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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24일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열매는 백 배가 되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1-9
1 그날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2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5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6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7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8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9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홀로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어려서 어른들은 애기들을 무릎에 앉히고 두 손으로 애기의 두 손을 잡고 서로 두드리며 ‘짝짝궁 짝짝궁’하고 노래를 부르면 아이들도 신이 나서 서로 박수를 치기도 합니다. 아이는 재미를 더 하면서 엇박자를 치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며, 웃기도 하고, 장단이 잘 맞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서로 안 맞아 소리가 들리지 않기도 합니다. 이것은 순전히 박수를 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손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부모들보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그게 너무도 재미있어 덩달아 신이 나서 이런 아이들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손을 두드리다가 점차 아이들은 박수를 칠 줄 알게 됩니다. 이런 재미있는 짝짝궁을 사람들은 많은 설명을 붙여 그걸 그럴듯하게 말을 만들었습니다.
1. 사람들은 오른손은 바른손이고, 하느님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 신체부위를 둘로 나누어 왼손은 부족하고, 별 볼일 없는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상을 존우사상(尊右思想)이라고 하고 그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짝짝궁은 하느님과 내가 서로 만나고 부딪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이에게 짝짝궁을 가르치면서 “얘야, 이렇게 언제나 하느님을 만나고 살렴, 하느님이 말씀하시면 맞장구치면서 살아야 한다. 우리 사랑스러운 아가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 좌우가 서로 맞부딪치는 것은 음(陰)과 양(陽)이 만나는 것을 상징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만나 사랑하고, 친구를 만나 우정을 쌓기도 하고, 부부가 서로 싸우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서로 외로울 때에 의지하고, 격려해서 행복하게 살라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결혼하여 자식을 많이 낳아 자손만대에 번성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아가야, 이제 너는 외톨이가 아니란다.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단다. 서로 격려하고, 서로 사랑하며, 그렇게 부딪치며 살아야 한단다.”
3. 소리가 들려야 합니다.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 사는 소리가 들려야 합니다. 서로 소리 없이 다가왔지만 서로 만나서 소리를 내어야 합니다. 잘 만나면, 소리가 커질 것입니다. 복된 말씀이 될 수도 있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노래가 될 수도 있고, 자신을 내세우는 자랑이 될 수도 있으며, 교만하고 오만한 거드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소리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시 말을 받습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지”라는 말이거나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라는 말처럼 많은 응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말씀에 응답하는 다양한 방법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길바닥에 떨어진 씨앗처럼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맛 쓴맛을 겪은 숱한 경험들로 딱딱하게 굳어져 더 이상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맞장구를 치고 있는 어리석은 나의 모습도 발견합니다. 얄팍한 지식으로 똘똘 뭉쳐져 있어서 아침나절의 이슬로 빛나고 마는 돌덩어리 위에 나를 보기도 합니다. 매일 세상의 모든 노여움과 괴로움으로 가시가 뒤엉켜 있는 가시나무 같은 나의 모습도 느껴집니다. 내가 맞장구치는 방법은 아직도 유치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해서 주님은 매일 내 귓전에서 서성이다가 돌아가십니다. 내 심장을 두드리시는 주님의 손길을 외면하고 살다가 가끔 관심을 보일 때면 주님은 저만치 혼자서 정말로 쓸쓸하게 야속하다는 듯이 서 계십니다.
행복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용혜원
한 목숨 살아감이 힘들고 어려워 서로가 한 가슴 되어
사랑을 하여도 짧고 짧기만 할 삶을 무슨 이유로
무슨 까닭에 서로가 짐 되고
서로가 아픔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참으로 우리들의 삶이란 알 수가 없어서
홀로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가을이 오면 여름날의 화려함이 하나도 남김없이
떨어짐을 보고서는 알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 마음에 맞는 행복만을 원한다면
더욱 슬퍼만 진다는 것을 바람과 빛을 맞아야 열매를 맺듯이
찬바람과 눈보라가 몰아친 후에야 봄이 오듯이
우리들의 삶이란 아파하며 살다 보면
행복이란 의미를 더욱더 깊이 알 수가 있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
▥ 예레미야서의 시작입니다. 1,1.4-10
1 벤야민 땅 아나톳에 살던 사제들 가운데 하나인 힐키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
4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5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
6 내가 아뢰었다. “아, 주 하느님,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
7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저는 아이입니다.’ 하지 마라.
너는 내가 보내면 누구에게나 가야 하고 내가 명령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말해야 한다.
8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9 그러고 나서 주님께서는 당신 손을 내미시어 내 입에 대시며,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내가 너의 입에 내 말을 담아 준다.
10 보라, 내가 오늘 민족들과 왕국들을 너에게 맡기니, 뽑고 허물고 없애고 부수며 세우고 심으려는 것이다.”
