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 세 가지를 대십시오. 생각해봅니다. 나에게 이런 혜택이 온다면 무엇을 구할까? 이야말로 일생일대 인생역전의 기회가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상상만 해도 신나는 일입니다. 마치 로또 한 장 사놓고 주말까지 꿈꾸는 기분입니다. 소원 하나도 아니고 세 가지나, 세상에! 어쩌면 나이마다 사람마다 다른 소원들이 나오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기업 성공, 대학 입학, 환상적 애인과의 만남, 연인의 마음 얻기, 취업, 신기술 개발 등등 얼마나 많습니까? 연예인이라면 또 다른 소원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연말의 연예 대상을 꿈꿀 수도 있습니다. 아카데미 주연상이나 작품상, 감독상을 바랄 수도 있겠지요. 세상 살면서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소원이 한두 가지입니까?
희망은 절망을 이기는 유일한 힘이라고도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이러저러한 소원들을 만들며 지냅니다. 어린 시절의 소원과 청소년 때 그리고 자라서 바라는 것들은 당연히 다릅니다. 분명한 것은 누구를 막론하고 형편이 좋든 나쁘든 소원은 있게 마련입니다. 저런 사람이 무슨 소원이 있겠어? 하지만 의식주 걱정 없다고 해서 인생 종치는 것 아닙니다. 어차피 인생이란 꿈을 꾸며 꿈을 하나하나 이루어가며 사는 것입니다. 있는 사람은 있는 대로, 없는 사람은 없는 대로 소원을 가지고 달려갑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이룬 소원보다는 이루지 못한 소원을 안고 살다 갈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소원을 가지는 것이 무용하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어느 날 서사학자 ‘알리테아’가 이야기 속에서나 보던 정령(精靈)을 만납니다. 상점에서 어찌어찌 얻은 호리병의 입마개가 깨지는가, 했더니 그 안에 갇혀 있던 정령이 연기 가운데 등장합니다. 그리고는 감사의 대가로 세 가지 소원을 말하라 합니다. 하기야 그 세 가지 소원을 이루어줌으로 해서 자신도 완전히 해방이 되는 것입니다. 정령도 자유를 희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게 말이 되는가? 아무튼 갑작스런 사태에 이것을 믿어야 하는지 현실인지 그리고 도대체 이 마당에 무슨 소원을 말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그래서 일단 시일을 미룹니다. 글쎄 소원을 말하는 것도 기한이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중년의 작가 여인과 정령의 만남이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갑니다.
소원 세 가지 내놓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운 일인가? 평소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거나 가지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던 사람이라면 아마도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선택하기 어렵겠지요. 반대로 평소 이렇다 할 꿈도 없었다면 이 또한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생각을 해보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뭘 말해야 하지? 본인 스스로 당황할 것입니다. 그럴 일이 행여 생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살면서 소원 몇 가지는 품고 살아야 하겠다 싶기도 합니다. 버킷리스트라는 것이 있는데 구태여 그렇게 많이 꿈꾸지 않아도 몇 개는 가지고 추진해보는 것도 삶을 힘차게 만들 수 있는 동기가 아닐까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인생은 만들지 말아야지요. 본인도 힘들 것입니다.
시간이 천연되면서 정령 ‘지니’는 자기 이야기를 꺼냅니다. 하기는 이야기 좋아하는 알리테아가 그렇게 유도하였습니다. 자신의 이야기 소재가 될 테니 말입니다. 그래서 드디어 3천 년의 숨겨진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출발은 그 유명한 솔로몬 왕입니다. 시바 여왕을 좋아해서 찾아갔답니다. 세상에! 성경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이 원본 훼손 소송을 걸지는 않으실라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여왕을 좋아하던 지니가 막강한 연적을 만났습니다. 지혜의 왕을 상대하다니, 결과는 뻔합니다. 그게 시작입니다. 그만 정령이 되어 호리병에 갇혀 버려집니다. 지니의 여행(?)이 시작된 것입니다. 한참 뒤에 한 여인의 손에서 밖으로 나옵니다.
뭔가 잘 되어 가나보다 했는데 그 여인은 사랑에 환장(?)해서 지니의 소원이 이루어지기 직전 그만 세상을 하직합니다. 그렇게 경고해주었음에도 죽음을 불사하는 사랑입니다.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세 번째 소원을 목숨이라고만 말했어도 길이 생겼을 텐데 말입니다. ‘죽음보다 강한 사랑’이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입니다. 지니는 다시 자유와 멀어집니다. 그리고 또 호리병에 갇힙니다. 몇 번의 기회는 될듯하면서도 무위로 그칩니다. 드디어 긴 시간을 흘러 알리테아를 만나게 됩니다. 오늘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야기 속에 갇힌 정령이 이야기꾼을 만난 셈입니다. 제대로 된 인연이 아닌가 싶습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또 다른 연애가 됩니다.
세상을 다니며 강의를 하는 서사학자가 운 좋게 기나긴 역사의 이야기를 안고 있는 대상을 만났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짝이 잘 맞을까요? 마치 아라비안나이트를 보는 느낌입니다. 그에 따른 화면 또한 잘 따라주고 있으니 이야기를 그림, 그것도 움직이는 그림으로 봅니다. 재미가 배가 됩니다. 음향효과도 좋습니다. 좀 기발한 생각입니다. 사전지식도 없이 시간에 맞게 보았는데 별난 세상을 구경하고 나온 기분입니다. 물론 반세기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작품이기는 합니다. 만들기 힘들었겠지요. 영화 ‘3000년의 기다림’(Three Thousand Years of Longing)을 보았습니다.
첫댓글 잘보구 갑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주말입니다. ^)^
한번 보고 싶습니다..감솨
예, 괜찮습니다. ^)^
감사합니다
복된 주말을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