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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3절 가사를 보면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 최영 장군의 말씀 받들자 황희 정승 맹사성 과학 장영실~~~~~” 노랫말이 있다.
과학 “장영실”은 누구이기에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에 선정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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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은 중국에서 귀화한 아버지와 동래 관기(官妓) 사이에서 태어났다.
1421년, 관노(官奴)였던 장영실은 명나라로 유학을 떠난다.
명나라 천문 기구를 연구하라는 어명을 받은 것이다.
천민 출신으로선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태종은 상왕(上王)으로 물러났지만 국가 현안에 관여했다.
장영실을 외국 유학까지 보낸 태종의 유연한 인재 등용으로 그는 세종 때 꽃을 피운다.
상호군(上護軍·정3품)까지 승진하며 과학기술 분야에 많은 업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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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의 부모님은 한국 분들이 그토록 경멸해 마지않는
소위 원나라(쭝꿔) 출신 아버지와 동래현 관기 출신 어머니로
장영실도 경상도 동래현의 관노(官奴) 출신이었다.
상식적으로 21세기에도 이런 사람들 자식들은 잘 되기가 어려울 터인데
어떻게 그 시절에 노비에서 기술자로 등용되어 벼슬까지 할 수가 있었을까?
첫째로 무엇보다도 장영실이 지니고 있는 타고난 기술자로서의 소질이었다..
둘째로 노비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발탁할 수 있었던 기술직 공무원 제도였다.
셋째로 태종과 세종의 과학 기술 장려정책이었다,
21세기에 장영실이 태어났다면 아마도 99.76% 정도는
화교, 조선족, 귀화 중국인과 술집 여자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따돌림을 받다가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니고 양아치가 되거나 사회의 그늘에서 살아가야 할 운명이었지만
다행히도 시대를 잘 만나 태종과 세종이라는 위대한 조선 황제들의 정치 덕분에
자기의 타고난 소질도 개발하여 수많은 발명품을 만들 수도 있었고 벼슬도 할 수 있었으며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 선정될 수 있었던 것이다.
장영실이 만일 금수저로 태어났더라면 일찍부터 까져서 헛짓거리나 하고 살았을지 모르나
노비로 태어난 까닭에 심심풀이로 자꾸 무엇을 만들다보니 손재주가 발달되고 뛰어남에 따라
결국에는 조선시대 기술직 공무원 채용에 합격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만일 귀화 출신인 쭝궈런 아버지와 술집 출신 어머니에 대한 신세를 한탄하면서
청소년 시절에 담배나 피고 술이나 쳐 먹었더라면 결코 기술직 공무원이 될 수가 없었다.
즉 사람은 부모 탓을 할 것이 아니라 지 인생 지가 잘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장영실 앞에서 누가 금수저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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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요즘처럼 기술직 공무원을 뽑는데 몇 과목이나 학원을 다녀야 한다면
과연 기술직 공무원이 될 수가 있었을까?
아무리 재주가 많다고 한들 영어 시험을 못 보면 합격이 불가능할 터인데
그 시절에는 타고난 분야에 소질만 있다면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는 제도 덕분에
장영실은 토익이나 토플이 없이도 당당하게 기술직 공무원에 임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21세기에도 이렇게 기술직 공무원 제도를 운영한다면 아마도 저마다 타고난 분야에서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할 인재와 영재들이 넘쳐날 터인데 빌어먹을 공무원 시험 때문에
수많은 인재와 영재들이 금형이나 열쇠 CNC 가공만을 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그 시절 조선 창업 초기임에도 불구하고 예산 탓을 하지 않고
대신들을 탓하지 않고 태종과 세종은 과학 기술 장려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노비 출신 장영실은 마음껏 자기가 지닌 과학적 기술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다.
툭하면 예산 때문에, 법 때문에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수많은 기술들이 사장되어 간다.
말도 안 되는 행복경제, 창조경제 한답시고 형식적인 인큐베이터 창업단지나 만들고 있으니
실제 지원되어야 기술 비용들이 정치가들의 서류 장난에 시달리다가 주머니로 들어갈 뿐이다.
대한민국 최고 통치권자가 생각이 있다면 이렇게 과학 기술을 방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태종/세종 시절에 국회가 없었어도 훌륭한 발명품이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오히려 시시때때로 과학 기술을 붙잡고 늘어지는 국회를 하루라도 빨리 없애버려야 할 것이다.
국회와 선거에 드는 비용이라면 대한민국은 이미 달에 아파트를 수 만 개 지었을 것이다.
핵 잠수함, 핵 항공모함도 몇 척씩 건조되고도 남았을 터인데 쓸데없이 민주주의 운영한다고
매일 권력을 잡기 위해 쌈질만 하는 국회에 왜 수 천억 원 세금을 낭비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장영실 발명품> 발명하였던 연도에 따라 정리
1. 소간의(小簡儀)/대간의(大簡儀) (1432년, 세종 14년)
천체의 위치를 측정하는 동양의 전통적인 천문 기구인 간의(簡儀) 중에서
휴대용으로 만든 규모가 작은 간의.
간의는 중국에서 전부터 사용해오던 혼천의의 결함을 보충하기 위해
아라비아의 천문 기구 등을 참고하여 새로 고안해 낸 것으로 종전의 기구에 비해
크고 간략하여 관측 값의 정밀도를 높였기 때문에 그 후 동양에서는 관측 장치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432년(세종 14)에 이천, 장영실 등에게 명하여 구리로 간의를 주조해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흔히 대간의라고 불리는 것인데, 소간의는 이 대간의 이외에
휴대용을 목적으로 해서 여러 차례 제작한 작은 규모의 간의이다.
세종은 1438년 경복궁의 경회루 북쪽에 간의대를 크게 만들어
그 위에 지름 2m 가량의 대간의를 설치했다.
2. 혼천의(渾天儀) (1433년, 세종 15년)
천체의 운행과 위치 그리고 적도 좌표를 관찰하는 데 쓰이던 천체 관측 기구로서
혼의(渾儀)·혼의기(渾儀器)·선기옥형(璇璣玉衡)이라고도 한다.