축일7월 24일 성녀 크리스티나 (Christina)
신분 : 동정 순교자
활동 지역 :볼세나(Bolsena)
활동 연도 :+연대미상
같은 이름 :끄리스띠나, 크리스띠나
성녀 크리스티나에 대한 역사적 근거는 부족하지만, 초기 순교자의 한 명으로 이미 4세기 이전부터 공경을 받아왔다. 1880년 볼세나 인근 성당의 기초를 발굴하면서 많은 그리스도인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한 대리석 항아리에 “Hic requiescit corpus Beatae Xristinae Martyris”(여기에 복된 크리스티나 순교자의 시신이 잠들어있다)라고 새겨져 있었다. “로마 순교록”의 기록과 전설적인 이야기들에 따르면, 그녀는 이탈리아 중부 라티움(Latium)의 볼세나에서 부유한 귀족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그리스도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갖고 있었으나 아버지는 우상숭배를 좋아하는 이교도였다. 그래서 황금과 은으로 된 많은 우상 조각들을 집안 곳곳에 놓아두고 딸에게도 우상 앞에서 향을 피우도록 강요했다. 어느 날 한 천사가 찾아와 그녀를 ‘그리스도의 신부’라 부르며 앞으로 겪게 될 고통에 대해 말해주었다. 천사의 방문으로 힘을 얻은 성녀 크리스티나는 비록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열정에 사로잡혀 금과 은으로 된 우상 조각들을 부숴버리고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성녀 크리스티나의 행동에 화가 난 아버지는 딸을 지하 감옥에 가두고 하인들을 시켜 채찍질하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심한 고통을 주었다. 아버지는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 딸을 죽이려고 그녀의 목에 무거운 돌덩어리를 매달아 볼세나 호수에 던져버렸다. 그러나 성녀 크리스티나는 천사의 도움으로 무사히 호수에서 빠져나왔다. 그 후 다른 재판관에 인계되어 끌려간 성녀 크리스티나는 계속해서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용감하게 참아냈다. 율리아누스 총독은 그녀를 불타는 가마 속에서 5일 동안 있도록 했으나 그녀는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다. 그리고 큰 뱀들에게 물린 상처도 바로 치유되었다. 마침내 성녀 크리스티나는 잔인하게 혀가 잘리고 목에 화살을 맞아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성녀의 유해 일부는 시칠리아의 팔레르모(Palermo) 대성당에도 모셔졌고, 팔레르모의 4대 수호성인(성녀 아가타, 성녀 크리스티나, 성녀 님파, 성녀 올리바) 중 한 명으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축일7월 24일 성녀 쿠네군다 (Cunegundes)
신분 : 왕비, 수녀
활동 지역 : 폴란드(Poland)
활동 연도 :1224/34-1292년
같은 이름 :구네군다, 구네군데스, 구네군디스, 쿠네군데스, 쿠네군디스, 킨가, 킹가
폴란드와 헝가리어로 킹가 또는 킨가(Kinga)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성녀 쿠네군다(Cunegundis, 또는 구네군다)는 헝가리의 왕 벨라 4세(Bela IV)와 마리아 라스카리나(Maria Laskarina)의 딸이자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Elisabeth, 11월 17일)의 조카딸로 헝가리 북부 에스테르곰(Esztergom)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헝가리의 성녀 마르가리타(Margarita, 1월 18일)과 폴란드의 복녀 욜렌타(Jolenta, 6월 11일)의 언니이기도 하다. 성녀 쿠네군다는 궁중에서 ‘라틴어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법을 배우면서’ 자랐고, 16세 때 폴란드의 왕 볼레스와프 5세(Boleslaw V)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비록 결혼에는 동의하였으나 결혼한 밤에 왕에게 동정을 지키겠다고 말하였다. 아내의 소원을 물리치지 못한 왕은 1년 동안만 지키자고 동의하였다. 그러나 이 기간이 다 끝나기 전에 왕과 왕비는 평생 동정을 지키기로 약속하고 크라쿠프(Krakow)의 주교 앞에서 서약하였다.
성녀 쿠네군다 왕비는 궁중의상 안에 허름한 옷을 입고 검소하고 엄격한 극기 생활을 실천했다. 수시로 병자와 가난한 이에게 음식을 제공하며 자선사업에 왕실 재산을 기꺼이 사용했다. 1279년에 남편이 사망하자 그녀는 나라를 다스리라는 귀족들의 청을 물리치고, 자신이 스타리 사치(Stary Sacz)에 세운 클라라회 봉쇄 수녀원에 들어갔다. 수녀원에 들어간 뒤로도 여러 곳에 성당과 병원 등을 지었고, 터키 사람들에게 포로로 잡힌 그리스도인의 몸값을 대신 지불해 그들을 구해주기도 했다. 1287년 몽골 타타르족이 폴란드를 침략했을 때, 그녀는 수녀들을 이끌고 한 성으로 피신했다. 당시 몽골 타타르군은 자신들이 지나가는 곳에 있는 모든 요새를 처참하게 파괴하고 학살했으나 성녀 쿠네군다와 수녀들이 피신한 성은 그녀의 기도 덕분에 백성들과 함께 모두 무사했다고 한다. 그녀의 놀라운 기도의 힘과 성덕으로 수많은 기적이 일어나 죽기 전부터 이미 성녀로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수녀원에서 여생을 지낸 성녀 쿠네군다는 1292년 7월 24일 병환으로 선종하였다.
