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반송(塔畔松)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
一尺靑松塔畔栽
한 자 되는 푸른 소나무를 탑 가에 심었더니
塔高松短不相齊
탑은 높고 솔은 낮아 차이가 나는구나
傍人莫怪靑松短
사람들아 푸른 소나무가 작다고 말하지 마라
他日松高塔反低
훗날 소나무가 높고 반대로 탑이 낮을 것이리니
어린 인재가 아직은 내가 어리고 모자라지만
언젠가는 당신보다 더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자부심과 호기를 드러내는 글로 흔히 인용되고 있는 이 시가
오늘 살펴볼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 선생이
열 살 전후 어린 나이에 지은 시 탑반송(塔畔松)이다.
후백(後白)이라는 이름은 지례현감을 지낸 할아버지 이원례(李元禮) 공이
당나라 시선 이백(李白) 같은 문장가가 되라는 염원을 담아 지은 이름이며
청련(靑蓮)이라는 호는 자신이 할아버지의 염원을 받들어 그렇게 되겠다고
이백의 호를 스스로 쓴 것이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쓴 선생의 행장(行狀)에 보면
16세 이전에 소상팔경(瀟湘八景)이라는 가사를 지었는데 이
것이 서울에 전파되어 여러 악부(樂府)에 등재되었으며 이
때부터 서울의 문사들 사이에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명공거경(名公巨卿)이
그를 중시하고 예를 갖추어 공경했다고 적혀 있다.
지금까지 내용만 본다면 선생이 문장가로만 이름을 날린 것 같지만 실제로는
훌륭한 행정가요 청백한 관리였던 자랑스러운 함양인이었다.
조선조 500년 동안 가장 공정하게 인사업무를 본 이조판서는 누구였을까?
청련 이후백 선생이다.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나오는 평가이다
. 선생이 이조판서로 있을 때 지인이 찾아와서 자리를 부탁했다.
선생은 탄식하며 그 지인에게 한 권의 책자를 내보였다.
재주와 덕행이 있는 사람을 기록해 둔 책자였는데 그 사람의 이름도 들어 있었다.
책자를 보여준 선생은 “내 일찍이 자네를 인재로 알고 기회가 되면 천거하려고
이렇게 기록해 두었는데 자네가 청탁하니 이제는 쓸 수 없게 되었구나.”라며
그 사람의 이름을 지워버렸다. 이 이야기는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행장(行狀)에도,
박세채(朴世采)가 지은 시장(諡狀)에도 나오고 있다.
두 분은 문묘(文廟)에 모셔진 동방 18현에 속하는 선현들로
근거 없이 이런 글을 쓸 사람들이 아니다.
청련 이후백 선생은 1520년 함양군 우암촌(牛巖村, 쇠바우마을)에서 연안이씨
이국형과 어머니 나주임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여러 기록에서 증조부는 충청도관찰사를 지낸 이숙감(李淑瑊) 대감이며
, 할아버지는 지례현감을 지내고 이조참판으로 추증된 이원례(李元禮) 공이요,
아버지는 일찍 죽어 벼슬하지 못했으나 영의정에 추증된 이국형(李國衡)으로
선생이 귀하게 되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증직의 영예를 누렸다고 적혀 있다.
선생은 열 살이 되기 전에 역병으로 부모님이 함께 돌아가시고
큰아버지 집에 살며 집상(執喪)했다. 어느날 집안 어른 집에 갔는데
어른이 단술을 권하니 물리치고 마시지 않았다. 이유를 물으니 단술이라고는 하나
술이라는 말이 들어 있으니 마실 수 없다고 해 함께 있던 사람들이 모두 감탄했다.
상을 마치고 백부의 권유로 바로 당곡(唐谷) 정희보(鄭熙普) 선생의 서당에 들어가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우암 선생이 쓴 행장과 현석 선생이 쓴 시장에는
표인(表寅)의 문하에 들어가 옥계 노진, 구졸암 양희 등 열다섯 명 학동들과
함께 공부했다고 적혀 있으니 그 연유를 모르겠다. 선생은 나이가 제일 어려서
말석에 앉아 공부를 했는데 함께 공부하는 학동들의 발표 내용을 모두 적고
외워 숙독자(熟讀者)처럼 모두 이해해 선생이 탄복을 했다.
그 이후의 청련 선생에 관한 기록들에서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할머니 남양홍씨(南陽洪氏)가 선생을 데리고 친정이 있는 강진(康津)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친정 조카와 결혼시켰으며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승중상(承重喪)으로
청련이 집상(執喪)했다고 적혀 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청련을 당곡 선생 서당으로 보낸 큰아버지 이국권(李國權) 공이
거창에 살고 계셨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할머니가 손자 를 데리고
친정으로 가시고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승중상으로 집상을 했다니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 궁금증은 연안이씨세보(延安李氏世譜)를 보아야만 풀린다.
