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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03
구약시대에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 경배와 제사를 받은 여호와의 사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실 수밖에 없다.여호와의 사자의 사람의 형체가 일시적인 피조물이었다면,그를 향해 절하거나 제물을 바친 인물들은 우상숭배를 저지른 것이었을 것이다.그러나 그들의 경배와 제사는 여호와 하나님께 드린것으로 여겨졌으므로 그 사자의 사람의 형체또한 일시적인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등한 영원한 존재라고 보는것이 합당하며,이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밖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벨기에신앙고백서 11.성령의 신성
We believe and confess also that the Holy Spirit proceeds eternally from the Father and the Son-- neither made, nor created, nor begotten, but only proceeding from the two of them. In regard to order, he is the third person of the Trinity-- of one and the same essence, and majesty, and glory, with the Father and the Son.
우리가 성령에 대해 믿고 고백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께로부터 영원히 나오십니다. 이는 성령께서는 조성되지도, 창조되지도, 태어나지도 않으시고 단지 성부와 성자께로부터 나오시는 분이심을 의미합니다. 삼위일체이신 세 위격들의 순서상 성령께서는 세번째 위격이시나, 다른 두 위격이신 성부와 성자와 함께 단일하고 동일한 하나의 신적 본질과 동등한 권세와 영광을 가지십니다.
He is true and eternal God, as the Holy Scriptures teach us.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와 같이, 성령께서는 참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으로서, 성부와 성자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으시는 한편 스스로 두 위격들로부터 나오신다. 그러나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성부께로부터 태어나시는 것과는 다른 나오심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성부께로부터 아들로서 태어나시지만,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께로부터 태어나심이 아닌 나오심으로 나오신다. 성부와 성자께로부터 나오시는 성령께서는 그대로 영원 전부터 성자와 연합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의 영에 완전충만하게 거하시고, 그리스도의 인성의 혼의 의지와 육의 말씀의 명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신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인성의 의지와 뜻은 그리스도의 인성의 영을 가득 채우신 성령의 뜻이고,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깊은 것, 즉 성부와 성자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므로 성령의 뜻은 곧 성부와 성자의 뜻과도 동일하므로, 표면적으로는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인성의 명령을 따르시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당신 자신의 뜻을 행하는 것과 동일하시다.
성령께서는 태초에 천지가 창조된 후 혼돈하고 공허해진 수면 위를 여호와의 영으로서 운행하셨고,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의 뜻을 따라 6일 동안 천지만물을 당신 자신의 능력으로 창조하셨다. 성령께서는 당신의 능력으로 영원 전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인성을 한없이 낮추셔서 처녀의 몸에 잉태되게 하시고 태어나게 하셨다. 여자에게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점점 자라감에 따라 성령께서도 그에 맞춰 그리스도의 인성의 영을 점진적으로 밝히셨고,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에는 이 땅에서의 구속사역을 수행할 수 있는 정도의 능력을 부어주셨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는 오시기 전 만큼의 완전한 성령충만은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다시 하늘로 오르신 때에야 비로소 성령께서는 영원 전만큼의 완전충만함으로 그리스도의 인성의 영에 거하시게 된 것이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성령께서 직접 당신 자신의 목소리를 발하신 것은 요한계시록 14:13절 밖에 없다.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시라 고백할 수 없고, 성령으로 말미암아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받은 자라 할 수 없다.
성령께서는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처녀의 태에서부터 보호하시고 돌보시듯이, 창세 전에 선택된 성도들이 거듭남에 이를 때까지 그들 각자의 영과 혼과 육은 물론이고 모든 성장배경을 돌보시고 보살피시고 섭리해 이끄신다. 그래서 중생의 때가 되어 성도들 각자의 영에 실제적으로 거하셔서 그들의 죽어있던 영을 살리시고, 성령에 의해 살아난 그들의 영이 자신의 혼과 연계해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로 자원하여 마음을 향하여 믿음을 가지게 하며 그 믿음으로 자신들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고 자신들의 의지로써 육신의 입술을 움직여 주님 앞에 회개하게 하시는 것이다. 선지자 에스겔이 예언한 바,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시다는 여호와 삼마는 바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영을 성전삼아 거기에 거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사역으로써 성도는 비로소 본격적으로 주님의 구원의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겨지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얻게 된다. 그러나 성도가 거듭나게 된 것만으로 보혜사로서의 성령의 사역이 끝난 것은 아니다. 성도들의 영은 이제 겨우 겨자씨 한알만큼만 새롭게 되었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도들의 영을 지속적으로 새롭게 하셔서 많은 열매를 맺고 여러 새들이 앉아서 쉴 수 있을만큼의 큰 겨자나무로 키우시기까지 잠시도 사역을 멈추시지 않으신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성도들의 신앙을 자라게 하시는데 결단코 성도들의 의지에 반하여 억지로나 강압적으로나 강제적으로 끌고 가시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의지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선을 바라고 추구하게 하심으로써 그들 자신의 의지와 연합하셔서 역사하신다. 그래서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참 사람이신 것처럼, 중생한 성도들의 모든 선한 신앙행위들은 전적으로 성령의 의지임과 동시에 전적으로 성도 자신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펠라기우스-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성령의 의지를 배제하고, 극단적 개혁주의자들은 성도의 의지를 배제하는 우를 범하였다.