그녀에 대한 공경은 1690년 교황 알렉산데르 8세(Alexander VIII)에 의해 허락되었고, 1715년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s XI)는 그녀를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수호자로 선포하였다. 성녀 쿠네군다는 또한 광부들의 수호자로 공경을 받고 있다. 이는 그녀가 약혼반지를 던져 다시 찾은 곳에서 암염 광산을 발견한 전설에서 기인한다. 그 후에 헝가리에서 광산 기술자들을 데려와 본격적으로 개발했는데, 이곳이 폴란드의 비엘리치카(Wieliczka) 소금 광산이다. 이렇게 13세기부터 암염 채굴이 시작되면서 유럽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소금 광산이 되었다. 현재 비엘리치카와 인근의 보흐니아(Bochnia) 소금 광산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지하 깊숙이 여러 층으로 개발된 광산 내에는 19세기 말부터 광부 조각가들이 암염을 깎아 만든 성녀 킨가(쿠네군다) 경당을 비롯해 암염을 조각해 만든 성인상과 다양한 조각 작품들이 있다. 1998년 7월 3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성녀 쿠네군다를 복자품에 올렸고, 이듬해인 1999년 6월 16일 폴란드를 방문하여 그녀가 수녀로서 여생을 보낸 스타리 사치에서 시성식을 집전하였다. 지역에 따라서는 그녀의 축일을 7월 25일에 지내기도 한다.
축일 7월 24일 성 사르벨리오 마클루푸 (Charbel Makhlouf)
신분 : 신부, 은수자
활동 지역 : 레바논(Lebanon)
활동 연도 : 1828-1898년
같은 이름 : 마클루프, 사르벨리우스
성 사르벨리우스 마클루푸(Sarbellius Makhlouf, 또는 사르벨리오 마클루푸)는 1828년 5월 8일 레바논의 베카아 카프라(Bekaa-Kafra)에서 노새를 끄는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 요셉 자룬 마클루푸(Josephus Zaroun Makhlouf)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3살 때 아버지를 잃고 삼촌에 의해 양육되었다. 어려서부터 신심이 깊었던 요셉에 비해 그의 삼촌은 그렇지 못했다. 소년 시절 그가 가장 좋아한 책은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의 “준주성범”이었다.
23살이 되었을 때 요셉은 집을 빠져나와 비블로스(Byblos) 북쪽에 있는 동정 성모 마리아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1853년, 2년간의 수련을 마친 그는 안나야(Annaya)에 있는 성 마로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그는 첫 서원을 하며 2세기의 순교자 성 사르벨리우스의 이름을 자신의 수도명으로 선택했다. 그는 1853년 장엄 서원을 하고 1859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모범적인 수도승으로 살았지만 그가 꿈꾼 것은 고대 사막의 교부들과 같은 삶이었다. 그래서 1875년부터 죽을 때까지 23년 동안 5세기의 수도원장 성 마로(Maron, 2월 14일)의 모범을 따라 은수자로서 매우 엄격한 삶을 살았다. 그의 성덕에 대한 명성이 커지자 점점 많은 사람들이 상담이나 축복을 청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는 또한 성체성사에 대한 위대한 신심을 갖고 있었다. 가끔 수도원장이 인근 마을에 가서 성체성사를 집전하도록 했을 때 그는 매우 기쁘게 이를 받아들였다. 그는 기도 중에 몸이 공중에 뜨는 은총도 받았다.
성 사르벨리우스 마클루푸는 1898년 12월 24일, 예수 성탄 대축일 전날 늦은 오후에 안나야에서 선종하였다. 그의 사후 몇 차례의 치유 기적이 일어나면서 그의 무덤은 레바논 사람이건 아니건,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수많은 사람들의 순례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는 1965년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7년 10월 9일 같은 교황으로부터 성인품에 올랐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종종 교회는 두 개의 허파(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를 갖고 있는데, 우리는 그 둘로부터 호흡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성 사르벨리우스 마클루푸 같은 성인이야말로 가톨릭 교회의 다양성과 일치의 참된 가치를 깨닫게 해주는 좋은 예이다. 사르벨 마클루푸(Charbel Makhlouf)로도 불리는 그의 축일은 12월 24일에 기념하기도 한다.
오늘 축일을 맞은 크리스티나와 쿠네쿤타 자매들과 사르벨리오 마클루푸 (Charbel Makhlouf)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