고대 중국의 우주관인 혼천설(渾天說)에 기초를 두어 서기전 2세기경에 처음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확실한 자료는 없으나,
삼국시대 후기에서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만들어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기록에 나타난 바로는 1432년(세종 14) 예문관제학 정인지(鄭麟趾), 대제학 정초(鄭招) 등이
왕명을 받아 고전을 조사하고, 중추원사 이천(李蕆), 호군 장영실(蔣英實) 등이
1433년 6월에 최초로 제작하였다.
3. 앙부일구(仰釜日晷) (1434년, 세종 16년)
태양의 그림자를 따라서 시간을 재는 해시계.
시계 판이 가마솥같이 오목하고 이 솥이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4. 갑인자(甲寅字) (1434년, 세종 16년)
그 전까지 쓰던 금속 활자를 고쳐서 더 단단하고 더 잘 찍히게 만든 금속활자로서
조선 세종 16년 갑인년에 만든 구리 활자.
갑인자는 금속 활자 인쇄술이 정점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활자로서
이전의 계미자는 글자를 밀랍으로 붙여 고정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몇 장 인쇄한 뒤에 글자들이 움직였고, 여러 장을 인쇄하는 데는 불편함이 따랐지만
갑인자는 글자 사이에 대나무 조각을 끼워 넣어 고정시키는 등 정교한 조립 형태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갑인자는 활자의 모양이 네모나고 조판의 조립 형태가 정교하였고
한 번에 많은 양을 찍어 낼 수 있어 인쇄 속도를 향상 시킬 수 있었으며
갑인자의 활자는 현존하지 않고 인쇄본만 남아 있다.
5. 자격루(自擊漏) (1434년, 세종16년)
물이 흐르는 시간을 재어 매 시간마다 종이 울리고 밤에는 북을 쳐서 시간을 알리는 물시계.
물을 부으면 저절로 움직여 시간을 알려 주는 자동 시보 장치가 달린 물시계이다.
세 개의 항아리에 물이 차오르면 안에 있던 나무 조각이 두둥실 떠올라 쇠구슬이 흘러가
인형을 움직이면 인형들이 종과 북, 징을 쳐서 시간을 알려주는 식이다.
조선 1434년(세종16년)에 장영실, 김빈 등이 왕명을 받아 만들었다.
물이 흐르는 것을 이용해 스스로 소리를 내어 시간을 알리게 만든 것으로 나무로 되어 있고
동자(童子) 인형모양이다. 국보 제229호이다.
지금은 1536년 중종 때 개량해서 만든 보루각 자격루가 덕수궁에 남아 있고
복잡한 자동 시보 장치가 없어지고, 3개의 물통과 2개의 물받이통만 남아 있다.
6. 현주일구(懸珠日晷), 천평일구(天平日晷) (1437년, 세종 19년)
세종 때 만들어진 해시계.
1437년(세종 19) 4월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나,
그 이전에 이미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제작자는 분명하지 않은데, 다만 1432년에 세종이 예문관 제학 정인지(鄭麟趾)에게
대제학 정초(鄭招)와 함께 천문의기(天文儀器)를 만들도록 명한 사실로 보아 정인지와 정초,
이천(李蕆) 등이 제작과정을 전담했을 것으로 보인다.
세종 때 만들어진 해시계로는 현주일구 외에도 앙부일구(仰釜日晷), 천평일구(天平日晷),
정남일구(定南日晷) 등이 있었다. 그러나 세종 때 만들어진 것은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이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앙부일구만이 지금까지 남아 있으나,
현주일구와 천평일구는 전혀 전해지는 바가 없어 그 모양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더욱이 현주일구는 중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세종 때 유일하게 만들어진 창작품인데,
다행히 그 모양이 기록으로는 남아 있어서 대략이나마 그 구조를 짐작할 수 있다.
현주일구는 사각형의 휴대용 해시계로 크기가 6촌 3푼밖에 되지 않는다.
평평한 바닥 북쪽에 기둥을 세우고 남쪽에는 못[池]을 팠으며,
북쪽에는 십자(十字) 표지를, 그리고 기둥머리에 추를 달아서
아래쪽 십자와 서로 닿게 하여 시계가 수평임을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시반(時盤) 중심 한가운데에 지름이 3촌 2푼인 작은 원을 그려 100각(刻)을 표시해 두었다.
100각을 그린 것은 당시의 시제(時制)가 1일(日)은 100각이라는 데에 따른 것이다.
100각이 그려진 원[小輪]의 한가운데에 구멍이 있어 한 가닥 가는 실을 꿰어서 위는 기둥
끝에 매고 아래는 밑바탕 남쪽에 매어 실 그림자가 있는 것을 보고 시각을 알 수 있게 하였다.
흐린 날에는 시각을 알기 어려우므로 행루(行漏)를 만들었는데,
행루는 파수호(播水壺)와 수수호(受水壺) 각각 하나씩이 있었다.
현주일구란 명칭이 붙은 것은 수평을 잡기 위해 매달아 둔 추 때문에 생긴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현주일구는 대단히 휴대하기 간편한 시계라고 하겠다.
자오(子午)를 정확히 하기 위해 지남침과 함께 사용했으리라는 추측도 있다.
세종 때 여러 개의 현주일구를 만들어 양계에 나누어 주고
남는 것은 서운관(書雲觀)에 보관했다고 한다.
7.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1437년, 세종19년)
조선시대에 사용하던 태양시와 항성시를 측정하는 주야시계(晝夜時計).
이천, 장영실 등이 만든 천문기기로 밤과 낮의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시계이다.
8. 옥루(玉漏) (1438년, 세종 20년)
장영실(蔣英實)이 만든 천상(天象) 자동 물시계.
시간을 알려주는 자격루와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혼천의의 기능을 합친 다목적 물시계.
자격루와 혼천의를 합하여 해, 달의 움직임과 시, 분을 나타내게 만든 기구였다.
