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나의 얕음
2월 어느 늦은 저녁, 나는 나의 집, 104호 현관문을 열고 나와 양손에 한가득 종이상자들과 가득찬 종량봉투를 들고, 분리수거함이 있는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슬리퍼를 끌고 지하주차장 끝에 위치한 수거함으로 중, 신발 밑창으로 물기가 느껴졌고, 그 순간 ‘앗’하는 비명소리와 동시에 미끄러지면서 손에 들고 있던 상자들이 공중으로 뿔뿔히 흩어졌다. 다행히 공중에 날아다니던 한개의 종이상자가 내 엉덩이 밑으로 방석처럼 떨어져 살포시 안착하게 도와줬다. 중심을 잡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미끄러진 이유를 찾기 위해 넘어진 지점을 유심히 탐색했다.
그 어느날 부터, 주차장 한 모퉁이에 왠 ‘큰화분’ 한개가 놓여져 있었다. 몇 일이 지나도 그 자리에 있길레, 경비반장님께 그 화분에 관해 물어보니, 나의 앞집 103호가 내려다 놓았는데, 곧 그들의 지인이 가지고 갈것이라고 답하셨다. 하지만 그 물건은 오랜동안 내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자리에서 그 화분에 물까지 주어, 그 흘러나온 물이 아니그래도 미끄러운 주차장 바닥을 더 미끄럽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것이 내가 미끄러져 넘어진 이유였다.
나는, 바쁘게 사건의 전말을 꿰어 마추고 난후, 흩어진 상자들을 모아 화분 밑바닥과 주변에 깔아 더 떨어질 물기를 차단하고 청소함의 막대 걸레로 바닥에 이미 흘러나온 물을 제거했다.
만약, 이 현장을 누가 보았더라면 나의 행동은 누가 보더라도 칭찬할 행동이며 나는 모범적인 이웃으로 자리매김을 할 것이다. 보기와는 반대로, 칭찬받을 만한 행동을 손으로 부지런하게 하는 동안, 나의 속 마음은 103호를 비난하고 정죄하느라 부지런을 떨고 있었다.
나는 5년동안 17세대의 빌라의 총무로 봉사했다. 다른 생각을 가진 세대들로 인해 크고 작은 이견과 소음들이 있었지만, 큰 소동없이 기쁘게 봉사했다.
103호 그녀가 내 집앞으로 이사 들어오기 까지는.
“네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큰 계명을 마땅히, 즐거히 지키고 행해야 하는 크리스찬이고 더군다나, 나의 집, 현관문에는 ‘교회문패‘까지 강력본드로 붙혀져 있어 이웃들과 좋은 관계로 지내기 위해 힘쓰며 살고 있는 평온한 104호 나의 집 반대편에 ‘새이웃’이란 이름으로 그녀가 등장함으로 나의 평온은 깨어지고 시험에 들기 시작했다.
103호는 총무로 봉사한 마지막 해에 등장해, 흔히 막장 드라마에서 볼수 있는 정말 고약한 시어머니처럼 나를 괴롭혔다. 청소 세제와 청소도구를 구입해 지출 내역을 관리비청구서에 올리면, 청소미화원 여사님이 세제를 헤프게 사용해 너무 자주 구입한다, 왜 멀리 있는 대형마트에 가서 더 저렴하게 구입하지 않는냐?는 배려없는 불만과 불평들로 나와 빌라 관리인들을 괴롭혔다. 그때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친절하게 설명하며 이해를 구했지만, 그녀의 태도는 일관성 있게 지속되었다. 나는 그녀가 미워지기 시작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이 말씀을 적어도 10분이상 다른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으며
‘이웃’의 본뜻을 찾으려고 애썼다. 아마도 이 말씀의 뜻이 지리적인 뜻이 아니라 다른 큰 뜻의 ‘이웃’이라는 진리를 찾아서, 바로 내 집앞의 이웃을 미워하는 내 처지를 말씀으로 타당함을 인정받고 정당화시키고 싶었다.
무사히 총무의 임무를 완수한 그해, 103호가 총무가 되었다. 나의 계획된 의도는 이니였지만 최고의 복수였다. 그 후에도, 공동구역에서 목줄 메지 않은 그녀의 개가 우리집으로 침입하는등 그녀의 ‘무매너’로 몇 번 작은 유쾌하지 않은 헤프닝이 있었다. 그리하여 더 서먹한, 아니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그저 눈인사 정도하고 사는 ‘앞집 사람’이 되었다.
