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장교였던 유승렬의 아들로, 일본 나고야에서 태어나 조선으로 돌아와 일본육사 55기로 졸업. 태평양전쟁말기 일본군 육군대위로 근무. 미군정 시기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대한민국 국군장교가 되다,
▷제주 4.3 항쟁때 무고한 양민 무려 일만명 학살의 주역
▷ 6.25 동란 초기 국군 7사단장으로 의정부에서 패하여 사단해체,(서울이 북한군의 수중에 넘어간 결정적인 패전)
▷ 국군 2군단장으로 중공군의 기습공격에 패하여 51년 1월 군단해체,(덕천전투에서 지휘실수로 중공군에게 포위 섬멸 당하여 청천강까지 진격했던 국군이 1.4후퇴를 감행하게 됨)
▷ 국군 3군단장으로 51년 5월 대한민국 국군의 가장 최악. 치욕의 패전 "현리전투" 에서 패전으로 군단 해체와 더불어 전시 작전권이 미국으로 이양됨,
▷ 현리전투중 밴플리트 미8군 사령관과의 다음과 같은 대화는 아직까지도 유명하며 현리전투에서의 국군의 치욕을 보여주고 있다,
밴플리트: "유장군, 당신의 군단은 지금 어디있소?" 유재흥: "잘 모르겠습니다." 밴플리트: "당신의 예하 사단은 어디 있소? 모든 포와 수송장비를 상실했단 말이오!" 유재흥: 그런 것 같습니다." 밴플리트: "유장군, 당신의 군단을 해체하겠소.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시오!
▷ 현리 전투는 1951년 5월 중공군의 5월공세 당시 오마치 고개가 중공군에게 점령당하여 지휘하던 3군단이 포위되었을때 벌어진 전투로, 유재흥은 군단사령부로 복귀하겠다며 경비행기로 도주. 이에 따라 3군단은 지휘통제가 불가능한 와해 상황이 되었으며, 사단장을 비롯한 모든 지휘관들이 지휘를 포기하고 계급장을 제거한 후 살기위해 무질서한 도피를 시작, 결국 현리 전투의 결과로 군단병력의 30%와 중장비 70% 손실하게 되었다,
당시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밴플리트 장군에 의해 3군단 해체, 이 사건은 미군 지휘관들이 한국군장교의 작전지휘능력을 철저하게 불신하게 유재흥기였다, 당시 밴플리트 미8군사령관은 국군의 1군단을 제외한 모든 군단 사령부를 해체하고 일체의 작전지휘권을 미군 장성에게만 부여하였다, 1군단 또한 육군본부를 지휘선상에서 제외하고 미군 사령부에서 직접적인 지휘를 받도록 하여서, 이시점부터 모든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이 상실 되었다,
▷ 유재흥은 참여정부시절 전시작전권 환수 논란이 되자 전직 국방장관이랍시고 작전권 환수 절대 불가를 외치며 노무현탄핵까지 주장한 인물임
ps : "현리전투에서 중공군의 포로가 되어 북한에 억류되었다가 94년 탈출한 조창호 소위(훗날 중위로 진급)는 유재흥과의 면담을 원하였으나 06년 사망할 때까지 일체 만남을 거부하였다, (확인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
▷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명단중 군 부문에 부친 유승렬과 함께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