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서천군 특집
백제 유민의 恨
한국의 명품 풍류로 이어지다
유민들이 빚은 소곡주. 세계문화유산 지정 한산모시
무령왕의 ‘우두성’ 건지산성… 주류성 규명
시급하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 칼럼니스트, 전 충북도문화재 위원) 사진 박준성
백제 복국의 恨 백강 신성리에 ‘전적
위령비’를…
역사의 가람 백강(白江).
백강은 백마강, 금강의 다른 이름이라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1400여 년 전. 백제 전사와 일본 지원군 수만 명의 뼈가 묻힌 비극의 강이다. 멸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맞서 싸우다 산화한 이곳은 백제 복국(復國) 의지와 좌절을 간직한 눈물의 강으로 회자되고
있다.
당시 처절한 전쟁이 벌어진 장소는 백강의 어디인가. 삼국사기에는 백강, 일본서기에는 백촌강(白村江),
중국사서에는 백강구(白江口)라고 기록되고 있다.
과거 백강에서는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까. 백제 복국군을 지휘했던 의자왕의 아들 풍왕(豊王)은 일본에서 건너와
주류성(周留城)에 본거를 만들었다. 잃어버린 백제 땅을 모두 회복하는가 했더니 나·당연합군의 공세로 인해 수세로 몰리게 된다. 왕은 일본에 급히
지원군의 파견을 요청했다. 일본 천지왕(天智王)은 AD 663년 7월, 약 4만 7000명의 병력을 한반도에 파견한다.
일본에서 건너온 지원군은 백제 복국군과 합세하여 나·당연합군과 백강에서 처절한 전투를 벌였다. 한 역사학자는
당시 백강전투에는 양측 군대의 수가 19만 명이 조우한 것으로 아시아에서 가장 큰 연합군 전쟁이었을 것으로 상정하고 있다.
백강 어구에 들어온 일본 지원군은 강안에 포진하고 있던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으로부터 공격을 받는다. 일본
전선을 구하려 출전한 백제기병은 신라기병과 강안에서 조우했으나 숫자적으로도 열세였다. 강 어구에 정박도 못한 4천 척의 일본 선단은
나·당연합군의 화살공격을 받고 불길에 휩싸였다. 지원군은 상륙도 하지 못한 채 강물에 빠져 익사하거나 화살을 맞고 죽어갔다. 결과는 백제·일본
연합군의 대참패였다.
풍왕은 눈물을 머금고 주류성을 피해 고구려로 피신한다. 백제 구토에서 승전보를 기다리고 있던 백제 유민들은
백강전투 패전 소식을 듣고 모두 일본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된다. 일본서기는 당시 백제 땅을 떠나는 유민들의 탄식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백제의 이름은 오늘로 끊어졌다. 조상의 묘를 어찌 다시
찾아뵙겠는가?”
백강은 지금의 금강 하구둑 일대로 추정된다. 한산 가까운 신성리 갈대밭으로 비정하는 학자도 있다. 한산 건지산성을
주류성으로 추정하고 이 성을 돕기 위해 강어구로 들어오다 나·당연합군과 일대 조우한 것이라고 추정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그
어디에도 이들의 원혼을 위로해줄 전적비나 위령비가 없다.
백제의 복국운동은 왜 그처럼 처절한 것이었을까. 왜 백제 전사들은 3년 동안 신라와 당나라군에게 극렬하게
저항한 것인가. 이는 백제의 우월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백제는 신라보다 문화적으로 큰 차이가 있었으며 건축, 제방축조기술을
비롯한 각종 신기술을 가르치는 입장에 있었다. 백제의 공장들이 신라왕실의 용역 요청으로 서라벌에 파견되어 황룡사의 대역사에 참여한 것은 기록과
유물로 입증되고 있다. 이런 입장에서 신라의 무력 통합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백강 위령비는 백제 전사와 일본 전사들의 영혼을 위로한다는 뜻도 있지만 한·일 고대사에서 백제의 우위를 입증하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한·일 간 우호는 미래 한국의 역사 발전 과정에서 매우 중요하다. 과거 36년 역사의 틀에 갇혀 반목하고 얼굴을 붉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위령비를 세우면 많은 일본 관광객을 불러들일 수 있다. 많은 일본인이 일본서기에 기록된 백강전투 고사를 알고 있다.
