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경영과 말의 응답 (잠언 16장 1절 – 33절) 16:1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 2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6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말미암아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11 공평한 저울과 접시 저울은 여호와의 것이요 주머니 속의 저울추도 다 그가 지으신 것이니라 12 악을 행하는 것은 왕들이 미워할 바니 이는 그 보좌가 공의로 말미암아 굳게 섬이니라 13 의로운 입술은 왕들이 기뻐하는 것이요 정직하게 말하는 자는 그들의 사랑을 입느니라… 16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얼마나 나은고 명철을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더욱 나으니라 17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의 대로이니 자기의 길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보전하느니라 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20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22 명철한 자에게는 그 명철이 생명의 샘이 되거니와 미련한 자에게는 그 미련한 것이 징계가 되느니라… 25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31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33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개역개정) 오늘부터 시작하는 성경 본문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신정왕국에서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로서 건강한 신앙인으로 살아가게 할 지혜의 교훈을 권면한 “솔로몬의 잠언”(1:1) 중에서, 솔로몬의 제2잠언 모음집(10:1-22:16)의 둘째 부분인 하반부 내용입니다. 제2잠언 모음집은 둘로 나뉘는데, 첫째 부분(10-15장)은 반의(反意)적 평행법인 대구(對句) 방식으로 각 문장마다 지혜로운 의인과 어리석은 악인을 대조하는 내용이라면, 오늘부터 시작하는 둘째 부분(16:1-22:16)은 지혜를 추구한 결과가 지혜로운 자의 삶으로 이어지지만 지혜를 거부한 결과는 미련한 자의 삶으로 이어진다고 경고하며, 의로운 삶에 대하여 찬양하는 첫 번째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인 16장에서는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16:1)는 말씀이 본문의 흐름을 관통한다고 보아서, “마음의 경영”과 “말의 응답”이라는 제목으로 잡았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계획과 하나님의 기도 응답’이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계획에 대한 기도의 응답 곧 구한 모든 것의 응답에 대한 주권적 결정은 하나님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계획과 그 성취 요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에 대한 것을, 다시금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16:9)고 증언하며, 결론적 선언을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16:33)고 마무리합니다. 1. 사람의 계획과 주님의 결정이 무엇입니까? 신앙인이 알고 행해야 할 중요한 자세와 주님의 주권적 통치에 대해서,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16:1) 곧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새번역)라고 선언합니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이 마음으로 생각했던 자기 계획들을 의미한다면, “말의 응답”은 그것을 하나님께 말로 표현한 기도의 응답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하나님께 무조건적인 “응답”을 요구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인간적인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결정을 기다리고 존중할 줄 아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과,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흔히들 인간은 자기중심적이다 보니 자신의 모든 행위를 정당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16:2)고 하신 것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라고 일깨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보이는 행동만이 아니라, 우리 마음과 생각 속에 감춰진 동기와 목적과 의도와 성향까지를 한 순간만이 아닌 계속적으로 삶의 전체를 살피신다는 것을, “주님께서는 속마음을 꿰뚫어 보신다”(새번역)라고 선언합니다. 따라서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16:3) 곧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기면,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새번역)라며, 우리 인간의 편협한 지식과 경험과 생각의 한계를 깨닫고, 자기가 계획한 모든 일의 주도권을 하나님께로 전적으로 맡기고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이루어지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전3:1)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16:4)라며,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따라 만물을 각자의 목적에 알맞게 쓰임 받게 하실 것을 증언합니다.