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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백성을 내 보내라
출 5: 1-3
내 백성을 내 보내라
출 5:1~3“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가서 바로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그들이 가로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에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가기를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온역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아멘
오늘 우리는 말씀을 접하는데 있어서, 많은 이해가 필요할 것이며,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겸허한 마음으로 이 예배에 임해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는 것은 엄청난 보화를 얻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깨달음에도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유형이 있다. 우선 보기만 해도 깨닫는 사람이 있고, 듣고 깨닫는 사람이 있으며, 매 맞고 깨닫는 사람, 그리고 잃어버리고 깨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잃어버린 경험이 없이는 돈 십원의 귀중함을 깨닫기란 쉬운 일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어느 분이 길을 가다가 지갑을 몽땅 잃어버렸답니다. 그래서 집으로 전화를 해야겠는데 20원이 없어 쩔쩔매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해보았다는 것입니다. 잔돈이 없기도 하거니와 바쁜 걸음걸이를 멈추기가 귀찮아서 많은 사람들이 그냥 못들은 척하고 지나치곤 해서 20원을 얻는 데 그렇게도 힘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제야 10원이 귀한 것을 깨달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대체로 잃어버린 다음에야 그 가치를 깨닫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은 편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죽을 지경이 되어서야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러다가도 조금만 사정이 나아지면 또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저 죽을 지경이 되어야 기도하고. 죽을 지경이 되어야 교회도 나오고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은 항상 죽을 지경으로 살아야 제대로 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좀더 심한 사람은 죽은 다음에야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어리석은 부자는 살아생전에 끝내 깨닫지 못하고 죽어 지옥에 떨어져서 아브라함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서야 깨닫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믿었어야 했다고 지옥에서 깨닫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사실 지옥에까지 가서야 깨닫게 될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느 쪽에 속합니까? 보고 압니까? 듣고 압니까? 아니면 죽을 지경이 되어야 압니까? 혹시 아직도 깨닫지 못했습니까?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깨닫지 못하면 평생 어둡게 살 수밖에 없다. 깨닫는 것은 엄청난 수확입니다. 오늘 우리는 영적으로 잘 소화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로왕은 사단 마귀 적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보고, 모세와 아론은 두 증인의 모형으로 봅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언약하신 기간이 마치게 될 때에 모세와 아론을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다. 앞으로 하나님께서는 대환난 전반에 모세와 엘리야와 같은 권세있는 두 증인을 보내어 바빌론 음녀 교권 밑에서 신음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출하여 내실 것이다.(계 18:4)
이집트 역사의 종말은 곧 음녀 바빌론의 세상이 종말을 뜻하고 있다. 이집트에서 3일 길은 대환난을 7년으로 본다면 전 3년 반의 모형으로 보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의 인도로 광야에 나와서 하나님의 절기를 지켰던 것처럼 영적 참 이스라엘인 교회는 용과 짐승의 박해를 피하여 광야 예비처로 갈 것인데, 거기서 3년 반 동안 하나님의 양육보호를 받을 것이다.(계 12:6, 14), 광야는 도인의 도장(道場)이요, 신앙의 훈련장이다. 광야의 복음을 모르는 자들은 참 기독교의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기독교는 화려한 예루살렘의 궁궐의 종교가 아니다. 황막한 광야의 종교이다. 모세의 40년 광야와 예수님의 40일 광야는 같은 도맥입니다. 세례요한의 광야와 두 증인의 광야도 같은 도맥이다. 이 시대의 우리 한국 목회자는 화려한 예루살렘 궁궐 안의 제사장형의 사역자들이 되지 말아야 하며, 광야 목자형의 사역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시대에 우리 목회자들은 바로 왕 밑에서 정권에 아부하는 목자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며, 광야에 나가서 하나님의 절기를 바로 지키는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양떼들을 먹이고 살릴 수 있다. 그러한 목자의 길을 가려면 다음 네가지 사단의 술책을 이기지 않으면 안된다.
1. 혼합주의 술책을 이겨야 한다.
※ 너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출 8:25절)는 것이다.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는 바로의 말은 혼합주의 바빌론 사상이다.‘바빌’의 뜻은 이것 저것을 섞는 혼합을 말해준다. 하나님은 절대 성별을 요구하십니다. 성별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선택하신 목적이요 뜻입니다.(레 12:44~45절) 하나님은“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 1:16)고 말씀하셨다. 성별은 하나님과 인간 관계에서 가장 선행적인 요긴한 요건이다. 말세에 모든 교회는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여 변질된 붉은 짐승과 짝하여 음녀가 되고 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이는 처소가 되고 말 것이다.(계 18:2),
우리 하나님은 이처럼 세속화된 바빌 도성에서 그 백성을 부르고 계십니다. 계 18:4절“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죄의 재앙들을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별된 백성들이 그 악한 죄에 참예하지 않고 그들의 받을 재앙을 받지 않기 위해서 그 곳에서 속히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저 이집트의 파라오 왕은 앞으로 말세에 나타날 짐승 적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타락한 음녀 바빌 교회는 이 짐승 적그리스도와 타협하고 666의 짐승표와 우상을 만드는 일을 조작할 것이다. 그들은 또한 예수님의 참 증인들을 죽이는 일에 앞장 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계 17:6절)
오늘 이 시대 말에 우리 사명자들은 이 짐승 음녀의 비밀을 깨닫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내가 사는 것이다. 철장권세로 무장하고, 말세의 종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 음녀 바빌 속에서 구출해야 합니다. 이것이 말세의 두 증인의 사명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바로가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고 했을 때,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거절했다. 그것은 곧 이집트 사람의 미워하는 행위가 되기에 그렇다.(출 8:6). 우리가 이집트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올바로 섬길 수 없는 것은 첫째 그들과 예배의 의식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상과 신과 하나님을 우리는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오늘 우리가 섬길 자를 바로 택해야 합니다. 할렐루야!
2. 세속주의 술책을 이겨야 한다.
※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희생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출 8:28절)
“너희가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는 말은 바로의 세속주의 술책이다. 세상 끝날에 교회들이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고, 미온적인 상태로 타락하게 되는데 그 원인은 바로(사단)의 두 번째 술책에 있다는 것이다.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고 미온적인 중간 상태는 예수님의 구미에 맞지 않는 모든 악의 온실이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모든 고질적인 병은 미온적인데서 시작된다. 예수님은 교회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나를 택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열심을 내어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뜨거운 것을 원하십니다. 차겁거나 미지근한 것은 원치 않습니다.(계 3:15절), 바로 왕은 이스라엘이 애굽에 그대로 머물러 있기를 원하고 바로가 섬기는 종교와 함께 섬기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바로의 첫 번째 술책에 실패해서는 안된다. 만일 여기서 실패를 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앙의 퇴보를 가져올 것이며, 그렇게 되면 그들의 몸은 애굽에서 탈출은 했지만 애굽을 그리워할 것이요, 그들의 세속화 술책에 말려들어서 몸은 떠나 있지만 그러나 애굽에 머물러 있는 상태와 같다는 것이다.
