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272) - 종친들과 함께 찾은 고향마을
말복이 지나고 처서가 가까운데도 연일 맹위를 떨치는 폭염의 기세가 꺾이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광복 68주년을 보내며 어수룩하게 나라를 빼앗긴 통한의 아픔을 다룬 한말 거유(巨儒) 최익현의 일대기를 그린 신봉승의 역사소설, '소설 1905'를 읽으며 지난봄에 대마도의 수선사에 들러 행적을 살핀 위인의 풍모를 가슴에 담았다. 나라 잃은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은 체 식민지배의 앙금을 털고 새로운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야할 한•일 간의 냉기류가 답답하다. 광복의 기쁨도 잠시, 외세에 밀려 분단된 남북은 동족상잔의 참혹한 전쟁을 치르고도 끝이 없는 치열한 대결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함이 안타까운데 가까스로 남북접촉의 물꼬가 트인 최근의 기류를 잘 활용하는 남북당국의 슬기로운 대처를 기대해본다. 이처럼 나라안팎의 사정이 엄중한데도 타협과 포용의 정도를 벗어나 민생과 동떨어진 정치놀음에 여념이 없는 정치권의 구태가 짜증스럽다. 이래저래 불쾌지수가 높은 날들, 자신과 주변을 살피며 슬기롭게 난세를 헤쳐나가시라.
규칙적인 아침운동과 꾸준한 독서로 심신을 추스르다가 주말에는 종친들과 함께 고향마을을 찾았다. 고향마을은 전라북도 고창군 상하면 고산부락, 우리가 자랄 때는 50여 가구에 수백 명이 북적이던 활기찬 마을이 지금은 20여 가구에 백 명이 못되는 한적한 시골로 가끔 들르면 나이든 어른들만 몇 분 만나게 된다. 1700년대 중반에 창원 황씨가 터를 잡은 고향마을은 차츰 선조들이 뿌리내린 청도 김씨 마을로 변하여 우리세대에는 대여섯 가구의 다른 성씨 외에는 종친 일문이 되었다. 우리 가족이 고향을 떠난 것은 1959년으로 다른 이들보다 앞선 편인데 이후 80%에 이른 농촌인구가 30%이하로 줄어드는 도시화와 맞물려 썰물처럼 빠져나간 것이다.
도시로 나간 고향마을 청장년들이 정착한 곳은 경인지방이 가장 많아서 일찍부터 서울에 재경종친회가 형성되었는데 최근에 비교적 젊은 세대에 속하는 후진들이 종친회를 이끌면서 첫 번째 행사로 고향방문 일정을 잡은 것이다. 새 종친회장은 피란길에 어머니 뱃속에 있었던 사촌동생이다. 피란길에 갈라선 아버지를 보지 못하고 어머니의 각별한 보살핌으로 자수성가한 사촌 동생은 가문은 물론 주변의 튼실한 재정적 후원자로 큰 몫을 담당하였는데 이제 그 활동반경이 고향무대로 넓혀진 셈이다. 사촌동생은 고향방문인사에서 나름의 고향에 대한 관점을 피력하였다. 중동의 건설현장에서 일할 때 찾아갈 고향이 없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접하며 찾아갈 고국, 정든 고향을 가지고 있음이 너무나 감사하게 여겨졌다고.
토요일 낮 12시, 마을회관에 모인 50여명의 종친들은 잘 차린 점심을 맛있게 들고 오후에는 수십 년 간 온 동네의 식수원이던 공동우물을 청소하는 일에 나섰다. 지금은 가정마다 수도가 가설되어 식수는 수돗물로 해결하고 공동우물은 빨래터로 활용하였는데 수년간 우물을 청소하지 않아 물이 더러워져 사용불가능상태에 빠진 것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다. 무더운 날씨에 땀을 뻘뻘 흘리며 양수기로 물을 퍼내는 등 여러 시간의 작업 끝에 우물은 밑바닥까지 깨끗하게 청소가 되고 밤이 되니 다시 깨끗한 물이 콸콸 넘친다. 고향을 떠나기 전에는 그 물을 물지게에 지고 와서 집안의 물독을 채워놓는 일을 맡았는데.