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16:4)는 말이, 하나님이 “악인”을 창조했다는 것이 아니라, 심판 날에 합당한 심판을 받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앞에 인간이 서야 할 자세와 서지 말아야 할 자세가 무엇인가를,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16:5)고 경고하며,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말미암아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16:6)고 교훈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증스럽게 여기며 역겨워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그러한 잘못된 삶을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앞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8:13)고 말씀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마음이 교만한 자”는, 자신이 한계성을 가진 유한한 존재임을 망각하고 주님을 거역하는 죄를 범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악한 자들이 자신들의 힘을 결집한다고 해서, 결코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경고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이고, 이들이 “악을 미워하”고 “악에서 떠나게 되”며, 따라서 하나님의 속성인 “인자와 진리로” 사람들을 진실한 사랑으로 대함으로써 하나님의 베푸시는 은혜로 자신의 “죄악이 속하게” 될 것을 일깨웁니다. “인자와 진리”가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우리가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느냐에 대해서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2:13,참고 겔9:3-10)고 말씀한 것처럼,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16:7)고 교훈합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원수와도 화합하며 사람들과 화목한 관계를 펼쳐가게 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게 한다고 약속합니다. 그렇기에 “적은 소득이 공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16:8)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자가 되는 것만이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가난해도 하나님의 선한 뜻 가운데 살고자 하는 것이 진정한 축복이고 은혜라고 선언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16:9)며, 우리 신앙의 중심이 자기 생각과 계획의 실현이 우선하기보다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동행하는 순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각성시킵니다. 2. 신앙적인 지도력을 어떻게 말씀합니까?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로 살아가는 믿음은, 세상 속에 주님께서 우리를 파송하셨다고 하는 청지기 의식으로 살아가는 신앙생활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고 일깨웠던 말씀처럼, 세상의 현장 속에서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신분과 위치에서 “왕 같은 제사장들”로서의 사명과 역할을 감당하는 이들이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과거 신정왕국 체제에서 하나님의 대리자로 세움 받은 왕과 공직자들이 감당해야 할 신앙적인 지도력을 증언하면서, 우리 믿는 이들이 행해야할 신앙적인 지도력을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왕의 입술에 있은즉, 재판할 때에 그의 입이 그르치지 아니하리라”(16:10)며, 하나님의 대리자였던 왕에 대해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뢰하여 주님의 말씀에 합당한 자세로 재판을 “그르치지 아니”하도록 개인적 감정과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없이 공정하게 행할 것에 대한 권한과 책임의 경고입니다. 둘째는, “공평한 저울과 접시 저울은 여호와의 것이요, 주머니 속의 저울추도 다 그가 지으신 것이니라”(16:11)며, 왕으로 상인들이 공정한 거래를 하는지를 관리 감독함으로써 사회 경제 생활의 근간을 뒤흔들지 못하게 할 것에 대한 권한과 책임의 경고입니다. 이미 솔로몬이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11:1)고 일깨웠지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로 살아가기 위한 중요한 모세의 당부와 경고 역시 이것 아니었습니까? “너는 네 주머니에 두 종류의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네 집에 두 종류의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 이런 일들을 행하는 모든 자, 악을 행하는 모든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하니라”(신25:13-16)고 하신 축복과 경고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완전하게 근절되지 않는 사회 문제 아닌가요? 셋째는, “악을 행하는 것은 왕들이 미워할 바니, 이는 그 보좌가 공의로 말미암아 굳게 섬이니라”(16:12)며, 하나님으로부터 통치 권한을 위임받은 왕은 “공의”를 실현할 책임을 가진 자이며, 그래야만 하나님이 지켜주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신뢰함으로써 왕권이 안정적이고 견고하게 설 것을 일깨우며 경고합니다. “악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바이기에, 또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왕들이 미워할 바”가 되어야 한다고 일깨웁니다. “공의”는, 하나님의 중요한 통치 방식으로서 왕의 윤리적 성향 역시 이와 같아야 하며, 성경 전체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반복해서 강조하는 중요한 신앙적 윤리 책임입니다. 따라서 “의로운 입술은 왕들이 기뻐하는 것이요, 정직하게 말하는 자는 그들의 사랑을 입느니라”(16:13)며, 믿는다고 하는 사회 공직자들 역시 동일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아부와 아첨으로 자기 이권만을 챙기려는 무책임한 신앙인들이 되지 말 것을 경고합니다. 신앙인은 “의로운 입술”과 “정직하게 말하는 자”로 살아갈 때, 하나님과 지도자들이 “기뻐하는 것”으로서 은총의 “사랑을 입”게 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왕의 진노는 죽음의 사자들과 같아도,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을 쉬게 하리라. 왕의 희색은 생명을 뜻하나니, 그의 은택이 늦은 비를 내리는 구름과 같으니라”(16:14-15)며, 절대 권력을 가진 왕으로 하여금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백성에게 선한 정치를 베푸는 신앙적인 지도력의 사람이 되도록 “지혜로운 사람”으로 설 것을 일깨웁니다. 