애굽을 멀리 못 떠나게 하고 근접에 있게 한 것은 이스라엘이 앞으로 광야에 나가서 어려운 시련과 고난이 엄습해 올 때 그 가나안을 포기하고 쉽게 애굽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바로의 술책이 담겨져 있다. 오늘 우리가 앞을 향하여 가나안을 향하여 가는 꿈을 상실한다면, 현재 당하는 현실의 어려운 고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쉽게 그 고생스러웠던 애굽을 동경하고 또 다시 그 곳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요인이 되게 하는 것이다. 바로는 이 인간의 심리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광야에서 희생을 드리되‘너무 멀리 가지 말라’는 것이다. 이 말은 애굽을 조금 떠났다가 곧 다시 애굽으로 돌아 오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모세는 이 바로왕의 술책에 속지 않고 적어도 3일 길은 가야한다고 했다. 애굽에서 광야 3일 길은 가나안 절반의 여정이다. 광야 3일 길에서 이제 다시 돌아가는 거리보다 가나안으로 전진하는 편이 더 낳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바로에게 3일 길을 가서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3. 인본주의 술책을 이겨야 한다.
위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모세는 바로의 두 번째 술책도 물리치고 남녀노소와 우양을 모두 이끌고 가겠다는 것이다. 그러자 바로왕은 너희 어린 것들을 보내면 여호와를 너희와 함께 함과 일반이기 때문에 그것은 불가하니 너희 남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는 것이다. 출 10:10~11“바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와 너희 어린 것들을 보내면 여호와를 너희와 함께하게 함과 일반이니라 삼갈지어다 너희 경영이 악하니라 11 그는 불가하니 너희 남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이것이 너희의 구하는 바니라 이에 그들이 바로 앞에서 쫓겨나니라”아멘.
이는 한마디로 인본주의 술책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바로는 인간의 애정으로 애굽의 탈출을 처음부터 봉쇄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다. 만일 바로의 말대로 남자들만 광야에 나온다고 했을 때 이것은 반쪽 구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몸은 애굽에서 빠져 나왔지만, 그러나 처와 자식들이 애굽에 남아 있다. 그래서 처자식들이 생각나서 여전히 애굽을 동경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온전한 예배가 이루어질수도 없다. 바로왕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술책에서 실패하게 되자 이처럼 인간의 애정을 이용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예배까지도 방해하려는 술책을 썼던 것이다.
노아가 처와 아들들과 며느리들을 데리고 방주 안으로 들어갔던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다 가족들이 구원받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식구들은 바로 왕 밑에서 신음하게 만들고 나만 혼자 광야에 나가서 예배드리는 것은 온전한 예배가 되지 못하고, 부분적 예배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걸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방해되지 않도록 특별히 유의해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기분과 감정에 따라서 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이 인간 애정 때문에 방해 받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할렐루야!
4. 바로의 물질주의 술책을 이겨야 한다.
출10:24“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 양과 소는 머물러두고 너희 어린 것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아멘.
바로는 이제 물질을 이용해서 술책을 씁니다. 남녀, 노소 다 데리고 가야 하겠다는 모세의 말에 바로왕은 그러면 어린 것들은 함께 가도록 해 줄 것이니, 그 대신 양 떼들과 소 떼들은 다 두고, 가라는 것이다. 양들과 소들은 구약 시대에는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재산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소중한 제물이었다. 제물이 없는 제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광야에 나가면 소 떼와 양떼를 구하기도 힘들고 반면에 하나님 앞에 온전한 희생을 드리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바로 왕은 이 약점을 이용해서 양과 소는 애굽에 두고 사람만 가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최선의 예배 행위가 물질 때문에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흔히들 들려오는 예기입니다만 교회에 나가도 돈이 있어야 예수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바로 왕의 이 네 번째 술책에 걸려 넘어진 자들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없어서는 안될 이 물질이 하나님께 바쳐질 때만이 가장 귀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우리의 가장 소중하고 귀한 소와 양을 애굽에 두고 나가게 될 때, 그것은 바로 왕의 소유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물질이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을 때, 그것은 사단에게 드려지게 된다는 것을 우린 명심해야 합니다.
1)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
2)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3) 너희 남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4) 너희 양과 소는 놔두고 두고 가라.
애굽을 탈출하지 못하게 하는 이 네가지 술책에 우리는 속아서는 안된다. 그리고 여기 사단의 네가지 술책을 거절할 줄 알 때 종말에 참된 하나님의 종들이 될 수 있다. 많은 성도들이 인정이나 혹은 물질 때문에, 아니면 명예와 권세욕과 세속적 안일 때문에 귀중한 성도의 사명을 거절하고 세상으로 미끄러지는 자들이 너무도 많다. 세상과 타협하는 일은 간음하는 여자와 같다(약 4:4)고 했습니다. 혼합주의, 세속주의, 인본주의, 물질주의, 이 네가지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또한 사단 마귀의 4대 술책이라는 것도 깨달아야 합니다.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사단의 술책을 능히 이겨내는 승리자가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라나타···············오직 예수 아멘.
하나님의 백성과 예배
출 5: 1-3
오늘은 우리교회가 창립 54주년을 맞이하는 주일입니다. 지난 54년 동안, 하나님은 우리교회역사의 이끌어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한 교회에 모여서 같은 지체로 예배드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교회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사람은 성도들이 매 주일마다 교회에 모여 예배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불교신자들은 일년에 한번, 사월 초파일 하루만 가도 되는데, 왜 그리스도인은 매 주일 가는지 참 이해가 안된다고 말합니다. 또 심지어 예수 믿는 사람들조차도 ‘일주일에 한 번, 주일 예배만 드리면 되지, 무슨 주일저녁, 수요일 저녁, 새벽기도, 금요심야기도회에 까지 나가냐? 적당하게 해라’라고 말합니다. 교회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교회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 만나는 곳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사실 교회가 무엇인지. 예배가 무엇인지를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 모여 하나님께 예배하는 장소입니다. 교회의 목적과 기능을 말할 때 제일 먼저 말해야 할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만약 교회가 예배를 잃어버린다면 그 교회는 단지 건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예배가 있는 교회가 진정한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누구입니까?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께 예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본질과 하나님의 백성됨의 본질은 다 예배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 성령이 임하는 예배가 사라지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배를 소중히 여기지 못하는 것이 믿음생활의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본질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배가 지겹다’ ‘예배 때문에 피곤하다’라고 말합니다. 또 ‘간단히 예배드리자’ 라고 말합니다. 이런 말들은 예배가 기쁨이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분들은 예배가 끝나는 시간이 조금만 늦어져도 시계를 보게 되고, 찬송가가 4절 짜리만 되어도 신경 쓰입니다. 실제로 그런 교회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미국 어느 교회 설교단에 조그만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고 하지요. “설교를 짧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다시 이 강단에 청함을 받을 것임이요”
제자 훈련 교재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40대 남자가 60대 어머니에게 예배드리러 가기 싫은 3가지 이유를 말했습니다. 첫째 늦게까지 잠자고 싶기 때문에. 둘째 성가대의 불협화음이 듣기 싫어서, 셋째 장로님의 기도가 너무 길어서,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어머니가 아들에게 그래도 교회가야 하는 이유 3가지를 말했습니다. 첫째 예배는 사람보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러 가는 것이기에, 둘째 예배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기 때문에, 그리고 셋째 너는 그 교회의 담임목사이기 때문에. 참 의미심장한 이야기입니다.
