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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유공자명단에 김경수도지사가 들어가 있다는 글들이 온라인에 돌아디닙니다
시민군들이 미군인들을 납치하려고했다는 글도 있어요. 검색해보세요
이번에는 고정간첩이 유공자라는 글이 있어서 이것과 미군인납치 관련 글을 폄했습니다
지금 518진상규명위가 활동중인 국회 앞에서 시민단체들이 518유공자 명단을 공개하라고 시위를 하는가 하면 국가에 공개정보청구를 하기도 했다. 필자는 지난 10여년 동안 지속적으로 518진실규명에 국가가 나서야 한다고 주장해왔고 지난해 관련법제정운동에 함께하기도 했다
김대령과 지만원의 연구와 저서들 그리고 수백 점이 넘는 자료와 사진들. cia해제문서들. 수많은 탈북자들의 증언과 기록들등등 이들이 진위를 납득이 되도록 국민과 역사 앞에 밝혀야 한다
김대령과 지만원이 정신병자이면 왜 그런지도...
특별히
518단체가 소장한 기록들과 지만원과의 소송기록 그리고 관련 판결문도 다 공개해라
518유공자 명단도 다 밝혀라
광주사람들이 특히 분노한다!
제목: 고정간첩 가족들도 5.18 국가유공자라고?
북한에서도 남한에서도 5.18국가유공자인 시민군 가족
체포된 후 전향하기 전까지 남북한을 수십번 왕래한 고정간첩이었던 김용규 선생은 그의 실화소설 『소리 없는 전쟁』에서 고정간첩들이 남한에서도 부인을 얻고 결혼한 사실을 217쪽에서는 이렇게 기록한다:
“제4대상 1차공작 성공, 대타자 급파 요망"
그로부터 1시간 후 A3 방송으로 22일 정각 23시, 하향 지시를 받으라는 회신이 날아왔다.
통금시간이 해제된 후 하산할 때 형권은 비트에 보관 했던 공작금 가방을 들고 내려와 송 마담 이름으로 통장 을 개설하고 은행에 예치시켰다.
그러고는 송 마담과 의논하여 그녀 명의로 레스토랑을 차리기로 했다. 마담은 아직 법적인 부부도 아닌 자기를 믿고 분에 넘칠 정도로 마음을 써 주는 그를 고맙게 생각하고 개업준비를 서둘렀다.
가게에서 먹고 자고 일하며 개업준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던 9월 22일 밤 11시, 지시가 내려왔다.
"10월 2일 오후 2시에 원남동 로터리와 종묘 사이의 노상에서 A집 암호로 접선하라” (김용규 1999, 217).
그런데 1970~80년대에 고정간첩들이 신분 위장을 목적으로 남한에서 남한 여성들과 결혼하고 자녀를 낳으며 가정을 꾸렸던 사실이 최근에 자신의 실명을 밝히는 한 탈북 지성인 증언으로 확인되었다. 북한애서는 신분이 좋은 가정이었기에 북한에서 영웅 대우 받는 북한의 여러 고정간첩 가정들을 잘 알고 있고, 북한의 5.18 유공자 자녀와 같은 학교에 다녔던 그는 광주사태를 추동한 고정간첩들은 북한에도 남한에도 부인과 자녀들 둔 사실을 증언한다 (아래 뉴스타운 영상 21:25). 그가 놀란 것은 광주사태를 추동한 고정간첩들의 부인들과 자녀들은 북한에서 5.18 유공자 가족으로 특별 대우를 받는데, 그들의 남한 부인들과 자녀들도 5.18 유공자 대우를 받고 있다는 어이 없는 사실이다.
『역사로서의 5·18』과 『임을 위한 행진곡』 등 김대령의 여러 저서들에서도 그 단서가 수록되어 있듯이 윤한봉과 윤상원 등 광주운동권, 즉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계열의 광주사태 주동자들이 무장반란을 사전 준비하기 위해 고정간첩들과 접선하고 있었음이 관찰된다. 그런데 위의 탈북자 역시 광주운동권의 광주사태 주동 배후에 고정간첩들이라는 북한세력이 있었던 사실을 증언하는 것이다. 자신이 13세였던 1980년부터 광주사태를 관찰해 온 이 탈북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점은 북한세력이 광주사태를 추동한 목적은 남한을 멸망시키려는 것이었는데, 어떻게 남한에서는 그 북한세력 및 그들의 남한 부인들과 자녀들이 국가유공자 대우를 받고 있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넌센스다. 이런 미친 넌센스가 역사 논리와 정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을 빨리 바로 잡지 않으면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되겠는가?