예수님께서도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라고 선포하셨는데,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16:1)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과연 분열과 갈등이 넘치는 세상 속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로 서는 참된 믿음의 사람으로 살 것입니까? 아니면, 오히려 세상 속에 왜곡과 증오와 반목의 갈등과 분노를 증폭시키는 거짓된 믿음의 사람으로 살 것입니까? 3. 왜 지혜로운 삶의 선택을 해야 합니까?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교회가 되었든 사업이 되었든, 얼마나 많은 사람을 집결시키느냐가 마치 성공의 기준인 것처럼 되어버린 현실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16:1)는 말씀은, 우리 인간적인 생각과 계획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집결시켰냐는 것이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 것인지를 알고 겸손히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성공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분별할 수 있는 통찰력과 분별력을 가지는 것이 세상적인 성공보다 낫다는 것을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얼마나 나은고? 명철을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더욱 나으니라”(16:16)고 일깨웁니다. “금”과 “은을 얻는 것”은, 세상적인 성공과 출세를 의미합니다. 이미 앞에서도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네가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도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3:13-15)라고 했습니다. “지혜를 얻는 것”이 사물과 상황에 대한 통찰력을 의미한다면, “명철을 얻는 것”은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력으로서, 단지 지적인 재능만이 아닌 하나님을 아는 영적인 지식과 윤리적인 성실성까지를 의미합니다. “금”과 “은을 얻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법으로 얻었느냐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지혜”의 통찰력과 “명철”의 분별력을 가진 사람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기 “마음의 경영”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의 응답”을 우선하기에,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의 대로이니, 자기의 길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보전하느니라”(16:17)는 말씀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자기 생명을 지킬 줄 압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8:13)는 것을 알기에, 자신이 가야할 길과 가서는 안 될 길을 분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와 달리 하나님 앞에서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생각과 능력을 과신하는 이들이 자기가 세운 계획인 “마음의 경영”에만 집착하는 것을 가리켜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16:18)고 경고하면서,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16:19)고 권면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삶의 선택은, 자기 이권을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교만한 자”들과 어울려 그 이권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자기의 영혼을 보전하”며 “자기의 길을 지키는 자”(16:17)라는 것을 일깨웁니다. 이처럼 “지혜로운 사람”의 삶의 선택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을,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16:20) 곧 “말씀에 따라 조심하며 사는 사람은 일이 잘 되고, 주님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새번역)라고 축복합니다.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충동적인 감정과 선동에 휩쓸려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일과 상황을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심사숙고하여 현명하고 신중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들이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요, “주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명철하다 일컬음을 받고, 입이 선한 자는 남의 학식을 더하게 하느니라”(16:21)며, 이러한 이들이 사람들의 인정과 존중을 받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선한 판단력을 더하는 선한 영향력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축복합니다. 그러나 “명철한 자에게는 그 명철이 생명의 샘이 되거니와, 미련한 자에게는 그 미련한 것이 징계가 되느니라”(16:22)며, 이처럼 “명철”의 분별력을 가지고 자신과 다른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샘”이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면서 지도자 행세를 하는 “미련한 자”는 쏟아져 나올 것이 “미련한 것” 밖에 없기에 자신과 다른 사람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몰아넣는 “징계” 밖에 받을 것이 없다고 경고합니다. 메마른 사막이라 물이 부족한 중동에서 물이 계속 솟아오르는 “샘”은 “생명” 유지를 위한 근원입니다. 혼탁한 세상에서 우리가 “명철한 자”와 “미련한 자”를 분별할 줄 아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사느냐 죽느냐 라고 하는 “생명의 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파멸과 혼돈에 몰아넣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살리고 치유하는 “지혜로운 사람”으로서의 삶의 선택을,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그의 입을 슬기롭게 하고, 또 그의 입술에 지식을 더하느니라. 