일본 교과서에서도 이 전쟁을 다루고 있다. 1400년 전 백강과 주류성을 찾는 일본인은 크게 늘 것이다. 왜 우리 정부와 지자체는 이런 중요한
사안을 과소평가하고 흘려보내는 것일까.
서천군 마서면 도삼리와 군산시 성산면 성덕리를 연결하는 금강하구둑 방조제의 총 길이는 1841m로
1990년에 완공됐다. 연간 3억 6000만 톤의 담수를 공급한다. 전라북도와 충청남도 일원에 농업용수와 공업용수를 공급하고 금강 주변 지역의
홍수를 조절한다. 그러나 여기에 담수된 물은 매년 수질이 악화되고 있다. 지금은 5급수로 향후 5년 이내 공업용수로도 부적합하다고 한다. 하구둑
일부를 헐어 바닷물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환경학자들의 의견이 대두되고 있으나 실현은 미지수다.
은빛 신성리 갈대밭
11월이면 갈대꽃은 모두 은빛으로 갈아입는다. 백제 전사들의 고혼이 환생한 탓일까. 신성리 갈대밭은
화사하면서도 아름답고 외로운 느낌이다. 20㏊에 이르는 넓은 갈대밭 풍경은 장관이다. 이곳은 얼마 전 ‘한국 관광의 별’ 생태관광자원부문 12개
후보지 중 한 곳으로 선정된 곳이다.
충주가 낳은 시인 신경림은 필자가 문화부 기자로 있을 때 자주 청주를 찾았다. 나는 시인과 막걸리를 기울이며
충주 얘길 주로 나눴다. 그의 남한강을 주제로 한 서정적인 시는 항상 나의 가슴에 와 닿았는데 문득 그의 시 ‘갈대’가 떠오른다.
갈대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신성리 갈대밭은 송광호, 이병헌 주연의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비무장지대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다.
백제 신라군이 조우하여 피를 흘리던 이곳에서 분단 한국 비극의 무대가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탐조여행
금강 하구둑에는 겨울철이면 시베리아 대륙에서 진객들이 날아든다. 바로 철새들로서 무리지어 나는 모습은 일대 장관을
이룬다. 계절에 따라 도요새가 통과하는 주요 이동 통로이며 희귀종인 검은머리 물떼새와 검은머리갈매기의 중요한 월동지이기도 하다.
조류 전문가들에 따르면 때로는 댕기흰죽지도 볼 수 있으며 시기에 따라 가창오리 무리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늦은 가을과 겨울이면 탐조여행객들이 몰려들어 철새의 군무들을 카메라에 담는다.
건지산성은 우두성-왕성 건지산성은 한산면 소재지에 있다. 왜 건지산성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일까. 성은 건지산의
정상부근을 에워싼 말안장 모양의 내성과 그 서북쪽 경사면을 둘러싼 외성의 2중구조로 되어있는 산성이다.
성을 쌓은 시기는 백제 중기로 추정하고 있다. 내성은 흙을 다져 쌓은 판축형(版築形)이며 외성은 돌과 흙을
섞어 쌓았다. 산성의 남서쪽 낮은 봉우리에는 2개의 소규모 산성이 있으며 이는 건지산성에 딸린 보루로 백제 산성의 특징을 보인다.
성안 절개된 곳에서는 역사의 편린들이 수없이 나뒹군다. 태토가 고운 연질(軟質)의 백제 와편에서부터 신라,
고려시대 와편과 토기가 많이 찾아진다. 이 조각들은 건지산성의 축조시기를 가늠케 하고 천수백년 금강하구를 지켜온 유구한 역사를 입증하는
것이다.
우두성-건지산-한산은 어떤 연관을 갖는 것일까.
‘우두성’은 삼국사기 무령왕조(武寧王條)에 나온다. 기록을 종합해 보면 사냥을 즐겨한 동성왕(東城王)은
23년(AD501) 부여 마포촌 일대로 사냥을 나갔다가 측근인 좌평(佐平) 백가(苩加)에게 시해된다. 당시 무령왕은 일본에 있었는데 급거
귀국하여 왕위를 계승했다. 왕위에 오른 무령왕은 병사들을 이끌고 우두성(牛頭城)으로 가서 한솔 해명(解明)으로 하여금 백가의 근거지인
가림성(加林城)을 공격, 백가를 잡아 죽이고 백강에 던졌다.
