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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018년 2월이 갖는 또 다른 의미
조성원
<나는 여자와 남자, 남자와 여자의 평등이 이제까지 억압당한 여자가 남자를 제압하는 보복이 아닌, 진정한 이성(異性)의 정치적 화해이기를 바랍니다. 둘이 함께 걸어가는 삶의 공유야말로 아름답습니다. 둘의 기나긴 대화야말로 다음 세대를 잇는 자손의 시작이자 함께 찾아가는 진리의 첫걸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벗이여 이제 돌아가서 만납시다.>
이 말을 누가 했을까. 그는 또 이 말도 했다.
<“야 니들이 여기 좀 만져줘.”‘니들’ 중에는 나와 또 다른 젊은 여성시인 한명도 있었다.>
원래 행동과 글은 같지 않은 것인가. 도시 믿어지지 않는다.
지난 가을이던가 미국에서 여배우가 나와 할리우드 거물 제작자인 하비 와인스틴의 성추문을 폭로할 때만 해도 할리우드가 성 적 매력을 유발하는 곳이고 또 성 추문 뉴스도 자주 등장하는 곳이기에 나는 그들만의 리그로만 생각했었다.. 미국에서 시작된 ‘미투(#MeToo)’ 운동, 말하자면 ‘나도 당했다‘라는 또다른 표현이 아닌가.
이 미투가 국내에서 벌어진지 오늘로 꼭 한 달째, 작은 날갯짓이 우리나라 문화예술계에 태풍을 몰고 올 것이라곤 누구도 예상을 못 했다. 날마다 벌어지는 새로운 충격, 지금 우리 땅에서 벌어지는 충격은 상상을 초월한다. 저 죽자는 소린데. 누가 감히 이를 까발려. 뭐 이게 상식이 아니었던가. 설마란 단어가 이렇게 주효할 줄이야.
법과 정의를 말하는 검찰에서 조차도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도대체 정의가 무엇인가 말이다. 현직 검사의 폭로로 폭발력 얻은 미투는 들 불 번지듯 활활 타올랐고 횃불이 되었다. 오랜 세월 이름을 알려온 문학계, 영화계, 연극계, 스포츠 계에서 이제는 종교도 넘어서고 그 불똥이 어디로 향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세계의 대부 같은 사람들의 익숙한 이름이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져 단 번에 뭉개지고 있다.
한국 문화예술계의 ‘철옹성’은 붕괴되기 시작했다. 출발은 연극계였다. 한 공연 관계자가 SNS를 통해 “2년 전에 연극배우 이명행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이때부터 ‘공연계에서 성폭력 논란은 과거부터 비일비재하게 들어왔다’ 이 과정에서 연극계 거대 권력인 이윤택씨의 성추문 사건이 터졌다. 연극계에서 큰 산맥과 같은 인물. 피해자들은 공동 법적 대응까지 예고하고 있다.
가해자들은 모두 한 결 같이 아직 어린 나이의 여자 신인들이 하늘같이 우러러보던 사람들이다. 고명한 인사가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바로 그 짝이다. 그들의 눈 밖에 나면 그 길에서 끝장이 난다고 생각되던 사람들. 추행과 폭행을 밥 먹 듯 하고 그리고도 태연한 자태에 나도 닭살이 돋는데 당사자들은 오죽할까. 늑대 앞에 놓인 어린 양과도 같이 바들바들 버텨선 그들이 이제 겨우 숨 죽이며 말문을 열었다.
기라성 같은 각계의 상좌들, 처음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을 텐데...그 가해자들도 뛰는 가슴을 갖고 그 길에 들어섰던 나이 어렸던 시절이 있었고 모든 것이 조심스러운 새파란 신인이었던 적이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괴물로 변한 것일까. 혹시 그들도 그렇게 당하고 그 자리에 섰단 말인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일들이 너무 쉽게 속출하고 있다. 작품과 작가는 별개라 해 둘 것인가. 사회근간이 흔들릴 정도다.
사실 전 사회가 휘청거린다는 데는 그들의 위엄성이 졸지에 휴지조각이 되어서만은 아니다. 2018년 2월, 우리는 고질적 병폐로 얼룩진 위선 시회의 급한 소용돌이를 바로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이는 크나큰 사회의 변모를 또 말한다. 세상은 굉장히 빨리 변하고 있다. 새로운 세대들은, 특히 여성 같은 경우에는 인권의식이 굉장히 높은 반면에 구세대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부모 세대들로부터 배운 그 문화 그것에 거의 화석처럼 굳어져서 순응하고 살아 왔다. 수백 년간 우리나라를 짓눌렀던 유교적인 가부장 문화의 마지막 장벽이 이제 막 걷히는 과정이 지금이 아닐까.