청진에는 북한의 5.18 묘지가 있다. 이 묘지는 1980년 광주 일원에서 무장반란을 선동하는 작전을 수행한 후 북한으로 복귀하지 못한 인민군들과 고청간첩들의 가묘이다. 보훈처가 5.18 유공자 명단과 신원을 공개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고청간첩들은 남한에도 부인과 자녀들이 있었는데, 그러면 광주에서 시민군을 지휘한 고정간첩들의 북한에 있는 가족과 남한에 있는 가족 모두가 북한과 남한의 국가유공자들이라는 말인가?
노무현 정부 시절 북한대표단 60 여명이 장대비를 마다하지 않고 멀리 5.18 묘지에 찾아와 먼저 헌화하고 참배한 후 남한에서의 일정을 시작하였다. 민주주의를 탄압하고 공산혁명을 지원하는 국가 대표단이 왜 그렇게 하였는가? 그 이유는 5.18 묘지에는 북한군과 북한에서 파견한 고정간첩들도 안치되어 있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은 북한의 국가유공자들이다. 그래서 현충원에서는 참배할 수 없는 그들이 5.18 묘지에서는 참배하였다. 비록 청진에 5.18 가묘가 있기는 하여도 실제로 공화국 영웅들이 (단 몇 명이라도) 안치되어 있는 묘역을 참배하는 것이 북한대표단에게는 국가적으로 중대사였던 것이다.
지난 3월 23일 문재인이 베트남 공산주의 혁명가 호찌민 묘소에 헌화하였다. 호찌민은 베트남 대학살로 민주화운동의 씨를 말려 버렸는데 왜 문재인이 참배하며 헌화하였는가? 그것은 1970년대부터 이미 베트남 공산당 세력과 문재인은 한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 두 장의 사진을 비교해 보면 5.18 묘지에 헌화하는 북한세력은 5.18 세력과 같은 편인지 다른 편인지 답이 나온다.
(2018년 3월 30일 작성)
[출처] 고정간첩 가족들도 5.18 국가유공자라고?|작성자 림호
시민군을 괴무장단체라고 불러야 함이 옳다. 광주시민들이 시민군을 조직한 적도 없었고, 광주사태 당시에는 시민군이란 명칭도 없었다. 광주사태 당시 다수의 광주시민들은 북한의 광주인민봉기 실황방송을 청취하고 있었는데 북한방송은 광주의 괴무장단체를 '봉기군'이라고 호칭하였고, 북한 용어 '봉기군'이 5.8측에 유리한 어감으로 순화된 단어가 시민군이었다.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냐 아니냐는 SBS '그것을 알고 싶다'에서 광주의 괴무장단체 혹은 시민군이 전남도청을 점거한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 줄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지금 국민이 광주사태에 대하여 품고 있는 의문을 한마디로 이것이다: "몇 명의 깡패들과 서너 명의 대학생들을 제외하면 주로 미진학 청소년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시민군이 도청 공무원들의 출근을 금지시킨 채로 공부도 안 하고, 일도 안하고 총 들고 도청에서 십 년 백 년 먹고 자면 달라지는 것이 무엇인가?" 그런데 SBS 그알은 시민군의 도청 점거의 목적에 대한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도청 점거의 목적이 광주에 거주하는 미국 국민들을 인질로 납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비밀해제된 미 국무부-CIA 5.18 문건에서도 확인된다.