과거 한국사연구의 태두이셨던 고(故) 두계 이병도 박사는 우두성을 삼국사기 지리지 기록인 우수주(牛首州)와
연계시켜 춘천으로 비정한바 있다. 그러나 당시 백제국의 상황으로 보아 춘천보다는 가림성(지금의 부여 임천) 인근의 지역으로 비정하는 게 타당하여
두계설은 모순이 있었다. 가림성은 지금의 충남 부여이며 동성왕이 시해된 마포촌(馬浦村)이란 곳도 이 성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비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삼국사기 무령왕이 진주했던 우두성은 어디일까.
‘건지’는 ‘건길지(鞬吉支)’라고도 하며 백제시대 왕을 일컫는
호칭이다. 주서(周書)에 치자계급(治者階級) 부여계통(夫餘系統)에서는 ‘어라하(於羅瑕)’, 피치계급인 마한계통(馬韓系統)에서는
‘건길지’라불렸다고 기록됐다). 한산 건지산성이 주목되는 것도 바로 이 호칭에서부터 시작된다.
특별히 주목되는 것은 동국여지승람 한산군 연혁조에 건지산성이
우두성(牛頭城)이라고 기록된다는 점이다. 또 ‘대동지지’ 한산군조에도 ‘백제 동성왕 8년에 우두성을 축성했는데 지금의 건지산,
예성(古城)이다’라고 하여 우두성이 한산임을 기록하고 있다. 한(干, 汗, 韓, 翰)은 모두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지금의 한산이란 지명
속에는 바로 우두머리와 왕성의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것이 건지산이란 이름으로도 남아 1500년 백제의 잔영을 보여주고 있다. 무령왕은
부왕이 시해된 곳에서 역적 백가를 죽여 그 원한을 갚은 셈이다.
일본에서는 우두(牛頭)를 지혜의 신으로 여기는 전통이 내려온다.
즉, 우두천왕은 일본 건국신화 수사노오의 화신이자 부처(佛)로도 지칭되는 것이다. 나라(奈良) 백제왕신사에서도 약사여래의 화신인 우두천왕으로
모셔지고 있다.
일본을 여행하면서 신사(神社)를 방문하면 건물 앞에 돌로
만들어진 소의 형상을 발견할 수 있다. 고대 일본에 신진기술과 지혜를 가르쳐 준 백제 ‘우두머리(왕)’를 소의 형상으로 변화시킨 흥미로운 유산이
아닐 수 없다.
건지산성에서 내려다보이는 한산면 종지리에는 한말(韓末), 서재필
박사와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 민족의식을 일깨웠던 선각자 월남 이상재(1850~1927) 선생의 생가가 있다. 월남은 어린 시절 건지산성을
바라보며 민족의식을 일깨웠을 게다. 생가는 서천군에 의해 성역화 되었으며 월남의 생애를 한눈에 읽힐 수 있는 유물관이 마련돼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한산 소곡주
백제 망국의 한을 달랜 한산
소곡주
한산 소곡주는 백제 유민들이 망국의 한을 달래기 위해 마신 술로 회자되고 있다. 그러니 14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셈이다. 백제 유민들은 소곡주를 마시고 비가(悲歌)인 산유화가를 부르며 상심을 달랬을 게다.
산유화가는 증보동국문헌비고(增補東國文獻備考) 권246 백제 가곡조에도 “백제가곡으로 산유화가 한 곡이
있는데, 남녀가 서로 즐거워하는 가사이며 가락은 서글프다(山有花歌一片 男女相悅之辭 音調凄苑)”라는 기록이 있다. 우두성에서 싸웠던 백제 전사들도
소곡주를 마시며 전의를 불태우고
이런 노래를 불렀을 게다. 역사의 상흔이 묻어난 탓에 술은 더욱 향이 짙고 취기는 가슴까지 적신다. 나라
잃은 슬픔을 어디에 비교할까.
