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子曰 若聖與仁 則吾豈敢 抑爲之不厭 誨人不倦 則可謂云爾已矣 公西華曰 正唯弟子 不能學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성스러움(聖)과 인자함(仁)에서야 내가 어찌 감히 자처할 수 있으리오? 그것을 배우기에 싫증 내지 않고 사람을 가르침에 게을리하지 않는 것은 가히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공서화가 말하기를, “바로 그 점이 저희 제자들이 배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此亦夫子之謙辭也 聖者大而化之 仁則心德之全而人道之備也 爲之謂爲仁聖之道 誨人亦謂以此敎人也 然不厭不倦非己有之 則不能 所以弟子不能學也 이것 또한 공자의 겸손한 말이다. 聖이라는 것은 위대하고 化의 경지에 이른 것이고, 仁은 즉 마음의 덕이 온전하고 사람의 도가 다 갖추어진 것이다. ‘爲之’란 仁과 聖의 도를 행함을 말한다. ‘誨人’이란 역시 이것으로써 사람을 가르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싫증내지 않고 게으르지 않는 것은 자신이 그것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이 때문에 제자들이 따라 배울 수 없었던 것이다.
勿軒熊氏曰 聖則仁之熟而至於化矣 聖非出於仁之外也 물헌웅씨가 말하길, “성은 곧 仁이 무르익은 것이자 化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聖은 仁의 밖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此專言之 仁包義禮智 故爲心德之全 立人之道 曰仁與義 仁體而義用 言仁則義在其中 故爲人道之備 신안진씨가 말하길, “여기서는 오로지 말한 것이니, 仁은 義와 禮와 智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의 덕이 온전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도를 세우는 것은 仁과 義라고 말하니, 仁은 體고 義는 用이다. 仁을 말하면, 義가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이니, 이 때문에 사람의 도가 다 갖추어지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他也不曾說是仁聖 但爲之 畢竟是箇甚麽 誨人是箇甚麽 주자가 말하길, “그도 역시 일찍이 仁과 聖이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다만 행한다는 것는 결국 어떤 것이고, 남을 깨우쳐준다는 것은 어떤 것이겠는가?”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自爲 觀十五志學章可見 敎人 觀博文約禮可見 皆不外乎知行 신안진씨가 말하길, “스스로 행한다는 것은 ‘십오세에 학문에 뜻을 둔다’는 장을 살펴보면 알 수 있고, 남을 가르친다는 것은 博文約禮를 잘 살펴보면 알 수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알고 행하는 것을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雲峯胡氏曰 此雖夫子不敢當聖與仁之名 而愈見夫子有聖與仁之實 운봉호씨가 말하길, “여기서 비록 공자께서 감히 聖과 仁의 이름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하였지만, 공자께서 성과 인의 실질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을 더욱 잘 알아볼 수 있다.”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夫子雖不居仁聖之名 而所行所敎無非不息於仁聖之道 不厭不倦 則純亦不已也 非已實有此仁聖之道 則有時而厭倦矣 신안진씨가 말하길, “공자께서 비록 仁과 聖의 이름으로 자처하지는 않으셨지만, 행하시고 가르치신 바는 仁과 聖의 道에서 쉼이 없는 것이 아님이 없었다. 싫증 내지 않고 게으르지 않는다면, 곧 순수함 또한 그침이 없는 것이다. 이미 실제로 이러한 仁과 聖의 道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싫증을 내고 게을리하는 때가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2 | ○ 晁氏曰 當時有稱夫子聖且仁者 以故夫子辭之 苟辭之而已焉 則無以進天下之材 率天下之善 將使聖與仁爲虛器 而人終莫能至矣 故夫子雖不居仁聖 而必以爲之不厭誨人不倦 自處也 可謂云爾已矣者 無他之辭也 公西華仰而歎之 其亦深知夫子之意矣 조씨가 말하길, “당시에 공자를 聖과 仁으로 지칭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공자께서 이를 사양하신 것이다. 만약 사양하기만 했을 뿐이었다면 천하의 인재를 나아가게 하고 천하의 선을 이끌 수가 없어서, 장차 聖과 仁이 헛된 기물이 되도록 만들고, 사람들로 하여금 어느 누구도 끝내 그 경지에 이를 수 없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비록 仁과 聖을 자처하지는 않았지만, 반드시 仁聖之道 행하기를 싫어하지 않고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것으로써 자처해야만 했던 것이다. ‘可謂云爾已矣’라는 것은 다른 것이 없다는 말이다. 공서화가 그것을 우러러 경탄하였으니, 그 역시 공자의 뜻을 깊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晁氏: 名說之 字以道 淸豊人 이름이 설지이고, 자는 이도이며, 청풍 사람이다.
