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에서 큰 키
김도은(정미)
내 키는 절벽에서 떨어지면서 컸다
아니, 떨어지는 꿈에서 자랐다
누가 더 아찔하게 추락해 봤는지
분간을 재보는 일
천장이나 벽마다
야광별이 붙어있는 오늘
나는 어떤 꿈을 선호하는 걸까요
그해 여름은 줄어든 키를
다시 자라게 해보겠다고
겁 없이 철봉에 거꾸로 매달렸었다
세상을 가로지르는 일이
누군가는 상실이라 했지만, 멈추고 싶지 않았다
시큼한 오늘
악몽일까요
따끔거리며 온전해지는 무릎도 있을 테니까
바닥의 균열을 뚫고 나온 풀꽃도 있을 테니까
키가 클 때마다 소리를 질렀던 헛딛는 꿈
넘어지는 꿈을 꾼 날엔 꿈틀,
반나절 먼저 푸르게 발목이 굵어지는 키들
아이들은 울음 속에서 넘어지고, 울음을 뛰쳐나오면서
몸무게가 무거워질 테니까
악몽을 꾸었다고 말할 때마다
엄마는 내 베개 밑에
붉고도 달디 단 날짜들을 숨겼다
발돋음을 익히는 일은 미리 키가 자라보는 일
이제 잠의 밖을 굴러가 볼까요
한밤의 차단기
김도은(정미)
누전,
이 집에 물이 흐르고 있다
그도 아니라면 어느 낮과 밤 사이가 끊어져 있는 것이 분명하다
상현달과 하현달 중 어느 쪽이 먼저
두꺼비 집으로 들어갔을까
잘 웃는 사람도
두꺼비집을 열면 정전의 한때,
검은 얼룩이 남아있다
어디로든 뜨는 달과 어디에서도 뜨지 않는 달이 없었다면
서로의 엇갈린 괄호는 생겨나지 않았겠지
옆집이 옆집을 발명한 것처럼
물 흐르는 내리막도 오랜 시간이 보여준 본(本)이 되었을까
어둠 속에선 두더지과에 속하는 두더지처럼 더듬거나 음력을 열어 달을 꺼내면 몇 번씩 누전을 채비하는 마음도 계절을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들인 나무들도 다 물에 올라탄 덕분이다
물의 숨소리 인양 어둠 속 어딘가에서
똑똑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날 때
불룩해진 배꼽을 만져본다
자꾸만 떨어지는 차단기, 아직 덜 익은 자두색이거나 빨간 토마토 색깔이거나 그도 아니면 지구 마지막 날에서야 겨우 도착할 별빛은 차단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