이 옥루는 장영실이 세종의 총애를 입어 관노(官奴)에서 대호군에까지 승진된 은총에
보답하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이 자동물시계를 만들기 위하여 송(宋)·원(元)시대의
모든 자동물시계와 중국에 전해진 아리비아물시계들에 관한 문헌들을 철저히 연구하여
하나의 독창적인 천상시계(天象時計) 장치를 완성하였다.
이 시계는 경복궁 천추전(千秋殿) 서쪽에 흠경각(欽敬閣)을 지어 설치하였는데,
김돈(金墩)이 쓴 흠경각기(欽敬閣記)에서는
“흠경각 안에 호지(糊紙)로 높이 7척 가량 산을 만들고 금(金)으로 태양의 모형을 만들어
오운(五雲)이 태양을 에워싸고 산허리 위로 가며, 낮에는 산 위에 뜨고 밤에는 산중에 지면서
일주(一周)하는데, 절기에 따라 고도(高度)와 원근(遠近)이 태양과 일치한다.”고
그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
이 옥루는 중국의 천문시계에서 보이는 물레바퀴(water wheel)를 기륜(機輪)으로 한 동력에,
원나라 순제(順帝)의 궁정 물시계와 중세 아라비아물시계들의 하나의 유행과도 같았던
인형에 의한 보시(報時) 장치를 가미, 조선화(朝鮮化)하였고,
거기에다가 태양의 모형을 덧붙여 천상시계로 한 것이다.
김돈에 의하면, 중국 물시계의 여러 장치들은 모두 사람의 손이 조금씩 필요하지만,
옥루는 인력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작동하였다고 하므로 장영실의 독창적 고안과 개량이
이 궁정시계에서 잘 조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옥루는 명종 초에 경복궁 실화로 불타 없어졌다가
1553년(명종 8)에 박민헌(朴民獻)· 박영(朴詠) 등이 다시 만들기 시작하여
다음해 8월에 완성하였다.
9. 수표(水標) (1441년, 세종 23년)
비가 와서 하천에 물이 늘어난 높이를 재는 기구.
물의 높이를 재는 기구로 서울 청계천과 한강에 설치하였고
물의 양을 수시로 확인해 홍수나 가뭄에 대비할 수 있어
백성들이 농사를 짓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10. 측우기(測雨器) (1442년, 세종 24년)
측우기는 조선 시대에 장영실이 만든 세계 최초의 강우량 측정 기구로
측우기는 그릇의 넓이가 달라도 일정 시간 동안 빗물이 고인 깊이를 재어
강우량을 측정할 수 있고 측우대는 측우기를 일정한 높이로 올려놓기 위해 받치던 돌로,
바닥에 튄 빗물이 들어가 오차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하였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발명을 하였는데 서양보다 200년이나 앞서 만들어진 것이다.
유럽에서는 1639년 로마에서 이탈리아의 B. 가스텔리가 처음으로 측우기로 강우량을
관측하였고, 프랑스 파리에서는 1658년부터, 영국에서는 1677년부터 관측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1442년부터 측우기로 강우량을 측정하였으니,
이것은 이탈리아보다도 약200년이 빠르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측우기를 통해 강우량을 알 수 있어 농사를 지을 시기를 예측할 수 있었고
홍수와 가뭄으로 인한 피해를 예방하고 나라의 중요한 행사 때 하늘의 상태를 예측하는
역할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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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눈으로 하늘을 보다>
세종은 1432년(세종 14년)부터 세종은
농업 생산성 향상을 위한 과학기술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가동시켰다.
천문 관측기구를 제작하는 의표창제(儀表創製)를 시작하면서
예문관 제학 정인지에게 총 지휘를 맡기고 천문관측 관청인 서운관을 확장하는 한편,
대형 천문대인 대간의대(大簡儀臺)를 경복궁 안에, 소형 천문대인 소간의대(小簡儀臺)를
북부 광화방 인근에 지었다.
대간의대는 높이가 9.5미터에 이르는 왕립천문대로서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이때 장영실은 이천과 함께 간의대에 필요한 각종 기구 제작에 나섰다.
여기에는 과거 명나라의 관성대에서 입수한 정보가 커다란 밑천이 되었음은 두 말할 필요조차
없다. 두 사람은 우선 간의(簡儀)를 만들어 한성의 위도를 새로 측정하는 한편, 그 결과를
기준으로 각종 기구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간의는 원나라의 천문학자 곽수경이 만든 천문 의기로 혼천의(渾天儀)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혼천의는 천체의 위치와 시각과 함께 태양과 달의 운동을 측정할 수 있지만,
간의는 천체의 위치만 측정하는 기기였다.
세종은 그 과정에서 장영실에게 정5품 무관직인 ‘행사직(行司直)’을 제수함으로써 업무 의욕을
고취시켰다. 그러자 장영실은 연구에 더욱 박차를 가하여 불과 1년 만에 혼천의를 제작하는 데
성공했다.
혼천의는 ‘선기옥형(璇璣玉衡)’ 또는 ‘기형(璣衡)’이라고도 하는데, 천구의(天球儀)인 혼상(渾象,
하늘의 별을 둥근 구형에 표시한 의기)과 함께 물레바퀴를 동력으로 이용하여 움직이는
시계장치와 연결되어 천체의 운행에 맞게 돌아가도록 되어 있으므로 혼천시계(渾天時計)라고도
부른다.
《조선왕조실록》 1437년(세종 19년) 4월 15일자 기록에는 이 혼천의에 대한 기사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규표의 서쪽에 작은 집을 세우고 혼의와 혼상을 놓았는데 혼의는 동쪽에 있고 혼상은 서쪽에
있다. 혼의는 물을 이용하여 기계가 움직이는 공교로움은 숨겨져서 보이지 않는다.“
<백성들을 위한 시계, 자격루>
시계가 없었던 고대에는 낮에는 해 그림자를 통해 시간을 측정했고,
밤에는 별자리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시간을 측정했다.