오후 다섯 시쯤, 일행은 가까운 곳에 있는 구시포해수욕장을 찾았다. 서남해안의 꽤 큰 해수욕장으로 발전한 이곳은 해변에서 1km 상거에 있는 가막섬까지 방파제를 쌓아 여러 척의 배가 정박할 수 있는 일종항구로 개발 중인데 어렸을 때는 넓은 바닷가에 인적이 드문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물이 많이 빠진 가막섬에 이른 일행들에게 옛날 일을 설명해주었다. 1956년 여름이던가, 중학1학년 때 또래들과 함께 이곳을 찾았는데 오늘처럼 물이 꽤 많이 빠져서 늘 가보고 싶던 가막섬을 향하여 물속에 뛰어들었다. 한참을 가다보니 아직 섬에 이르지 못하였는데 썰물이 밀물로 변하자 서둘러 되돌아가기로 하였다. 그런데 들어갈 때와 달리 점점 물이 차올라 목덜미까지 이른다. 세 살 아래 동생은 얼굴이 잠기는 상태, 한 쪽 팔에 동생을 안고 가까스로 빠져나왔는데 그때 허우적대던 또래 아저씨는 앞서가는 일행의 이름을 부르며 보리쌀 한 말 줄 테니 나 좀 붙잡아달라고 애원을 하기도.(고향마을을 지키던 그 아저씨는 금년 봄에 세상을 떴다.) 또 어느 날은 같은 또래 소년소녀들이 이곳을 찾아 바닷가에 널린 대합조개를 캐며 놀기도 하였는데 그때 함께 했던 8촌 여동생도 먼 길 찾아왔구나.
시골 잔치에는 돼지 한 마리 잡는 것이 옛 풍습, 이날도 돼지를 잡았다. 저녁의 주된 메뉴는 돼지 바비큐에 맥주를 곁들이고 흥에 겨운 종친은 탁자를 두들기며 호남가(호남지방 여러 고을 이름을 붙여 지은 가사음악)를 읊조린다. 밤이 이슥하여 에어컨이 설치된 마을회관에 잠자리를 폈다. 자다가 일어나니 새벽 두시, 살며시 밖으로 나가 서쪽하늘로 사라지는 달빛과 총총한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본다. 칠석이 지난 지 나흘, 견우와 직녀는 잘 만나고 헤어졌을까?
다음날 아침, 동생들과 함께 마을 뒤편에 있는 증조할아버지 묘소를 다녀오니 어느새 아침 먹을 때다. 애호박에 넣은 새우 맛이 좋구나. 식사 후 고향방문 행사를 평가하는 모임을 가진 후에 인근 심원면에 있는 갯벌의 장어양식장으로 향하였다. 때마침 양식장 가까운 곳에서는 2013 갯벌체험행사가 펼쳐지고 있어서 많은 차량과 인파가 몰려든다. 수협조합장을 지낸 이웃마을 종친이 수십억 원을 투자하여 최근에 개장한 장어양식장과 대화(큰새우)양식장이 한곳에 있는데 풍천장어로 유명한 갯벌에 양식장을 만든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대화양식장에서는 그물을 펼쳐 건진 것을 먹거리로 주었는데 두 번에 걸쳐 꽤 많은 대화가 걸려들었다. 양식장에서 나와 인근의 음식점에 이르니 종친들과 친분이 있는 군수가 찾아와 인사를 나눈다. 일행들은 서울지방보다 3~4도 높은 남녘의 더위를 실감하는 듯 연실 부채를 펄럭이고. 양식장에서 건진 대화를 안주 삼아 소주 한 잔 비우고 바지락 죽으로 점심을 든 후 한담을 나누다가(* 의정부에 사는 어릴 적 단짝 아저씨는 더운 여름, 외출을 삼가고 사서삼경을 번역하며 보내는 날들이 뿌듯하다네.) 서울로 가는 일행들과 작별하고 광주로 향하였다.
6.25 때 의용군으로 끌려 간 후 행방을 모른 둘째형의 가족과 큰형님이 6년 전,금강산에서 이산가족상봉행사로 만났다. 둘째형은 1996년에 64세로 별세하고 형수와 조카들이 상봉장에 나왔다. 그때 조카들이 전한 둘째형의 고향묘사는 이렇다. "아버지 고향은 전라북도 고창군 상하면 고산마을, 재를 하나 넘으면 아름다운 바다가 펼쳐지고 황토밭에서 캐낸 고구마 맛이 일품이었다.” 꿈엔들 잊힐리야,,, 그리운 내 고향을 얼마나 와 보고 싶었을까.
60년도 훨씬 지난 고향풍경이 지금도 똑같이 펼쳐진다. 다시 찾은 고향바다가 아름답고 건강식품으로 주가가 오른 황토밭 고구마 밭이 끝없이 펼쳐진다. 하루 빨리 '우리의 소원, 통일'이 이루어져 끝내 고향을 밟지 못한 둘째형 대신 조카들이 내려와서 '고향바다가 그립다. 황토밭 고구마가 먹고 싶다.'고 남긴 아버지의 유지를 실천에 옮길 날이 다가오기를, 더불어 열심히 사는 종친들의 따뜻한 고향사랑의 발길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