성령께서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성도들 각자에게 주신 모든 은사들은 성전 삼으신 성도들의 영을 특별하게 각성시키심으로써 발현되는 능력들이다. 어떤 은사들은 사람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혼과 육의 능력들 중에서 지성이나 감성이나 예술 등의 어느 특정한 분야에 탁월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고, 어떤 은사들은 사람이 행할 수 없는 능력을 행하게 되는 소위 기적을 행하는 것이기도 한다. 그 중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신자들에게서 관심을 받아온 방언이라는 은사는 성령께서 기도하는 성도의 영을 강력하게 주관하셔서 정신활동을 주관하는 혼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육의 입술을 통해 하늘의 주님께 기도하게 하시는 것이다. 즉, 방언이라는 것은 성령께서 성도의 영과 입을 통해 직접 주님과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방언하는 성도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방언하는 성도는 교회에서는 하지 말고 집에서 혼자 하거나, 정 교회에서 해야 할 경우에는 반드시 방언 통역자를 둘 것을 명한다. 한편 사도 바울은 교회와 신자들의 방언에 대한 관심과는 달리, 일만 마디 방언보다 다섯마디 예언이 낫고, 모든 은사들 중에서 가장 큰 은사는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은 사랑이라 가르친다.
성령훼방죄 또는 성령모독죄란 이미 복음의 진리를 접하고 신앙의 유익을 어느정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진리나 명백한 주님의 사역을 공공연하게 부정하는 죄를 말한다. 구약에서는 사울 왕과 요아스 왕이 성령을 훼방하고 모독한 대표적인 악인들이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내어쫓으신 것을 보고도 귀신의 왕 바알세불이 지폈다고 모독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베드로 사도 앞에서 땅 판 값을 속이려 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이 죄를 지은 대표적인 악인들이다. 사도 바울이 정죄한 거짓 사도 또는 거짓 교사들은 할례를 비롯한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여 복음과 주님의 희생의 공로를 훼손하였으므로 성령을 훼방하고 모독하였다. 사도 요한이 정죄한 바 교회에서 스스로 떨어져나간 자들은 교회의 참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저버림으로써 성령을 훼방하고 모독하였다. 주님께서 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사자들에게 편지를 보내라 하시면서 정죄하셨던 발람과 이세벨의 가르침을 전하는 자들과 니골라당은 음행 등의 더러운 죄를 저질러도 신자의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고 하여 주님의 값없는 구원의 은혜를 더럽힘으로써 성령을 훼방하고 모독하였다. 그렇게 거짓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자들은 물론이거니와, 그 거짓 가르침에 미혹되어 거짓 사도와 거짓 교사들을 따라가는 자들도 성령을 훼방하고 모독하는 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사리사욕으로 교회를 운영하거나 목회하는 목사, 간음과 횡령을 저지르는 목사, 하나님더러 자기에게 까불면 죽인다고 하는 목사,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국가 지도자와 정부를 저주하고 비방하며 악담하는 목사들과, 이들을 맹종하는 교인들 모두가 성령을 훼방하고 모독하는 용서받지 못할 죄인들이다.
사실 엄밀하게 따진다면 모든 죄는 성령을 훼방하고 모독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들과 주님께서는 무언가 최종적으로 무르익은 단계의 죄의 형태로 한정하시는 것 같다. 만약에 엄밀하게 모든 죄를 성령훼방과 모독죄로 여기게 된다면 주님께서 단언하신 바 아무도 죄사함을 받지 못하고 모두 영원한 지옥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창세 전에 이미 구원하실 성도들을 선택하셨고 그들의 죄를 대속하셨고 그들에게 성령을 보혜사로 보내셔서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택하신 성도들이라고 해서 이 땅에 사는 동안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럼에도 성도들이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지은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며 그 죄를 짓지 않으려고 고군분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내용이 있는 것은, 우리로 성령을 훼방하고 모독하는데로 나아가지 않게 하시려는 안전장치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교회에 있으면서도 죄를 짓고도 아무런 죄의식 없이 뻔뻔하여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설령 그들이 목사이건 장로이건 집사나 권사이건 교인이건 간에 장차 성령을 훼방하고 모독함으로써 죄사함을 받지 못하고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 떨어지게 된다고 볼 수가 있다. 교회 내 성령훼방모독자들은 처음부터 성령을 보혜사로 받았다가 성령께서 떠나신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성령을 보혜사로 받지 못했으면서 다른 성도들이 받은 성령의 은사와 유익들을 빵 부스러기처럼 잠시 맛보았던 것에 불과하다. 때문에 그런 자들은 제아무리 교회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과 기적을 행하고 좌지우지하는 큰 영향력을 끼쳤다 하더라도 마지막에는 성령을 훼방하고 모독했다는 판결을 받아 바깥 어두운데로 쫓겨나 울며 이를 갈게 될 뿐이다.
