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5월 서울 중구 회현동의 중고음반매장인 리빙사 모습.
긴 하루 지나고 언덕 저편에
빨간 석양이 물들어 가면
놀던 아이들은 아무 걱정 없이
집으로 하나 둘씩 돌아가는데
나는 왜 여기 서 있나?...
전인권의 절창 ‘사랑한 후에’는 이렇게 시작한다.
철모르고 함께 뛰놀던 친구들이지만 때가 되면 다들 제자리를 찾아간다. 정신을 차렸거나 성숙해 버렸거나. 맘잡고 공부를 하고 취직을 하고 또는 유학을 가고. 결혼도 하고 아파트도 장만하고 아이도 낳고.
그런데 아이 때나 하던 놀이를 나이 먹어서도 계속하는 인간이 있다. 좀 모자란, 뒤처진, 대책 없는 행색이다. 친구들이 다 떠나간 텅 빈 놀이터에서 홀로 뒤처진 모지리는 탄식한다.
‘나는 왜 여기 서 있나?’
중학교 1학년 때 동대문운동장 부근 청계천 어느 판가게에서 생애 첫 음반을 샀다. ‘빽판’이라 부르는 해적판으로 밥 딜런의 ‘딜런’ 타이틀이다. 180원이었다. 그후 20대 시절에도, 30·40대 내내, 그리고 50대 이 나이에도 회현 지하상가 중고 LP점에 쭈그려 앉아 판을 고른다.
늦은 30대 어느 가을의 기억이다. 그날도 판가게 큼큼한 먼지더미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는데 건너편 가게에서 전인권의 바로 그 노래, ‘나는 왜 여기 서 있나?’가 흘러나왔다.
까닭 모르게 눈가에 핑 눈물이 맺혔다. 아니 까닭이 있었다. 결혼도, 집장만도 뭣도 아무것도 못한, 판만 사모으는 철부지가 나였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제길, 아으 제길, 평생을 판가게 주변에서 맴돌다니, 평생을!
놀이터가 아이들로 북적이던 그 옛날 도시의 구석구석을 메웠던 3대 업종이 있다. 다방, 중국집, 약국. 실제 1980년대 통계청 자료에 근거한 것이다. 한집 건너 사무실 대용의 다방이 있었고 또 한집 건너 안채가 여관방 노릇을 하던 짜장면집이, 바로 그 옆에 병원 노릇을 다하던 약국이 있었다.
그러면 그다음으로 어떤 가게가 많았을까.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 내 주관적 기억으로 그 시절 거리에 3대 업종 다음으로 많아 보였던 것이 판가게였다.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거리를 건너가도 모퉁이를 돌아 나와도 판가게에서 길거리를 향해 틀어대는 그때그때 유행곡이 빵빵 터져 나왔다. 빠른 곡에 맞춰 행인들 발걸음은 빨라졌고 느린 곡에 맞춰 재잘재잘 이야기가 많아졌다. 도시의 거리는 음악으로 가득했다.
생각해 보니 두 종류의 판가게가 있었다. 하나는 물론 정규 음반점이고 또 하나는 ‘길보드 차트’를 만드는 리어카상이다. 학교 앞이나 도심이나 사람 붐비는 곳이면 으레 리어카들이 늘어서 최신 유행 카세트테이프를 팔았다. 미국 잡지 빌보드 차트를 차용해 길보드 차트라고 부를 만큼 길거리 리어카 음악상들의 영향력은 컸다.
정식 판가게에서도 LP보다 더 많이 팔린 것이 실은 테이프였다. 심야 라디오 프로에서 곡을 익힌 중·고교생들이 각자의 선곡 리스트를 만들어 판가게에 주문한다. 공테이프에 좋아하는 곡만 담아 친구에게 선물을 하거나 애장본을 삼는 것이다. 판가게 주인들은 판을 팔기보다 테이프 녹음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 당시 웬만한 집에는 천일사 또는 독수리표 전축이 있었다. 아버지들(대체 언제부터 ‘아빠’라는 호칭이 생겼을까?)은 이미자, 패티김, 남일해, 최희준, 김상희, 정훈희 등의 가요 음반을 사왔다. 그 아버지의 자녀들은 속으로 외쳤다. ‘아, 유치해!’ 그 시절 학생들에게 가요와 국산 영화는 유치함의 대명사였다.
오직 팝송만이 음악이었고 김민기, 양희은, 송창식, 서유석 등의 포크송 정도라야 납득이 되었다. 판가게의 팝송 음반은 전부 해적물 빽판이었는데 놀랍게도 국세청 납세필증 인지까지 붙어 있었다.
1970년대 중반쯤 라이선스 음반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음반 유통시장도 전면적인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다. 청계천 도매상이 번성하고 일반 소매점으로 광화문 시대가 열린다. 광화문 새문안교회쯤을 기점으로 종로 쪽을 향해 숱한 음반점이 들어선다. 광화문음악사, 박지영레코드사, 코스모스, 올리버, 진레코드….
