥野(리더, 금강산협회) 파티가 올라갔다. 그런데 이 친구는 같은 해 봄에 이 白雲台 우연히 나와 각각 다른 코스를 등반한 후 부터는 어느틈엔가 계속해서, 서울과 금강산의 바위 코스, 북한(北韓)의 적설계등반 등을 1941년에 이르기 까지 앞서거 니 뒤서거니 해서 그와 나는 山의 좋은 라이 벌이 되었다. 앞으로 소개하겠지만 그와 나 두 사람은 마치 그 당시 한일 인 (韓日人)간의 산의 양쪽기수(旗手)나 된 것처럼 한 7~ 8년간 줄기차게 맞서 다니면 서 심심치 않은 에피소드를 4가지고 있다.”고 부연 설명하고 있다.
김정태의 『登山 50年』(1976. 7) 59쪽에 “우리가 白雲臺 정면벽을 오르고 있을 때(註: 1934. 3) 서쪽 岩稜에선 일본인 오야정해(金剛山협회) 등 2명이 오르고 있었다.”고 하여 오꾸노 일행이 원효릿지로 추정되는 코스를 올랐음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만경대, 병풍바위 등반은 만장봉 동면벽 초등과 함께 엄흥섭과 두 세번째 등반이였다고 한다. 김정태의 『登山 50年』(1976. 7) 54쪽에서는 “들놀이 격으로 조촐하고 조용하기만한 이 봉과 屛風바위의 능선코스를 오른 것도 이 무렵 이었다. 용암문 위에서 붙어오르는 屛風바위 능선은 萬景臺 정상의 비스듬이 나선형으로 돌아 올라간 생선아가미와 같은 틈(밴드)에서 한 번 확보한 외에는 어느 바위 코스보다도 경쾌하고 조망이 좋은 연속등반의 코스이다.”고 하며 각주에 만경대와 병품암 초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오봉등반에 대해서는 “五峰 제4, 5頂上岩(1938. 10)과 五峰 連峰 全逆登(1938. 10)은 그 당시에 제1봉에서 아래로 제5봉까지 연등(連登)은 하고 있었으나 제4, 5峰의 정상암 (頂上岩)들은 쉽지 않아서 오르지를 않았다. 그래서 嚴과 둘이서 미등정(未登頂)의 峰을 정리나 하듯이 올라갔으며 五峰 연봉 全逆登은 아래 제5봉 끝 슬랩 침니에서 스타트해서 제1봉까지를 바위만으로 연속 등반한 것이다.”고 적고 있다.
서울근교산의 릿지등반 기록에 대해
이전 글인 우산(又山) 손경석의 『韓國登山史』 읽어보기 9의 「백령회의 금강산 집선봉 동북릉(S1~S7) 역종주와 1351m봉 서북릉 종주 초등반」에서 언급하였듯이 금강산 집선봉 등반에 대해서는 릿지등반을 포함 별도의 글이 있을 예정이고 우선 서울근교 릿지등반에 대해 이해해보고자 한다.
1934년 3월의 원효봉-사각봉-백운대 종주 초등반으로 조선산악회 회보 No.9(현재, 전하는 회보가 없음)를 근거(한국등산사고찰9)로 하고 있으나 손경석이 오꾸노에게 확인한 것은 “1934년에 백운대 정남벽 트레버스와 크랙, 밴드상 크랙에서 직등한 백운대 코스를 三村光三하고 올라갔는데, 그것이 초등이 아니고 코스는 다르나 경성제대의 泉등 4명이 정남벽을 직등한 것을 후에 가서 알았노라고 말하면서”라고 확인하고 있어 김정태가 제시한 조선산악회 회보 9호의 기록보다 오꾸노 본인이 등반코스가 원효릿지 등반이 아니라 백운대 정면벽 등반이라 확인한 손경석의 기록을 우선해야 할 듯하다.
1935년 4월의 만경대 릿지등반은, 제1주말에 백운봉 암문(위문)에서 크랙, 침니를, 제2주말에 노적봉 안 부에서 만경대 능선쪽으로 크랙과 슬랩등반을, 3주말 용암문-병풍암-만경대-암문까지 여러차례 등반(한국등산사고찰9)하였다고 한다. 결국 지금의 만경대 릿지 전코스 종주를 한 셈이고 이는 첫종주등반이다.
