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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서 만든 넋풀이 노래극 '임을 위한 행진곡' 탄생 |
국소남의 통기타는 영원하다 39. 광주 통키타 중흥기(Ⅲ) 김정식ㆍ김종률 |
●암울했던 시대에도 광주 통기타는 중흥시대 1970 중반
70년대 일어난 일들을 보면 △1975년 박정희 정권 긴급조치 9호 선포ㆍ유신체제의 시작 △1976년 판문점 도끼사건 △1977년 이리역 화약폭발사건 △1978년 대통령 취임(제 9대) 유신 2기 출범. 굵직한 국내 뉴스는 △1976년 양정모 올림픽 첫 금메달(몬트리올 레슬링 자유형 페더급) △신안 해저보물 인양(송ㆍ원 시대 도자기) △1977년 에베레스트 정복(세계 최고봉 8848m ㆍ김영도ㆍ고상돈) △부가세 실시 (8개 간접세 통합) △수출 100억 달러 달성ㆍ의료보험 실시….
1975년까지 당시 GNP(1인당 국민소득)가 북한이 우위에 있던 시절. 1970년대 중ㆍ후반 국내 정치ㆍ경제적 상황은 밝지 못했다. 청년문화의 상징으로 일컬어지던 통기타, 청바지, 생맥주가 젊은 청년들과 대학생들의 전유물이 돼 유행했다. 장발ㆍ미니스커트 단속하는 거리 풍경이 매일같이 도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통기타를 매고 다녀도 단속 대상이었다. 사회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게 이유였다. 말리면 더 한다 했던가. 통기타를 치는 대학생과 청년들의 모습은 공용터미널 대합실이나 완행열차 속에서 주말ㆍ휴일이면 흔히 보던 풍경이었다. 휴일의 삼등열차는 장관이 펼쳐진다. 열차 칸칸마다 통기타 소리가 울려 퍼지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대학가요제 열기 폭발 1977이후
1977년 시작된 대학가요제에 광주에서는 박문옥을 필두로 3인조(트리오)가 제 1회 대회 동상을 수상했다.(소리모아ㆍ저녁 무렵). 서울을 비롯, 지방 각 대학마다 그룹사운드 붐이 조성됐고 활화산 처럼 폭발했다. 제1회 대회 서울대 샌드 페블스가 '나 어떡해'로 그랑프리를 거머쥐자 기폭제가 됐다. 광주권 대학도 예외가 아니었다. 1977년 이후 80년대 초 많은 대학 그룹사운드가 탄생한다.
전남대 로터스, 농대 바이슨, 공대 매킨토시, 치대 CDC, 조선대 스캠프스, 캬라반, 목포대 태거스는 물론 전문대에서도 그룹사운드 물결이 거세게 일었다. 1977년 제1회 통기타 그룹 소리모아 바통을 이어받은 팀이 김정식(1978)과 김종률(1979)이었다.
●제2회 MBC대학가요제 은상 김정식(약속) 1978
김정식(세례명 로제). 노래를 통한 삶의 영성을 나누며 새만금 갯벌 살리기 운동, 사형폐지를 위한 노래마당, 심장병, 백혈병 환아를 돕기 위한 거리 공연에 적극적이었다. 장애인 단체와 공동체, 교도소, 공부방 등 사회에서 소외된 이웃을 돕기 위한 공연활동에 나섰다. 그는 카톨릭에서 말하는 사제와도 같은 심정으로 사회에 봉사하고 헌신했다.
로제 김정식이 1976년 박해종ㆍ김용숙과 함께 별밤에 입단해 방송을 타기 시작했다. 1978년 제 2회 MBC대학가요제 트리오로 참가 '약속'이란 노래로 은상을 수상한다. 그는 전남대(전자공학과)를 졸업, 국립파리음악원에서 교회음악을 공부하고 우리 신학연구소 연구위원, 카톨릭 뉴스 '지금 여기'의 편집위원을 역임했다. 1996년 민주화실천가족 협의회가 주최한 양심수 석방을 위한 시민가요제에서 '열린 감옥상(고향의 들국화ㆍ문병란 시ㆍ자작곡)'을 수상했다. 2000년에는 한국휴먼 네트워크 선정, 생활 속 신지식인으로 선정되는 등 2015년 제 32회 카톨릭 대상(문화부문)을 수상했다. 1987년부터 심장병ㆍ백혈병 환아를 돕기 위한 명동 거리공연 등 국내 카톨릭 교회에서 생활성가라는 장르를 개척했다. 현재 10여개의 음반을 내놓았고 예술가요, 희망의 노래, 동요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으로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국내에서 5000회ㆍ해외 100여 차례의 초청공연 및 강연을 해 왔다. 노래로 풀어보는 교육 이야기, 인문학이 주는 삶의 치유, 헤르만 헷세의 시로 만든 시노래 콘써트 등 음악과 인문학을 접목한 새로운 진행방식을 통해 교육현장에서 학생과 부모, 교사간 소통에 고군분투하고 있다.