#20220103
#리브가
나그네에게 우물물 한그릇 건네주는 것은 누구나 베풀수 있는 호의다.그러나 나그네의 낙타열마리 모두에게 우물물을 길어주는 것은 기적과도 같이 기대할수 없는 호의다.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은 자기주인의 아들의 배필을 찾기 위해서 이정도의 기적을 여호와 그리스도께 표징으로 간구하였고,리브가는 기적과도 같은 호의를 엘리에셀에게 베풀었다.그러나 리브가가 항상 그런 호의를 베풀어 왔는지 그때에만 성령의 감동으로 그런것인지는 알수없다.
#사사기 #Judges 3:1-30
그 땅에 남겨 두신 사람들
1 여호와께서 가나안의 모든 전쟁들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2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 두신 이방 민족들은
3 블레셋의 다섯 군주들과 모든 가나안 족속과 시돈 족속과 바알 헤르몬 산에서부터 하맛 입구까지 레바논 산에 거주하는 히위 족속이라
4 남겨 두신 이 이방 민족들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의 조상들에게 이르신 명령들을 순종하는지 알고자 하셨더라
5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6 그들의 딸들을 맞아 아내로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고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미숙함이나 미련함이나 게으름이나 이해타산을 따라서 가나안 족속들을 내쫓지 않고 남겨두었으나 여호와 그리스도께서는 그 남겨진 가나안 족속들을 가지고 도리어 이스라엘의 신앙을 시험하시는 도구로 삼으신다. 물론 근원적으로는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창세 전부터 이러하도록 작정하시고 섭리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지 않은 책임은 여호와 그리스도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이스라엘의 자유의지에 의한 책임으로 돌려야 한다. 왜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작정하셨는데 그 책임이 이스라엘에게 돌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사람의 지성으로서는 깨달을 수 없는 신비한 원리이므로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은 여호와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책임을 돌리거나 여호와 그리스도의 작정과 섭리를 부정하는 반면에 성령을 받은 성도들은 비록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에게 유익해 보이는대로 가나안 족속들을 남겨두었지만 필경 그것은 사망의 길이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들과 혼인으로써 교류를 맺었는데, 혼인은 인간관계 중에서 가장 끈끈한 것이고 서로 다른 남자와 여자가 가정을 이룸으로써 둘이 하나가 되는 신비한 연합이기 때문에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그 영향력이 상호 연합적으로 일어날 수 밖에 없다. 인류 최초의 범죄도 아담과 하와라는 부부관계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남편의 죄는 아내를, 아내의 죄는 남편을 오염시키는 것이 통상적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들과 혼인으로 교류를 맺은 것은 홍수 이전의 고대 사회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삼은 것보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딸들을 사람의 아들들에게 주기도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딸과 혼인하게 되면 솔로몬이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맞이하였다가 우상숭배에 빠지는 죄에 빠지게 되고, 하나님의 딸이 사람의 아들의 아내가 되면 남편의 폭력적인 억압으로 인해 신앙을 저버리게 된다.