광화문 다음으로 음반점이 밀집한 곳이 명동 일대, 황학동 돌레코드 주변 그리고 각 대학가를 꼽을 수 있다. 1980년대 초 내가 다니던 성균관대 정문 앞길의 판가게만 모두 6곳이었다. 등굣길에 단골 판가게 ‘성난꼬마’에 가방을 맡겨 놓고 하루 종일 들락거리곤 했다.
모든 연락이 성난꼬마를 통해 이루어졌고 언젠가는 교정에서 재킷을 잃어버렸는데 꽤 여러 날 후에 손에 손을 거쳐 가게로 돌아온 일도 있었다 (하도 낡고 헐어 성대생은 그 단벌 재킷을 다 안다는…).
그런데 이들 장소는 빽판과 라이선스, 그러니까 정상적인 오픈마켓이다. 진짜 선수들, 그러니까 음악에 약간 돌아버린 자들이 찾는 것은 따로 있었다. 통상 원판이라 부르는 오리지널 음반이 그것인데 구입 경로가 달랐다. 그때의 원판 대부분이 미군부대 PX에서 ‘슬쩍’ 빠져나온 일종의 장물이었다. 광화문 어느 한옥집 장롱 뒤에 숨겨 놓고 파는 집이 있었고 이태원 몇몇 가게가 유명했다.
나처럼 지지리도 돈 없이 궁벽하게 판을 모으던 자들은 그나마 싼 가격에 중고 원판 구입이 가능했던 기지촌 양공주들을 찾아다녔다. 동두천 2사단 앞 보산리, 오산, 송탄, 문산 등지의 양색시를 만나러 숱한 팝송키드들이 기웃거렸다. 미군 병사들이 듣다 버린 음반이 표적이었다.
밤이 늦으면 손님을 못 잡은 양색시 방에서 하룻밤 신세지는 일도 생기는데 그때 들었던 감동의 대사가 생생하다. “백의민족이 외국 군인에게 몸을 버렸는데 어찌 몸을 주겠어요?” 당연히 공짜로 나를 재워줬던 양색시 미미의 말이다. 그날 우리는 오누이처럼 착하게 한 침대에서 잤다.
1980년대 후반, CD음반이 나오면서 또 한 차례 변화가 찾아온다. 음반점이 고급화·대형화의 길을 걷게 된다. 신나라, 교보문고 내 핫트랙, 미도파백화점 지하, 타워레코드 강북·강남점 등등 마치 죽기 전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를 낸다는 백조의 노래, 스완송처럼 음반점들은 몸집을 키웠다. 전문가들의 핸드드립 커피숍을 프랜차이즈 커피체인이 다 흡수해 버리는 요즘 추세와도 같은 형국이다.
1990년대 들어 한국에도 청소년 문화가 열리기 시작하는데 그 첨병이 가요였다. HOT나 김건모의 신보는 나왔다 하면 100만 장을 돌파했다. 모든 판매는 대형매장을 통해 문어발식으로 이루어졌다. 판가게에 책가방을 맡기고 다니거나 잃어버린 재킷이 되돌아오는 일은 옛말이 되어 갔다.
레코드숍과 판가게는 참 어감이 다르다. 가령 신나라나 타워레코드는 레코드숍이고 성난꼬마는 판가게다. 판가게에서는 음반 구입 못지않게 대화가 왕성했다. 구부정한 자세로 폼생폼사하던, 그런데 도무지 모르는 음악이 없던 자는 나중에 보니 영화평론가 정성일이었고, 알파벳을 떼지 못해 표지그림으로만 음반을 구분하던, 그런데 모든 록을 다 섭렵했던 P는 자살했다. 홍대 앞에서 주로 CD를 팔던, 세련과 깔끔의 왕자님 같은 인물은 KBS ‘명연주 명음반’의 정만섭이었고, 괴이한 습성이 하도 많아 일일이 설명할 길 없는 재즈광은 시인 장정일이었다.
이런저런 자들이 날마다 모여들어 음악의 뒷얘기로 장광설을 펼치는데 늘 신기했다. ‘도대체 어디서 저런 지식을 주워들었나?’하는 것. 손님의 많은 수가 더 작은 판가게의 주인이 되었다.
음악공간이 아닌 곳을 판가게에서는 ‘일반사회’라고 했는데 취직을 했다가도 그 일반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다시 음악동네로 튕겨져 오는 자들이 많았다.