왜 가인이 실패의 사람이 되었습니까? 예배의 중요성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아벨이 믿음의 반열에 서게 된 것은 예배의 비밀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예배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비밀이었습니다. 에서와 야곱에 대해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알아야 합니다. 에서가 실패한 것은 윤리적인 문제 때문이 아닙니다. 성경은 아주 간단하게 한마디를 합니다. 그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겼더라” 성경에서 말하는 장자의 명분이란 재산권 이전에 예배를 드리는 권한을 말합니다. 반면 야곱은 인격적으로는 좀 문제가 있었어도 예배드리는 부분, 즉, 하나님에게 복받아야 된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생을 걸었습니다. 그것이 에서으이 실패와 야곱의 축복의 분기점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로 서는 것이 출애굽의 본질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모세가 애굽에 도착하여 드디어 바로 앞에 서서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그런데 모세의 메시지는 우리가 기대했던 그런 대단한 메시지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제 내 백성을 그만 탄압하고 자유케 하라” 좀 이 정도는 말해야 하는데, 그런 말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메시지입니까? 1절을 함께 보십시다.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가서 바로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모세가 바로에게 무엇이라고 말하지요?. ‘광야에서 절기를 지키도록 내 백성을 내 보내 달라’는 것입니다.
모세의 이 메시지는 출애굽의 어마 어마한 사건과는 좀 다른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어떤 성경학자는 ‘바로 앞에서 정말 하고 싶은 말을 숨기고 겉으로 다른 이유를 내세운 것으로 모세가 정직하지 못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모세에게 그렇게 말하라고 했고, 모세는 그 말씀대로 전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모세에게 바로에게 가서 광야에 나가서 절기를 지키도록 내 보내달라고 말하게 했을까요? ‘내 백성을 내보라. 가나안으로 가서 거기서 한 나라를 이룰 것이다. 안보내면 그냥 안두겠다’ 라고 하지 않고 광야에서 절기를 지키도록 내보내라고 했을까요? 우리는 오늘 모세의 이 요구를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의 요구는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예배의 특권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를 달라’고 하지 않고 ‘예배하게 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노예에서 해방되는 것은 참 중요한 것입니다. 자유인이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래서 패트릭 헨리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고 했습니다. 일제시대에는 대한의 자주 독립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바쳤습니다. 정치적인 자유도 그처럼 중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유를 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드리게 해 달라’고 요구하게 합니다. 참 이상하지요.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관심을 읽을 수 있습니다. 노예상태에서 해방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지만 사실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의 진정한 이유는 정치적인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께 예배하는 백성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출애굽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애굽에 수많은 신들이 있고 제사들이 있지만 그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것을 섬기거나 우상에게 절하는 그런 백성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께 예배하고 섬기는 백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백성을 내보내어 예배하게 해달라고 요구하게 한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해방되었다고 삶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변화는 제도의 변화나 사회구조의 변화에 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예배, 섬기는 것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변화는 섬기는 것이 바뀌는 것입니다. 예배가 바뀌는 것이 운명과 삶이 바뀌는 것입니다. 우상을 절하던 사람들이 더 이상 우상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것이 가장 큰 삶의 변화이고 가장 큰 축복입니다. 출애굽의 궁극적인 비전과 목적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애굽에서 사람을 섬기는 노예가 아닙니다. 우상에게 절하고 우상들을 두려워하는 자도 아닙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로 예배의 대상, 섬김의 대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구원은 섬기는 대상이 바뀌어지는 것이지요.
지난 주에 한 분이 우리교회 나오면서 집안에 있던 것들, 염주, 부적, 이상한 그림들을 다 버렸습니다. 어느 권사님이 이 집에 심방하고 다 떼어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 분의 삶이 하나님께로 돌아왔다는 말입니다. 제가 서울에서 목회할 때 한 가정이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이 섬기는 것을 바꾼 것이지요. 이 분들은 종로 4가에서 금팔찌를 세공했습니다. 처음에는 돈을 잘 벌었는데 점점 힘들어 지기 시작하자 이들은 섬길 자를 찾았습니다. 누굴 찾아갔는가 하면 무당을 찾아갔습니다. 부적을 몇 백만 원짜리 사서 집안에 부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섬긴 것은 헛된 우상에 불과했습니다. 점을 치고 묻고, 그리고 굿을 하고 액운을 없앤다고 했지만 결국 그들은 엄청난 빚에서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은 너무 힘드니까 날마다 술 마시고 폐인이 되다시피 했습니다. 완전히 절망에 빠진 것입니다. 하루는 주일 예배를 마쳤는데 이 사람의 누나가 우리교회 집사였는데 자기 동생을 살려달라고 했습니다. 점심도 먹지 못한 채 이 분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왜 예수를 믿어야 되는지를 말했습니다. ‘예수 믿어야 될 6가지 이유’를 말한 것입니다. 그날 이 분들이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영접했습니다. 섬기던 것을 바꾸기로 결단한 것이지요. 그리고 집안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부적들, 은가시나무, 북어대가리(?)와 실뭉치를 다 떼어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이후 이 집에 놀라운 축복을 주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는 너무 중요합니다. 살아있는 예배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꿉니다. 한 민족의 역사를 바꾸고, 삶을 치료합니다. 이스라엘의 변화는 바로 섬기는 것이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예배는 이스라엘의 본질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 만나는 살아있는 예배가 우리의 삶의 한 가운데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배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배에 생명을 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오늘 창립 54주년 기념 주일을 보내면서 예배를 새롭게 회복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광야에서 예배드려야 합니다.