사사 #옷니엘
7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 년 동안 섬겼더니
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10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
11 그 땅이 평온한 지 사십 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얼마만에 부패하고 타락하게 되었는지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이스라엘이 모세를 따라 애굽을 나오고 40년 동안 광야에서 지낸 것을 기준으로 본다면 여호수아 치세에서도 40년을 지내었다고 가정해볼 수 있고 여호수아를 비롯한 이스라엘의 수령들과 장로들이 죽은 이후, 즉 가나안을 정벌하기 시작하고 40년이 지나서 본격적으로 범죄하기 시작한 것으로 봐도 무방해보인다. 연대기적으로 보면 이 당시의 이스라엘의 범죄상은 사사기 17-21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레위인들을 돌보지 않고 일반 백성은 레위인을 가정 제사장으로 삼고 어떤 지파는 한 가정을 강탈하기도 하고 어떤 레위인은 첩을 두기도 하고 어떤 지파는 소돔과 고모라에서나 볼 수 있는 극악무도한 죄악을 저지르기도 하였고 이로 인해 동족상잔의 비극까지 벌어지기도 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다른 지파들이 이 범죄한 지파와 전쟁을 벌이려 할 때 아론의 손자이자 엘르아살의 아들인 비느하스가 대제사장으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동족상잔의 비극 이후에도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죄악에서 돌이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고 그래서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메소포타미아의 구산 리사다임 왕의 지배와 탄압을 받도록 징벌하셨다. 극심한 탄압을 받던 이스라엘이 여호와 그리스도께 돌이켜서 긍휼을 간구한 것인지, 아니면 단지 애굽에서처럼 괴로움을 견디지 못한 신음과 탄식을 내뱉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호와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는 갈렙의 조카이자 사위인 옷니엘을 사사로 세우셔서 자유를 찾게 하시고 40년 동안 평안을 베푸신다. 아마도 옷니엘이 사사로서 다스리던 시기 초반에 유다 족장인 살몬과 여리고의 창녀였던 라합이 마치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노년에 아들 보아스를 낳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사 #에훗
12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므로 여호와께서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하게 하사 그들을 대적하게 하시매
13 에글론이 암몬과 아말렉 자손들을 모아 가지고 와서 이스라엘을 쳐서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한지라
14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왕 에글론을 열여덟 해 동안 섬기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옷니엘이 죽고 나자마자 바로 죄악을 지은 것이 아니라, 옷니엘이 다스리던 40년 동안에 점진적으로 조금씩 죄악을 더해갔고 옷니엘이 죽은 이후에는 스스로 고삐가 풀려서 아무 거리낌 없이 죄를 저질렀었을 것이다. 이에 여호와께서는 모압을 강성하게 하시는데 이스라엘이 모압의 지배를 받던 18년 기간이 아마도 룻기의 배경이 되는 시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모압과 암몬은 혈통적으로는 이스라엘과 사촌지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출신이 패역부도한 근친상간으로 말미암은 것이었기 때문에 족속 전체가 대대손손 여호와 그리스도의 저주를 받아 이스라엘을 대적하기에 이르렀다.
15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그는 곧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를 통하여 모압 왕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칠 때에
16 에훗이 길이가 한 규빗 되는 좌우에 날선 칼을 만들어 그의 오른쪽 허벅지 옷 속에 차고
17 공물을 모압 왕 에글론에게 바쳤는데 에글론은 매우 비둔한 자였더라
18 에훗이 공물 바치기를 마친 후에 공물을 메고 온 자들을 보내고
19 자기는 길갈 근처 돌 뜨는 곳에서부터 돌아와서 이르되 왕이여 내가 은밀한 일을 왕에게 아뢰려 하나이다 하니 왕이 명령하여 조용히 하라 하매 모셔 선 자들이 다 물러간지라
20 에훗이 그에게로 들어가니 왕은 서늘한 다락방에 홀로 앉아 있는 중이라 에훗이 이르되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왕에게 아뢸 일이 있나이다 하매 왕이 그의 좌석에서 일어나니
21 에훗이 왼손을 뻗쳐 그의 오른쪽 허벅지 위에서 칼을 빼어 왕의 몸을 찌르매
22 칼자루도 날을 따라 들어가서 그 끝이 등 뒤까지 나갔고 그가 칼을 그의 몸에서 빼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기름이 칼날에 엉겼더라
23 에훗이 현관에 나와서 다락문들을 뒤에서 닫아 잠그니라
24 에훗이 나간 후에 왕의 신하들이 들어와서 다락문들이 잠겼음을 보고 이르되 왕이 분명히 서늘한 방에서 그의 발을 가리우신다 하고
25 그들이 오래 기다려도 왕이 다락문들을 열지 아니하는지라 열쇠를 가지고 열어 본즉 그들의 군주가 이미 땅에 엎드러져 죽었더라
26 그들이 기다리는 동안에 에훗이 피하여 돌 뜨는 곳을 지나 스이라로 도망하니라
27 그가 이르러 에브라임 산지에서 나팔을 불매 이스라엘 자손이 산지에서 그를 따라 내려오니 에훗이 앞서 가며
28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따르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수들인 모압을 너희의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매 무리가 에훗을 따라 내려가 모압 맞은편 요단 강 나루를 장악하여 한 사람도 건너지 못하게 하였고