이제 음반을 사려면 회현동 지하상가나 용산 전자랜드 2층을 찾아가야 한다. 리빙사, 클림트, 파파게노, LP러브, 파스텔 등등 회현동 판가게들은 갈수록 한산해져 간다. 새로 유입되는 사람은 드물고 대개는 ‘나는 왜 여기 서 있나?’를 가슴속에 품고 있는, 성장이 멈춘 어른아이들이 중고음반을 뒤진다. 그들의 고집 속에 멜론이나 다운받아 듣는 파일 음악은 더 이상 음악이 아니다. 음악이 귀하게 대접받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거리마다 동네마다 학교 앞마다 판가게가 들어찼던 시절에 사람들은 엘턴 존의 신곡 ‘굿바이 옐로브릭 로드’를 다같이 이야기했다. 전 세계가 똑같이 그런 신곡을 들었다. 아바의 ‘댄싱퀸’도 너바나의 ‘네버마인드’ 음반도 그러했다.
어느덧 판가게는 사라져 버리고 인터넷에 접속만 하면 온갖 음악이 떠도는데 지금 화제의 노래가 뭐더라? 소녀시대, 동방신기인가? 저스틴 비버인가? 에라 모르겠다. 이제 아무도 음악 따위를 갖고 장광설을 펼치지 않는다.
한 LP 마니아가 27일 회현동 중고음반매장의 때묻은 음반 속에서 희귀음반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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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에 찍은 서울 홍대앞의 명물 음반가게 ‘레코드 포럼’ 전경
한국에서 LP 판매의 역사는 불운했다. 1970년대에 나온 포크가수 김민기의 독집 앨범은 판매금지를 당했다. 클래식 명반, 재즈 음반이나 전설적인 프로그레시브 록 앨범 등을 구하기가 무척 어려웠던 시대였다.
또한 한국에서 초기에 유통되던 앨범 가운데는 불법 카피 음반이 많았다. 정식 계약을 하지 않았고, ‘빽판’으로 불렸다. ‘빽판’이 지금은 세계 중고음반시장에서 오히려 희소성을 인정받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이같이 열악한 상황에서 1960년대 구멍가게 수준이던 레코드판매점은 국민소득 향상과 함께 규모가 커졌다. 1990년대 말 1만 개 수준으로 늘어났고, 신나라레코드, 타워레코드, SKC플라자 등 대형음반매장이 전성시대를 맞았다. 중고레코드판매점도 서울의 광화문, 명동, 대학로 등 번화가로 진출했다.
광화문 네거리의 진레코드는 명성이 자자했다. 1973년 광화문 경기여고 뒤편에 ‘올리버’라는 음반판매점을 하다 올드팝 중고LP음반을 파는 진레코드로 바뀌었다. 진레코드는 마니아들이 주문하는 음반을 미국 등을 돌아다니며 구해 주던 팝 음반 딜러이기도 했다.
일부 청계천의 중고음반매장들은 황학동 벼룩시장 등지에 나온 낡은 음반을 클리너로 깨끗하게 청소한 뒤 새 비닐을 입혀 판매하기도 했다. 용돈이 궁한 중·고등학생들이 아버지 몰래 음반을 훔쳐 나와 청계천의 허름한 음반가게에 팔기도 했다.
MP3 시대가 되면서 대형음반점들도, 광화문 등지의 중고LP판매점들도, 동네 골목에까지 있었던 소규모 매장들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2000년대를 기점으로 급속히 쇠락했다. 2000년 서울 강남 타워레코드, 2004년에는 신나라레코드 강남점과 종로의 뮤직랜드가 문을 닫았다.
음반산업에서 디지털 음악시장으로 구조 전환이 이뤄졌다. LP에서 CD, 이제는 MP3로 음악을 듣는 매체가 옮겨가면서 자연스레 음반판매상은 과거의 유물이 되고 말았다.
최근 들어 LP가 재조명되고 있다. 음반 마니아들이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놓았다. 중고음반시장에서도 음악팬들은 신중현, 산울림 등 우리나라 가요 음반을 마구 사들이기 시작했고 LP음반 가격이 크게 올랐다.
LP팩토리는 국내에서 마지막까지 LP를 찍은 공장인 서라벌레코드가 폐업한 후 6년 만인 2011년 9월 문을 연 국내 유일의 LP공장이다. 이 공장에서는 지금껏 패티김, 고 김광석, 림지훈, 얄개들부터 빅뱅의 지드래곤 등 아이돌 그룹들의 음반까지 다양한 LP를 찍어냈다. 조용필의 19집 ‘헬로(Hello)’의 LP 음반도 나왔다.
‘지지직∼’하는 소리가 정겨운 LP의 재발견은 차가운 디지털 음원 대신 따뜻한 아날로그 감성을 다시 찾는 흐름과도 맞물려 있다. 긁힌 판에서 바늘이 홈을 넘지 못하고 같은 구절을 되풀이 플레이하는 것은 LP에나 있는 추억이다.
하지만 LP 음반의 부활은 단순한 추억의 부활이 아니다. CD에서 음원의 일부가 깎여 나가는 것과 달리 LP는 녹음 당시의 원음을 왜곡 없이 재생한다. 병풍을 쳐놓고 LP를 틀면 병풍 뒤에서 가수가 노래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린다는 것이 음악전문가들의 얘기다.
김갑수/시인·문화평론가
Nirvana - Never Mind(full album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