광주사태 당시 김대중의 외곽단체를 '국민연합'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조총련계 한민통의 한국지부 약칭이었다. 함석헌과 김대중이 이 종북단체 공동의장이었고, 힌츠페터를 광주로 데리로 온 김사복은 함석헌의 동지였다. 1974년 광복절 기념식 때 박정희 대통령 암살 시도 과정에서 육영수 여사를 저격한 문세광은 김대중과 김사복의 한민통 동지였다. 일본 국민이던 문세광이 광복절 기념식 행사장 및 행사일정을 자세히 알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김사복이 모든 정보를 주고, 범행에 이용할 차량도 한민통 전용 차량인 자신의 승용차를 김사복이 제공하였다. 1980년 5월에는 윤상원이 한민통 한국지부, 즉 국민연합 사무총장이었기 때문에 그런 인연으로 김사복의 동지가 되었다. 이때 한민통 세력은 1979년의 이란의 회교도 혁명을 벤치마킹하여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세우려 하였다. 이란 혁명 모델이란 관공서에 미국인 인질을 납치한 후에 미국 정부를 상대로 협상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광주사태 주동세력의 미국인 인질 납치 계획이 사전 누설되어 미 대사관에 알려졌기 때문에 5월 21일 광주의 괴무장단체가 전남도청을 함락하는 순간 미국이 광주 거주 미국인 200 여명을 군용비행기로 대피시킨 사실을 황석영은 그의 5.18 기록 저서에서 이렇게 기록한다:
2017년의 문재인의 5.18 눈물 쇼 때 문재인이 껴안아준 유족 김소형씨가 5.18 유족이 된 사연이 광주사태 주동자들의 이런 음모와 깊은 관계가 있다. 미국이 미국인들을 군용비행기를 이용하여 대피시키니까 시민군이 송정리 미군비행장을 점령하려 하였고, 그것을 막으려면 20사단 61연대 제2대대가 먼저 광주국군통합병원을 사수하여야 했다. 김소형씨 부친인 완도시민군 김재평씨는 5월 22일 저녁 그 날의 시민군 활동을 마치고 광주통합병원 바로 옆 쌍촌동 친척집에서 묵으려 했는데, 다른 시민군 조가 계속 통합병원을 향해 총기난사하였을 때 총상을 입었다.
비밀해제된 미 국무부-CIA 5.18 문건이 있으므로 SBS '그것을 알고 싶다'에서 국민에게 널리 알려야 할 사실은 이것이다. "evacuation of americans from kwangju 1980.5.23"이란 제목의 미 국무부 문건에는 5월 21일 국무부가 주한 미대사관에 광주 거주 미국 국민 대피령을 내린데 이어 23일 광주 일원에 거주하는 전 미국 국민들을 당일까지 전원 소개를 완료한 확인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음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광주사태라는 명칭은 5월 21일 괴무장단체가 전남도청을 점령한 이후에 생겨났다. 그러면 광주사태는 왜 일어났는가? 5.18 사기꾼들이 왜곡하는 것처럼 공수부대 과잉진압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괴무장단체가 도청을 점거할 것이라는 정보에 따라 광주경찰은 계엄군에 경찰이 도청기밀문서들을 안전한 곳으로 수송할 때까지만이라도 사수해 달라고 해서 사수한 것이다. 그러면 도청 점거의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SBS는 설명해 줄 수 있는가?
광주운동권은 꼬뮌주의자들이었다. 유럽에서 제일 먼저 공산주의 혁명이 시도된 사건이 1871년의 빠리꼬뮌(Paris Commune : 파리코뮨)이었다. 이미 1976년부터 광주운동권은 빠리꼬뮌을 벤치마킹하며 무장반란에 의한 공산주의(혹은 사회주의) 혁명의 꿈을 불태우며 준비 작업에 착수하였다. 비록 빠리꼬뮌은 실패하였지만 광주꼬뮌은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 광주운동권의 신념이었다. 그런데 1978~1979년 사이에 발생한 이란의 반미주의자들의 혁명이 광주운동권에 전략적 아이디어를 주었다. 그것은 도청 점거로 광주꼬뮌을 실현한 후 미국인들을 인질로 삼고, 반미친북 사회주의혁명 의도를 숨기고 민주팔이하며 미국 정부를 상대로 직접 협상하면 최규하 대통령 정부를 일거에 전복시키고 정권을 장악하여 사회주의 정부를 수립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반미의 정체를 숨기고 잠시 친미 가면을 쓰고 미국과 협상하면 혁명에 성공할 것이라는 자신의 계획을 윤상원은 1980년 5월 23일 밤의 이재의와의 대화에서 피력하였다.)
