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왜 이래? Ⅱ
-창조 이야기
성경은 구전과 전승, 사료를 모아 편집을 거듭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먼저 창조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다. 창조 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창조의 두 이야기도 서로 다르게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사제계 문헌이다. 이는 지식 계층이나 사제들의 유다인이 바빌론으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옛 메소포타미아의 문명을 접하면서 여러 신화와 문화를 익혔다. 유배 중 그곳에서 그들의 신화와 전승을 받아들이며 창조 이야기(1, 1-2, 4ㄱ)를 썼으며, 그 내용은 분리의 신학적 특징이 있다. 다른 하나(2, 4ㄴ-3, 24)는 솔로몬 시대에 야훼계 문헌이다. 창조주 야훼(아도나이)는 인간의 구원과 세상의 근원이시고 주님의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창조 이야기 6-9장은 노아의 홍수 이야기이다. 이는 고대 근동(메소포타미아)의 대홍수 이야기와 거의 일치한다. 길가메쉬 서사시에는 대홍수로 구원을 받은 이는 우트나피쉬팀이며 성경에는 노아이다. 근동의 대홍수는 7일 밤낮으로 비를 내렸는데 창조 이야기에는 40일 주야로 비를 내렸다고 기술하고 있다. 노아의 홍수에는 땅이 말랐는지 까마귀를 보내고 나중에 비둘기를 보냈다. 그러나 근동의 대홍수 이야기에는 비둘기를 먼저 보내었고 까마귀를 나중에 보냈다고 되어 있다.
구약성경은 폭력으로 일관되고 신약은 구원과 사랑이 지배하고 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으며 카인은 동생 아벨을 죽였다. 홍수의 폭력으로 인류를 쓸어버렸다. 이집트의 탈출 사건에서 이집트의 맏아들과 짐승의 맏배를 쓸어버렸다.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 이민족을 학살하고 전쟁을 일으키며 폭력으로 쓸어버렸다.
노아의 아들 셈의 후손들이 이슬람(앗시라아, 바빌론, 페르시아) 민족이다. 오늘날 유다 민족과 이슬람 민족의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며 폭력이 난무하며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다. 마치 구약시대를 연상하게 한다. 같은 하느님을 믿고 있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전쟁은 예부터 그들이 믿은 신의 전쟁이다. 고대 유다인들은 바빌론과 싸워 패했다. 이는 유다인 그들이 믿는 신이 바빌론이 믿는 신에게 졌다는 것이다. 유다인 그들은 조상이 수천 년 동안 믿어 물려준 신앙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또한 오늘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과의 전쟁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과연 신은 존재하는가에 의문을 가지며, 왜 저렇게 내버려 두는지 말이다.
오늘날 과학 만능시대이다. 무엇이든 과학의 산물인 AI나 쳇GPT, 사물 인터넷(ICBM)으로 다 해결하고 있다. 그러하니 누구의 도움이 필요 없어 개인주의가 팽배하며 절대자의 도움이 없어도 된다고 한다. 「과학 시대에도 신앙은 필요한가」(김도현 신부 著)에서 중세기 코페르니쿠스 전후 시대에 과학과 신앙이 대립과 갈등으로 창조와 진화로 첨예하게 다투었다. 왜 갈등했을까? 김도현 신부는 카이스트 물리학 박사로 과학은 보편성의 눈으로 모든 사건의 개별성을 설명하고, 신앙은 반대로 특정한 계시 사건이라는 개별성의 눈으로 모든 사건의 보편성을 설명하려고 함에서 갈등을 빚었다고 한다.
조환길 대주교는 추천사에서 과학과 신앙 사이에서 그 둘의 차이와 다양성을 풍요의 원천으로 바라보고, 서로에게서 배우며, 두 개의 시선으로 하느님을 깨닫고 섬기는 삶으로 살자고 했다. 김도현 신부는 과학과 종교, 이성과 신앙은 “인간 정신이 진리를 바라보려고 날아오르는 두 날개”(성 요한 바오로 2세)가 되어 서로 대화하고 상생하는 관계가 되어야 하며 그 길로 가고 있다고 했다.
니체의 정신 발달 단계처럼 성경도 있는 그대로 믿고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따지고 비평하면서 비판 이후의 순수함으로 과학지식이나 역사적 사실을 넘어서 신학적 진리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새로운 시대에 합당하게 새 창조로 삶의 여정으로 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