2016년 4월 의 아처의 등반기를 보면, 1930년으로 추정되는 시기에 아처와 임무가 병풍암 릿지를 등반하였고 만경대(또는 병풍암) 의 동면 중에 우측 크랙코스(아마도 만경대릿지 마지막 핏치인 직벽)을 등정을 하였고 중앙봉과 남봉은 상단부 직전까지 올랐다고 한다. 1930년 아처, 임무의 병풍암릿지 초등반 그리고 1935년 4월에 엄흥섭, 김정태의 만경대릿지 초등반으로 생각된다.
김정태는 오봉 등반에 대해 당시 “그 당시에 제1봉에서 아래로 제5봉까지 연등(連登)은 하고 있었으나” 또는 그 무렵에 오봉은 위에서 1, 2, 3봉 정도가 등반되고 있었으므로“(한국의 등산사 고찰10)으로 보아 이미 통상적인 등반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월간 <山>(1983. 10) 「한국의등산사고찰11」에서 ”그 무렵에 오봉은 위에서 1,2,3봉 정도가 등반되고 있었으므로 嚴, 金 파트가 아래서 위로 5~1봉으로 역종주등반(지금의 릿지 클라이밍)을 해서 그동안 초등반이라 발표해 왔으나 최근 영국인 「C.H 아처」의 오봉 초등반(註: 본고 ⑦「Some Climbs in Korea」 기록이 나타났으므로 위의 종주등반은 자주적인 제2등이 되었다.“며 오봉릿지 초등을 제2등으로 수정하였다.
이 점에 대해서, 오봉 1~3봉을 동에서 서로는 등반장비 없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일반 암등로 임을 감안할 필요가 있지만, 아처는 분명이 오봉의 각 독립봉을 대상으로 등반을 하였고 김정태는 감투바위 등반 포함 전연봉을 종주등반하여 그 등반 대상과 루트가 다른점이 있어 릿지등반 초등은 맞는 듯하다.
서울근교산의 릿지등반은 임무와 이이야마(1926?) 그리고 아처와 야마나카(1930?)의 오봉 1~3봉 정찰이 있었고 1930년경 아처와 임무가 북한산 만경대의 남봉 그리고 오봉에서 릿지 등반이 있었다. 1935년 4월 김정태, 엄흥섭에 의해 만경대릿지가 초등되었으며, 1938년 10월 김정태, 엄흥섭에 의해서 실질적인 오봉릿지 초등반으로 이해된다. 피크헌팅 초등반 시기로 서울근교산에서는 의미있는 릿지등반코스와 등반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금강산 집선봉 일대의 대규모 암장을 대상으로 한 원정등반으로 인해 릿지등반이 활발히 이루어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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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효봉-사각봉-백운대 종주 초등반으로 조선산악회 회보 No.9를 인용.
2) 손경석은 「한국산악등반사의 발굴4」에서 “김정태의 「한국의 록·크라이밍대상」에는 백운대 정면벽 만경대쪽 침니, 밴드横断코스는 1929년 5월과 1934년 5월 건국소년단의 김정태, 李春峰의 3명이라고 발표했고 같은 백운대 北稜面 원효봉쪽 슬랩, 크랙코스는 1934년 5월 일본인 奥野正玄, 三村光三 이라고 하였다. 김정태는 그 후 「등산 50년」에서 1929년 5월은 완등(完登)한 것이 아니고 중상반부(中上半部)만 올랐고 1934 년 3월(앞서 5월을 수정)에 김정태 엄흥섭이 완등하였다고 수정발표하고 원효봉쪽 슬랩 · 크랙코스는 서북능선이라고 수정 하였다. 한편 奥野正玄는 1934년에 백운대 정남벽 트레버스와 크랙, 밴드상 크랙에서 직등한 백운대 코스를 三村光三하고 올라갔는데, 그것이 초등이 아니고 코스는 다르나 경성제대의 泉등 4명 이 정남벽을 직등한 것을 후에 가서 알았노라고 말하면서, 1932년5월 당시의 경성고등공업의 OB인 垣見(가까미)와 柴田(시바다) 두 명이 크랙横断을 해서 직등하여 자기들보다 앞서서 정면벽을 초등한 것을 알게 되었고 泉들의 직등코스는 이보다 좀 서쪽으로 치우친 남벽이라고 부언하는 것이었다. 결국 각기 주장하는 것이 다르고 코스의 설명 이 부정확해서 지금의 백운대 앙드레 지드레로 이어지는 남벽은 과연 누가 먼저 초등한 것인 지. 또는 각기 다른 4개의 초등코스가 있다는 것인지도 확실치 않다. 김정태의 1934년 백운대 등반은 그분의 19세때의 기록일 것이고 상중부 (上中部)의 기록은 14세때의 기록이 악우회 발행「한국의 암벽」에선 김정태로 된다, 발표되고 있음을 참고로 적는다.” 고 하였고 김정태는 <등산>(1970. 8)에서 “五峰 정상암의 인공등반 시도