하지만 날이 흐리면 해도 별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만들어낸 것이 물시계였다.
기원전 7세기경 중국에서 발명된 물시계는 매우 단순한 구조였다.
물을 채운 항아리 한 귀퉁이에 구멍을 뚫어 물방울이 떨어지게 한 다음 다른 항아리에
그 물방울을 받아 부피를 잰 다음 12등분하여 한 시간의 길이를 계산했던 것이다.
그런데 물시계는 매일 물을 갈아주어야 했고,
조금만 주의를 게을리 해도 물이 말라 시간을 제대로 맞출 수 없었다.
그래서 송나라의 과학자 소송(蘇訟)은 1091년경 물레바퀴로 돌아가는 거대한 자동 물시계를
발명했지만 장치가 너무 복잡하여 기술을 이어받을 사람이 없었으므로 그가 죽은 뒤 사라졌다.
12~13세기경에는 아라비아인들이 쇠공이 굴려 종이나 북을 쳐 시간을 알리는
자동 물시계를 만들었다.
세종은 일찍이 자동 물시계를 구상했지만 과학기술의 불모지였던 조선 땅에 시계 제작에
필요한 자료와 기술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정인지와 정초가 중국에서 소송의 물시계와
이슬람의 물시계 자료를 수집했고,
장영실이 그것을 바탕으로 ‘자격루’라는 새로운 자동 물시계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오랜 자신의 구상이 실현되자 세종은 매우 기뻐하며 경회루 남쪽에 보루각(報漏閣)을 짓고
자격루를 설치했고 자격루는 보루각루(報漏閣漏) 혹은 궁궐 안에 있어 금루(禁漏)라고 불렸다.
혼천의가 국가의 자존심을 세워주었다면
자격루(自擊漏)는 백성들을 위한 순수한 창작품이었다.
당시 세종이 장영실의 공로를 치하하며 정4품 무관직인 ‘호군(護軍)’을 제수하자 여러 대신들이
반대했다. 그러나 황희가 과거 태종이 김인이라는 평양의 관노를 호군으로 제수한 적이 있다는
전례를 듦으로써 무리 없이 통과되었다. 그 무렵 세종은 장영실의 교묘한 실력만이 아니라
매우 똑똑하다는 이유로 늘 곁에 두고 내시를 대신하여 왕명을 받들게 하기도 했다.
1434년(세종 16년) 7월 1일, 세종은 자격루를 조선의 표준 시계로 선포했다.
그때부터 자격루에서 시간을 알려주면 궁궐 밖에 있는 종루에서 북이나 종을 쳐서
오정(낮 12시)이나 인정(밤 10시경) 등의 시각을 백성들에게 알려주었다.
서울의 거리 이름인 종로(鐘路)는 바로 이 종루에서 유래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자격루가 당시 어떻게 관리되었는지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보루각에 새 누기(漏器)를 놓고 서운관생으로 하여금 번갈아 입직하여 감독하게 하였다.
경회루의 남문과 월화문, 근정문에 각각 금고(金鼓)를 설치하고, 광화문에 대종고(大鍾鼓)를
세워서, 당일 밤에 각 문의 쇠북을 맡은 자가 목인(木人)의 금고 소리를 듣고는 차례로 전하여
친다. 영추문(迎秋門)에도 큰 북을 세우고, 오시에 목인의 북소리를 듣고 또한 북을 치고,
광화문의 북을 맡은 자도 전하여 북을 친다. 경회루 남문과 영추문·광화문은 서운관생이 맡고,
나머지 문은 각각 그 문에 숙직하는 갑사들이 맡았다.“
1438년(세종 20년), 장영실이 또 하나의 자동 물시계인 옥루(玉漏)를 완성하자,
세종은 경복궁 천추전 서편에 흠경각(欽敬閣)에 짓고 옥루를 설치했다.
옥루는 시간을 알려주는 자격루와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혼천의의 기능을 합친 다목적
물시계였다. 시간은 물론 계절의 변화와 절기에 따라 필요한 농사일까지 알려주는 기계가
탄생한 것이다.
세종은 새삼 장영실의 능력에 감탄하며 우승지 김돈에게 〈흠경각기(欽敬閣記)〉를 짓게 했다.
안타깝게도 옥루는 1553년(명종 8년)에 화재로 소실되었었고, 이듬해 다시 제작했지만
임진왜란으로 불타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그 무렵 장영실이 제작한 과학기기는
* 혼천의를 간소화한 대간의와 소간의,
*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 천평일구,
* 시간과 함께 남북의 방위도 알려주는 해시계인 앙부일구,
* 밤낮으로 시간을 잴 수 있도록 만든 일성정시의,
* 해 그림자에 따라 절기를 알 수 있게 만든 규표 등이 대표적이다.
<갑인자, 측우기, 수표>
우리나라의 금속활자 개발은 고려 고종 때인 1234년에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인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 인쇄 이후 답보상태에 빠졌다.
조선에서는 1403년 금속활자인 계미자(癸未子)가 만들어졌는데, 크기도 일정하지 않았고
활자를 고정하는 데 밀랍을 사용했으므로 많은 양의 인쇄물을 찍을 수가 없었다.
몇 차례만 인쇄해도 밀랍이 녹아버렸기 때문이다.
1420년, 장영실은 이런 현실을 직시하여 이천, 김돈, 김빈 등과 함께 계미자보다
작고 정교한 경자자(更子字)를 만들었고, 이를 다시 개량한 것이 바로 갑인자(甲寅字)이다.
대소 활자 두 종류로 20여만 자가 넘는 갑인자의 효용은 대단했다.
아름답고 선명한 인쇄는 물론이고 종전보다 2배나 빨리 인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자소에서는 이 갑인자를 이용해 수많은 서적을 인쇄함으로써 세종 대 문화발전에 일익을
담당했다. 현재 갑인자는 전해지지 않지만 《대학연의》, 《분류보주 이태백시》 등
갑인자로 찍어낸 서책들이 살아남아 그 유적을 보여주고 있다.