소곡주는 ‘앉은뱅이 술’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취하는 줄 모르고 마시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게 되기 때문이라
한다. 삼국사기의 백제본기 중 다인왕 11년(318년) ‘흉작이 되자 민가에서 제조하는 가양주를 전면 금지하였다’는 기록을 감안하면 이미 4세기
일반 가정에서 가양주를 제조했음이 나타나고 있다. 추수가 끝난 뒤 음력 10월경에 많이 빚어지며 동네 여인들이 목욕재계를 한 후 정성을 다하여
빚는다고 한다. 만드는 법은 멥쌀로 무리떡을 쪄서 떡과 누룩가루를 묽게 섞어 아랫목에서 발효시켜 술밑을 만든다. 찹쌀로 다시 술밥을 찌고,
누룩은 밀가루처럼 곱게 친 가루누룩을 준비한다. 시루 맨밑에 술밥, 그 위에 누룩가루, 그 위에 술밑을 깔아 마치 시루떡처럼 앉힌 뒤 100일
동안 땅 속에 묻어둔다. 100일이 지난뒤 열어보면 끈끈하고 노란 술이 되어 있다.
1970년대에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됐으며 기능보유자 우희열(79, 농식품부 식품명인 제19호) 할머니와
아들 나장연(48) 대표가 양조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한산면 일대에서는 소곡주를 빚는 가구가 200여 집이나 된다. 그러나 ‘한산 소곡주’라는
공식 상표로 출시되는 곳은 나 대표 집뿐.
2004년 노무현 대통령 시절 청와대에 납품이 시작되었으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어느 해는 도자기형
4000세트가 2주 만에 모두 팔리기도 했다.
한산 소곡주는 지난 4월 벨기에에서 열린 세계 3대 주류품평회 ‘2014년 몽드셀렉션’에서
금상을 수상한 데 이어 최근에는 영국 주류품평회(IWSC)의 증류주(Spirits) 부문에서 브론즈 메달을 수상하기도 했다. 세계3대명주로
각인되어 서구인들도 소곡주의 맛을 사랑하기에 이르렀다.
올올이 고운 한산모시
조선 정조 때 문신 채제공(蔡濟恭)은 정승의 지위에까지 오른 인물. 그가 아내를 잃은 후 얼마 있다 모시옷을
입을 기회가 있게 된다. 채제공은 모시옷에 묻어난 아내의 바느질 솜씨를 발견하고 눈물짓는다. 그는 백저행(白苧行)이란 시를 지어 아내의 영전에
바치며 그리움을 슬프게 노래한다.
한산모시
새하얀 모시 베 백설처럼 하얗구나
당신이 살아있을 때 남긴 물건
사랑하는 남편 위해
모시 한 필 끊더니
바느질 미처 못 마치고 당신이 먼저 떠났구려
할멈이 울면서 오래된 상자를 열어
아씨가 옷을 짓다 돌아가셨으니
누가 이 솜씨를 따를까 하네
모시 베 전폭이 벌써 마름질은 끝나 있고
바느질하던 자욱 여기저기 남아
있네
이른 아침 빈방에서 모시옷을 입으니
당신의 얼굴 어렴풋이 다시 보는
듯하오
당신이 창 앞에서 바느질하던 모습을 생각하니
내가 이 옷 입은 것을 당신이 못 볼 줄 어찌 알았겠소
이 옷이 하찮아도
당신의 사랑이 묻어 있으니
이후에는 언제 당신이 바느질한 옷을 입을 수 있겠소
… (하략)
서천의 명물은 백제 장인의 정교함이 묻어나는 백설같이 희고 고운 한산모시다. 모시풀에서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시옷이
되기까지는 어렵고 긴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 인고를 거쳐 탄생된 한산모시에는 선조들의 지혜가 올올이 배어있다. 요즈음 만들어진 옷감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한산모시가 지닌 품격과 아름다움을 능가하지는 못한다.