예배를 회복하기 위해 우리가 본문에서 제일 먼저 보아야 할 단어는 “광야”라는 단어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보내어 예배하게 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광야에서’ 예배드린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신앙의 모티브입니다. 지난 수요일 심야기도 시간에 오정석 선교사가 간증을 하면서 기도제목을 함께 나누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선교사의 생활에서 광야를 경험하게 해달라고 기도요청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광야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험한 장소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맞습니다. 성경적으로 본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가장 가깝게 체험한 장소가 바로 광야입니다. 가나안에 들어왔을 때보다 그리고 애굽에 있을 때보다 그들에게 있어서 광야는 하나님 체험의 장소였습니다. 바로 왕은 단순히 예배드리는 일이면 애굽 땅에서 해도 되지 않느냐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굳이 광야로 나가야 된다고 말합니다. 왜 하필 광야입니다. 왜 애굽 땅에서는 예배가 안됩니까?
혹시 성지순례를 다녀오신 분은 알 것입니다. 광야는 황폐한 땅입니다.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적막한 광야입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광야만 계속됩니다. 변화가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광야를 지나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아니 그들이 할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농사도 못 짓고, 장사도 못했습니다. 놀러갈 데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오직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하나님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일, 하나님께로 자신의 삶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출5:1을 한번 보십시오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라고 말합니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광야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 앞에 서기에 가장 적절한 장소였습니다. 애굽이라는 문명의 한복판, 세속의 한복판에서는 하나님을 경험하기 힘듭니다. 애굽에서 여전히 물질의 노예로 살면서, 세속의 노예로 살면서 하나님 앞에 서겠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애굽에서 벗어나서 적막한 사막 한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저는 오늘 예배가 바로 광야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속의 한복판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광야처럼 비우고 오직 하나님에게 집중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다가 만나가 내리는 것을 경험하고, 그러다가 바위가 터져서 샘물이 솟아나는 기적을 체험할 것입니다. 애굽이라는 세속 한가운데서 경험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이 바로 그 광야에서 일어났습니다. 구름기둥이 나타나고 불기둥이 나타나서 그들의 삶을 인도했습니다.
동시에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 광야와 같은 상황, 앞뒤를 둘러보아도 소망이 없고, 많은 문제들만 있는 환경에 처한 분이 있다면, 그래서 삶이 광야 한 가운데 있는 것처럼 적막하고 힘들다면 기억해야 합니다. 불신자들은 그런 상황에 들어가면 자살하려고 할 것입니다. 아무 희망도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런 상황에서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광야를 만나거든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배는 절기입니다.
두 번째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절기’라는 단어입니다. 계속해서 1절을 보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절기를 지킨다는 것은 예배에 대한 다른 말입니다. 절기는 다른 말로 축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기를 지키라는 것은 축제를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절기의 의미를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절기는 언제나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과거 지향적인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지향적인 의미입니다. 과거 지향적이란 하나님께서 이미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감사를 말하는 것이고 미래 지향적이라는 것은 과거와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대한 감사와 미래에 대한 기대가 바로 절기의 중요한 의미입니다. 유월절이 무엇입니까? 애굽에서의 구원에 대한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동시에 유월절 절기를 지키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래에도 동일하게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보호하고 지켜주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감사와 기대는 기쁨과 찬양으로 표현되어 졌습니다. 절기 때만 되면 그들은 기뻐서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 당신의 백성에게 베풀어 주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대가 그들의 가슴에 가득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란 감사와 찬양입니다. 감사와 찬양은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감사와 찬양이 없는 예배는 있을 수 없습니다. 보통 한국 교회의 예배에 대한 이미지는 거룩함, 경건함입니다. 눈 지그시 감고, 옆 사람 쳐다보지 않고, 심각하게 인상 쓰고, 굳은 표정으로 예배드립니다. 아멘도 크게 해서는 안되고 조용조용하게 예배드립니다. 예배 마치고 교회를 걸어 나올 때도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걸어야 합니다. 이런 것이 거룩한 예배라고 우리는 생각해 왔습니다. 아마 이런 것은 유교적인 영향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오늘 성경은 예배를 축제라고 말합니다. 조용조용한 것이 아닙니다. 축제에는 웃음이 있고 감동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배에는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기쁨의 눈물, 통회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웃든지 울든지 해야 참 예배입니다. 그 감동의 물결에 도둑과 강도들이 회개하고 가정이 바뀌고 술집이 문을 닫고 도시에 깡패들이 사라지고 창녀들이 없어지고 역사가 완전히 변화되는 일, 이것을 우리는 부흥이라고 말합니다.
월드컵 때 우리나라가 4강 신화를 이루자 많은 사람들이 울고 웃고 소리 지르고 난리 났습니다. 감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로 얼싸안고 기뻐 뛰었습니다. 옆에 사람이 누구라도 상관없습니다. 그냥 좋았습니다. 어떤 분은 온 가족이 함께 축구구경을 하다가 한국이 골을 넣고 승리하자 옆에 있는 사람 붙잡고 뛰었는데 알고 보니까 시동생을 붙잡고 뛰었다나요? 더 놀라운 것은 범죄율이 급속히 떨어졌습니다. 강패들도, 강도들도, 도둑도 다 사라진 것 같습니다. 교통사고도 줄어들었습니다. 온 국민이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온 국민이 함께 감격했기 때문입니다. 예배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속으로부터 폭발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감격과 감동이 있습니다. 그래서 갈등도 사라지고, 미워하는 자고 사라지고, 원수도 없고, 그냥 누구나 붙들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고, 함께 축복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어느 선교사님의 간증에 보면 한번은 한 흑인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도저히 설교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설교자보다 청중들이 더 많은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설교 한마디가 끝나면 여기 저기에서 "Amen, praise the Lord, O, Jesus Christ, Halleluah, Thanks God...“ 등등 처음 설교를 시작할 때는 사람들이 다 앉아있었는데, 설교가 계속되는 동안 이 사람이 일어나고 저 사람이 일어나고, 일어서서 같이 떠들고... 이 선교사님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어떻게 설교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예배가 절기, 축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배는 희생입니다.
우리가 보아야 할 세 번째 단어는 ‘희생’입니다. 3절을 함께 읽어 보십시다. “그들이 가로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 나셨은즉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에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가기를 허락하소서” 여기에 보면 희생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것은 예배에 필요한 제물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예배 때마다 제물을 드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주로 어린 양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피를 뿌려 죄 사함을 받았고 번제로 그 제물을 태워 삶을 헌신하는 예표로 삼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희생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께 헌신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는 더 이상 어린 양이라는 제물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제단인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전 인류를 위한 거룩한 대속의 제물로 드렸습니다. 예수님이 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죄사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예배마다 희생 제물 되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보여 져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 전에 성막에 대해 배울 때, 제 마음속에 잊을 수 없는 한 가지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분향단에 대해서 배울 때였습니다 그것은 분향단에 향을 피울 때 반드시 번제단, 즉 희생제사가 드려진 바로 그 번제단의 불로 향을 피워야 했다는 것입니다. 레위기 10장에 보면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다른 불로 향을 피우다가 그만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서 두 사람을 태워버렸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희생을 의미하는 번제단의 불로 향을 피워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예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의 중요한 요소가 우리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 번제물로, 마치 어린양처럼 우리의 삶을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12:1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몸을 하나님께 희생으로, 곧 제물로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산제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예배는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 헌신하는 것입니다. 마음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TV앞에서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컴퓨터 앞에서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내 몸과 내 삶을 제물로 드리는 헌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예배를 단지 설교 듣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설교시간 시작 전에만 오면 안 늦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설교가 끝나면 그냥 나가버립니다. 아닙니다. 예배에 있어서 설교도 너무 중요하지만 헌신하는 것, 헌금을 드리고 우리의 삶을 드리는 희생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시간에 헌금이 있고, 헌신과 결단의 기도를 하는 시간도 있습니다.