장영실이 만든 또 하나의 회심의 작품이 바로 측우기(測雨器)다.
농업국가인 조선에서는 농산물의 생산량이 곧 국력의 바로미터가 된다.
때문에 정밀한 강우량의 측정은 농사의 질과 양을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였다.
그때까지 조선에서는 비가 땅 속에 스며든 깊이를 재서 강우량을 측정하는 원시적인 방법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1436년 전후 한발과 폭우로 인한 흉년이 거듭되자 세종은 장영실에게
측우기 개발을 명했다. 그리하여 세자 이향과 장영실이 함께 아이디어를 짜낸 끝에
1441년 높이 41.2센티미터, 직경 16.5센티미터 크기의 원통형 쇠그릇을 만들었다.
세계 최초의 측우기였다.
이 측우기는 이듬해 높이 30.9센티미터, 직경 14.1센티미터로 규격이 통일되었다.
그런데 측우기는 정밀한 만큼 대량 제작이 어려웠다. 이에 장영실은 좀 더 대중성 있는
측우기를 구상했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수표(水標)이다.
청계천의 마전교 서쪽과 한강변에 설치된 수표는 백성들이 쉽게 강우량을 알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실용적이었다. 수표교(水標橋)라는 다리 이름의 유래이기도 하다.
이것은 쉽게 강우량을 알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실용적이었다.
장영실은 이처럼 조선의 과학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종3품 대호군까지 승진했다.
하지만 그의 말년은 쓸쓸했다.
<성공신화, 가마와 함께 무너지다.>
최근 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장영실은 세종대의 유명한 천문학자 김담의 매형이었다.
그가 실력을 발휘한 천문 분야에 대한 지식의 원천이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를 추측하게 한다.
그렇듯 뛰어난 능력으로 세종의 과학입국을 선도하던 장영실의 만년은 쓸쓸했다.
“대호군 장영실이 안여(安輿: 임금이 타는 가마) 만드는 것을 감독하였는데,
튼튼하지 못하여 부러지고 허물어졌으므로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였다.“
《세종실록》 1442년 3월 16일 자의 기록이다.
바로 그 해에 세종이 어가(御駕)에 올랐다가 부서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어가는 장영실이 설계하고 장인 임효돈이 제작한 것이었다.
그 일로 인해 대간의 탄핵을 받은 장영실은 졸지에 죄인의 몸이 되고 말았다.
대신들은 때를 만난 듯 그를 성토했고, 파직과 함께 곤장 100대에 처해야 한다고 상주했다.
그런데 세종의 조치는 뜻밖이었다. 저간의 공이 있으니 곤장 80대로 감해주라는 것이었다.
그 동안 장영실을 중용하고 아꼈던 세종의 마음이 왜 그렇듯 냉정하게 돌아섰던 것일까?
그 후 장영실의 자취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사생활은 물론이고 말년의 행적조차 깨끗하게 묻혀
버렸다. 일개 관노에서 종3품 벼슬까지 올랐던 그의 영광도 거기에서 끝이었다. 어쩌면 미천한
출신 성분 때문에 사가들로부터 외면당했을 수도 있다. 혹은 그가 갑작스런 지위 상승으로
인해 오만하고 나태해져서 완벽주의자 세종에게 버림받았을 수도 있다.
단초는 있다. 그가 몇 차례 뇌물 수수로 벌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정도의 잘못으로 저간의 빛나는 업적이 상쇄될 수는 없다.
더군다나 그는 과학입국을 지향하던 세종대왕의 대표선수가 아니었던가. 그러기에 오늘날
그의 말년 행적을 둘러싸고 다양한 추측이 나돌고 있지만 대부분 드라마틱한 상상일 뿐이다.
장영실, 귀천이 엄연했던 전제정치 시대에 강고한 신분의 벽을 뚫고 조선 최고의 과학자가
되었던 인물, 매 순간마다 뜨겁게 열정을 불살랐던 그는 아직도 조선 최고의 발명가로서,
성공을 꿈꾸는 모든 이들의 표상으로 남아 있다.
오늘날 우주를 유영하고 있는 소행성 68719호에는 ‘장영실(Jangyeongsil)’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아직도 그는 별빛을 반짝이며 우주 공간을 유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천(李蕆)>
1376년 (우왕 2년)에 출생하여 1451년 (문종 1년) 사망하였다.
세종 시대 뛰어난 무장이자 과학자로서 평생 다재다능한 면모를 보여주었던 이천은
남방의 대마도 정벌과 북방의 야인 정벌 등에 공을 세웠으며,
금속활자와 천문기구 제작의 책임자였을 뿐만 아니라
화약무기 개발, 악기 개량, 도량형 표준화 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멀티 플레이어였다.
세종은 당시 자신이 기획한 과학기술프로젝트의 총감독으로써 선수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했다.
그는 신분이나 계급에 구애됨이 없이 장영실이나 이순지, 김담, 정인지, 정흠지 등 개인적으로
최고의 역량을 갖춘 전문가들을 한데 모은 다음, 이천이란 인물을 중심에 세웠다.
이런 세종의 기대에 부응하여 이천은 천문기기의 실제 제작과 개발을 담당한 장영실의 패스를
이어받아 이론 천문학자인 이순지나 정인지 등 스트라이커들에게 정확하게 어시스트해주어
≪칠정산내외편≫이라는 조선의 독자적인 역법을 개발하고 농업의 과학화를 완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와 같은 이천의 활약상은 천민 출신이었던 장영실과 달리
실록에 매우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그의 신분이 당당한 양반이었기 때문이다.
이천(李蓚)은 1376년(고려 우왕 2년)에 군부판서 이송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불곡(佛谷), 본관은 예안이다. 그의 어머니 염씨는 고려 우왕 때 매관매직을 일삼으며
갖은 비행으로 국정을 농단에 빠뜨렸던 권신 염흥방의 누이동생이었다.