모시는 일명 저포·저치라고 한다. 모시나무가지 껍질을 벗겨 재료로 삼는다. 백제시대부터 한산에서 제조하여
왕궁에 진납했을 것으로도 짐작되며 기록으로는 신라 경문왕(재위 861∼875) 때에 당나라에 보냈다고 돼 있어 교역품으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모시는 보통 1년에 3번 정도 수확하는데 5∼6월초, 8월초∼8월 하순, 10월초∼10월 하순이며, 두 번째
수확한 모시가 품질이 제일 좋다. 제작과정은 재배와 수확, 태모시 만들기, 모시째기, 모시삼기, 모시굿 만들기, 모시날기, 모시매기, 모시짜기,
모시표백 순이다. 우선 재배하여 수확한 모시를 훑고 겉껍질을 벗겨 태모시를 만든 다음 하루쯤 물에 담가 말린 후 이를 다시 물에 적셔 실의 올을
하나하나 쪼갠다. 이것을 모시째기라고 한다. 쪼갠 모시올을 이어 실을 만드는데 이 과정을 모시삼기라 한다.
모시는 보통 7새에서 15새(보름새)까지 있는데 10새 이상을 세모시라 하고 숫자가 높을수록 고운 최상품으로
여긴다. 1새는 30㎝ 포폭에 80올의 날실로 짜여진 것이다. 모시는 습도가 모자라면 끊어지기 쉬우므로 더위에도 통풍이 안 되는 움집에서 짜야
하고, 바람이 불거나 비오는 날에는 일을 할 수가 없다.
모시짜기는 201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한산면에서 열리는 한산모시축제는 2014년도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우수축제로 선정되기도 했다.
금제관식(왕) 국보 154호(제공 공주국립박물관)
노박래 서천군수
노박래 서천군수, 문화 관광발전 노력
노박래 서천군수는 30여 년의 풍부한 행정 경험을 바탕으로 소외되고 정체된 서천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겠다고
의욕을 보인다. 그는 머무는 관광, 즐기는 문화·예술, 건강한생활체육 정착, 장항 송림 생태관광지구 지정, 문헌서원과 연계한 역사문화체험
관광테마벨트 구축, 서천군립도서관 건립, 마량리 해양·문화관광지 조성에도 힘을 기울일 것이라고 의욕을 피력했다. 그는 또 올해의 관광도시 선정
추진, 서천을 빛낸 작가 초대전, 영세 고령농 및 여성농업인 육묘지원사업, 장항건어물 특화단지 조성사업에 중점을 둘 예정이다. 특히 쌀시장
개방화에 대응한 서천쌀 경쟁력 강화, 장항국가생태산업단지 활성화 추진 등의 54개 신규시책과 63개 개선보완시책을 펴기로 했다.
지난 7월 1일 취임 직후 100여 일 동안 노박래 군수가 가장 비중을 둔 부분은 바로 군민의 목소리를 듣는
것. 주요 사업장 방문과 읍·면 순방, 기업체 간담회 등을 갖고 군민 생활과 맞닿아 있는 현장을 살펴보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지난
8월에는 민선 6기 서천군 발전을 이끌 공약사업 선정을 위한 토론회를 개최해 장항국가산단 선도기업유치, 통합복지 일자리확대, 군도 25호 4차선
확포장 추진 등 6개분야, 71개 사업을 확정했다.
군민 모두의 염원인 장항국가생태산업단지가 지난달 1일 착공돼 장차 서천, 장항 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노 군수는 지난달 29일 열린 비전 선포식에서는 ‘풍요와 기회의 서천 공동체 만들기’를 민선 6기 군정 운영 미션으로
정하고 ‘새로운 내일을 여는 행복한 서천’을
비전으로, 슬로건은 ‘행복한 군민 희망찬 서천’으로 채택해 군민 중심의 군정을 펼치겠다는
의지를 담아냈다.
노박래 군수는 “취임 후 줄곧 군정을 파악하고 군민을 위한 행정을 추진하기 위해 나름대로 동분서주 했다”며
“군민과 함께 소통하고 현장중심의 업무추진으로 새로운 내일을 여는 행복한 서천을 위한 군정을 펼쳐 나가겠다”고 말했다.
한편 인근 지자체와도 소통을 추진하는 노 군수는 문동신 전북 군산시장과 만나 지역 현안에 대해 공동 해결방안을
모색하고 그동안 쌓였던 앙금을 풀어가는 데 노력하자며 두손을 잡았다. 노 군수는 “군민을 위한 행정혁신, 기업하기 좋은 도시, 행복한 서천
건설에 신명(身命)을 다 바치겠다” 고 각오를 다졌다
첫댓글 _()_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_()()()_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