29 그 때에 모압 사람 약 만 명을 죽였으니 모두 장사요 모두 용사라 한 사람도 도망하지 못하였더라
30 그 날에 모압이 이스라엘 수하에 굴복하매 그 땅이 팔십 년 동안 평온하였더라
에훗이 속한 지파인 베냐민 지파는 옷니엘 전에 소돔과 고모라를 뺨치는 극악무도함으로 인해 장정 6백명을 제외하고 지파가 전멸을 당하는 재앙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형제 지파들의 긍휼함에 힘입어 그 살아남은 6백명의 장정으로 다시 지파를 세우기 시작하였고 옷니엘이 사사로 다스리던 시대에 생육하고 번성하게 되었던 것 같다. 에훗이 왼손잡이였음을 특별히 기록한 것은 선천적이거나 후천적이거나간에 그가 오른손을 못쓰는 장애를 가지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더욱이 비록 장애로 인해 불가피하게 왼손잡이가 될 수 밖에 없었어도 고대에는 왼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에훗은 아마도 주위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고 배척당하는 처지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에훗이 모압 왕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치는 자로 발탁이 된 것은 에훗에게 좋은 의미로서가 아니라 차마 자기들 중에서는 고귀한 자들을 세워 자기들을 억압하는 원수인 모압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치게 할 수 없어서 가장 비천한 장애인을 세운 것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게 동족에게서 천대를 받던 에훗은 도리어 모압 왕 에글론에게는 매우 신임을 받게 되는데, 이스라엘로서는 그런 에훗의 모습도 마치 민족 반역자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러한 에훗의 모습은 세리장 삭개오와도 적잖이 유사한데, 이는 그의 키가 작다고 기록된 것은 그가 남들보다 그저 조금 작은 정도가 아니라 난장이로 취급받을 정도의 장애를 가진 자였음을 암시하는데다가 삭개오 또한 동족에게서 미움과 배척을 받고서 로마의 세리장까지 오를 정도로 억척스러웠기 때문이다. 에훗은 적절한 시기를 봐서 모압 왕 에글론을 살해하고 모압을 무찌르는데 성공하여 그 이후로 장장 80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평안을 선사한다. 자기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간신히 죽다 살아난 지파에서 그것도 신체가 온전한 자가 아니고 왼손밖에 못쓰는 장애인 구원자 사사가 나오게 된 것은 나중 된 자로 처음되게 하시는 여호와 그리스도만의 전적인 긍휼의 권세로 말미암은 것이다.
#20210103
#민수기 #Numbers 22:1-8 #발람
모압의 왕이 발람을 불러오다
1 이스라엘 자손이 또 길을 떠나 모압 평지에 진을 쳤으니 요단 건너편 곧 여리고 맞은편이더라
이스라엘이 진을 친 지역을 모압 평지라고 한 것은 아마도 그 곳이 처음에는 모압 땅이었는데 아모리 왕 시혼에게 빼앗겼다가 이스라엘이 아모리에게서 점령했기 때문인 듯 싶다. 그 모압 평지에서는 요단 강만 건너면 바로 여리고로 갈 수 있었다.
2 십볼의 아들 발락이 이스라엘이 아모리인에게 행한 모든 일을 보았으므로
3 모압이 심히 두려워하였으니 이스라엘 백성이 많음으로 말미암아 모압이 이스라엘 자손 때문에 번민하더라
4 미디안 장로들에게 이르되 이제 이 무리가 소가 밭의 풀을 뜯어먹음 같이 우리 사방에 있는 것을 다 뜯어먹으리로다 하니 그 때에 십볼의 아들 발락이 모압 왕이었더라
모압은 전에 아모리 족속에게 침략을 당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이 아모리 족속을 멸망시킨 것처럼 자기네들도 멸망시키지나 않을까 두려움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발락이 자기 형제 족속인 암몬 족속은 이스라엘의 공격을 받지 않았으며, 거슬러 올라가면 이스라엘과는 혈통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인식했다면 굳이 이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발락은 다시 한 번 아모리 때처럼 침략을 당할까봐 미디안 장로들을 불러서 이스라엘을 저지할 대책을 마련한다. 발락이 미디안 장로들을 불러서 조언을 구했다는 것에서 미디안 족속은 모얍 족속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 같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미디안의 제사장이었는데, 아마도 이드로는 모압 족속의 신 그모스를 섬기는 제사장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왜 자기 족속과 함께 거주하지 않고 산에 가족들만 데리고 홀로 지내게 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이드로는 모압의 신 그모스의 제사장이었으면서도 온유하고 지혜로운 성품을 가지고 있어서 애굽에서 도망한 모세를 사위로 맞아들이고 광야에서 모세를 위해 여러 조언을 해주기도 하였다. 아마도 이드로는 그모스에게 인신제사를 드리는 것을 더이상 참지 못하고 자기 민족 모압에게 반역자로 낙인 찍혀서 추방을 당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5 그가 사신을 브올의 아들 발람의 고향인 강 가 브돌에 보내어 발람을 부르게 하여 이르되 보라 한 민족이 애굽에서 나왔는데 그들이 지면에 덮여서 우리 맞은편에 거주하였고
6 우리보다 강하니 청하건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내가 혹 그들을 쳐서 이겨 이 땅에서 몰아내리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
발락은 이스라엘이 자기네 모압보다 강하다고 했는데, 이는 아마도 순전히 군사력으로만 평가했거나 아니면 이스라엘이 모압을 이긴 아모리를 물리쳤으니 당연히 모압보다 강하다고 판단한 것일지도 모른다. 자기들 나름대로 아무리 묘안을 짜내봐도 이스라엘을 물리칠 방안이 없으니 결국에는 아주 탁월한 주술사인 발람을 섭외하러 간다. 자기 딴에는 군사력으로 안되니 무속으로 승부를 보려고 한 것이지만, 이는 더욱더 미션임파서블 전략이었다. 왜냐하면 그 주술보다도 더 위대하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편이시기 때문이다. 결과론적인 생각이지만, 차라리 발락이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으면 그것이 가장 지혜로운 대처였을지도 모른다.