新安陳氏曰 聖仁之道 若天下無一人能與於此 是終爲虛器而無人能實之矣 신안진씨가 말하길, “聖仁之道에 대하여, 만약 천하에 한 사람이라도 능히 여기에 관여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이는 끝내 헛된 기물이 되어서 이를 채울(實)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夫子固多謙辭 到得說抑爲之不厭 誨人不倦 公西華便識得 所以有正唯弟子不能學也之說 便說道聖人有不讓處 주자가 말하길, “공자께서는 본래 겸사가 많았지만, ‘그렇지 않고 행함에 싫증 내지 않고 사람을 가르침에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음에 이르자, 공서화는 곧바로 알아서 터득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바로 오직 제자들이 배울 수 없는 것입니다.’라는 말이 있었던 것이니, 성인께서도 겸손해하지 않는 부분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其他人爲之誨之 不能無厭倦時 惟聖人則不厭不倦 正唯弟子不能學處 這正是弟子不能學處 這若不是公西華親曾去做來親見是恁地 如何解恁地說 기타 사람들은 聖仁之道를 행하고 가르치면서 싫증 내거나 게을리할 때가 없을 수가 없고, 오직 성인이라야만 싫증 내지 않고 게을리하지 않는다. 正唯弟子不能學이란 부분은 이것이 바로 제자들이 배울 수 없는 부분이란 말이다. 이것은 만약 공서화가 직접 일찍이 가서 행하고 와서 직접 이렇다는 것을 본 것이 아니라면, 어찌 풀어서 이렇게 말하였겠는가?
仁之與聖 所以異者 大而化之之謂聖 若大而未化之 只可謂之仁 此其所以異 仁이 聖과 더불어 다른 까닭은 크면서도 化의 경지인 것을 일컬어 聖이라고 하고, 만약 크지만 아직 化의 경지가 아닌 것은 그저 일컬어 仁이라고 할 수 있을 뿐이니, 이것이 바로 그것이 다른 까닭이다.
南軒張氏曰 夫子雖不居聖 然玩味辭氣 其所以爲聖者 亦可得而見矣 夫盡人道 聖人也爲之不厭 誨人不倦 聖人之仁 天之無疆也 남헌장씨가 말하길, “공자께서 비록 聖을 자처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말씀하시는 기세를 잘 음미해본다면, 공자께서 성인이 되신 까닭을 또한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무릇 人道를 다함에 있어, 성인께서는 이를 행하심에 싫증 내지 않았고, 사람을 가르침에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성인의 仁은 하늘처럼 그 끝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慶源輔氏曰 爲之不厭者 仁聖之實 誨人不倦者 仁聖之施 非在己者有仁聖之德 豈能如是 公西華蓋卽爲之不厭誨人不倦 而見夫子實全仁聖之道 非學者所能效也 경원보씨가 말하길, “행하기를 싫증 내지 않는다는 것은 仁과 聖의 채움이고, 남을 가르침에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것은 仁과 聖의 베품이다. 내 안에 있는 것에 仁과 聖의 덕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공서화는 아마도 행함에 싫증 내지 않고 남을 가르침에 게을리하지 않음에 나아가 공자께서 仁과 聖의 도를 실제로 온전하게 하였으므로 배우는 자가 능히 따라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雙峯饒氏曰 前以學不厭誨不倦爲何有於我 此却以二者自任何也 蓋前章是泛說 所以雖非聖人之極至而亦不敢當 此章是見人以仁聖歸之己 旣遜了第一第二等 只得且承當第三等底事 所以勉人也 쌍봉요씨가 말하길, “앞에서는 ‘배움에 싫증 내지 않고 깨우쳐줌에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에게 대체 무엇이 있는가?’로 여겼는데, 여기서는 도리어 이 두 가지를 自任하였으니, 무엇 때문인가? 대체로 앞장에서는 비록 성인의 지극함이 아닐지라도 또한 감당할 수 없다는 까닭을 넓고 얕게 말한 것이고, 이 장에서는 사람이 仁과 聖을 자기에게 귀결하도록 함에 있어, 이미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것을 사양하였다면, 그저 장차 세 번째 일을 이어받아 감당해야 함을 드러내어 보여준 것이니, 이는 사람들을 권면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