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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실(윤정난)과 처용(김성현)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더프리뷰=서울] 이용숙 음악평론가 = 객석의 열기는 기대 이상으로 뜨거웠다. 비제의 <카르멘>, 마스네의 <마농>, 들리브의 <라크메> 등 프랑스 걸작 오페라들의 초연 무대였던 파리 오페라 코미크의 1천2백여 석은 프랑스 교민들과 프랑스인 관객들로 가득 찼다. 총 객석 점유율은 90퍼센트 이상이었고, 유료관객 점유율도 50퍼센트를 넘겼다. 6월 9일 오후 5시, 이 유서깊은 극장에서 국립오페라단,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국립합창단이 함께 참여하는 작곡가 이영조의 오페라 <처용>의 유럽 순회공연이 막을 올렸다. 국립심포니와 국립합창단 단원만 거의 100명에 달했고, 제작진과 출연진, 스태프들까지 총 150여 명이 현지로 이동했다. 7월 개막하는 파리올림픽을 기념하는 문화행사의 일환이었다.
작품 길이와 등장인물 및 연주자 수를 대폭 줄인 공연
1987년 국립극장에서 초연해 한국오페라의 한 획을 그은 이영조의 <처용>은 원래 3관 편성의 대규모 오케스트라와 80명에 달하는 합창단이 필요한 대작이다. 그러나 해외투어 예산 등을 고려해 이번 공연에서는 인원을 대폭 줄였고, 원래 130분이었던 공연시간 역시 90분 가량으로 짧아졌다. 장면을 압축하다보니 등장인물 중에서도 검은 귀신, 붉은 귀신, 임금 등 몇몇이 빠졌다. 작곡가는 줄이는 작업이 상당히 힘들었다고 말했다. 정연하게 세워놓은 창작의 논리를 허물고 심혈을 기울인 음들을 덜어내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지휘자 홍석원은 다리 부상으로 목발을 짚은 채였지만 파리의 한국문화원에서 있었던 현지 리허설 때도 특유의 유머감각으로 출연 솔리스트들과 합창단을 유연하게 이끌었다. 오페라 코미크의 첫 공연에서 홍석원은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50여 명의 단원들에게 손끝의 섬세한 사인으로 에너지 레벨을 올리고 음량과 음색과 템포를 정밀하게 조율했다. 현악기의 수가 상당히 부족했지만 연주자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음량을 채웠고, 목관악기들은 작곡가의 의도대로 흥겨운 국악 장단을 구현했다. 꽹과리와 목탁의 독특한 울림은 프랑스 청중들로 하여금 귀를 쫑긋 세우게 했다.
국악기 아닌 양악기로도 국악의 신명을 전달하는 이영조 음악의 특성이 효과적으로 드러난 연주였고, 무대 위 성악가가 노래할 때 오케스트라가 침묵하거나 성악가가 침묵할 때 오케스트라가 감정과 상황을 전달하는 이영조 특유의 음악적 여백을 더욱 돋보이게 한 연주였다.
9세기 신라 헌강왕 시대의 인물인 용왕의 아들 처용이 전염병의 신인 역신(疫神)에게 아내를 빼앗기고도 노래를 불렀다는 옛 설화를 작가 김의경은 1980년대에 현대적으로 해석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물질적 욕망으로 타락한 신라의 멸망이 예고되자 옥황상제의 아들 처용이 사람들을 구하고자 아버지의 뜻을 거슬러가며 신라로 내려온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사랑에 빠진 거리의 여자 가실도 신라도 구하지 못한다. “인간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정치는 도둑과 어울려 백성을 배반하고 악을 선하다 하며/진실을 파묻어버리고 양심의 입을 막는다”라는 작품 속의 대사는 여러 시대와 지역의 국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일 것이다.
이번 공연의 연출은 뮤지컬로 성공신화를 쓴 관록의 연출가 이지나가 맡았다. 파리 오페라 코미크의 무대 조건을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까닭에, 상황의 변화에 즉각 대처하고 적응할 수 있는 이지나의 경험과 능력은 이번 프로덕션에 큰 도움이 된 것으로 보인다. 무대 위에는 오페라 코미크의 다음 공연작인 륄리의 <아르미다>를 위한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인물들이 오르락내리락 할 수 있는 그 나무를 아낌없이 활용한 연출이 관심을 모았다. 나무 하나뿐인 무대였지만 시시각각 텍스트와 음악에 맞게 변화하는 조명과 영상이 독특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스테파노 포다가 제작한 국립오페라단의 <나부코> 의상을 재활용하고 그 위에 새 의상을 더한 이번 공연의 의상은 신라시대와 현대를 뒤섞어 모호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주었다.