7 모압 장로들과 미디안 장로들이 손에 복채를 가지고 떠나 발람에게 이르러 발락의 말을 그에게 전하매
8 발람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는 대로 너희에게 대답하리라 모압 귀족들이 발람에게서 유숙하니라
모압과 미디안 장로들이 복채를 가지고 발람을 찾아갔다는 것은 발람이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단지 점을 치는 박수 또는 무당에 불과한 자였음을 알려준다. 모압 족속은 돈을 주고 저주의 능력을 사려고 했던 것이다. 마술사 시몬도 회심한 후에 사도 베드로에게서 성령의 능력을 돈을 주고 사려 했다가 심한 책망을 듣고 만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사는 사람이 육신의 것을 바쳐서 그 대가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각 성도에게 복음을 위해 필요한 만큼 거저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거저 받은 것은 거저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교회라고 하더라도 어떤 물질적 대가로 무언가 복음의 유익을 얻으려 하는 것은 무속인에게 복채를 주고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원래는 이렇게 세상의 악인들이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들을 내심 두려워해서 불법과 불의로써 해를 끼치려 하나, 결국에는 성공하지 못하고 자멸하는 것이 성경의 원리인데, 어찌된 것이 오늘날 교회와 교인들은 세상이 두려워서 악인들이나 쓰는 불법을 가지고 저들과 싸우려 하는 모습이 마치 복채를 주고 발람을 사주하려는 발락과도 같다. 전광훈 같은 자가 교회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정치적 선동과 국가 지도자를 향한 저주와 비방과 세력 규합 등의 방식은 세상에서나 쓰는 것이다. 순수한 복음에 정치 또는 경제 이념을 교묘하게 짜맞춰 혼란을 야기하는 것도 불법적인 방식이다.
아마도 발람은 발락의 신하들이 많은 재물을 들고 찾아왔을 때 무슨 일인가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말을 가만히 듣고서는 일단 하룻밤 머물면서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를 기다리라고 한다. 이것만 본다면 발람은 마치 별다른 욕심 없이 여호와께서 명하시는대로 순종하겠다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발람은 예수님의 사도들에게도 탐욕에 눈이 멀어 망령되고 미친 자이며,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 한 곳을 부패시킨 거짓 교사의 대명사로도 불릴 정도로 평가된다. 따라서 그가 모압의 장로들을 맞아들이고 여호와의 뜻을 알아본다고 한 것도 결국 순종을 빙자한 탐욕에 근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발람은 다른 여타 주술사들과는 달리, 귀신의 힘을 빌리지 않고 여호와의 힘을 빌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특이한 주술사였다. 이방인으로서, 더군다나 주술사로서 여호와의 능력을 행할 수 있는 자는 아마도 발람이 전무후무했을 것이다. 그정도의 능력을 가진 술사라면 당연히 여호와의 뜻을 파악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발람은 분명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택하신 축복받은 민죽임을 알았을 것이고, 그런 이스라엘을 향해 저주를 해달라고 하는 모압의 요청은 당연히 여호와의 뜻에 정면으로 위배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압 장로들이 아무리 많은 복채를 들고 왔더라도 저들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것이 자기에게 능력을 주시는 신에 대한 충성과 예의일 것이다. 적어도 무당들은 자기들이 섬기는 귀신에게 절대 복종하는 것이 국룰이다. 그러나 발람은 어처구니 없게도 그들을 영접하고 여호와께서 무슨 말씀을 주실는지 알아보겠다고 하는데, 이는 결국 모압 장로들이 가져 온 복채에 눈이 멀어 여호와와 감히 타협을 해보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남들보다 많은 은사를 받았으면서도 이를 겸손히 복음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자기 탐욕을 위해 악용하는 자들은 이 시대의 발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안타깝게도 발람이 아닌 참된 교회와 성도들을 찾아보기가 더욱 어렵게 되어버렸다.
#20200103
#성경묵상 #창세기 #Genesis 16장.
