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이순신의 효(孝)ㅡ
1. ‘백유(伯兪)의 고사’가 나온다.
백유가 잘못을 저질러
그 어머니가 매를 때리자 백유가 울었다.
그의 어머니가 말하기를,
“다른 날에 매를 때릴 때는 네가 울지 않다가
이제 우는 것은 어째서이냐?” 하자,
백유가 대답하기를,
“제가 죄를 얻어 매를 맞음에 항상 아프더니,
지금은 어머니의 힘이
저를 아프게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는 것입니다” 하였다.
어머니가 ‘등짝 스매싱’을 하는 TV 광고가 연상된다.
어머니가 장난삼아 아들의 등짝을 때리는데
하나도 아프지 않아서
아들이 어머니의 노쇠함을 걱정하는 광고였다. ------
어머니를 향한
이순신의 마음이 이와 같았다.
에 나오는 말처럼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깊은 연못에 임한 듯이 여기며,
얇은 얼음을 밟는 듯이 여긴다
[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
전전긍긍 여림심연 여리박빙]”고 하였다.
또 에 이르기를,
“우리의 신체는 머리털에서 살갗에 이르기까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손상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
[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
신체도 오히려 훼손해서는 안 되거늘
하물며 그 행실을 훼손하여
그 부모를 욕되게 하였겠는가.------
에는 이순신 집안의 가풍과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
특히 75회나 기록된 어머니에 대한 태도는
이순신의 효심을 짐작케 한다.
예를 들면,
임진왜란이 한창 중이던
갑오년(1594) 1월 12일 일기에는,
이순신이 휴가로 어머니를 찾아뵙고 나서
하직을 고하자,
어머니는
“잘 가거라.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라고
두 번 세 번 타이르며
조금도 이별하는 것을 탄식하지 않는다.
이순신의 어머니는 아들을 보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을 표현하기보다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으라며 떠나는 아들
이순신을 독려한다.
이것을 볼 때 이순신의 올바른 인격 형성과
부모에 대한 효심은
어머니의 가정교육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2. 어머니에 대한 이순신의 지극한 효성은
전반에 걸쳐 나타나 있다.
북방 근무 중 아버지를 여윈 이순신은
홀로 남은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더욱 커졌다.
전쟁 중에도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그의 심경과 어머니의 부음(訃音)을 들었을 때의
일기를 살펴보자.------
계사년(1593) 5월 4일,
이날은 어머님의 생신일이건만,
적을 토멸하는 일 때문에 (어머니께) 가서
헌수(獻壽)의 술잔을 드리지 못하게 되니
평생의 한이 된다.------
계사년(1593) 6월 12일,
아침에 흰 머리털을 몇 가닥 뽑았다.
흰 머리털이 무엇이 어떻겠느냐마는
다만 위로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정유년(1597) 4월 13일,
일찍 아침을 먹고
어머님을 마중하려고 바닷가로 가는 길에
홍찰방(洪察訪) 집에 잠깐 들러
이야기하는 동안 울(蔚, 둘째 아들)이
종 애수(愛壽)를 들여보내어
‘아직 배 오는 소식이 없다’고 했다.
또 들으니,
황천상(黃天祥)이 술병을 들고
흥백(興伯)의 집에 왔다 하므로 홍(洪)과 작별하고,
흥백의 집에 이르렀더니,
조금 있다가 종 순화(順花)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訃告)를 전한다.
뛰쳐나가 뛰며 나뒹구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다.
곧 게바위[蟹巖, 아산군 해암리]로 달려가니
배가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는,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이야
이루 다 어찌 적으랴. (뒷날 대강 적었다.)------
정유년(1597) 4월 19일,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님 영(靈) 앞에 하직을 고하고
울며 부르짖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간에 나 같은 사정이 또 어디 있을 것이랴.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정유년(1597) 5월 4일, 비가 내렸다.
오늘은 어머니 생신날이다.
슬프고 애통함을 어찌 참으랴!
닭이 울 때 일어나 눈물만 흘릴 뿐이다.
오후에 비가 많이 내렸다.------
-->> 계사년(1593) 당시 이순신은 49세였는데도
어머니에게 흰 머리털을 보이기 싫어
스스로 흰 머리털을 뽑을 정도로
효성이 지극하였다.
또한 이순신의 생애에서
가장 애처로운 장면은
정유년(1597) 4월 13일,
어머니의 부음을 접하고 통곡할 때이다.
정유년 옥고를 치른 후 4월 1일 옥에서 풀려나
백의종군을 위해
도원수 권율의 막하로 내려가던 길이었다.
마침 고향인 아산을 지날 때
어머님의 부음을 듣는다.
정유년,
왜란이 다시 일어나는 상황에서 어머니는
노구를 이끌고 여수에서 아산으로
배편으로 올라오시는 중
아산에 거의 도착할 즈음에 돌아가셨다.
이순신이 뛰쳐나가 뛰며 나뒹구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게 느껴진다.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이다.
초상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채
영령 앞에서 하직을 고하게 되었다. ------
위에서 보듯이 4월 19일,
이순신의 일기는 눈물로 범벅이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간에 나 같은 사정이 또 어디 있을 것이랴.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어머니의 장례마저
자식이 치르지 못하고 의금부 관원들과 동행하여
도원수 권율의 막하
(幕下, 거느림을 받는 지위)로 내려가야 하는
자신의 딱한 사정이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비관적인 생각까지 들도록 만들었다.
그래도 이순신은
자신을 절제하고 단속한다.------------
3. 백사 이항복의
"고 통제사 이공 유사"에 다음의 얘기가 보인다.------
공이 북변(北邊)에 있을 적에는
어떤 사람이 상(喪)을 당하고도 가난하여
분상(奔喪)하지 못하자,
공이 그 말을 듣고 불쌍히 여겨
즉시 자신이 타는 말을 풀어서 그에게 주었다.------
-->> 1583년(39세)
11월 중순에 이순신의 부친이 아산에서 작고하였는데,
북방에서 여진족과 대치 중이던
이순신은 이듬해 1월 말이 되어서야 부고를 듣고
아산으로 급히 내려가게 된다.
최전방에 근무하다보니
제대로 부모님을 찾아뵐 수 없는 처지인데,
부친의 임종조차 함께 하지 못했으니
이순신은 자식으로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
그런 효심의 이순신이기에
북방에서 상을 당한 사람이 가난하여
분상하지 못하게 되자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마음이
일었을 것이고,
자신의 말을 주어
얼른 가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 이야기의 발생 시점이 언제인지를 알 수가 없어
부친의 부고와 전·후관계를 알 수는 없으나,
평소 효심이 가득한 이순신의 행동을 보고
동료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통해
기록한 것으로 판단된다. ------------
* 추기 : 이 기회에 부모님과 자식들에게
안부전화 한 통 하시고
모처럼 가족들과 소통하세요.^^
* 이순신이 한때 군관으로 근무했던
충청병영의 진남문.
현재의 해미읍성 남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