유언비어 같은 여자 연예인들과 정치인들, 기업인들이 어찌어찌해왔다는 그런 류들의 이야기는 시중에 흔했다. 그런데 뭐 또 그것이 정녕 찌라시는 아니었다. 여성인권을 대표한다는 내 친구 이종걸 의원은 성 매매 강요 등에 연관된 장자연 사건을 소신 껏 고발하다가 오히려 되치기로 명예훼손에 걸려 줄곧 법정을 들락거려야 했다. 우리에게는 웃기는 법이 하나 있다. 미국의 미투와 우리 미투는 속성은 같지만 법은 아주 다르다.
그들은 직접 이름을 내고 또 그 피해자들까지도 특정을 하지만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그걸 못 한다. 왜냐하면 설령 그것이 사실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형법 내지는 정보통신망 이용법상 사이버 명예훼손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미국은 표현의 자유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민사적으로 해결하는데 우리나라는 그러지 않고 설령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으로 해서 가해자가 고소를 하면 처벌받게 되어 있다. 한마디로 억울하게 당해도 명예훼손 처벌을 받는 그런 상황 속에서 누가 감히 제 목을 스스로 칠 것이냐는 그런 상황. 그러기에 재갈을 풀고 상황을 박차고 나온 그들의 용기가 더욱 가상한 것이다. 얼마 전 문대통령은 법률가답게 이 한 마디를 했다.
<친고죄 조항이 삭제된 2013년 6월 이후의 사건은 피해자의 고소가 없더라도 적극적인 수사를 당부합니다. 특히 강자인 남성이 약자인 여성을 힘이나 지위로 짓밟는 행위는 어떤 형태의 폭력이든, 어떤 관계이든, 가해자의 신분과 지위가 어떠하든 엄벌에 처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은 또 무슨 말인가. 이전과 이후로 성폭력에 대응하는 역사가 우리나라는 다르다. 2013년 6월 달 이전 같은 경우에는 반드시 피해자가 고소를 해야만 처벌할 수가 있고 처벌하다가도 합의가 되면 더 이상 불문에 부치는 그런 상황이었는데 그 이어 2013년 6월부터는 친고죄가 전부 다 폐지가 됐다. 그러다 보니까 이번 같은 경우에도 2013년 이후 사건 같은 경우에는 고소가 없다 하더라도 경찰이나 검찰에서 이른바 직권으로 인지수사를 할 수 있도록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인데 문제는 법의 능동대처다. 이번에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경찰은 이 부분에 대한 조사를 내실화하겠다는 발표를 즉각 했다. 여성계에서는 환영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서 느껴지는 것은 구태의연함과 한심함이다. 그간 정의는 어디다가 팔아먹은 것인지. 돌이켜보면 단순한 성적 욕망 때문만이 아니라 세력을 남용하는 행태로 힘없는 여인들을 착취하는 행태로 아무렇지 않게 수용되고 달구어져 왔다. ‘수청을 들라’가 말하듯 남존여비가 극심했던 시대이후 한국 여인들은 눈물로 산 세월이 천년도 넘는다. 불과 십년 전만해도 큰 행사라 하면 내 직장에서도 당연 한 듯 여직원은 미니스커트를 입거나 한 복을 입고 안내를 맡고 꽃인 양 행동 해왔으며 회식자리에선 제일 높은 사람들 옆에서 시중도 들었다.
여자들은 왜 예뻐야 하고 아양을 떨어야만 하는 지. 우리가 성 평등 성 희롱 성 추행 성 폭력을 구분하며 성희롱 예방 교육을 실시한 게 불과 10년 안 쪽이다. 솔직히 남성들은 최근에 극도로 혼란스럽다. 누구는‘ 아니 과거 여자 히프 한 번 안 두들겨 본 사람이 어디 있누. 그나마 내가 공인이 아닌 게 다행이지.’하고 말했다. 사실 스토커마냥 졸졸 쫓아다니며 추근대는 게 남성의 생리가 아닌가. 중요한 것은 이성적 자율이냐 강요냐에 대한 차이다.
얼마 전에 나온 뉴스이야기 하나, 수원지법 형사11부(부장판사 오상용)는 7살 여자 어린이의 볼에 입을 맞춘 혐의(13세 미만 미성년자 강제추행)로 기소된 이모(57)씨에 대한 국민참여재판에서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또 성폭력 치료강의 80시간 수강을 명령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과거와 달리 아동의 성적 정체성과 가치관의 형성을 존중하는 최근 일반 사회의 인식을 고려하면 피고인의 행위는 순간적이었지만, 객관적으로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고 선량한 성적 도덕관념에 반하는 강제추행에 해당된다"고 밝혔다.