1387년 조반의 옥사가 일어나자 분개한 최영과 이성계가 힘을 합해 염흥방을 제거했을 때
아버지 이송을 비롯하여 일족이 모조리 참살 당했지만 이천과 동생 이온은 다행히
승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 후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하자 18세였던 이천은
1393년(태조 2년) 뛰어난 무술실력을 발휘하여 정7품 별장(別將)이 되었다.
1402년(태종 2년)에 무과에 급제했으며, 1410년(태종 10년)에는 무과중시에 합격했다.
1415년(태종 15년) 8월 군기감정에 임명된 그는 평안도와 영길도에 비축한 옷과 갑옷의
숫자를 확인하는 직무에 임하는 한편, 두 도에서부터 한성에 이르기까지
산과 강의 험하고 막힌 것, 즉 지형을 순찰하는 임무도 맡았다.
1419년(세종 1년) 이천은 충청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면서 우군첨종제가 되었다가 곧바로
우군 부절제사가 되어 이종무가 지휘한 대마도 정벌에 참전했다. 이때 그는 우군절제사인
이지실을 보좌해 공을 세우고 좌군 동지총제에 오른 다음 곧 종2품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평범한 무장이었던 이천의 과학적인 능력이 발휘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당시 이천은 조선의 군선이 속도가 느릴 뿐만 아니라 물에 잠기는 선체가 빨리 썩는 것을
보고 이를 시정할 방법이 없는지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그리하여 판자와 판자를 이중으로
붙이는 갑조법(甲造法)의 시행을 조정에 강력히 주청했다. 그 방법으로 배를 만들면 속도가
빨라질 뿐만 아니라 내구성도 강해진다는 것이었다. 과연 그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군선이
왜구 토벌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때 세종은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게 되었다.
금속활자의 개발, 세종의 믿음을 얻다
1420년(세종 2년), 세종은 그를 공조참판에 임명하고 제기의 주조와 금속활자 제작을 맡겼다.
당시 그가 제기 주조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자 세종은 말 한 필을 하사했고, 실무기술자들에게
무명 세 필씩을 하사했다.
세종의 첫 번째 과제를 무사히 통과한 이천은 곧바로 금속활자 제작에 나섰다.
당시 주자소에서 사용하고 있던 활자는 계미자였는데, 고정된 청동판에 밀랍을 녹여 붓고
활자를 꽂은 다음 밀랍이 말라붙은 뒤에 인쇄를 했는데 밀랍이 연약해 활자가 흔들리는
단점이 있어서 대량으로 인쇄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글자체도 크고 거칠었다.
일찍이 태종은 1403년(태종 3년)에 어명을 내려 활자 제작과 서책 인쇄를 장려했다.
“정치를 하려면 반드시 널리 책을 읽어 이치를 깨닫고 마음을 바로잡아야 ‘수신제가치국평천하
(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효과를 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중국의 바다 건너에 있어
중국 서적이 잘 들어오지 않을 뿐더러 판목은 부서지기 쉽고 노동력이 많이 들며 많은 서적을
인쇄하는 것이 어렵다. 이제부터 동활자를 만들어 책을 인쇄하고 널리 보급시키면 그 이득이
많을 것이다.”
이에 따라 활자 제작 및 출판 인쇄 기관으로 주자소가 설치되었고 금속활자인 계미자가
제작되었다. 한데 계미자 역시 대량 인쇄를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태종에 이어 보위에 오른 뒤 집현전을 중심으로 문화통치를 구상하던 세종은
새로운 활자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그 임무를 이천에게 맡겼던 것이다.
과연 이천은 세종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부감독으로 남급을 임명하고 주조실무자들과 머리를 맞대 궁리한 끝에
1422년(세종 4년) 경자자 주조에 성공했다.
남급은 악기제조 전문가로서 박연과 함께 악기를 제조하기도 했던 기술자였는데,
이천에게 특별히 스카우트되었을 만큼 손재주가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를 통해 태어난 활자는 글자가 작으면서도 정교했다. 그때까지 책을 찍으려면 활판에 활자를
놓고 녹인 밀랍을 부어 넣어 굳힌 다음 인쇄했다. 그런데 몇 차례 책을 찍어내면 활자가
움직여서 얼크러지기 일쑤였고, 이를 조정하다보면 한 번에 많은 양을 찍어낼 수 없었다.
그런데 경자자는 바닥이 평평하고 규격이 정확하게 맞추어져서 밀랍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하루에 이십여 장 이상을 인쇄할 수 있었다.
이천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김돈, 김빈, 장영실, 이세형, 정척, 이순지 등 당시 과학기술자들을
총동원하여 1434년(세종 16년) 경자자보다 더 아름다운 갑인자(甲寅字)를 개발했다.
20여 만 개의 활자로 주조된 갑인자는 대나무로 조판하여 빈 곳을 완전히 메우는 조립식으로
대소활자를 필요에 따라 섞어서 조판할 수 있었고 하루에 40여장을 선명한 농도로 인쇄할 수
있었다.
“일찍이 경에게 고쳐 만들기를 명했더니, 경도 어렵게 여겼다. 그러나 내가 강요하자 경이
지혜를 써서 판을 만들고 주자를 부어 만들었다. 이는 모두 바르고 고르며 견고하여
비록 밀랍을 쓰지 않고 많이 박아내도 글자가 비뚤어지지 않으니 내가 심히 아름답게 여긴다.”
갑인자를 대한 세종은 희색이 만면했다. 이로써 조선의 활판인쇄기술은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했던 것이다. 당시 조선의 인쇄기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는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발행한
라틴어 성경과 비교해보면 금방 증명된다.
구텐베르크 성경은 총 1천2백 쪽이지만 이보다 20년 앞서 조선은 갑인자로 방대한 분량의
《자치통감강목》 5∼6백 부를 인쇄했다. 이 책의 한 권은 76페이지로 1부가 294권이므로
모두 합하면 2만2천344쪽이 된다. 이것을 5백 부로 계산하면 총 1천117만 쪽이 넘는다.