우리들은 어떤 예배를 드립니까? 우리교회 예배가 축제가 되고 희생이 되고 있습니까? 제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참된 예배를 경험한 사람들, 그들이 역사를 바꿀 수 있고, 하나님의 부흥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삶을 바꾸는 것입니다. 예배를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가슴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이 시대에는 예배가 살아있는 교회가 하나님께 쓰임 받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54주년 기념주일에 우리 교회는 예배를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예배드리는 교회, 그런 예배 자들이 모인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사명을 받은 자라면
출 5: 1-3
사람은 자기의 분수와 주제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자기가 앉아야 할 자리와 설 자리를 잘 구분 할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는 일이 옳은 일인지 아니면 옳지 않은 일인지 분간 할줄 알아야 피할일은 피하고 싸울일은 싸우고 목숨을 걸 일이 있으면 목숨을 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확연히 달라진 모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미디안 광야]에서의 모세는 그렇게 심약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명을 말씀하시자 '제가 그것을 어떻게 할수 있습니까?' '저는 그만한 인물이 못됩니다.' 하면서 극구 부인을 하며 회피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연약하고 그렇게 자신의 무능함 때문에 고민하던 모세가 애굽에서는 달라져 있습니다. 바로 앞에 나선 그의 모습에 당당함이 있습니다. 당당하게 나서서, 하나님의 명령대로 백성을 보내주기를 요구하고 있는 모세입니다.
지금 한 순간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모세는 사명의 길을 따라 애굽으로 들어온 그 이후로 한 번도 심약해 보이거나 마음이 흔들리거나 후회하는 모습 따위를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사실 지도자의 자리는 외롭고 힘겨운 자리입니다.
자신의 속마음과 감정을 그대로 표현할 수 없고, 마음이 위축 될 때에도 그 마음의 연약함을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 것이 지도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지도자라 할지라도 뒤따라오는 사람들이 흔들리면 이끄는 사람으로서는 참 힘이 듭니다. 흔들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그 이후로 백성들이 작고 큰 고통들을 참지 못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며 애굽을 그리워 할 때도 전혀 연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자리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제는 자신의 자리가 장인의 양이나 치는 미디안의 목동이 아닌 것입니다.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구출하기 위해 애굽으로 [보내심을 받은 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전달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대사로 지금 바로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지난해 자매교회 교역자 부부 경주 코오롱 호텔 초청 위로회에서 개척 교회목사님이 사모님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 한 부분입니다.
둘째를 낳고 젖이 나지 않아 일주일 동안 우는 아이 안고 밤낮을 애태우면서도 남편 잠 설치면 새벽예배 지장 있다며 추운 겨울 건너방에서 둘째를 안고 토닥거리며 긴 겨울밤을 지새울 때… 이웃교회 부흥회를 참석했다가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우유를 개에게 주는 것을 보고 나는 40리 길을 울며 흐르는 눈물을 훔치면서 집으로 돌아 왔다오. 그 우유 한 숟가락만 있으면 우리 둘째 배부르게 먹이고 당신 또한 오늘밤에 푹 잘 수 있었을텐데, 생각해보니 흐르는 눈물이 멈추어 지지 않터구려. 집에 도착했을 때 당신은 나의 눈이 왜 그렇게 붉으냐고 물을 때 나는 피곤해서 그렇겠지 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소.
나는 이 대목을 읽을 때 나의 눈에서 눈물이 평평 솟아지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돈으로 나의 가정에 개에게 우유를 먹이는 것이 무슨 잘못이 되겠느냐고 반문 할지 모르지만 개척교회 목사 가정에 우유를 못먹여 배고파우는 자식을 보며 마음 아파 눈물 흘리는 부모의 마음을 어찌 알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전해주고 싶어하는 예수님을 그들의 눈에 어떻게 보여 줄 수 있겠습니까?
내 모습을 보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이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리의 모습을 보며 예수를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보며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까지도 평가를 해버리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싫던 좋던 세상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의 편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앞에서 우리가 어찌해야 할 것인가는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1,"주님 말씀하옵소서 종이 순종 하겠나이다 " 라는 삶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꺼낸 첫마디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1절中)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는 이들의 모든 행동의 이유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나도 말합니다]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에게 '지금 내가 당신에게 요구하는 민족해방의 요청이 단순한 민족적인 항거나 인간적인 시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니 나는 절대적인 명령에 순종할 뿐입니다.'라는 암시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제 마음대로 하는 대사는 대사가 아닙니다.
대사는 본국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본국에서 지시하는 대로만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는 그 말씀대로만 해야합니다. 우리의 본국인 하나님 나라에서 전달되는 메시지에 따라서만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불의한 세상의 권력자 앞에서 바른 말을 한다는 것은 굉장한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특히 그 권력자에게 온갖 힘과 전쟁, 피흘림을 통하여 얻게된 권리를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나 지금 죽고 싶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나 같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바로가 그렇게 쉽게 모세의 말 한마디에 맥없이 자유를 주겠습니까?
어쩌면 현실적으로 볼 때 모세의 이 요구는 실현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일을 바로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모세]는 바로의 분노 속에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권능과 말씀만 의지하고 나가 담대하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바로 앞에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우리를 둘러싼 영적인 현실이 심각함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 시대를 향하여 던져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저 내 생활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신앙생활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도의 제목도 그저 나를 위한 것이 전부입니다. 그리고, 그런 외면 속에서 그리스도의 빛과 소금은 그 맛과 밝음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제는 모세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품고 보내시는 곳으로 가야합니다.
가서 말씀을 던져야 합니다. 세상의 어두운 곳에, 불의한 곳 죄악이 성한 곳에,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던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 믿음으로 던진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말과는 달리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 프로이센의 왕이었던 [프레데릭] 대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기독교 신앙을 비웃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총 사령관인 [본 질랜드]는 충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군대 장관들이 모두 모여있는 자리에서 프레데릭 대제는 언제나 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상스러운 농담을 시작했습니다. 왕의 농담에 신하들은 깔깔대고 웃음보를 터뜨렸습니다. 그러자 [본 질랜드]는 엄숙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무겁게 입을 열었습니다.