지독한 반미주의자 윤상원이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키운 운동권 이재의에게 그날밤 들려준 전략도 그런 것이었다. 반미세력이 미국 선거철에 여론전으로 반미 투쟁에 승리한 선례가 불과 몇 년 전에 두 번 있었다. 1975년 봄에 월맹군이 시민군으로 위장하여 베트남에서 무장반란을 일으켜 사람들이 죽게 하자 미국에 반전 여론이 확산되어 미국 정부는 베트남의 친미 정권을 포기하였다. 1979년에는 카터 행정부가 이란의 미국인 인질 구출에 실패하자 여론을 의식하여 친미 정권 팔레비 왕정 지지를 철회하였다. 윤상원이 이재의에게 들려준 전략도 광주에서 시민들이 죽을 수록 국제 여론이 미국을 압박하여 최규하 대통령 정부 지지를 철회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무장봉기 지도부가 대안을 제시하며 미국을 상대로 직접 협상하면 미국 정부는 여론에 굴복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최규하 친미 정부는 일시에 전복되고 윤상원이 주도하는 유혈 혁명의 승리는 보장되어 있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미국 카터 대통령이 이란에서 미국인 인질 구출에 실패하자 선거철에 더 여론이 민주당에 불리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이란의 친미 정권 지지를 깨끗이 포기한 것을 광주운동권이 벤치마킹한 것이 1980년 5월의 광주사태 발생 배경이었음을 남찬순 기자는 이렇게 정리한다:
역사는 팔레비가 아니라 호메이니가 독재자였음을 실증한다. 그러나 반미세력이 미국 여론을 이용하여 친미 지도자를 제거할 때 독재자라는 딱지를 붙인다. 호메이니는 잠시 반미 발톱을 감추고 미국과 협상하는척하여 카터 대통령으로 하여금 대화에 매달리게 해놓고 인질은 석방하지 않은 사실을 이상우 기자는 이렇게 보도한다:
윤상원은 중남미의 공산주의 혁명가 체 게바라를 우상으로 받들며 그의 '도시게릴라'를 한국 상황에서 벤치마킹하려 하였다. 그래서 그의 추종자들은 체 게바라의 전술 이론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구성한 무장단체는 실은 오합지졸에 불과하였다. 5월 27일 새벽 도청 구간에서 사망한 시민군 희생자 10명은 모두 시민군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새벽 4시에 이양헌이 도청의 모든 전등을 소등하자 아직 계엄군이 도청 뒷담에 도착하기 훨씬 전에 시민군들은 아무데나 대고 총을 쏘기 시작하였는데 자기 편을 향해서 쏘았다. 윤상원 자신도 박남선의 M16 유탄발사기 오발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북한군은 5월 21일 도청을 함락하여 광주운동권에 인수인계하고 무등산으로 이동하였기 때문에 27일 새벽의 시민군 전력은 아주 허약하였다.) 윤상원이 아무리 강한 무장단체를 조직하려 해도 현실적으로 그것이 되지 않았다. 그에게는 광주사태를 선동하는 유언비어 유인물을 제작하는 것 하나만 해도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그러면 그가 그런 오합지졸 수십 명을 데리고 60만 대군 국군을 상대로 무모한 싸움을 하려는 바보였는가? 아니다. 그에게는 전략이 있었다. 그리고 그 전략은 미국과 직접 협상하는 것이었는데, 미국을 대화 테이블로 나오게 하려면 도청 점거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5.18 왜곡세력이 주장하는 것처럼 공수부대 과잉진압이 있었기 때문에 광주사태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미 몇 달 전에 도청 점거 계획이 치밀하게 세워져 있었음을 5.18 기념재단 설립자 윤한봉은 이미 1990년대에 자신의 자서전에 밝힌 바 있다. 황석영은 윤한봉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래서 그는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이전에 이미 그런 미국인 인질 납치 계획을 알고 있었던바, 그가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인 1988년에 『창작과 비평』지에 "항쟁 이후의 문학"이란 제목으로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밝힌다:
임낙평은 윤상원의 전남대 후배로서 5.18 단체에 몸담고 있지만 그가 아무리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는 진실은 윤상원이 미국인들을 인질로 납치하려 했던 사실이다. 미국이 광주의 괴무장단체의 무장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항공모함 두 척을 보내 주었다는 유언비어를 윤상원이 지어낸 경위를 설명하려면 이건 감출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런 사실을 임낙평은 아주 완곡하게 이렇게 서술한다:
윤상원은 혁명가였지만 그의 후배들이 모두 그처럼 과격하였던 것은 아니다. 도청도 점령하여 그 다음 단계인 미국인 인질 납치를 시도하려 하였을 때 그의 후배들의 반대가 의외로 거세어 실행되지 못했다. 그래서 선교사들을 제외한 미국 국민을 모두 미국 정부가 소개한 후에도 몇몇 주동자들은 여전히 미국인 인질 납치 계획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는데, 그 중에 조선대 출신 운동권 김현장이 있었다.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은 괴무장단체 무기 강제회수 작전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광주사태 당시 김재규 대법원 재판이 진행되고 있었고, 김대중 세력의 운동권 변호사들이 김재규 변호를 하였기 때문에 법리 전투가 대단하였다. 전두환 합수부장의 그때 임무는 김재규 재판에 관한 것이었다. 지금 아무리 5.18 특별법을 제정하여 재조사하고, 아무리 SBS와 JTBC에서 모든 자료를 뒤져보아도 전두환이 괴무장단체 무기 강제회수 작전에 관여되어 있었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혀 그런 사실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 38년간 전두환에게 누명을 씌우는 사기꾼들이 내세우는 유일한 근거는 김현장이 5월 22일 북한방송이 불러주는 대로 베껴 문정현 신부가 전주성당 고속복사기로 수 만장 제작하여 전국에 뿌린 유언비어 삐라뿐이다. (얼마전 SBS가 찾았다는 한 줄 문건도 근거가 있는 문건이 아니라, 김현장이 퍼뜨린 유언비어를 누군가 재인용하여 그런 광주사태 유언비어가 있음을 미국무부에 보고한 문건에 불과하였다.)