이는 구텐베르크 성경에 1만 배가 넘는 분량이다. 그때부터 조선은 출판 강국으로써 수많은
인문과학 서적들을 찍어낼 수 있었다. 이천이 그렇게 금속활자 사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자
세종은 두 번째 프로젝트로 도량형 표준화 사업을 맡겼다.
“요즘 관청이나 사가에서 사용하는 저울이 정확하지 않아 문제가 많다.
이 문제를 해결해 보도록 하라.”
세종의 명에 따라 이천은 1422년(세종 4년) 6월 20일 저울 1,500개를 만들어 바쳤는데
매우 정확했다. 이에 세종은 흡족해하며 백성들이 필요한 만큼 제작하도록 했다. 그 후 도량형
표준작업은 급속도로 진행되어 ‘잔(盞)·작(爵)·대야(鐥)·병(甁)·동이(東海)’ 등으로 정비되었다.
2001년에 발견된 세종 때의 의관 전순의가 쓴 《산가요록》에 따르면 두 홉(合)이 한 잔(盞)이
되고 두 잔이 한 작(爵)이 되며, 두 되(升)가 한 대야(鐥)가 되고 세 대야(鐥)가 한 병(甁)이
되며, 다섯 대야가 한 동이(東海)가 되었다.
이로 미루어 한 동이는 한 말(一斗)과 같은 분량이고, 한 병은 6되였음을 알 수 있다.
천문의기 프로젝트
1425년(세종 7년), 이천은 병조참판에 올랐고, 1429년에는 중군총제가 되어
나라 안의 동과 철광산을 조사했다. 이때 그는 동이 포함되어 있는 동석을 구별하는 방법을
개발해 각 광산에 전파했다.
그를 신임하던 세종은 1430년(세종 12년) 9월 양근의 강물 속에 있는 암초를 깨뜨리는 일까지
맡겼다. 당시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아 강물이 얕아지자 바닥에 깔려있던 바위를 깨뜨려
조운선이 드나들기 쉽게 하려는 뜻이었다. 이 작업에는 석공과 군인 100여 명이 동원되었다.
1431년(세종 13년)에는 경복궁 근정전의 화재에 대비해 궁궐 지붕에 쇠로 만든 걸이를 일일이
설치했다. 또 병선 개량을 위해 시험선을 제작했으며 사거리가 많이 나가는 활의 개발에도
나섰다. 당시 그는 대마도 정벌 과정에서 노획한 일본 선박을 통째로 뜯어내 구조를 분석하고
유용한 점을 병선 개조에 적용했다.
그와 같은 이천의 성과에 만족한 세종은 그해 12월 우군도총제로 승진시키더니
이듬해인 1432년(세종 14년)에는 지중추원사 겸 상의원 제조로 임명해
악공의 악기와 관복 등의 개선 작업을 맡겼다.
그처럼 이처럼 이천은 다양한 부문에서 전문가들을 진두지휘하여
성공적으로 마무리를 지었으므로 세종의 신임은 깊어만 갔다.
이윽고 세종은 그 동안 구상하던 천문의기 프로젝트를 공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명했다.
“이제 우리도 독자적인 역법이 필요하다. 예문관제학 정인지와 대제학 정초는 천문의기에 관한
과거의 내력과 출전을 연구하고 지중추원사 이천과 호군 장영실은 천문의기의 제작을
감독하라. 우선 북극 출지의 값을 알아야 하니 간의를 먼저 만들도록 하라.”
그리하여 이천은 총감독으로, 장영실은 제작 실무 책임자가 되었다. 그들은 이론가인 이순지의
뒷받침을 받아 먼저 혼천의를 비롯한 목간의를 제작했고, 이어서 대간의, 소간의, 혼의, 혼상,
현주일구, 천평일구, 정남일구, 앙부일구, 일성정시의, 자격루 등 수많은 관측기구를 제작해
냈다. 이 기기들을 설치하기 위해 호조판서 안순과 함께 간의대를 경복궁 경회루 북쪽에
건설했다.
간의대는 높이 9미터, 길이 14미터, 넓이가 9.8미터인 현대식 천문대로서 동양에서는 원나라의
곽수경(郭守敬)이 연경에 세운 관성대 이후 가장 큰 규모였다. 간의대 중앙에는 주망원경 격인
간의를 설치하고 간의의 남쪽에 간의의 방향을 잡는데 필요한 방위 지정표인 정방안(正方案)이
설치되었다.
간의대 서쪽에 설치한 규표는 해가 머리 꼭대기 위에 떠있는 하지에는 그림자가 가장 짧고,
멀리 남쪽에서 비스듬히 비추는 동지 때 가장 긴 것에 착안해서 만들어진 표준달력이다.
당시 규표는 13세기 원나라의 규표를 기본으로 삼아 청동을 높이 8.28미터의 막대(表)를
세우고 땅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질 수 있도록 청석을 다듬어 길이가 26.8미터인 받침(圭)을
만들었다. 이것은 중국의 규표에 비해 5배에 이르는 것으로 정밀도가 매우 높았음을 단적으로
알려준다.
규면에는 ‘장·척·춘·푼’ 단위의 눈금을 새겨 청동막대의 그림자 길이로 1년의 길이(365.2425)와
24절기를 쟀다. 푼(分)은 현재의 척도로 2밀리미터이다. 간의대 서쪽에는 작은 집을 지어
혼천의와 혼상을 설치했고, 연못 남쪽에는 기계식 자동물시계인 자격루, 동쪽으로는 임금의
시계인 흠경각루가 세워졌다.
“아, 이제 곧 우리 조선이 중국의 시간에서 독립할 수 있겠구나.”
이로써 조선 왕조는 자주적인 역법을 세울 수 있는 과학적 기반을 완성한 것이었다.
이런 바탕 하에서 정인지, 이순지, 김담 등에 의해 완성된 《칠정산내외편》은
우리나라 최초의 역법으로 조선의 자주성을 내외에 과시한 일대 쾌거였다.
