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적관계상 근친이라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봉마루의, 아니 장준하가 봉우리를 바라보는 촉촉한 눈빛도 애써 '너는
봉마루야'라며, 봉우리를 여자로 보는 마음을 더이상 키우지 말기를 바라면서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드라마였으면 이런
막장설정이 어디있느냐고 노발대발 흥분했을 법한데도, 봉우리와 장준하의 특별한 상황때문에, 솔직하게는 준하에 대한 연민이 앞서다보니
막장이라고 욕을 할 수 없습니다. 봉우리에게 향하는 준하의 마음은 첫사랑같은 순수함보다는, 갈 곳없는 준하의 마지막 고향같은
존재이기에 가슴이 아려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하야, 그러면 안돼!"라고 말해 줄 수 밖에 없어요ㅜㅜ. 차동주와 봉우리에게서
시작되고 있는 사랑때문이 아니어도, 준하의 사랑을 지지하기는 힘듭니다. 준하의 사랑은 동생 우리도, 여자 봉우리도, 아버지도,
할머니도, 그리고 차동주까지도 잃을 수 있는 위험한 사랑이기 때문이에요. 너무나 측은한 사랑이죠.
봉
우리에 대한 준하의 마음은 동생 작은 미숙이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쉬고 싶은 여자 봉우리에 대한 감정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준하는
아버지 봉영규가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요.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 할머니 황순금과 봉영규, 봉우리는 혈연으로
묶여있는 가족관계는 아니지요. 피보다 진한, 없으면 안되는 생필품같은 존재들입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떨어져서는 살 수 없는 가족 이상의 관계지요. 멍군이네 식구들이 봉영규네와 지지고 볶으면서 함께 살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 중심에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함께 있으면 마음이 정화되는 것같은 봉영규가 있습니다. 구름 한 점없는 파란 하늘같은
사람입니다.
준
하는 봉마루라는 이름을 버리면서 위태로운 외줄타기를 하며 살아왔습니다. 떨어지면 끝입니다. 그토록 혐오했던 바닥으로 떨어져야
합니다. 따스함이 없는 어머니 태현숙의 손길, 어머니의 손은 언제부터인가 부드럽고 따뜻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처음 장학증서를
받으러 가서 어머니를 만났던 날, 엄마에게서 느껴질 것이라고 상상했던 부드럽고 따뜻한 손길을 느꼈습니다. 엄마의 손은 이런
거구나...준하는 "내 아들할래?" 라는 말에, 영혼을 팔듯 태현숙의 손을 덥석 잡아버렸습니다. 방화벽을 내려 작은 미숙이
어머니를 죽게 하고, 아버지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고 유치장에 넣은 우경그룹 최진철 사장의 부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죠.
자라가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죠. 최진철과 우경그룹, 어머니와 최진철과의 관계, 동주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본 것
등에 대해서 말이지요. 동주가 한국에 돌아가서 할 일, 어머니 태현숙이 계획하는 것들을 하나 둘씩 알아갈 때마다, 어머니의 손은 더
차갑고 무섭게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처음 장학증서를 받던 날의 손이 아니었습니다. 커갈수록 준하는 알게 되었지요. 어머니가
얼마나 독하고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어머니에게 간과 쓸개를 다 빼준다고 해도, 장준하는 어머니의 아들 차동주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말이지요.
그
런데도 장준하는 갈 곳이 없었습니다. 가족을 버리고 태현숙의 손을 잡은 순간 봉마루는 죽여버렸기에, 봉마루로도 장준하로도 과거의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에게 버림받지 않으려면 어머니가 원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고, 어머니가 바라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어머니에게 버림받지 않은 유일한 길입니다.
한국에 돌아와서 준하는 7살 바보아빠와 눈높이를 맞추는 어린 아이와 같은 여자를 만났습니다. 밤중에 무섭다고 화장실 앞에서
기다려 달라던 아이, 한번도 웃지 않았던 까칠하기만 했던 과거 봉마루를 웃게 했던 여자아이입니다. 오빠라고 하지말라고
해도 귀찮은 껌딱지처럼 들러붙어, "오빠오빠 오빠가 제일좋아" 노래를 부르던 아이입니다. 아버지와 결혼했으니 자기도 성을 봉으로
해야 한다며, 수돗가에서 할머니에게 이름을 뭘로 지을지 심각하게 고민하던 아이, "창고에서 살았으니까 봉창고? 봉부엌?". 세수를
하던 봉마루가 처음으로 피식하고 웃었지요.
우
경그룹 장학생으로 태어나 처음으로 가져보는 시계, 그때 그 시계만 아니었더라면, 작은 미숙이랑도 잘 지냈을텐데, 어쩌면
새어머니도 돌아가시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 가슴 한가득 후회가 밀려옵니다. 작은 미숙이가 유리병에 꽃을 꼽아 들어와서 머리가
좋아지는 꽃이라고, 책상에 놓고 공부하라는데, 퉁명스럽게 말은 했지만 마루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오빠, 나도 이 꽃냄새 맡고
머리 좋아졌어. 가나다라마바사...카타파하 다 외웠어. 거꾸로도 할 수 있어. 하파타카차자...라다나가". 작은 미숙이 앞에서
처음으로 마루가 웃어 보였습니다. 작은 미숙이가 꽃냄새도 맡아보라고 마루의 코에 화병을 들이대자, 마루는 멋적어 개미똥냄새난다고
나오는대로 말해 버렸지요.