빈틈없는 가창력과 연기 앙상블
90분 동안 관객을 지루할 틈 없이 몰입하게 했던 중요한 요인은 주역 가수 네 명의 빈틈없는 가창력과 연기 앙상블이었다. 타이틀 롤을 맡은 테너 김성현은 그의 아버지 옥황상제 역을 노래한 베이스 권영명과 초반부터 날카롭게 맞서며 드라마틱한 성악적 대비를 보여주었다. 가실 역의 소프라노 윤정난은 매혹적이면서도 단호한 캐릭터의 배역에 최적이었다. 바리톤 공병우는 마치 역신에 빙의한 듯한 자연스러운 에너지로 관객을 설득했다. 지극히 사실적이고 절박해 보이는 배역들의 연기 디테일도 극적인 재미를 더욱 키웠다.
국립합창단은 합창의 비중이 큰 이 오페라에서 때로는 가볍고 유쾌하게, 때로는 처연하거나 비장하게 노래하며 사건의 전개를 뒷받침했다. 공연 때마다 관객에게 충격적인 감동을 남기는 ‘승려들의 합창’이 이번에는 축소된 인원 때문에 예전만큼 효과를 거두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웠으나 그 음악적 독창성은 충분히 전달되었으며, 고승(高僧) 역을 맡은 국립합창단원 유지훈의 안정감 있는 노래는 깊은 인상을 주었다.
2013년에 국립오페라단은 고연옥 대본, 양정웅 연출로 21세기 관객을 위한 개정본을 만들어 <처용>을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재공연했다. 음악과 대본 상당 부분이 예전과 달라졌는데, 2막 ‘거리의 여자들’이 부르는 여성합창, ‘처용과 세 여자귀신’ 장면을 첨가해 작품의 남성성을 약화시키고 여성성을 보완했다. 그러나 이번 공연에서 작곡가는 개정본이 아닌 초연본을 더 다듬고 축약한 새 버전을 무대에 올렸다.
장중함과 익살을 수시로 넘나드는 음악, 동서양 음악어법의 혼재와 빠른 변환, 각 인물의 라이트모티프와 불규칙한 리듬 등 서구의 현대음악이면서도 한국의 정서와 장단이 묻어있는 이 오페라의 음악을 프랑스 관객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공연 후 리셉션이 있어 여러 관객에게 소감을 물어볼 수 있었다. 최상호 국립오페라단 단장, 최재철 프랑스주재 대한민국 대사, 루이 랑그레(Louis Langrée) 오페라 코미크 극장장이 환영과 감사의 뜻을 각각 짧은 연설로 전했고, 그 뒤 현지 기자들의 인터뷰 등이 이어졌다. 리셉션이 열린 극장 2층 로비는 가득한 관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질문을 받은 관객 중 공연이 지루했다는 관객은 한 명도 없었다. 공연시간 내내 프랑스어 자막을 읽느라 초집중하고 있던 프랑스 관객들 중 연령대가 높은 관객들은 텍스트의 심오함에 매료되었다고 말했고, 젊은 여성 관객들은 “가실아~ 가실아~” 하고 노래를 따라 부르며 연기까지 즉석에서 선보이는가 하면, 남성 무용수 류재혁의 격렬한 춤사위에 반했다는 관객도 있었다. 한국 관객들 가운데는 음악의 비장미가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의견도 있었고, 대본의 도덕적 교훈에 또는 시적 표현력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리고 한국을 대표하는 3개 국립단체가 파리에 와서 이런 훌륭한 공연을 했다는 사실 자체에 마음이 벅차올랐다는 관객들도 있었다. 관객들은 작곡가의 음악세계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파리나무십자가소년합창단 단원들이 미동도 없이 공연에 집중했던 것이 놀라웠다. 이날 관객 중에는 유명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소프라노 박혜상도 있었다.
감동의 근원은 1차적으로 작곡가 이영조의 깊이 있는 음악과 세 국립단체의 탁월한 연주였겠지만, 이번 <처용>의 파리 공연은 한국문화의 달라진 위상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만들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파리 가르니에나 바스티유 같은 국립오페라극장에도 그리 많지 않은 젊은 프랑스 관객의 수가 많았다는 점이 놀라웠다. 그렇다면 이제는 개성 있고 수준 높은 우리 고유의 작품들, 세계무대에 들고 나갈 수 있는 프로덕션들을 체계적으로 준비하는 일이 급선무일 것이다.
출처 : 더프리뷰(http://www.thepreview.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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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리뷰] 대본의 교훈과 음악의 비장미에 감동한 관객들 - 국립오페라단 ‘처용’ 파리 공연 - 더프리뷰 (thepreview.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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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오페라단
이영조 작곡
창작 오페라 ‘처용(Tcheo Y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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