노장의 투혼을 발휘하다
세종은 일찍이 1433년(세종 15년) 맹사성의 제안으로 파저강 유역에 거주하며 변경을
어지럽히던 여진족을 정벌했다. 당시 최윤덕은 압록강을 건너 일곱 갈래로 병력을 나누어
총공세를 취하여 여진족을 궤멸시킴으로써 북방을 안정시켰다.
그 후 1437년(세종 19년) 무렵 조선에서 천문의기 제작 사업이 한창일 때
평안도와 함경도에서 재차 야인들이 소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세종은 61세의 노장이었던
이천을 평안도 도절제사로 임명하고 정벌을 맡겼다.
명을 받은 이천은 그해 9월, 8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북방에 출동하여 파저강 너머에 있던
여진족의 근거지 우라산성과 오미부를 공격하여 야인들을 격퇴했다.
당시 그는 자신이 만든 대포를 활용하여 여진족들을 혼비백산케 했다.
그 여파로 세력이 크게 꺾인 이만주는 남은 무리와 함께 요동지역으로 도망쳤다.
훗날 세조는 강순, 남이 등에게 1만의 대군을 주어 명나라 군대와 연합작전을 펼쳐
오미부에서 이만주를 척살하고 그 일대의 여진세력을 완전히 뿌리 뽑았다.
그렇듯 두 차례의 야인정벌을 통해 서북지역을 평정한 세종은 여연군 외에 자성군을 설치하고
1436년(세종 18년)에는 무창현, 1443년(세종 25년)에는 우예군을 설치함으로써 4군을 완성했다.
이는 압록강 남쪽 조선의 경계를 완전히 확정시킨 쾌거였다.
그런데 4군 지역은 이후에도 여진족의 출몰이 잦고 방어가 어려워 문종 때부터 폐지논의가
줄을 이었다. 결국 1455년(단종 3년)에 여연, 무창, 우예 3군이 폐지되었고
1459년에는 자성군마저 폐지되었다. 그 후 이 지역은 폐4군이라 하여 오랫동안 비워졌다가
19세기 후반부터 개발되었다.
당시 세종은 이천의 공을 치하하며 정헌호조판서로 봉했다. 이듬해 86세가 된 노모를 간병해야
한다며 은퇴를 청했지만 세종은 들어주지 않았다. 이천이 그렇듯 승승장구하자 조정 신료들의
질시가 이어졌다. 특히 《세종실록》의 사관들은 그에게 매우 냉소적이었다.
“이천이 다른 재능은 없고 이와 같은 기교 하나로 쓰이게 된 것이었다.”
1440년(세종 22년) 6월 9일자 실록에 따르면 이천은 국경 지역의 순찰을 건실하게 하지 않고,
여진족이 공격해 오는데 전선이 아닌 영변에 물러나 있다며 비난하고 있다. 또 정벌의 공을
놓고 부하들이 다투거나 여진족의 공격에 미온적으로 대처했다는 이유로 탄핵받아 천안에서
1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세종의 신뢰는 굳건했다.
1443년, 세종은 그를 군기감 제조에 임명하고 무기와 장비의 개선을 맡겼다. 그러자 이천은
노구에도 불구하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과학적 사고를 발휘하여 군비를 일신시켰다.
그는 당시 조선에서 생산되는 환도의 길이가 일정하지 않아 불편하다는 것을 알고
조선 병사들에게 가장 적합한 환도의 길이와 너비를 연구한 다음 길이 1척7촌3분과
너비 7푼짜리 환도와 길이 1척6촌 및 너비 7푼의 환도를 제작했다.
그는 또 방패의 길이와 넓이를 확정하여 공격과 수비에 편하도록 개량했다.
“무기가 제각기 규격이 다르니 제작이나 수리에 문제가 많다.
시급한 것은 역시 표준화를 통해 공정을 단순화하는 것이다.”
이천은 또 변방의 험한 산악지대에서 출몰하는 야인들을 정벌하기에 적합한 야포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선진화된 중국의 제철기술을 입수해 무쇠로 연철을 만든 다음
구리 대신 쇠로 대포를 만들어 실전에 사용하게 했다.
그 과정에서 이천은 모친상을 당했지만 같은 시기에 세종대왕이 승하하자
3년 상도 치르지 못하고 세종의 능에 관련된 업무를 맡았다.
이천은 임금 때문에 불효자가 되었다고 투덜거렸지만,
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문종 역시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불효는 충성으로 갚으십시오. 그것이 대감의 사명입니다.”
문종은 이천을 판중추원사에 임명한 다음 최고의 국가 공신으로 예우하는 뜻에서 궤장을
하사했다. 1451년(문종 1년) 11월 8일,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문종은 몹시 슬퍼하며
익양공(翼襄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실로 이천은 양반 신분으로 기술에 능했고, 영명한 군주를 만나 자신의 역량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었던 행운아였다. 그가 사관들에게 푸대접을 받은 것은 어쩌면 천재적인 인간들이 보여준
쌀쌀맞은 성격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없는 세종시대의 과학 발전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 조선 최고의 무장이자 과학자였던 이천은 훗날 대한민국 최초의 잠수함으로
되살아나 한반도의 푸른 바다를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빙혼>
주인과 머슴도, 사장과 관리자도 서로 운이 맞아야만 한다.
이천이나 장영실이 연산군 시절에 태어났더라면 과연 수많은 발명품이 탄생될 수 있었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기술자/과학자들이 희한한 정치가들 때문에
그들의 숨은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실업자로 지내고 있을지 모르겠다,
주댕이로만 과학강국을 일삼는 대가리 빈 정치가들이 하루빨리 사라지고
진심으로 민족과 국가 발전에 헌신할 수 있는 정치지도자가 나오지 않으면
21세기 대한민국은 헬조선이 되어 성폭력과 성폭행, 음주운전, 비리와 부패, 불법과 탈법,
투기를 하고 사기를 치느라 백성들이 정신이 없을 때 정치가들은 우물 안 한반도 땅에서
권력 싸움만 일삼다가 결국 또 다시 일본과 중국 또는 미국에 진멸(盡滅)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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