이어 "7세에 불과한 정신적·신체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피해자가 이 사건으로 인해 상당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을 것으로 보임에도 피해 회복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 엄중한 처벌이 필요하나 동종 전과가 없고 추행의 정도가 그리 중하지 않은 점 등을 참작했다"고 덧붙였다. 이 씨는 지난해 6월 군포시 한 상가 슈퍼에서 A(7)양을 보고 "너 예쁘다. 뽀뽀하자"라면서 볼에 입을 맞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었다. 이씨는 그러나 A양 볼에 입을 맞춘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강제추행이 아니라며 재판에 4차례 불출석했고, 결국 구속영장이 발부돼 옥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할아버지들이 자주 쓰는 ‘너 참 예쁘구나.’ 이 말도 성희롱이 될 수 있는 세상, 남성들은 여자를 바로 볼 용기가 점점 줄어들고도 있다. 현재 남자는 갈피를 못 잡는다고도 할 수 있다. 내 나이 때 많이 하던 소리, ‘너무 예뻐 자빠트려 지금의 아내가 됐다는 말’ 물론 그 말에는 책임을 졌다는 전제가 들어가 있지만 강제성으로 위험한 말이다. 여차하면 지금은 엄청난 죄다. 아내지만 강제로 성 폭행을 했다가 재판에 회부된 경우를 뉴스로 봤다. 중요한 것은 자율과 강요, 그 분별을 잘 해야 하는 것이다.
성희롱일까 아닐까, 성매매 강요와 돈 받고 하는 성매매 등등 참 요즘은 성에 대한 무식이 큰 화를 불러일으킨다. 자고로 남성은 입조심과 거기 조심하라더니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니다. 아무튼 참으로 오래 오래 곪아오던 환부가 드러나고 터져 나오는 미투 운동, 듣자면 더욱 가슴 아픈 것이 그렇게 황당하게 다른 사람들이 같이 있는 상황에서 추행을 당하고 있는데도 그것을 알면서도 누구도 그 당하는 사람을 위해 나서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투명인간 같았다는 표현이 뇌리에서 맴맴 돈다.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들은 척 침묵하는 사람들 방관하는 사람들. 그들 때문에 더 큰 상처를 받았다는 말에 공감을 한다. 밥줄 때문에? 아니면 그들도 그리 당했기에 ? 내 딸 같은 여성이 그렇게 당하는 것을 보고도 침묵하고 난 후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잠을 청했을까? 누구 한 사람 “나는 그런 상황에서 반발하고 박차고 나왔어도 이렇게 잘 컸다...“정당한 소신 발언 하나 없는 게 너무 우울하다.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 같지 않은 짓을 하면서도 얼굴을 들고 목소리를 높이며 활보해왔던 세월이 너무 길었다는 반증 같이만 느껴진다.
이제라도 이런 미투 운동을 통해 마비되고 죽어버린 마음들을 알알이 깨치면 좋겠다. 나아가서 아직도 일부나라에선 명예살인이 행해지고 여성할례 여성 투표권제한 등 여성에게 불리한 일들이 고유문화란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데 이 참에 미투 운동이 전 세계로 확산되었으면 좋겠다. 어디 성적인 면에서만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폭력이 있었을까. 크든 작든 가진 자들의 부의 세습과 그 부를 바탕으로 한 사교육에 의한 불공정한 경쟁, 기득권자의 다양한 폭력, 성공과 목적을 위해서라면 옳지 않은 수단과 과정도 용인하고 묵인하는 그릇된 인식 등등 이 세상엔 너무 많은 잘못이 정상적 인 양 산재해 있다.
이번 일을 계기로 공정하고 올바른 질서, 참된 가치관이 새롭게 자리 잡히길 나는 간절히 소망한다. 분명 2018년 2월은 우리나라에게는 아주 중요한 한 달이었다. 나 또한 미투의 혐의자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보면서.... <무참한 도시에서 그래도 자연을 표상하는 건 여자입니다. 나는 내가 아는 여자들의 이름을 모조리, 나무 이름, 꽃이름, 풀이름 바위로 명명(命名)하고 싶기도 합니다. 출전 : 고은 수상록 <사랑을 위하여>> 나는 오늘 부로 '원로시인 En' 을 괴물이란 명명하에 무참히 길 바닥에 버리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