이런 103호가 나를 넘어지게 한 사건의 원인 제공자라고 생각하니, 사고 수습을 하는 동안 마음속으로 과거의 모든 기억들을 끌어내어 지금의 사건과 접목시켰다. 공동구역에 개인의 물건을 비치, 방치한 죄, 배수가 되는 쪽에 옮겨서 물을 주지 않는 개인의 편리를 위해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무매너, 물을 준후의 상황을 알고도 다음날, 청소 도우미 여사님이 청소해 줄 때까지 방치한 ‘갑질’의 죄 등등.
지금까지 내 마음의 얕은 바다에 검정비닐봉지에 동겨 메어 꾹꾹 넣어두었던 그녀에 관한 봉지들이 이 사건의 수면위로 둥둥 가벼움을 이용하여 올라왔다. 이런 타당한 기회를 놓칠수 없다는 듯이!
사건 다음날 오전, 경비반장님을 만나 바닥에 널부르게 깔아 놓은 상자들을 설명하고 치울려고 지하주차장에 내려가니 마침 계셨다. 신나게 어제 저녁의 사건을 이야기하고 보지는 않았지만 거의 103호의 짓이지 않겠냐며 은근히 경비반장님의 맞장구를 부추이며 반응을 기다렸다.
하지만, 웬걸, 경비반장님이 얼굴 가득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반전의 고백을 하셨다.
그 사건의 주범이 바로 경비반장님 본인이라고 하시며, 미처 후의 일을 생각지 못하고 나무가 시들해 보여 물만 주고 퇴근하셨다 라고! 아뿔사 사건의 전말을 깨달음과 동시에 멋쩍어져서, 괜시리 103호로 확실시하고 오해했다며 급히 마무리 하며 발길을 돌려 집으로 가는 20개 정도의 계단을 한계단, 한계단 딛고 오르는 동안 스물고개의 수수께끼 질문들이 나에게로 쏟아졌다. 그 수수께끼의 답은 ‘나의얕음’이었다
내 자신의 얕음의 극치에 수치스러움과 자괴감이 몰려왔다. 나는 이런 감정으론 집으로 들어갈수가 없어 조용한 뒷정원으로 피난을 갔다. 찬 바람이 힘을 빌어 나의 뇌를 쿨링시키고, 조용히 생각을 할수 있었다. 그곳에서 나의 추측에 근거해서 나의 잣대로 그녀를 재단하고 비난한 ‘나의 얕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수업시간마다 사부님이 당부하시는 “비난하지마라”의 성경말씀이 나의 뇌리를 때리며, 튀어나와 나를 조롱하고 정죄하는 듯했다. ‘크리스찬’이 된후, 지금까지 이 말씀에 대한 설교를 얼마나 많이 들었는가, 믿지 않는 이들도 좋은 인격자가 되기 위해 지킬려는 덕목인데, 내 나이 5자를 달은 지금도, 이 지극히 상식적인 이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있는 나의 얕음이 참으로 참담했다. 이 말씀은 그저 단순히 도덕적으로 좋은 사람이 되라는 얕은 뜻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이, 알파와 오메가 되시고, 마지막날의 심판자이시며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며, 나의 삶에 좌정하사 나의 모든 것을 아시기에 제자들에게, 나에게 우리의 얕음을 알고 말로나, 행동으로나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당부의 말씀이라는 깨달음은 나를 부끄럽게 하였다. 그 사건의 현장에, 그 일이 벌어질 때 나는, 그곳에 없었고, 또한 그녀가 왜 화분을 그곳에 놔두어야 했는지 그 사정도 나는 모른다. 게다가 그럴 것이다! 라는 나의 추측은 확실하지 않으며, 나의 경험 또한, 이러한 불완전한 나에게서 해석되고 입력되었기에 정확하지 않고 사실이 아닐수 있다는 나의 성찰을 하는 도중, 기억의 마우스로 나의 얕음을 클릭하니 과거 그녀와의 사건들까지 드래그 되었다.
나의 얕음에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현관문앞에 서니, 단단히 부착되어 있는 ‘교회문패의 십자가’가 나의 얕은 마음에 철퍼득 들어와 고인 물들이 밖으로 튀어나는 것 같았다. 나는 몸과 눈을 앞집 103호로 돌려서 나의 얕음으로 인한 행동들을 사과하며 이젠, 찐 미소로 인사하고, 우연을 가장한 기회가 주어지면, 얕은 마음에 고인 물들을 다 쏟아버리고 조금 더 깨끗한 맘으로 다가가리라 약속했다.
그리고 감사함으로, 좀 깊어진 마음으로 나의집 104호의 문을 열고 가장 가까운 이웃, 남편이 기다리는 집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