7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8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2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14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15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16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아브라함의 씨를 임신했다고 기고만장하여 주인인 사라를 업신여긴 하갈은 도리어 예상치 못한 아브라함의 손절과 사라의 보복성 괴롭힘에 혹독한 댓가를 치르게 되고 더이상 이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게 된다. 아마도 하갈이 도망하던 시기는 임신한지 적어도 5개월 이상은 되었을 것이다. 이 시기의 임산부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힘들고 지치기 쉬우므로 태아의 건강을 위해서 제대로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여종에게서 멸시를 받은 사라의 분노가 어찌나 극심했던지 사라의 보복은 임신한 하갈의 상태는 안중에도 없었던 모양이다. 하갈은 아마도 이대로 사라의 괴롭힘을 받다 죽으나 아무도 의지할 데 없는 곳으로 혼자 도망치다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여겨서 그 무거운 몸을 이끌고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하갈은 자기가 저지른 짓이 있기 때문에 억울해 할 자격도 없고 자기 처지를 하소연 할 사람도 없는 철저히 버림받은 상황이었다. 하갈은 어디로 가야 할 지 정하지도 못한 채 그저 도망치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광야의 샘물 곁에서 하갈을 만난 여호와의 사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천사 중 하나일 수도 있으나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판단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기다리신 것처럼 샘물 곁에서 하갈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셨다. 비록 하갈이 주인에게 죄를 지어 도망치게 되었지만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하갈이 비참하게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살리시기 위해 기다리신다. 하갈을 만나신 그리스도께서는 그녀의 신분과 이름을 부르시며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를 물어보신다. 하갈의 신분과 이름을 부르셨다는 것은 당신께서는 지금 인자의 모습을 입고 계시지만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셔서 하갈의 모든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신 분이심을 드러낸다. 그녀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를 물으신 것은 몰라서 그러신 것이 아니라 하갈이 스스로 자초지종을 가감없이 솔직하게 털어놓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동산에서 죄를 짓고 나무에 숨은 아담과 하와를 찾으시며 부르신 것과 같다. 지혜로운 자는 범죄하여도 그리스도께서 부드럽게 찾으실 때를 놓치지 않고 회개하나 미련한 자는 끝까지 버티고 외면하다가 결국 그리스도에게서 채찍과 철장으로 흠씬 두드려 맞은 다음에서야 돌아오게 마련이다.
하갈은 처음 보는 사람이 자기를 보고 그렇게 부르는 것에 평범한 사람이 아닌 어떤 초월자임을 직감하고서는 자기 처지를 아뢴다. 그러나 여기서 하갈은 하와가 그리스도 앞에서 동문서답을 한 것처럼 자기가 사라를 멸시했던 것은 쏙 빼고 사라에게 괴롭힘을 받다가 도망친 것만 말씀드린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앞에서도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숨기려는 인간의 죄악 된 본성은 오늘날 그리스도께서 주인이신 교회 내에서도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며 심지어 그리스도로부터 교회를 위임받아 다스린다 하는 담임목사에게서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담임목사가 제 욕심을 따라 잘못 판단하여 불미스러운 사건과 사고를 초래했으면서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듯이 이 때만 넘기면 교인들만 모르게 하면 괜찮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그리스도를 속이려 든다. 그러나 교회를 신부처럼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담임목사에 의해서 교회가 훼손되는 것을 두고 보시지 않으시기 때문에 설령 지금 잠깐은 담임목사의 의중대로 아무 일 없이 지나가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결국에는 악을 선으로 돌이키시는 그리스도께서 그런 담임목사가 자기 꾀에 걸려 넘어지게 하시고 교회 밖으로 쫓아내신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양심의 가책을 주시면 그 순간을 놓치지 말고 우선 엎드려 우리 죄를 어떻게든 자백하는 것이 급선무다.
하갈이 비록 자기 유리한대로만 아뢰었어도 그리스도께서는 은혜로우시게도 그녀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다만 돌이켜 다시 사라에게 복종할 것을 명령하신다. 순종이 아니라 복종하라는 것은 하갈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라의 지시라면 무조건 따라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의 회개가 단지 하나님께 아뢰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갈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므로 그리스도의 명을 따라 사라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잘못을 아뢰며 거두어주기를 간구해야 했다. 이를 행하지 않고서는 자기 목숨을 도저히 광야에서 부지할 다른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교회와 신자들의 회개 또한 이와 마찬가지다. 교회와 신자가 하나님과 이웃에게 불미스러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우리는 통상 피해를 입은 이웃에 대한 의무는 행하지 않은 채 그저 하나님께 아뢴 것으로 죄사함을 받았다 치부하여 혼자 거짓 평안에 심취하곤 한다. 그러나 우리가 회개할 것에 대해서 이웃에게 마땅한 배상 의무를 행하지 않는다면 그런 자의 회개는 그리스도께서 받지 않으시는 죽은 회개일 뿐이다. 아직도 불미스러운 사고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들이 많은데도 담임목사가 바뀌고 시간이 많이 지났다는 이유로 이들을 외면하는 것은 어쩌면 아직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와 죄사함을 받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것일 수 있다. 하갈은 샘물 곁에서 뵌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순종함으로써 자기와 태아의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갈에게 아들의 이름을 지어주시고 큰 백성이 되게 하실 것이라는 계시를 주신 것은 하갈이 다시 사라에게 들어가서 십 수 년간 여종의 생활을 견딜 수 있도록 하시려는 것이었다. 하갈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직접 뵈고 그분에게서 명령과 계시를 받음으로써 다시 여종으로서의 삶을 이어갈 수가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선물로 보내주신 보혜사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확실한 계시는 하갈이 받은 것보다 더욱 우월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계시를 근거로 해서 우리 인생에서 복음으로 인해 어떤 고난을 겪든지 간에 낙담하지 말고 소망으로 견고히 인내할 수 있어야 한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다시 돌아와 용서를 구하는 하갈에게서 그녀가 샘물 곁에서 그리스도를 뵈어 이러저러한 말씀을 받았다는 것을 들었을 것이어서 그녀가 알려준대로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지었을 것이다. 육신으로는 86세에 비로소 얻은 첫 아들이었어도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낳은 것이 아내라 사라의 조바심에 의해 낳았기 때문에 마냥 기뻐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에게 전혀 아버지로서의 애정을 쏟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육신으로서는 아버지로서 한없이 이스마엘을 사랑했어도 영적으로는 상속자가 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언제나 안타까움이 묻어났을 것이다.