●김정식, 노래하는 음유시인 명성
김정식은 비상업 대중예술인이다. 생활성가 장르를 만들어 낸 장본인이다. 생활성가는 김정식이 부르는 노래 한 부분이다. 그의 노래는 생활성가뿐 아니라 예술가요, 시노래, 희망의 노래(민중노래), 성탄 노래,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부르는 노래(동요), 연극곡 등 다양하다.
40여년 동안 600여곡을 만들고 불렀다. 팬클럽 회원들은 김정식을 노래하는 음유시인으로 부르길 주저하지 않는다. 성가가수라고 못박지 않는다. 몇 개월 전 필자에게 동영상이 하나 전달됐다. 김정식이 사고로 다리를 다쳐 보호대를 차고 병원 침대에 누운 채 딸과 노래하는 모습이 담겼다. 'If you want me' 영화 'Once'의 삽입곡을 딸과 함께 이중창으로 부른 영상이다. 김정식. 그는 '노래는 생활이고 생활은 노래다'라 외치는 듯 했다.
●김종률 '임 행진곡'탄생ㆍ배경 1982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중략/깨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앞서서 가나니 산자여 따르라' 1980년대로 넘어 오는 운동가요 흐름에 한 획을 그으며 진정한 민중가요의 효시로 일컬어져 온 '임을 위한 행진곡'. 민중가요 중 가장 많이 불리는 노래가 된지 오래다. 매년 5월이 오면 깨어나 소리치는 함성과 함께 또렷이 귓전을 파고드는 이 시대의 애창곡 '임을 위한 행진곡'. 이 노래는 광주민중항쟁 2돌때인 1982년 봄에 세상에 태어났다. 엄청난 죽음이 가져온 충격과 살아남은 자들로서 자괴감을 이겨내고자 했던 몇몇 광주사람들의 일치된 뜻에서 비롯됐다.
●넋을 '쨈매 주는' 넋풀이 노래극
'임을 위한 행진곡' 작곡자인 김종률(현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은 제작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1982년 5월 광주 민중항쟁 2주기를 앞둔 어느 날 황석영(소설가), 이훈우 선배 등 몇몇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들은 "아무리 무서운 세상이라고 하지만 2주기를 앞두고 그냥 지나갈 수는 없지 않느냐"고 했다. 이렇게 해서 광주 동운동 황석영의 집(지금의 문화예술회관 소극장 자리)에는 황석영, 김종률, 김희숙, 김은경, 오정묵, 이훈우, 전용호, 윤만식 등 광대를 비롯한 광주의 문화패들 사이에서 낯익은 얼굴 15명이 녹음기와 사물을 들고 모여들었다.
이들은 도청을 사수하다 숨진 윤상원과 들불 야학을 하다 숨진 박기순의 영혼 결혼식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있던 참이었다. 그들은 광주항쟁 때 희생된 한 청년노동자와 여대생을 가상해 그들의 넋을 '쨈매 주는' 넋풀이 형식의 노래극을 만들기로 했다. 요즘 말로 미니 뮤지컬인 셈이다. 살벌한 분위기에서 말이 새나가기 전에 일을 끝내야 했다. 오전에 만나 소품들을 준비하고 오후부터 저녁까지 대본과 노래를 짓고 연습해 새벽에 녹음을 마쳐야 했다. 작곡가 김종률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노래극 넋풀이를 위해 창작곡 8곡이 필요했다. 7곡은 이미 만들어 놓은 곡에 가사만 조금 수정해 사용할 수 있었다. 대미를 장식할 마지막 한곡이 없었다. 음악을 담당한 김종률은 암담했다. 자취방으로 돌아와 4시간 씨름한 끝에 곡을 완성했다. 그게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노래를 만들어 악보를 들고 황석영의 집으로 갔다. 기타로 반주하며 흥얼거렸더니 모두들 좋다고 했다. 이제는 가사가 문제인데 모두 힘을 합해 한두 마디씩 거들고 백기완 선생의 시에서 몇 소절 발췌해 황석영이 노랫말로 정리했다.