"폐하께서는 제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시리라 믿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폐하를 위해 수많은 전쟁을 치렀으며, 서른 여덟 번이나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제 저는 늙을 대로 늙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머지않아 폐하보다 더 위대하신 한 분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 분은 죄로부터 나를 구하신 능력의 하나님으로서 방금 폐하께서 모욕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제 저는 이 자리를 떠나면서 폐하의 충실한 장군으로서가 아니라 자기 구주를 사랑하는 한 늙은이로서 폐하께 마지막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이렇게 본 질랜드가 정중히 하직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물러나려 하자 프레데릭 대제가 떨리는 목소리로 "본 질랜드 장군, 나를 용서하시오! 나를 용서하시오! 나를 용서하시오!" 하면서 용서를 구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이 담대하게 하나님 편에 서서 마음에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면, 그 능력의 말씀에 의해서 죄인의 마음이 뒤집어지고 마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2, 하나님 말씀에 아멘하는 사람을 하나님은[내 백성]이라 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 갈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한 번 묻겠습니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까?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은 그 나라의 백성이 아닙니다. 들어가야 백성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의 백성이 되는 자격을 지금 예수님께서는 [하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는 단서를 붙이신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그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꼬리표가 집사요, 권사요, 장로요, 목사라 할지라도, 그 나라의 백성이 되는 자격은 말씀앞에 아멘 하는자들 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내 백성]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내가 너를 책임지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암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 된 자녀들과 하나님 사이에는 아무 것도 끼여 들 것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 하겠습니까?
너는 내것이라.너는 내백성이라 하시면 바로가 대항하겠는가?
홍해가 그들앞을 가로 막겠는가?
여러분도 주님으로부터 너는 내것이라는 확신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는 싸인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을 통하여 바로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내라!]
[나와 내 백성 사이에 끼여들지 말라!]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이스라엘을 보내지 않았던 바로는 이 이후로 굉장한 손실을 입고, 마지막에는 자기의 장자까지 잃고 맙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자라면 하나님 말씀에 아멘으로 순종하시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어떤 환란이나 역경이나 문제나 어려움도 사명자에게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하면 그 나머지는 모두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것입니다.
모세처럼 사명받아 나갑시다. 가는 길에는 바로가 기다려도 하나님은 내백성 이라시며 승리의 길을 인도 하시리니 염려나 근심 걱정을 맡기고 말씀대로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 아 멘 -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
출 5: 1-3
우리 민족을 배달민족이라 부릅니다. 배달민족이라 배달 안 해 주는 게 없지요? 원래 배달이란 ‘밝달’이란 말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이 말은 밝은 땅을 의미합니다. 우리 민족은 본래 밝고 따뜻한 삶을 추구한 민족이었습니다. 한(韓)이란 말도 환(桓)이란 말과 같은 말이라고 합니다. 밝고 환하고, 크고 하나인 삶을 추구했던 한국인입니다.
그런데 최근 우리 사회의 인륜은 추락하고 극악의 상태에서 헤매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를 무참히 살해한 뒤 방치하고도 훔친 로또 복권이 1등에 당첨돼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30대 남자가 얼마 전 무기징역을 받았습니다. 젊은 어머니를 살해하고 아기를 유괴해 자기가 낳은 아기로 위장하던 여인과 살해와 유괴를 맡았던 해결사들이 붙잡혔습니다. 이런 무참한 인륜의 파괴를 충격 없이 보고 사는 우리입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에서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부모를 거역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라고 하더니 그 말대로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인륜의 파괴, 인면수심의 사태는 극단적인 물질 지향적 삶의 결과입니다. 이 모두가 삶의 목적을 상실한 세태 때문입니다. 이런 때에 우리라도 삶의 목적을 상실하지 말아야 합니다. 분명히 사람의 본문을 찾아야 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을 확고하게 지향해야 합니다.
아브라함 헤쉘은 “삶이란 우리 자신의 재산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이다. 삶을 성스럽게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그 소유권이다”라고 했습니다. 삶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삶의 목적을 되찾는 것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가들은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매우 큰 화폭이 필요하였습니다. 그것은 묘사하는 장면들 속에 종종 사물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수많은 천사들도 포함시켰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들은 삶을 보다 넓은 안목에서 바라봄으로써 중세의 암흑시대로부터 빠져나올 출구를 찾았다고 합니다. 우리도 넓은 안목에서 나의 삶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심장으로 세상을 바라봄으로 현대의 암흑시대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네로의 스승이었던 세네카는 삶 전체를 통해서 사람들은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인생을 통해서 죽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삶은 그 자체로 이미 어렵습니다. 엉뚱한 방향으로 가면 훨씬 더 어렵습니다. 우리는 삶의 목적을 가지고 분명한 방향으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에 하나님의 목적이 우리를 통하여 성취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과정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확인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예배입니다.
사도행전 2장의 마지막 부분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범적 삶을 일러줍니다. 2:46에는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라고 합니다. 47절에는 “하나님을 찬미하며”라고 합니다. 이들의 모범적인 삶은 예배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이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성전 예배였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배는 그들의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교회란 말의 어원은 ‘에클레시아’입니다. 불러 모았다는 뜻입니다. 모이면 여러 가지 일을 합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입니다. 모여서 예배만 해도 문제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일을 한다고 해도 예배하지 않으면 그 모든 일이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또 다른 어원은 ‘수나고게’입니다. 이 말은 함께 모인다는 뜻입니다. 교회의 어원은 모인다는 뜻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도 모임으로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모여 예배함으로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교회가 있는 곳에 예배가 있습니다.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삶의 목적입니다. 구원이란 새로운 삶은 예배를 위한 새로운 시작입니다. 출애굽기 5:1에는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고 합니다. 5:3에는 “광야로 사흘 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라고 합니다. 출애굽의 구체적 목적은 제사였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였습니다. 예배는 중요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목적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예배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는 반드시 예배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자는 예배하기를 즐거워해 합니다. 구원받은 자는 예배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예배란 문자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입니다. 예배는 어떤 예배이든지 하나님을 높이고 섬기고 찬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예배가 오히려 사람에게 시험이 되기도 합니다. 가인과 아벨은 똑같이 하나님께 제사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은 성스런 제사의 일로 가장 가증스러운 살인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제사가 그에게 시험이 된 것입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가 시험이 될 수 있습니다. “왜 순서를 이렇게 하나? 왜 이런 찬송을 하나? 왜 기도를 저렇게 하나? 왜 설교시간에 나를 꼬집어 말하나? 왜 십일조를 해야 하나?” 이런 모든 생각들이 예배를 통한 시험입니다. 예배가 우리에게 시험이 되지 않도록 늘 영적으로 삼가야 합니다.
