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 때 꺼내 보는 비밀 노트
문희봉
내가 한없이 초라하고 작게 느껴질 때면 산에 오른다. 경사가 심한 계단을 오르면서 심장이 터질 듯한 고통을 느끼지만, 그것도 잠시 평상 맥박수를 유지한다. 오르는 길 좌우에 도열해 있는 각종 수목들이 나에게 용기를 준다. 희망을 준다. 늘 푸르게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해 준다. 그런 베풂의 호사를 누리며 오른 정상에서 내려다본 세상은 어떤 사람 부럽지 않다는 걸 느끼게 한다. 내 발밑에 펼쳐진 세상은 바로 내가 주무를 수 있는 세상이다. 아주 별것 아닌 세상들인데 괜히 나 자신을 초라하다 생각해 왔다는 걸 깨닫고는 실소를 금치 못한다. 세상에는 나보다 낫다고 생각되는 사람도 더러 있지만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걸 느끼고 무릎을 친다.
삶이 힘겨울 때 나는 새벽시장으로 간다. 밤이 낮인 듯 치열한 삶을 살아가는 상인들을 보면 힘이 절로 생긴다. 생존경쟁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여건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면서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그들을 보면 팔뚝에 근육이 생겨나는 것 같은 착각을 한다. 새벽잠을 설치면서 준비해 온 농수산물을 팔고 있는 그들의 얼굴 근육에 생기가 묻어 있다. 끊어지는 허리 한 번 펴 보고 다시 굽히며 일상으로 돌아가는 그들에게서 진한 삶의 애착을 배운다. 열심히 살아가는 방법을 그들에게서 배우고 나도 모르게 이마를 치며 쾌재를 부른다.
삶에 지치고 피곤함을 느낀다 싶으면 병원에 간다. 문병을 간 것은 아니지만 입원실 복도를 걸어본다. 세상살이를 어렵게 생각했던 내가 미워 스스로 고개를 떨군다. 나는 하찮게 생각했던 목숨인데 다른 사람들은 처절하게 지키려 애쓰고 있다는 걸 발견하곤 얼굴을 붉힌다. 흔히들 파리 목숨이라고 하지만 쇠심줄보다 질긴 게 사람 목숨인데 나를 포함해서 그걸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반성할 일이다.
내 인생이 갑갑하다 생각될 때면 기차여행을 떠난다. 몇만 원으로 떠나는 여행, 무수히 많은 사람을 만나고, 무수히 많은 풍경을 보고, 무수한 생각들과 만나면서 활짝 펼쳐질 내 인생을 그려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어 좋다. 비록 지금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갑갑하여도 분명 앞으로 펼쳐질 내 인생은 탄탄대로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돌아오는 영광을 얻는다. 여행은 내 인생을 바꾸어주는 스승이다.
진정한 행복을 느끼고 싶을 땐 따뜻한 아랫목에 배 깔고 엎드려 재미난 책을 본다. 그리고 김치 부침개에 막걸리 한 잔 곁들인다.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진다. 세상에서 음식을 먹는 즐거움보다 더한 것이 있을까. 여유를 갖고 가장 편한 자세로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도 즐거움 중의 즐거움이다. 그 속에서 지금껏 잊고 지내던 중등학교 시절에 나를 흠뻑 녹여주었던 얘기들을 다시금 꺼낼 수 있다는 것은 또 나를 얼마나 즐겁게 하는 것이랴. 파랑새가 가까이에서 노래를 불러도 그 새가 파랑새인지 까마귀인지 모르면 아무 소용이 없다. 분명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가까운 곳에서 찾아내는 행복이 나를 기쁘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속 썩일 때가 있다. 그럴 땐 이런 말을 해준다. ‘그래 내가 전생에 당신한테 빚을 많이 졌나 보네. 맘껏 나에게 풀어. 그리고 지금부턴 좋은 연만 쌓아가자. 그래야 담 생애도 좋은 인연으로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꼭 이기려고만 하는 삶은 피곤하다. 가끔은 져주기도 하면서 살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그 삶은 만점 삶이다. 내가 즐겨 사용하는 건배 구호가 있다. ‘당신 멋져’다. 상대를 칭찬하면서 사는 삶은 상대만이 아닌 나도 행복해진다. ‘당신 멋져’는 ‘당당하게 살자. 신나게 살자. 멋지게 살자. 져주면서 살자.’이다. 내가 생각해도 좋은 말이다.
하루를 마감할 때면 베란다에 나와 냉수 한 잔 마시면서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리고 하루 동안의 일을 하나씩 떠올려 본다. 불면증으로 일찍 깨어 새벽 시간을 보내느라 고생했던 일, 소년원에서 멘티와 나눈 대화, 친구들과 술 한잔하면서 나누었던 웃음, 테니스와 탁구를 하면서 풀었던 스트레스, 내 칭찬의 말을 듣고 기뻐하던 이웃들의 얼굴을 그려보면서 잠자리에 든다.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 활기차게 열릴 것이라 믿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