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푸 진입부 陳立夫(1900 ~ 2001)】
"대한민국임시정부 정식 승인 지지 원조,”
1900년 8월 21일 중국 저장성(折江省) 우싱현(吳興縣)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천주옌(陳祖燕)이고, 리푸(立夫)는 자이다. 이명으로 리롱칭(李融清)·구쥔밍(辜君明)이 있다. 어린 시절 고향의 사숙(私塾)에서 중국 전통교육을 받았다. 숙부인 천치메이(陳其美)가 1911년 혁명군호군도독(革命軍滬軍都督)으로 임명되자 초빙을 받아 전 가족이 상하이로 이주하였다. 1917년 톈진(天津)의 베이양(北洋)대학에 입학해 광공업(鑛工業)을 공부하였고, 졸업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1924년 미국 펜실베니아주 피츠버그대학(University of Pittsburgh)에서 야광(冶鑛)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였다.
상하이 시절, 형의 권유로 쑨원(孫文)의 강연을 듣게 되면서부터 쑨원의 주장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미국에 도착한 후 미국의 발전된 모습을 고스란히 중국에 투영하여 혁명과 국가 건설에 투신해야 하는 중요성을 깨달았다. 피츠버그 재학 시절 중국동학회(中國同學會)의 일원으로서 중국의 현실과 미래에 대한 많은 강연과 토론회에 참가하였고, 192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정식으로 중국국민당에 가입하였다.
1925년 귀국한 후 중국매광공사(中國煤鑛公司)의 초빙에 응해 채광공정사(採鑛工程師)로 재직하려 하였다. 그때 친형이 장제스(蔣介石)와 천치메이의 전보를 보내왔다. 바로 광저우(廣州)로 가서 도와 주었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천궈푸는 국민혁명에 헌신할 수 있는 기회라며 재차 설득하였다. 형의 권유와 장제스의 성의를 생각해 같은 해 12월 배를 타고 광저우로 향하였다. 이를 계기로 정치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정치에 입문한 후 처음으로 맡은 관직은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교장 판공청(辦公廳) 기요비서(機要秘書)였다. 사실상 장제스의 개인비서로서 관저에 머물며 개인적 중요기밀문서를 처리하였다. 비밀전보를 번역하는 일이 가장 많았다. 29세가 되던 1929년 국민당 중앙당부 비서장(秘書長)에 임명되었다. 국민당 역사상 가장 젊은 비서장이었다. 1931년 국민당 중앙조직부 부장을 맡았다.
조사통계국(간칭 中統局)을 맡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연 국민정부의 교육부장에 임명되어 1944년까지 재임하였다. 전면 대일항전 개시 이후 교육부장에 임명되었던 것은 대학의 내륙 이전을 추진하기 위해서였다. 이 밖에도 학자금 지원 제도를 최초로 도입하였다. 당시 중국은 군벌이 난립해 매우 혼란한 시기로 많은 젊은 청년들이 학비가 없어 학업을 이어갈 수 없는 처지였다. 교육부 일을 맡기 시작하면서 학자금 제도 도입을 추진하였다. 이 같은 근대적 교육제도는 모두 교육부장 재임 시기에 이루어졌다. 이로써 근대 중국교육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한국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천치메이의 한국 독립운동 지원 활동을 돕고 있던 천궈푸에게 이와 관련된 소식을 자주 듣게 되면서부터였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톈진(天津)에서 학생으로 공부하고 있었지만, 한국에 대해서 상세히 알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 미국에서 돌아와 황푸군관학교에서 장제스를 도와 비밀공작을 할 때에도 한국 독립운동 소식에 대해서는 그리 밝지 못하였다. 그러나 숙부 천지메이는 일찍부터 한국과 베트남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었다. 천치메이가 사망한 뒤 독립운동 지원을 장제스가 맡게 되었고, 천궈푸가 이 일을 돕기 시작하였다.