다음의 五蜂 정상암(頂上岩)은 제5봉의 것은 조금 까다롭지만 짧아서 문제가 되지 않으나 제 4의 정상암은 한명치 거대한 암두(岩頭)에 4방 이 반듯한 10여 m의 직벽이므로 쉽게 오를수가 없었다. 지금 같으면 볼트하켄의 벽으로 십상이겠지만 책에 서만 보고 해보지 못한 자일의 「푸르지크」 등반을 하기로 했다. 첫날에는 자일을 올려 넘기기 위하여 보조줄에다 하겐을 댓개 추 (锤)로 잡아매어 던져 보았다. 나보다도 嚴이 팔매질이 좋아서 교대로 몇번인가 거듭한 끝에 넓은 정상의 중간 머리까지 올라갔으나 하겐이 걸려서 꼼짝하지 않아 그날은 당기고 퉁기고 하다못해 보조줄을 끊고 내려올 수 밖에 없었다. 다음 주일은 미리 굵고 질긴 삼(麻)끈을 준비 하고 추()는 광석분쇄용의 골프공만한 강철공 (틸스트·볼)을 구해 철공장에서 줄을 감아맬 구멍을 뚫어가지고 갔다. 그동안에 연습도 하고 있어서 두 세번 크게 돌려 던진 결과 어렵지 않게 이 거암(巨岩)의 西에서 東쪽 위로 넘길 수 있었고 여기에 자일을 달아 반대편 아래 바위에 하켄을 고정하여 자일등반을 할 수 있었다. 보조줄 3개를 푸루지크(prusik) 매듭으로 자일에 걸어서 하나는 가슴에 젤프스트 자일로 연결, 몸을 가누어 올리고 들은 발디딤줄로(지금은 이것을 스링(sling)이라고 한다) 좌우를 번같아 딛고 올라 10여m 직벽의 정상을 거뜬히 올라갈 수 있었다. 그 위는 반듯한 두어간 넓이의 하게(下界)와 격절(隔絶)된 한덩치 망루(望樓)와 같은 절정인데 그야말로 에누리없이 흔하지 않은 초등정(初登頂)을 한 셈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이와같은 자일 푸로지크 동반은 최근 새로운 동반방식으로 주목되기 시작한 「다이랱티씨마」(直線登撃-Direttissima climb (注 2)) 방식의 쥬마센다(Jumar-자일 登降具)에 의한 등반과 같은 짓을 한 듯하였다. 아마 지금 같으면 초등정을 위한 인공등반의 핏치로 뻔뻔한 직벽에 볼트 하켄을 때려 박고 올랐을 것이며 그러지 않아도 최근에 그렇게 올랐다던 가 오르려 한다던가 들은듯 하다.“고 하였으며 이 방법으로 비봉 애기바위(순수비 옆 정상암 추정)바위도 초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3) 본 산서회 카페 2020년 9월 1일 필자가 쓴 「단독등반」에서 김정태는 조선산악회 계간 17호의 자료를 근거로 “1939년 10월 금강산 집선봉 센타피크 2봉을 “遠藤登(京中 OB)” 단독으로 초등반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오꾸노는 1938년에 중앙릉 C4를 후지모토(藤本)와 등반하였고 1939년 C2를 오꾸노 본인과 함께 등반했다며, 김정태의 조선산악회 회보와는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奧野正亥, 1995, 「集仙峰 中央릉 C2の 登攀」, 『北朝鮮の 山』, p. 161.) 김정태가 출처로 제시한 “朝鮮山岳会 「会報」No, 17”은 김정태 이후 없어진 자료로 달리 전하는 문헌이 없고 있기도 어려운, 짧은 소식지다. 일제강점기의 기록은 전하는 것도 적고, 개인적인 주장으로 서로 기록이 틀린 것이 많다.“라고 또 1937년 김정태의 노적봉 등반에 대해서도 오꾸노는 1938년이고 선인봉에서는 김정태를 본 적이 없다고 언급하였다.