나아가서 예배가 오히려 저주가 되기도 합니다. 아론의 아들들인 나답과 아비후는 제사장의 직이 세습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제단에 다른 불을 드리다가 그 불로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없는 제사였습니다. 영이 없는 예배입니다. 다른 영을 통하여 예배합니다. 이런 예배가 오히려 저주가 됩니다. 영이 없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다른 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배가 영이 아닌 몸만 와서 앉아 있는 육의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닌 악령이 지배하는 예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문선명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예배도 있습니다. 다른 계시, 다른 명령으로 설교하는 예배도 있습니다. 이런 예배가 다른 불의 예배입니다.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는 그의 책 ‘영신수련'에서 “모든 좋은 선택에 있어서 그것이 우리의 손에 달려 있는 한, 우리의 목표는 단순한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오직 우리가 창조된 목적인 우리 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리의 영혼이 구원받는 것만을 고려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단순한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구원받은 목적인 하나님 찬양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입니다.
둘째, 교제 입니다.
사도행전 2:44에는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라고 합니다. 46절에는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라고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지난 교제의 모습입니다. 교제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다른 목적입니다.
교제는 자신의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것을 줄 수 있어야 교제도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거룩한 교제를 하기 위하여 자신의 몸과 피를 친히 주셨습니다. 이것이 교제를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교제는 성도들의 필수과목입니다. 교제가 없는 예배, 교제가 없는 성도의 삶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옆에 앉아 있는 성도가 없이는 우리의 삶도 그 목적을 성취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 옆에 있는 성도들은 참 귀한 분들입니다.
신약성경에는 교제란 단어를 18회 사용하고 있습니다. 요한서신에 3회, 히브리서에 1회, 그 외는 바울 서신에 사용된 바울의 용어입니다. 18회중 하나님과의 교제로 사용된 것이 7회입니다. 사람과의 교제로 사용된 것이 8회입니다. 연보란 의미로 사용된 것이 3회입니다. 연보도 소중한 교제라는 것입니다.
교제란 말은 라틴어에서는 communio라고 합니다. 이 말은 함께 됨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도 communion 혹은 fellowship이라고 합니다. 나아가서 교제란 말은 참여하다(participation)란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십자가의 종교라고 합니다. 수직과 수평의 관계가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와 더불어 사람과의 교제가 있어야 참 기독교의 삶입니다.
빌립보서 1:4-5에서 바울은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절을 개역성경에서는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고 합니다. 교제를 참여하고 합니다.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는 것이 복음에서 교제하는 것입니다. 교제는 복음의 사역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하나님과의 교제와 사람과의 교제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찬송과 기도 그리고 묵상을 통하여 가능합니다. 사람과의 교제는 대화와 위로와 친밀한 인간관계를 통하여 가능합니다. 존 오트버그는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랑 이야기’라는 책에서 “사랑받는다는 것은 선택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선택을 받을 때 나는 무언가 기여를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식됩니다. 선택을 받는 것, 그것은 누군가가 나를 원한다는 의미입니다”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엄청난 파워를 가지고 사역에 동참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6에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2:9에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라고 합니다. 성경은 교제를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교제는 중요한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교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탈무드에는 “하나님 앞에서는 울고 사람 앞에서는 웃으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울음과 사람 앞에서의 웃음이 다 교제입니다.
최근 교인들의 성향은 교제를 굉장히 강조하고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예배 공간, 교육 공간도 중요하지만 교제 공간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교회마다 교제 공간을 확보하느라 애씁니다. 교회가 이젠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긴 탓도 있겠지만 이제는 교제 공간이 없고 쉴 자리가 없으면 교회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차도 마시고, 얘기도 하고, 쉬고, 부모와 아이를 기다리고, 아기를 돌봐주는 공간이 필수적이 되었습니다. 교제의 자리는 참 중요한 자리입니다. 교제가 중요하듯이 교제 공간도 중요한 것입니다.
셋째, 전도 입니다.
47절에는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은 결과적으로 전도가 되었습니다. 또 다른 사도행전적 삶은 삶 그 자체가 전도였습니다. 초대교회는 전도하는 교회였습니다.
복음전파는 예수님의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입니다. 우리의 책임이며 소명입니다. 복음전파는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마 28:20),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그 외에도 전도에 대한 말씀은 무수히 많습니다. 전도에 대한 사도들과 성도들의 열정을 느낄 수 있는 성경 구절들이 무한히 많습니다. 그만큼 전도는 성경이 강조하고 있는 일입니다. 전도는 성경이 가르치는 강력한 명령입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지엄한 명령입니다.
전파하라는 말은 헬라어로 여러 단어입니다. ‘케루소’란 단어가 있습니다. 이 말은 선포하다, 공포하다란 말입니다. ‘유앙겔리조’란 단어가 있습니다. 이 말은 복음을 전하다, 기쁜 소식을 아뢰다는 말입니다. ‘카타레고’란 단어가 있습니다. 이 말은 남김없이 말하다는 말입니다. ‘라레오’란 단어가 있습니다. 이 말은 얘기하다는 말입니다. 복음 전파는 다양한 단어로 명령하고 있습니다. 담대하게 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좋은 소식을 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알뜰하게 얘기해 줘야 할 때가 있습니다. 자근자근 풀어줘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전도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방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잔해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에 빚 갚는 자세로 전도에 열심을 다했습니다. 좀 거부하고, 좀 반대하고, 좀 핍박하고, 좀 박해한 사람들이 믿으면 전도 잘 해요. 왜냐하면 복음에 빚이 있거든요. 미안한 생각에서 더 열심히 전도하게 됩니다. 그런데 누가 제일 전도 못하는지 아십니까? 예수 열심히 믿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주위에 예수 믿는 사람들밖에 없기 때문이랍니다. 그런데 아직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최근에 나온 ‘한국교회 미래 리포트’란 자료집이 있습니다. 저도 이 책에 관련했고 글도 썼습니다. 이 책에 나온 자료에 의하면 전도는 가족이나 이웃, 친구를 통하여 거의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예수 믿지 않던 사람이 제 발로 걸어오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소위 관계전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나아가서 이미지 전도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이미지 관리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성장하고 성숙한 교회는 끊임없이 전도열에 불타는 교회라고 합니다. 전도열정은 복음열정입니다. 우리 교회도 이런 열정이 불타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전도의 불꽃이 튀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전도는 목숨을 거는 일입니다. 헬라어에서 증거라는 말은 순교라는 말입니다. 증거와 순교는 같은 단어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전도하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목숨을 걸 일도 없으니까 전도의 열정도 약한 것 같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사실이 아닌 거짓된 일에 목숨을 걸었습니까? 세상에 거짓에 목숨을 걸 사람은 없습니다. 무슬림들은 살려고 전쟁하는 것이 아니라 죽으려고 전쟁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전쟁은 끝이 없고 무서운 것입니다. 알라 신을 위하여 죽으면 천당에 가고 천당에 가면 일곱 부인을 준다고 한답니다. 그래서 목숨을 걸 수 있습니다. 이런 데도 목숨을 거는데 복음은 사실인데도 목숨을 걸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최근에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가 화제입니다. 이런 적 그리스도, 반 그리스도적인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진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인간으로 묘사하고, 그리스도교를 거짓된 사기 집단으로 묘사하는 소설이 인기를 얻습니다. 저는 이런 일을 볼 때마다 그리스도교야말로 참 종교이며 진리라고 확신합니다.