1931년 중국 국민당 중앙조직부장을 맡게 되면서 한국 독립운동 지원 업무를 하기 시작하였다. 일제의 만주 침략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것을 기회로 중국정부로부터 자금을 원조 받아 특무대 조직을 계획하였다. 김구(金九)는 이에 필요한 자금을 중국정부에 요청하였다. 당시 외교부장이던 조소앙(趙素昻)에게 5,000 달러의 활동 자금을 원조하였으며, 조소앙은 그 반액을 김구에게 건네기도 하였다. 1932년 윤봉길(尹奉吉)의 홍커우공원의거(虹口公園義擧)를 계기로 중국인들의 찬양은 물론 중국 국민정부 당국은 자국 침략군대를 지휘한 적장 등을 처단해 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는 한편, 한국 독립군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지원해 주기로 결정하면서 재정적·군사적 지원 실무를 담당하였다. 이에 임시정부에 매월 5,000원의 경상지원비와 임시사업비를 지원하였고, 장래 독립전쟁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한인 청년들이 중국 군사학교에 입학해 훈련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일본군이 상하이 침공 이후 수쥬하(蘇州河) 도하에 성공하고 육군·공군 연합의 맹공습에 따라 상하이 난스성(南市城)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상하이 프랑스조계 난스지역에 거주하던 독립운동가들의 신변이 위험에 처하였다. 이때 김구의 모친 곽낙원(郭樂園) 여사 역시 안공근(安恭根)을 따라 10월 30일 자동차를 타고 난징(南京)으로 탈출하였다. 난징으로 피난 온 임시정부 요인과 그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 프랑스조계 라비타로 500번지 자신의 활동본부를 피신처로 제공해 주기도 하였다.
국민정부가 충칭(重慶)으로 퇴각한 후에도 충칭에 정착한 임시정부와 한국 교민들의 생활 지원을 위해 노력하였다. 9월 22일 김구가 교민 구제비를 청구하는 공문을 중국정부에 보냈다. 한교 23명을 쿤밍(昆明)에서 충칭으로 데려왔다며 의복·숙박 등에 필요한 구제비를 청구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던 한인 청년 12명과 중국에 투항한 청년 21명을 수용하고 정착시킬 경비 마련 역시 시급하였다. 그러자 이 편지를 우티에청(吳鐵城)에게 보내 지원문제를 상의하였다.
일제 패망이 가까워지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문제가 대두되자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임시정부 승인과 관련해 중국국민당 국방최고위원회는 김구로부터 임시정부를 정식으로 승인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바 있다. 중국국민당 국방최고위원회는 내부적으로 이 안건을 통과시켰는데, 당시 국방최고위원회에서 가장 중요한 운영자로서 안건 통과에 힘을 보탰다. 중국 국민정부 역시 충칭 정착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경내에서 진행하는 국권회복운동을 지원하도록 하였는데, 이때 소위원회의 일원으로서 임시정부 승인을 지지하였다.
1942년 7월 20일 중국국민당은 군무부장 겸 군사위원회 참모총장 허잉친(何應欽), 중앙조직부장 주자화(朱家驊), 중앙비서처 비서장 우티에청 등 7인으로 한국문제전문소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8월 1일 1차 회의를 개최하고 군사위원회가 작성한 「대한국재화혁명역량부조운용지도방안(對韓國在華革命力量扶助運用指導方案)」을 검토하였다. 방안은 모두 8가지로 ‘임시정부를 타국보다 먼저 승인하고, 한국광복군을 군사위원회에 직속시킨다. 임시정부와 각 혁명단체는 동맹국의 군사 전 방략과 중국군 부서에 배합해 투신할 공작의 종류, 경비보조 문제’ 등이었다. 우티에청·허잉친과 함께 이 방안의 지도원으로 참여하였다. 모두 중앙의 책임자들이었다. 이들은 다른 나라보다 먼저 임시정부를 승인하지만 적당한 시기를 택해서 결정하였고, 이에 근거해 한국독립운동을 후원하는 근거가 된 「부조조선복국운동지도방안(扶助朝鮮復國運動指導方案)」을 확정해 실시하였다.
이외에도 중한문화협회(中韓文化協會)의 명예이사로도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의 정식 승인을 위해 힘썼다. 중한문화협회는 1942년 11월 충칭에서 성립대회를 갖고 정식으로 조직되었다. 중한문화협회는 중·한 두 나라의 뜻있는 인사들이 두 나라의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보존하고 전승시키기 위한 노력과 조국의 독립 및 자유를 회복시키기 위해 힘써야 할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펑위샹(馮玉祥)·왕총훼이(王寵惠)·천궈푸 등과 함께 중한문화협회의 명예이사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중한문화협회는 1943년 강연회를 통해 임시정부 승인을 촉구하였다. 임시정부를 승인해 국제적 지위를 주어 한국의 인력·물력으로 동맹국의 승리를 돕게 하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제2주년 기념식 때에는 강연회를 통해 임시정부 승인을 결의하고, 이를 중국정부에 촉구하였다. 이 기념식에서 조소앙과 함께 중국 측 연사로 나서 동맹국들이 임시정부를 조속히 승인할 것을 촉구하는 연설을 하였다. 이후 중국정부에 정식으로 임시정부 승인을 건의하기로 결의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