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규어의 기함 XJ. 현행 모델은 올해로 10년차 장수 모델이다. 다소 보수적인 경쟁 상대와 달리, 날렵한 눈매와 실루엣으로 틈새를 노렸다. 그러나 결과는 저조했다. 가령, 지난해 미국 내 판매량은 1,579대에 불과하다. 본고장 유럽에선 1,099대로 더 암울하다. 참고로 메르세데스-벤츠 S-클래스는 미국에서 연간 1만5,000대 정도, BMW 7시리즈는 8천~9천 대 정도 팔린다.
국내도 상황은 비슷하다. 지난해 1~12월 XJ 전체 판매대수는 215대에 불과하다. 독일 브랜드를 제외해도 링컨 컨티넨탈(854대), 캐딜락 CT6(958대), 렉서스 LS(672대) 등 경쟁 플래그십 세단보다 턱없이 부족하다. 또한, 국산차와 비교하면 올해 1월 제네시스 G90가 1,387대, 기아자동차 K9이 1,047대로 1개월 판매량에도 못 미친다. 새 전략이 필요한 이유다.
최근 자동차 매체 <카 매거진>에 따르면, 재규어는 차세대 XJ를 준비하며 노선을 바꿨다. 이제 S-클래스와 7시리즈 등 플래그십 세단과 대결하지 않을 예정이다. 대신, 새로운 MLA(Modular Longitudinal Architecture) 플랫폼을 밑바탕 삼아 순수 전기차로 거듭날 전망이다. 경쟁상대로 테슬라 모델 S와 포르쉐 타이칸, 아우디 e-트론 GT를 지목했다.
하루아침의 반짝 도전은 아니다. 이미 재규어는 전기차 경주 대회인 포뮬러 E에서 꾸준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또한, I-페이스를 통해 프리미엄 전기차 시장에 발을 디뎠다. 오랜 시간 가꿔온 XJ의 헤리티지에 첨단 전동화 전략을 곁들이면, 반등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아직 S-클래스나 7시리즈 등도 플러그 인 하이브리드(PHEV) 외에 순수 EV 모델은 없는 까닭이다.
또한, 전통적인 자동차 제조사가 제대로 만든 전기차라는 점에서 좋은 반응을 이끌 수 있다. 외신에 따르면 차세대 XJ EV는 100㎾h 리튬-이온 배터리를 얹어 I-페이스보다 주행거리를 키울 전망이다. 재규어 디자인 총괄 이안 칼럼은 차세대 XJ의 크기를 줄일 예정이며, 뒷좌석보단 운전대가 탐나는 차로 빚을 계획이다. 경쟁상대로 포르쉐 타이칸을 지목한 이유다.
최근 I-페이스를 시승하며 재규어의 전기차 기술력에 감탄한 바 있다. EV 전용 플랫폼은 휠베이스를 키워 차체 뱃바닥에 90㎾h 배터리를 얹었고, 뼈대에 알루미늄 단조를 심어 비틀림 강성을 든든하게 키웠다. 두 개의 전기 모터가 각각 앞뒤 차축에 자리해 네 바퀴를 굴리며(AWD), 최고출력 400마력을 뿜는다. 1회 충전으로 최대 333㎞까지 달릴 수 있다.
그러나 보완할 부분도 분명 있다. 가령, 주행모드는 각 모드별 차이가 크지 않으며, 회생제동 시스템은 선회 중 때때로 좋은 주행질감을 훼손한다. 다소 수고스러운 공조장치 조작버튼과 디스플레이도 좀 더 직관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 이를 빼면 I-페이스는 브랜드 첫 EV임에도 불구하고 높은 완성도를 자랑한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청각경고 시스템도 눈에 띈다.
한편, 같은 영국 출신 애스턴 마틴도 4도어 전기 스포츠 세단인 래피드 E를 개발하고 있다. 최고출력 602마력을 내며 1회 충전 주행가능 거리는 200마일(약 322㎞) 이상을 목표로 잡았다. 영국 웨일스 남부에 자리한 애스턴 마틴 공장에서 생산하며, 올해 말 고객 인도를 시작할 예정이다. 래피드 E 역시 포르쉐 타이칸과 테슬라 모델 S를 경쟁상대로 지목했다.
또한, 메르세데스-벤츠는 전기차 브랜드 EQ의 두 번째 타자로 4도어 세단 EQS를 준비 중이다. S-클래스급 기함이지만, 차체 크기는 CLS와 비슷하며 새로운 전기차 전용 플랫폼을 통해 태어날 전망이다.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자리한 메르세데스-벤츠 공장에서 생산하며 이르면 내년 출시할 예정이다. 플래그십 세단의 EV 도전, 앞으로의 행보에 관심을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