선한 말은 꿀 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16:23)고 일깨웁니다. 입만 열면 그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들이, 과연 사람들을 살리는 “선한 말”인지, 사람들의 영혼을 파멸시키는 “맹렬한 불같은 것”(16:27)인지를 분별할 것을,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16:25)고 경고합니다. 악한 사람들의 선동에 휩쓸리지 않는 이들이 복됩니다. 그런데 갑자기 중간에 “고되게 일하는 자는 식욕으로 말미암아 애쓰나니, 이는 그의 입이 자기를 독촉함이니라”(16:26) 곧 “허기진 배가 일하게 만들고, 그 입이 사람을 몰아세운다.”(새번역)는 묘한 말씀이 튀어 나옵니다. 속된 표현으로 하자면, ‘어쩔 수 없이 먹고 살기 위해서 고생스럽지만 일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문맥과 맞지 않아 보이지만,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16:25)는 선언과 함께 악인들의 여러 형태가 이어져 나온다는 점에서, 먹고 살기위해서 어떤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을 미혹하고 선동해서, 그들로 자신들의 악행에 동참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럴지라도 거기에 휩쓸리는 것이 “필경은 사망의 길”이라는 것을 알 것과,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의 대로이니, 자기의 길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보전하느니라”(16:17)는 말씀을 기억할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이어서 나오는 악인의 첫 번째 행태를, “불량한 자는 악을 꾀하나니, 그 입술에는 맹렬한 불같은 것이 있느니라”(16:27)며, 믿는다고 하면서 누군가를 해치기 위해서 온갖 거짓말과 기만으로 그들을 물어뜯고 악을 모의하며 함정에 몰아넣고자, 군중들을 강렬하게 미혹하고 선동함으로써 사회적 분쟁과 혼란을 초래하는 “불량한 자”의 행태를 고발합니다. 악인의 두 번째 행태를, “패역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말쟁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16:28)며, 믿는다고 하지만 인간성이 뒤틀려 있어서 입만 열면 중상 모략하는 비뚤어진 말과 경박한 말로 사람들을 이간질하고 분열시키는 불신의 씨앗을 심어 하나님의 윤리적 질서와 인간관계의 신뢰성을 파괴하는 “패역한 자”와 “말쟁이”의 행태를 고발합니다. 악인의 세 번째 행태를, “강포한 사람은 그 이웃을 꾀어 좋지 아니한 길로 인도하느니라”(16:9)며, 믿는다고 하면서 폭력을 행사하도록 충동질하여 사람들로 타락한 본성대로 악행을 저지르도록 미혹하고 강요하는 “강포한 사람”의 행태를 고발합니다. 악인의 네 번째 행태를, “눈짓을 하는 자는 패역한 일을 도모하며, 입술을 닫는 자는 악한 일을 이루느니라”(16:30)며, 믿는다고 하면서 모든 악한 일을 도모해놓고 자신은 모르는 일인 것처럼 음흉하게 진실을 왜곡하고 외면하는 “눈짓을 하는 자”와 “입술을 닫는 자”의 실체를 고발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16:1)는 말씀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안타까운 것은, 안 믿는 이들이 아니라 믿는 이들이 그것도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말의 응답”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고, “마음의 경영” 곧 자기 생각과 계획만을 우선할 때 벌어지는 악행을 증언하는, 네 가지 악인의 행태에서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솔로몬은 오늘 본문을 마무리하면서, 갑자기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16:31)고 선언합니다.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인생을 오래 산 증거인 노년의 “백발”을, 쇠약함과 노화의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인생의 연륜과 경륜을 상징하는 “영화의 면류관”으로 선포합니다. 그러나 똑같은 “백발”일지라도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는 선언을 통해서, 한 생애를 어떻게 살아왔으며 지금도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그 “백발”이 추한 것이 될 수도 있고 “영화의 면류관”이 될 수도 있음을 밝힙니다. 그러면서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16:32)며, “백발”이 되어서까지 자기감정을 자제하고 조절하지 못하는 충동적인 성향이라면, 평생 동안 “용사”처럼 격렬하게 살았고 “성을 빼앗는” 업적을 얻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교훈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의 성향을,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출34:6)고 계시하셨습니다. 자기 “마음의 경영”을 우선하고 집착하는 이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의 응답”을 기다리고 들을 줄 아는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와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진정한 믿음과 신앙 인격을 가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밝힙니다. 그러면서 솔로몬은 다시 한 번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16:33)는 선언으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제비”뽑기는 오늘날의 추첨 방식으로,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뜻을 결정하는 공평한 수단으로 사용했으며, 우연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 선택 결과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언제나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믿는 자들의 악행을 지켜보면서 그 근원적 이유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말미암아 악에서 떠나”(16:6) “정직한 사람의 대로”(16:17)를 걸어가는 “지혜로운 사람”들의 믿음이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