#20180103
#과거묵상 2018
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한국교회가 자기들 입맛에 맞는 정권을 옹호할 때 빼먹지 않고 단골로 인용하는 성경구절이다. 작년에 온 국민이 박근혜 탄핵을 외칠 때도 한국교회는 이 구절을 들어서 교인들을 세뇌시키고 박근혜 탄핵을 저지하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고 인류 정치 제도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섭리해 오셨는지를 본다면, 사도바울의 저 권면은 오늘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당한 것인가?
인류 고대사로부터 지금까지 인간사회의 정치제도는 크게 족장제도에서 시작해서 왕정 또는 군주제를 거쳐 오늘날 민주주의제에 이르게 됨을 볼 수가 있다.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권력이 주로 한 사람, 소수에게만 집중되는데, 이는 일반적으로는 배움의 기회가 보편화되지 않았고 특별하게는 하나님께서 그 은사를 아주 소수에게만 집중해서 주신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따라서 백성을 다스리는 지도자의 경우에는 그만큼 일반인보다 더욱 특별한 재능의 소유자여야 하며, 어떤 면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그만한 재능을 주셔야만이 가능한 것이다. 때문에 다스림을 받는 자들은 자신의 지도자에 대해서 마치 하나님을 대하듯이 특별한 경외심을 가지고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시간의 흐름속에서 인류의 구원의 은혜를 보편화 하시면서 배움의 기회도 보편화 시키셨고, 아울러서 정치권력도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통해서 보편화 시키시고 분산시키셨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냐면, 적어도 오늘날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채택한 나라에서는 더이상 그나라의 대표 지도자가 주인이 아니라, 그 지도자를 선출한 국민들이 주인이라는 의미이다. 즉, 민주주의의 제도 안에서 사도바울의 가르침을 해석하자면, 순종해야 할 위에 있는 권세는 대표 지도자가 아니라 그 지도자를 뽑은 국민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 국가 내에서의 모든 정치집단이나 공공기관들, 심지어 종교단체들도 국민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라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역사가 워낙에 짧다보니, 그리고 여러가지 청산되지 못한 부조리한 것들로 인해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그 본질에서 너무나 많이 왜곡되어왔다. 겉으로는 민주주의인데 실상은 왕정 군주제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권력에 빌붙기를 희망한 한국교회는 사도바울의 저 가르침을 심각하게 왜곡해서 하나님보다 부당한 국가권력에 복종할 것을 교인들에게 세뇌해 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더이상 이 대한민국의 국민들의 권세가 훼손되는 것을 막으시기 위해서 국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부당한 국가 지도자에 대해 저항하게 하시고, 평화롭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불법적인 지도자를 폐하셨다. 그리고 국민들의 권세를 통해서 새로운 지도자를 세우시고 이제 하나님의 공의를 세워가시는 것이다.
지금의 정부는 국민들의 권세로 그 권력을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을 잘 알고 실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잘 살펴보고 그 뜻을 잘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들이 지금껏 주장해온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는 가르침을, 이제는 한국교회 스스로 지킬 수 있어야 한다.
2. 국가에 합당한 세금을 내는 것은 교회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음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사도바울께서도 조세와 관세를 받을 자에게 합당한 세를 내라고 가르치시는 것도 그러하다. 이 가르침이 교회에 주는 말씀이 아니면 누구에게 주는 말씀인 것인가? 따라서 종교인 과세에 반대하는 작금의 교회들의 행태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고 하나님의 사역자에 반항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또한 종교인 과세에 동참한다고 하면서도 이를 빌미로 교회가 부교역자들의 사례비를 깎는 만행을 저지른다면, 그들에게 주지 않은 삯이 하나님께 직접 부르짖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