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곤드레 나물을 삶는 밤
조정인
이곳은 온통 눈이나 비, 바람마저 살의를 띤 거대한 맹점지대
우리의 유일한 지하자원은 고독
고독을 연료로 우리는 검은 연애를 지폈다
오로지 동사하지 않기 위해
연애의 잔여분 같은 검은 술이 술병 밑바닥에 조금 남아 있다
나는 그 검은 것을 오래 보관하려고 한다
아직은 무엇을 앓고 무엇에 병들어야 할지를 묻는다
지렛대로 시간의 퇴적층을 뒤집 듯
긴 나무젖가락으로 나물을 한 번 뒤집었다
누군가의 창백한 얼굴이 길게 찢어진다 안나푸르나의 A는 지금
수십 미터 적설 속에서 죽어가고 있다
사랑은 그러므로 스스로 얻은 상처가 아름다울 때
발현되는 빛? 희미한 기억을 뒤적이는 사이, 겨울이 가고
안나푸르나는 잊히고 다시 오늘의 저녁 뉴스가 흘러든다
계부, 계모는 아니, 어른들은 아이들을 가둔다
트렁크에 화장실에 베란다에 다락방에······ 모든 문밖에
나에게는 연애의 잔여분 같은 검은 술이 아직 남아 있다
마지막 날까지 나는 그 검은 감정을 남겨두겠다
그것은 나의 연료, 나의 조난식량
어떤 완강한 고독은 웬만해선 손을 들고 투항하지 않는다
박제된 고생대 질긴 내장 같은 검은 나물을 이틀간 물에 불려
일만 년째 삶는 중이다 지구의 빈 화덕에 눈발이 흩날린다
조정인
서울 출생. 1998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사과 얼마예요』 『장미의 내용』 『그리움이라는 짐승이 사는 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