김현장은 광주사태 당시 광주에 없었으며, 전혀 광주사태 현장을 본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저 멀리 전라북도 전주에서 '전두환의 광주살륙작전'이란 유언비어 삐라를 제작할 수 있었는가? 그 유언비어 원작자는 북한 대남공작기관이었기 때문에 김현장은 자기가 퍼뜨린 유언비어에 대한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가 5월 26일 저녁 때 갑자기 전남도청에 나타났는데, 그 이유는 지금이라도 외국인 신부들을 인질로 납치하자고 시민군 지도부를 설득하기 위함이었다.
김현장은 김대중의 내란음모의 핵심 주동자였다. 그는 김대중과 형 아우 하는 사이였으며, 서울 동교동의 김대중 집과 광주와 해남 등지를 왔다갔다하면서 광주사태를 일으킬 준비를 하였다. 그는 광주사태 주동자들이 이란의 미국인 인질을 이용한 반미 회교 혁명을 벤치마킹한 사실을 감추지 않는다. 5월 26일 초저녁까지는 전남도청에는 무장투쟁파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무기 반납을 호소하는 학생들과 시민들은 도청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윤상원과 박남선 등에게 간절히 무기 반납을 호소하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회의실에 나타난 김현장이 이제라도 외국인 수녀, 신부, 목사, 신문기자들을 인질로 삼아야 승리할 수 있다고 했던 연설을 그는 이렇게 증언한다:
그러나 김창길 등 무기 반납을 호소하는 학생들과 시민들에게는 외국인 선교사들을 인질로 납치하자는 김현장이 간첩으로 보여 자칫 시민군들끼리 총질할지도 모를 만큼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김현장이 전두환 관련 유언비어를 열심히 유포한 것도 그 긍극적인 목적은 미국인들을 인질로 납치한 후 봉기지도부가 미국 정부와 김대중의 집권을 조건으로 협상하는 것이었는데, 주동자들에게는 그것이 명전략이었지만 대다수의 광주시민들은 그런 극단적인 반미 행동에 따르기를 완강히 거부하였다.
문재인이 의무적으로 5.18 행사에서 제창하게 한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에서 "산 자여 따르라"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윤상원을 따라 미국인들을 인질로 납치하라는 것이다. 지난 2018년 봄에 아프리카의 한 해안에서 한국인 선원 3명이 인질로 납치되었을 때 문재인이 문무대왕함을 급파하였다. 그렇다면 한국인이 남의 나라 국민을 인질로 납치해도 되는가? 또 하나 따르라는 것은 도청에 8톤의 다이너마이트 폭발장치를 한 것을 따르라는 것이다.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냐 아니냐는 윤상원과 그의 추종자들이 전남도청에 8톤 분량의 다이너마이트 폭발장치를 설치한 이유를 SBS '그것을 알고 싶다'가 설명해 줄 수 있느냐의 여부에도 달려 있다. 그러나 SBS는 그 질문에 절대로 대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8톤 다이너마이트는 미국인들을 인질로 삼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이란의 반미 회교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군 특공대가 미국인 인질을 구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여기에 윤상원이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한 이유가 있다. 광주 금남로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폭발장치를 한 것은 누군가를 인질로 삼기 위함이며, 인질 구출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하려 함이었다. 그러면 윤상원이 전남대 자기 후배들과 광천동 자기 동네 사람들과 들불야학 제자들을 인질로 삼기 위해 다이너마이트 폭발장치를 하였는가? 아니다. 원래 의도된 인질은 미국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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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5.18 국가유공자는 개나 소나 모두가 하는 것입니다. 호남 출신. 종북좌파, 민주당원이면 희망하면 되는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