● 30분짜리 노래극 테이프 '광주에 살던 두 젊은 넋의 죽음과 사랑노래 이야기'
이렇게 완성된 30분짜리 노래극 테이프가 '넋풀이', 부제는 '광주에 살던 어느 두 젊은 넋의 죽음과 사랑에 관한 노래이야기'였다. 광주항쟁을 상징하는 폭풍우로 시작해 도청이 함락되던 아침을 그린 노래, 주인공들의 넋을 위로하는 '무등산 자장가'와 '용봉동 비가', 주인공이 살아있는 사람들의 풀죽은 모습을 질책ㆍ격려하는 노래와, 주인공들을 회상하는 대사 등으로 이어지다가 맨 끝에 주제곡(합창)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행진곡이란 밝고 경쾌한 것뿐 아니라 비장하면서도 희망을 주는 단조곡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임을 위한 행진곡'의 첫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주 테마는 이미 가지고 있었다. 김종률은 그날 즉석에서 듣는 이의 가슴을 복받쳐 오르게 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 뒤 '임을 위한 행진곡'은 박관현의 죽음을 계기로 1982년 가을부터 광주에 퍼지기 시작했다. 이어 서울로 상륙해 대학가를 중심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김종률이 말하는 에피소드 하나. 그가 군 휴가를 나온 1983년 봄, 연세대에 다니는 친구와 학교 앞을 지나는데 어디서 많이 듣던 노래가 들려왔다. 친구에게 물어보니 "최근 대학생들이 자주 부르는 운동가"라고 했다. 그래서 김종률이 "이 노래는 내가 만든 곡이다" 했더니 깜짝 놀랐다고 한다.
●87년 6월 항쟁 노래도 '임 행진곡'
그때 '임을 위한 행진곡'은 이미 서울에 와 있었고 1987년 6월 항쟁의 중심노래가 되었을 때 김종률도 자신의 곡을 목이 터져라 불렀다. 김종률은 1979년 제 2회 전일 대학가요제에서 '소나기'로 대상을, 같은 해 제 3회 MBC대학가요제에서 '영랑과 강진'으로 은상을 수상했다. 그 당시 최고 음반사였던 지구레코드사에서 다른 대상ㆍ금상 수상자들보다 그의 노래로 대학가 출신 최초로 독집음반을 선사 받았다. 그의 뛰어난 음악성을 인정받았다. 그는 새 날을 앞당기기 위해 또 새날이 오면 부를 노래를 준비해 놓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풍금연주
필자와 친한 친구의 남동생이 수창초교 5학년 때 김종률과 같은 반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김종률이 풍금 뚜껑을 열고 연주를 하자 반원 모두가 놀라워 하더라는 말을 건네줬다. 어릴 적부터 음악적 재능이 탁월했던 그다. 천재는 길러지는 게 아니고 타고나야 한다고 했던가.
●젓가락 한 벌처럼 광주항쟁과 '임행진곡'은 영원할 것
2017년 5월18일. 문재인 정부 탄생 첫 공식행사는 5ㆍ18 기념식이었다. '임 행진곡'의 연주나 합창이 이 때까지 얼마나 많은 논란이 있었던가. 세월이 흘렀음일까. 이럴 때도 있구나 싶었다. 참석자 모두가 맘 터놓고 부를 수 있었으니 말이다. 5ㆍ18의 영혼을 달래는 넋의 노래로, 아니 추모곡으로 이보다 더 좋은, 이만한 노래가 또 어디 있으랴. 5ㆍ18 기념곡 지정도 올해 5월 이전에 결정이 나지 않을까 싶다. 이제는 문화 예술적 가치로 계승돼야 할 때다. 뮤지컬도 선보인다고 하니 기대해도 좋겠다. 광주항쟁과 '임을 위한 행진곡'은 젓가락 한 벌처럼 우리 광주인들에게 영원히 남겨지게 될 것이므로.
<전남일보 문화기획 (39)광주 통키타 중흥기>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