김정태는 한국전쟁 등 혼란기에 자료를 잃어버렸고 이후 확인된 사항에 대해 수정을 거듭한 등반 기록을 발표하여 왔으며, 이는 초기 등반기록에 혼선을 준 이이야마 다츠오(베가본드 2만킬로에서 기록을 소각했다고 함)는 물론, 백령회의 양두철, 방현도 인터뷰에서도 한국전쟁 때 분실했다고 얘기하고 있다.
1930년을 전후한 초등반 시기 그리고 한국인들이 1935년경 이후 본격적인 서울근교산의 암벽등반 시기에 초등반 사진이 거의 없고 당시 기록 또한 없으며 오로지 이이야마 다츠오의 전언과 김정태의 자전적 등반기인 『登山 50年』 및 그의 글이 전거의 모두이다.
손경석은 일본인의 자료를 찾아보고 초기 기록 복원에 평생을 힘썼으나 아직도 그 작업은 미진한 상태이고 그나마 그의 기록이 수장되어 있는 국립산악박물관 수장고는 열람 준비가 안되어 있으며, 『김정태유고집』의 일문 기록도 번역이 안되어 있어 초기등반사는 추정에 추정을 얘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4) 이 부분은 초등반 시기임을 고려하더라도 등반으로 인정하기 힘든 암릉으로 도봉산 포대능선 암릉 수준으로 등반난이도를 얘기할 것도 없어 초등반으로 기록하기엔 미흡한 듯하다.
5) “(만경대)남봉도 어렵다. (중략) 이거야말로 서울에서 내가 올랐던 등반들 중에 가장 아쉽게 생각하는 등반이었다. 능선을 타고 남쪽으로 등반을 이어가기는 쉬웠지만 경치도 좋고 무척 즐거운 등반이 됐다.”고 말하고 있다.-글 C.H 아처 번역, 오영훈 서울농대OB(와운루계회) “아주 기술적인 방법을 쓰지 않는 한 주봉을 오를 순 없다” 2016. 06. 27
아처가 마지막으로 올랐던 만경대를 배경으로 한 임무
그는 조선신문 금강산등반기에서도 체격이 건장했음을 엿볼 수 있다. “다시 비로봉을 목표로 향해 진행한다. 마가연을 지나며 눈은 단연 깊어져 전진하기 곤란을 겪었고, 그 중에 몸이 무거운 임군은 몹시 곤란한 듯하다.”-朝鮮新聞(1930, 2. 15), 宮川泰의 「雪の連峰に旭光映え壯觀その極に達す, いよいよ勇を鼓す一行」
6) “처음 오봉을 접한 건 야마나카와 함께 긴 하루를 보낸 뒤 북쪽에서부터 이 봉우리를 건너 넘어와야 했을 때였다. 가장 북쪽에 위치한 정상(A)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두 번째(B)도 그리 어렵진 않아 한 번 시도에 오를 수 있었다. 세 번째(C)는 이야기가 달랐다. 바위 안부까지는 쉽게 오를 수 있었지만 내 친구는 그 다음 오를 부분을 내켜하지 않았다. 북서쪽 방면으로 갈라져 정상까지 향하는 유일한 루트였다. C와 D사이에는 절벽이 형성돼 고립되는 것 같고, 또 날이 늦어 등반을 단념했다. 다음으로 오봉을 찾은 건 만장봉 북벽을 오른 이튿날 맥레이와 함께였다. 남쪽 끝 E부터 오르기로 작정하고 북쪽으로 향한 안부를 등반했다. 오봉 중 3봉은 단독으로 올랐. -1931년 만장봉과 오봉 등반기, 글 C.H 아처 번역, 오영훈 서울농대OB(와운루계회), 2016. 04.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