청련 선생은 이숙감 대감의 혈손(血孫)이 아니었다.
선생의 실제 증조부는 용궁현감(龍宮縣監)을 지낸 이숙황(李淑璜) 공인데
증조부로 알려진 이숙감(李淑瑊) 대감의 큰형님이다.
이숙황 공은 네 분의 아드님을 두셨다. 큰아들 이원례 공은 지례현감을 지냈다
. 이원례 공은 국권(國權), 국형(國衡) 형제와 두 분의 따님을 두셨으며,
국형은 청련 이후백과 딸 하나 남매를 두었다. 선생이 귀하게 되자
조부 이원례는 이조참판, 부친 이국형은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그런데 아버지 국형은 증조부 이숙황 공의 네째 동생 이숙함 공의 아들
세문(世文)의 양자로 들어갔으며 역병으로 일찍 돌아가셨다.
선생은 양조부 이세문 공 사후 조모 남양홍씨(南陽洪氏)를 따라
강진으로 내려가 모시면서 그곳에서 결혼하고 살았다.
이런 까닭에 이숙감 대감의 증손으로 알려지고 큰아버지가 있었음에도
승중상을 집상한 것이다. 그래서 흔히 이숙감-이원례-이국형-이후백으로
계통이 알려져 있으나 잘못된 것이다. 이숙감-이세문-이국형-이후백으로 하거나
이숙황-이원례-이국형-이후백으로 해야 한다.
청련은 이른 부모님의 죽음으로 진취(進取)에 욕심이 없어 자연 속에 묻혀 지내다가
1555년 36세에 대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일찍 호당(湖堂)에 들었다.
우리 함양인으로 호당에 뽑힌 사람은 표연말(表沿沫), 유호인(俞好仁), 이후백(李後白)
세 사람뿐이다. 사간원대사간, 병조참의, 도승지, 예조참판, 홍문관부제학, 이조참판을 지내고 1573년 54세 때 주청사(奏請使)로 중국에 가서 조선 왕실의 종계(宗系)를 바로 잡아 200년 국가 숙원을 해결했다. 이 공으로 후에 연양군(延陽君)에 추봉되었다. 이듬해 55세 때 형조판서로 특배되고 1576년 57세 때 함경도관찰사로 가서 명분 없는 부세(負稅)와 불법(不法)을 일소하고 군병의 훈련을 엄히 했다. 이때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하고 처음 종9품 동구비보권관(童仇非堡權管)으로 왔는데 그의 능력을 확인한 이후백 감사가 칭찬하고 격려하여 종8품의 훈련원 봉사로 승진했다. 16년 후에 일어난 임진란의 영웅을 미리 발탁한 셈이다. 이후 다시 조정으로 들어와 이조판서, 양관제학이 되었다.
1578년 호조판서로 있을 때 동문수학한 옥계 노진 선생이 8월 23일 죽었다. 휴가를 얻어 수동면 모간리에 있는 부모님 산소에 성묘도 하고 문상도 할 겸 함양에 내려왔다가 병이 나서 10월 7일 하루 만에 돌아가셨다. 향년 59세였다. 장지(葬地)는 이숙감, 이세문 공이 영면하고 있는 파주군 광탄면 선영이다. 함흥의 문회서원(文會書院), 강진의 서봉서원(瑞峯書院), 영암의 구암서원(龜巖書院), 지례 도동서원(道洞書院)에 배향되어 있다. 문집으로 청련집이 있다.
함양문화원에서 나온 함양역사인물록에서는 선생이 강진으로 내려간 다음 부모형제도 없는 고향에는 자주 오지 못한 것으로 사료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함양에는 어려서 돌아가셨기에 더욱 애모(哀慕)했을 부모님의 산소가 있고 누이와 자형이 살고 있었으니 자주 오지 않았을 리 없다. 누이는 춘당 박맹지(朴孟智) 공의 증손자 박승원(朴承元)과 혼인하여 모간에 살고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긴 했으나 외가집도 함양에 있었다. 어머니 나주임씨(羅州林氏)는 한림(翰林) 종의(宗義)공의 따님인데 한림공은 수동 화산서원에 모셔진 임대동(林大仝) 선생의 당질(堂姪)이며 남계 임희무 선생의 아버지 임각(林珏)공의 재종숙(再從叔)으로 외가 친척들이 모두 함양군 모간과 세평에 살고 있었으니 함양과는 연이 끊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조선조의 대표적 청백리 청연 선생의 올곧은 삶과 정신이 기억되고 되살려져 청렴 평가에서 하위에 맴돌아 부끄러운 우리 함양의 오늘을 다시 맑고 깨끗한 청백리의 고장으로 되살려 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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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천령삼걸(天嶺三傑)을 찾아서 - 그 세 번째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 선생 -|작성자 권 충 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