여러분, 살만 루시디란 작가를 아시지요? 영국국적의 인도인 소설가입니다. 이 사람이 ‘악마의 시’라는 소설에서 알라를 모독했다고 이란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호메이니는 살해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는 지금도 도피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어느 신문사에서는 루시디를 지지하는 사설을 썼다가 폭파당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기독교에서 댄 브라운을 살해 명령을 받고 있습니까? 생명에 위협을 받고 있습니까? 오히려 그는 지금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돈방석에 앉아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만 봐도 기독교가 참 종교가 아닙니까? 그리스도를 잔해하는 소설로 자신의 명예를 얻습니다. 물질을 얻습니다.
초대교회에도 영지주의라는 이단이 있었습니다. 영지주의(Gnosticism)란 ‘그노시스’란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지식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지식을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영지주의적 해석은 이렇습니다. “인간의 문제는 죄가 아니라 자기 인식의 결여라는 것이 핵심이다”고 합니다. 죄사함이 아니라 자기교화가 목적입니다.
그런데 ‘다빈치 코드’는 영지주의 복음서들을 신약성경보다 더 신빙성을 두고 쓴 소설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여 딸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 후손이 프랑스 메로빙 왕조를 세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카톨릭의 시온수도회가 이 사실을 알고도 은폐하고 있었습니다. 시온수도회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아이작 뉴턴, 빅토르 위고 등이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최후의 만찬에 사용되던 성배는 사실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의 시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가 교회를 계승하기를 원했지만 베드로가 시기하여 마리아를 창녀로 선언하여 지도자의 역할을 박탈하였다고 합니다. 시온수도회는 이런 비밀을 숨겨왔는데 회원인 다빈치는 이 비밀을 그림에 표현하였다고 합니다.
최후의 만찬 그림의 예수님 곁의 예쁘장한 얼굴은 막달라 마리아라는 것입니다. 카톨릭의 ‘오푸스 데이’라는 단체는 이 사실을 은폐하는데 총력을 기울인다는 소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복음에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반 기독교적 소설에 대하여 분명한 잘못을 알아야 합니다. ‘다빈치 코드 깨기’라는 책을 보세요. 참 명확하게 기독교의 거짓을 파 해친다는 다빈치 코드의 거짓을 파 해치고 있습니다. 지금 인터넷에도 반기독교 사이트가 많이 있습니다. 반기독교 서적과 소설이 많습니다. 기독교 흠집 내기에 결사적인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의 전도는 너무 미온적입니다. 전도는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결사적이어야 합니다.
위에서 말한 ‘한국교회 미래 리포트’를 보면 교인들 89%가 교회의 존재 목적을 교인들의 가족을 돌보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11%만이 불신자를 인도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반면 목회자들 90%가 불신자를 인도하는 일이라고 했고 10%만이 교인들을 돌보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교회의 목적을 묻는 질문에서 교인들과 목사들의 대답이 크게 다르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목회자들은 90%가 전도하는 일이라고 하지만 성도들은 자신들을 관리해 주기를 바라고 전도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이 보입니다.
제가 오래 전에 전도왕이란 별명을 가진 어느 집사님을 만났습니다. 이 분은 예수 믿은 지가 얼마 안 된 TV 카메라맨이었습니다. 이 분이 친구의 전도로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원래 술을 좋아하고, 예수님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집안에서 자란 사람인데 친구가 얼마나 끈질기게 밥을 사주고 졸라대는지 결국 친구에게 밥 얻어먹은 죄로 한번 나와 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자기가 아주 끈질긴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방송국 사람들이 이 사람에게 걸렸다 하면 교회에 안 나오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게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그를 만나면 피해 다녔다고 합니다. 저와 함께 식사하다가 이분이 중간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방송국 기사가 방송 끝날 시간이 되어 문 앞에서 그를 만나 전도해야 한다고 미리 간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그가 배운 대로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것입니다. 전도는 열심히 하는 것 밖에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전도의 요령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령은 열정입니다. 끈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에 충실한 거듭난 삶은 전도에 열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전도는 그 대가도 멋집니다. 다니엘서 12:3에는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고 합니다. 전도는 큰 보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결론
이집트 카이로에는 시 중앙에 우뚝 솟은 산이 있습니다. 마치 서울의 남산 같이 올라가면 카이로 시대가 다 내려다보이는 산입니다. 이 산을 ‘모카탐’이라 부릅니다. ‘모카탐’이란 말은 아랍어로 베어냈다는 뜻이랍니다. 그 산의 반대편에 바위가 움푹 파인 천연 동굴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의 이름은 구두쟁이 성 사만(St. Samaan) 교회입니다. 성 사만은 10세기 사람입니다. 이 사람과 다른 여럿이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라는 뜻의 ‘키리에 엘레이손’을 기도하는 가운데 바위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이 때 떨어져 나간 바위가 100톤 이상이 되었답니다. 산에서 바위가 떨어져 나가서 생긴 동굴에 교회를 세워 동굴 교회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참 아름다운 천연 동굴인데 이집트가 이슬람 국가이기 때문에 이 교회를 명물이 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들어가는 좁은 입구가 완전히 쓰레기 동네가 되었습니다. 성 사만은 구두를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구두를 고치러 온 어느 여인이 다리를 올리면서 여인의 맨다리를 보았습니다. 성 사만은 여인의 다리를 본 것이 가책이 되어 자신의 칼로 한쪽 눈을 찔렀습니다. 성경에서 눈이 범죄 하면 한 쪽 눈을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는 말을 실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성 사만은 자신의 전 삶을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는 예배하며, 경건하게 일하며, 전도하며, 섬기며 살아서 성자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에 자신의 삶을 올인 한 것입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이런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에 너무 소홀합니다. 말씀대로 문자적으로 사는 것도 우습게 생각합니다. 의미만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하지만 의미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런 점들이 참으로 안타깝고 아쉽습니다. 이제 우리 다시 일어나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을 향해 전력투구합시다. 목적을 향해 질주합시다.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답게 목적을 향해 올인 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