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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의성김 원동파 원문보기 글쓴이: 낙민
여헌(장현광) 선생에 대하여 장달수
취정록(就正錄)-문인(門人) 조임도(趙任道)
정미년(1607,선조40) 초봄에 선생께서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호임) 정 선생(鄭先生)을 따라 도흥강(道興江) 가로 와서 노시고는 인하여 망우당(忘憂堂) 곽 우윤(郭右尹 곽재우(郭再祐)를 가리킴)과 서로 모여서 함께 용화산(龍華山) 아래에서 배를 띄우고 노시니, 이웃 고을에서 와서 모인 선비와 친구가 30여 명이었다. 우리 부자(父子) 두 사람도 또한 이 가운데에 참여하였다.
용화산 아래에서 함께 배를 띄우고 노시던 날에 망우당 곽 우윤이 웃으며 한강 정 선생에게 말씀하기를, “나의 소견에는 여헌(旅軒)이 한강보다 낫다.” 하니, 한강 선생은 답하기를, “영공(令公)의 소견이 옳습니다. 옳습니다.” 하였다. 우리 고을의 노인(老人)인 작계(鵲溪) 성공(成公)이 나이가 가장 높았는데, 손을 저으며 말씀하기를, “우선 이러한 말씀을 하지 마시오. 우선 이러한 말씀을 하지 마시오. 나는 단지 우리 스승이 있음을 알 뿐이오.” 하였다.
영산(靈山) 사문(斯文) 이외재(李畏齋) 어른은 곽 우윤을 돌아보고 말씀하기를, “영공의 의논은 서하(西河) 사람과 같음이 있다.” 하고는 서로 한바탕 재미있게 말씀하고 파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곽 우윤의 말씀은 질박하여 꾸밈이 없고 한강의 대답은 탁 트여 사사로움과 인색함이 없었으며, 작계가 우선 이러한 말씀을 하지 말라고 한 것과 외재가 서하 사람이라고 배척한 것도 스승을 높이고 도(道)를 호위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사문(斯文)의 성대한 모임을 어찌 다시 얻을 수 있겠는가.
선생이 난리를 겪으시던 중에 일찍이 청송(靑松) 땅의 산골짝을 지나다가 유숙(留宿)하셨는데, 주인인 촌로(村老)가 봉밀(蜂蜜)을 가지고 와 올리면서 “보약(補藥)에 쓰소서.” 하였다. 선생이 받지 않자 주인이 굳이 청하니, 선생은 우선 받아두었다가 얼마 후 주인을 불러 다시 주며 말씀하시기를, “이 물건은 이미 나의 소유가 되었으니, 나그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시 주인에게 주는 것이 나쁠 것이 없다. 관청에 바치는 여러 물건 중에 기름과 꿀이 가장 귀하니, 그대는 이것을 보관하였다가 한 번 관(官)에 바치도록 하라.” 하였다. 주인은 할 말이 없어 그대로 물러갔으니, 선생이 사양하고 받고 취하고 주는 것을 구차히 하지 않으심을 여기에서도 볼 수 있다.
선생은 힘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으나 몸은 옷을 이기지 못하는 듯이 여기셨으며, 지식과 생각이 세상에 뛰어났으나 말씀은 입에서 내지 못하는 듯이 여기시어, 온화하고 공손하고 간략하고 침묵하여 오직 날마다 공경하고 공경할 뿐이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칭찬하는 말씀을 들으시면 사양하고 피하여 비록 작은 선(善)이라도 자처하지 않으셨다. 그리하여 학문이 이미 이루어졌으나 항상 미치지 못할 듯이 여기고 덕이 이미 높았으나 더욱 스스로 공손하였다.
