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 (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문학비평을 목적으로)
작성자:게바라
19세기 덴마크의 철학자 쇠안 키에르케고르가 <불안한 개념> <무서움과 떨림> <죽음에 이르는 병>등의 저서에서 그 개념을 명확히 종합하기 이전에도 실존주의적 사조는 파스칼, 중세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 초기 기독교의 성자 바울, 고대 이스라엘의 임금 다윗 등의 글에서 별견되는 하나의 전통이며 일부 분석가들은 그러한 사조의 표현을 세익스피어 도스트예프스키 등 문인들에서도 발견하고 있다.
그 근본 전제는 합리주의 철학(데카르트 칸트 헤겔)이 규정하는 인간에 대한 추상적 이론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실제로 존재하는 체험적 개인의 상황 그 자체가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다. 개인의 구체적 실존은 합리적인 이론으로 설명할수 없는 비합리적인 것이므로 합리 이외의 다른 방식에 의한 질문과 해답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20세기 대표적 실존주의 철학자는 독일의 마르틴 하이데거와 프랑스의 장 폴 사르트르 등인데, 특히 문학 활동과 관련하여 가장 즁요한 영향을 끼친 이는 사르트르이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합리주의에 의한 낙관적 세계관이 불신되자 개인의 실존의 비합리성이 두드러지게 느껴졌고 이것이 프랑스를 중심으로 작가들의 가장 중요한 테마가 되었다. 이들 실존주의적 사조를 띤 문인들에 의하면, 살마의 실존은 기존의 이론 신학 사회 과학이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어떻게 만드느냐에 달려 있다.
사람은 자기가 성취하는 바 그대로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만큼 자유롭다.
이 자유에 의하여 사람은 남이 자기를 규정하려 드는 것을 완강히 뿌리치고 자기를 스스로 정립할 책임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의 자유의지를 발휘해서 행동해야 한다. 이처럼 자유롭게 자기의 실존을 성취하기 위한 행동을 <앙가주망, 현실참여>이라고 부른다.
인생은 한시도 쉴수 없는 행동의 연속이어야 한다 실존은 결국 앙가주망인 것이다.
한편 실존주의는 합리적으로 설명할수 없는 부조리한 세계속에 인간이 실존한다고 보기때문에 결국 인간은 궁극적인 허무, 부조리를 안고 실존하는 것이 된다. 그러한 절대적 무의미와 허무를 받아들이면 불안, 고뇌가 생기지 않을수 없다.
실존의 무의미함에서 오는 고뇌, 불안이야말로 모든 실존주의적 문학의 공통요소가 된다. 그러나 실존주의는 타락한 세상에 자기를 내던져 포기하는 허무주의와는 달리, 각자가 처란 상황에서 오히려 완전한 허무이기 때문에 자유롭게 열렬히 스스로 선택한 또는 창조한 가치에 따라 성실히 행동할것을 가르친다.
절대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것을 완전히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의 실존을 주장한다는 자신감과 성실성에서 그 무의미에 반항하여 계속 행동하는 신화적 거인 시쉬포스는 그러한 실존주의자의 모습이다.
결국 그러한 성실한 행동이 무의미를 의미로 바꿀 수 있다는 처절한 낙관론이 가능한 것이다.
대부분의 실존주의적 경향의 문인들은 무신론적이지만 키에르케고르의 전통을 이어받아 가브리엘 마르셀 등은 허무의 저 너머에서 만날 수 있는 궁극적인 존재 즉 신을 인정하였다.
실존주의적 사조 중 세계에 대한 절망과 인간 존재의 무의미함 등 불안과 허무의 정서는 현대 문명에 대한 공포 및 반감과 합하여 카프카 류의 소설이나 부조리극 등에 잘 표현되고 있지만 실존주의의 보다 핵심적인 강령인 허무를 받아들이고 성실한 앙가주망으로 나간다는 생각은 문학 속에서는 그렇게 큰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듯하다.
그것은 결국 로마의 영웅주의의 근본이었던 견인주의(스토이시즘)의 현대판의 하나라고도 볼 수 있으며 견인주의가 모든 사람에게 다 매력적일 수는 없다. 1940년대와 1950년대 초기에 누렸던 인기를 실존주의 문학은 계속 누리지는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