"개미똥냄새?" 마루와 작은 미숙이는 처음으로 마주보고 그렇게 웃었습니다. 둘만이 아는 '개미똥냄새 나는 꽃'이었어요. 둘만이
아는 '꽃에서 나는 개미똥 냄새'였어요. "그만 나가, 오빠 공부하게..." 마루도 모르게 오빠라는 말이 튀어나왔지요. 맨날맨날
오빠 아니랬는데, 작은 미숙이는 오빠라고 해 준 마루오빠가 좋아 죽을 지경입니다. 마루에게도 동생이 생겼습니다. 작은 미숙이
봉부엌ㅋㅋ. 지금처럼 웃는 날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마루였지요.
작
은 미숙이가 시계를 보여달라고 하지 않았다면, 아니 작은 미숙이에게 그냥 보여주기만 했어도, 유리병에 시계가 깨지지도, 새어머니가
유리조각에 찔려 피가 나지도 않았을 겁니다. 하늘은 잠시 잠깐의 웃음도 마루에게는 허락해 주지 않으려했나 봅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시계 하나 허락해 주지 않은 거지같은 가족, 친아버지도 아닌 바보아버지를 아버지라 불러야 하고, 말못하는 새어머니에게
미안하다고 말도 못하고 뛰쳐나올 수 박에 없었던 어린 시절의 반항이, 치기가 그 후로도 오래동안 준하를 괴롭혔습니다. 버린
가족들, 돌아갈 수 없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말이지요.
새어머니의 마지막 유품이 되어버린 시계를 맡겨두고, 여기서 기다리라고, 곧 돌아오겠다고 떠난 마루는 16년이 지나 장준하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16년을 한결같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와 작은 미숙이를 만났습니다. 이름도 알지 못하고 떠났는데,
작은 미숙이 봉부엌이의 이름이 봉우리라고 합니다. 작은 미숙이가 꺾어왔던 꽃봉오리처럼 예쁘고, 좋은 냄새가 납니다. 처음으로 웃게
만들었던 그 꽃냄새가 납니다. 이제는 웃어도 될까요? 아니 이제는 웃고 싶습니다. 편하게 쉬고 싶습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허락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봉우리의 어깨에 잠시만이라도 기대 편하게 쉬고 싶습니다. 16년간 버림받지 않기
위해 긴장했던 모든 피로를 잠시 내려놓고 싶습니다. 사랑이어서는 안되는데, 준하는 봉우리가 여자로 다가와서 힘이 듭니다. 몇번이고
몇번이고 우리에게 가는 발길을 멈추려고 했지만, 어느샌가 그 집앞에 멈춰서서 서성이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동
주는 지켜야 할 봉마루의 동생이라고 하고, 어머니는 만나서는 안되는 가족이라고 합니다. "봉우리 내동생 아니에요. 예전에도 지금도
우리를 동생이라고 생각한 적 한 번도 없어요. 나 장준하에요. 왜 다들 우리를 제 동생이라고 해요?". 준하는 그렇게 혼자만이
느끼는 우리에 대한 감정을 토해냅니다. "나 봉우리가 좋아. 우린 친남매도 아니야. 장준하로서 봉우리를 좋아하고 싶어. 그래서
나는 봉마루가 되고 싶지 않아. 나를 봉마루라고 강요하지 마. 봉마루는 봉우리를 사랑할 수 없잖아".
하루만 신이 허락한다면, 아주 잠시만 봉우리를 여자로 사랑하고 싶습니다. 우리야, 그러니 너도 아주 잠시만 나를 마루오빠가 아닌
장준하로 받아다오...술에 취한 척, 그렇게 준하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슬픈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
준하야, 아줌마는 너의 손바닥키스에 길게 드리워진 슬픈 그림자에 순간 가슴이 미어졌다. 그래도 거기서 멈췄으면 좋겠다.
세상에는 관습이라는 이유로 허락되지 않은 사랑이라는 게 있지. 피한방울 섞이지 않았어도, 봉우리에게 봉마루는 아빠 봉영규의 아들,
봉우리의 오빠일 수밖에 없어. 마루오빠가 마루오빠가 아니면, 봉우리의 가족은 없어져 버리잖아. 아빠 아들, 할머니 손자, 고모
아들, 그리고 봉우리의 오빠인데, 장준하든 봉마루든 봉우리를 여자로 사랑해서는 안되는 거지...그럼에도 너의 사랑을 욕하지는
못하겠어. 그저 가엾다. 준하야, 아니 마루야...
그래도 멈췄으면 좋겠다. 우리를 사랑하면 아버지에게도 할머니에게도 다시는 돌아갈 수 없어. 동주에게도, 봉우리에게도... 잠시만
그렇게 혼자 아팠으면 좋겠다.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했다고, 미안하다고, 충격받은 우리 가슴을 진정시켜 주었으면 좋겠다.
조용히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들어봐. 우리의 말이 들릴 거야. 아버지 말이 들릴 거야. 너의 슬픈 그림자가 반쯤은 줄어들
거야. "오빠, 보고 싶어, 마루오빠, 아빠가 매일매일 밥 해놓고 기다려. 아빠는...아빠는...16년동안 따뜻한 밥을 먹은 적이
한번도 없어. 오빠 얼른 돌아와", "마루야, 마루야. 아빠가 잘못했어. 어디갔어, 마루야, 마루야". 눈을 감으면 보일 거야.
마루를 정말 사랑하는 가족들의 얼굴이, 사랑이...
그리고 동주...이제는 준하의 수호천사가 돼 줄 동주, 에고고...얘는 또 어쩌면 좋냐ㅠㅠ 동주를 잃지 않으려면 장준하는 봉마루가
될 수밖에 없을 것같다. 봉마루는 봉우리의 가족, 오빠니까... 로미오와 줄리엣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 사랑은 국경도
인종도 초월하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진입금지 구역도 있는 법, 그게 봉우리 마음인 듯하다. 준하의 사랑이 가슴 아픈 아줌마가 깊은
밤 한숨 쉬며, 눈물로 당부하는 말을 들어 주었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