산림(山林)에 은거(隱居)한 지 80년 동안 조정의 옳고 그름과 시정(時政)의 잘잘못과 인물의 장단점을 말씀하지 아니하여 광채(光彩)를 감추고 거두어서 안으로 닦으니, 사람들은 선생이 가슴속에 간직한 것을 알지 못하였다. 평생의 소견과 얻은 바가 모두 저술한 문자(文字)에 있으니, 이것을 잘 연구하고 자세히 음미하면 거의 그 가슴속에 간직하신 것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은 덕스러운 도량이 높고 깊으며 덕스러운 용모가 충실하고 완전하였다. 수염이 드물게 나시고 눈썹이 빼어나 신채(神彩)가 빛나고 가득하였으며, 기질이 후중하고 음성이 크고 안색이 온화하여 위의(威儀)와 풍도(風度)가 엄숙하고 태연하니, 사람들이 바라보면 두려워하였다. 그리하여 비록 나이가 젊은 부박(浮薄)한 무리들이라도 선생의 용모와 광채를 바라보면 자연 두려워하여 몸을 검속하였다.
선생은 평소 남이 잘한 것을 듣기 좋아하시고 남이 잘못한 것은 덮어두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손님 중에 남의 선행(善行)을 칭찬하는 자가 있으면 기뻐하는 기색이 얼굴빛에 나타나 재미스러워하시고 권태로움을 잊으셨으며, 만약 훼방하고 꾸짖는 말이면 들어도 못 들은 체하시며 웃음으로 답할 뿐이었다.
사람들이 처리하기 어려운 일이 있어 선생을 찾아와 물으면 선생은 이해(利害)를 자세히 개진하고 양쪽의 단서를 다 말씀하여 명백하고 통쾌하였으며, 의리(義理)에 근거하여 평이하고 착실하였다. 비록 기이한 담론과 특이한 의논으로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움직이며 사람들을 크게 복종시킬 만한 내용은 없었으나, 사람들로 하여금 의혹이 깨끗이 제거되고 울분이 사라져서 일이 모두 평탄하고 순조로워 원망과 후회가 생기지 않게 하였으니, 이 어찌 충화(沖和)한 기운과 신순(信順)한 덕이 흉중(胸中)에 쌓여서 밖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겠는가.
배문록(拜門錄)-문인 신열도(申悅道)
병진년(1616) 9월에 선생의 자씨(姊氏)인 임 첨추부인(任僉樞夫人)이 세상을 떠나셨다. 선생은 부음(訃音)을 듣고 즉시 오셨는데, 동구 밖에서 집을 바라보고 곡하며 들어오셨고 이미 들어와서는 흐느껴 곡하여 곡소리가 끊이지 않으셨다.
명정(銘旌)을 처음에는 숙부인(淑夫人)이라고 썼었는데 선생은 단지 본관(本貫)과 성씨(姓氏)만을 쓰도록 명하셨으니, 이는 첨추(僉樞)가 실직(實職)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장례할 때에 선생이 몸소 왕림하여 일을 주관하시어 정(情)과 예(禮)가 모두 지극하였다
나는 또다시 여쭙기를,
“사람들이 풍수설(風水說)을 지나치게 믿어 지금 세상의 고질적인 병폐가 되옵는바, 그 말이 과연 일리가 있습니까?”
하니, 선생은 대답하시기를,
“산천(山川)의 풍기(風氣)는 모인 곳이 있고 흩어진 곳이 있고 응집하여 맺힌 곳이 있으니, 기운이 모이면 산세가 뭉치고 기운이 흩어지면 산세가 흩어지는 것이 진실로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나 만약 한결같이 풍수설을 믿어서 때를 지나도 장례하지 않음에 이른다면 크게 옳지 않다. 다만 풍기의 모이고 흩어짐과 산천이 응집되어 맺혀 있는 곳을 살펴서 쓰면 불가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선생은 일생 동안 자신을 감추고 숨기시어 사람들이 그 끝을 엿볼 수 없었으며, 또 스승으로 자처하지 아니하여 문하에 출입하는 사람을 손님처럼 대하셨다. 그리하여 무릇 저술하신 것을 사람들이 엿볼 수가 없었으며, 외인(外人)이 의심나는 예(禮)를 질문하여도 가타부타 하시는 일이 드무셨는데, 말년에야 비로소 답을 하셨다.
선생은 일생 동안 가난함을 편안히 여기시어 한 그릇의 밥과 한 그릇의 음료도 부족하여 여러 번 끼니를 걸렀으나 태연히 거처하였으며, 비록 거친 밥과 나물국이라도 반드시 배우는 자들과 함께 드셨다
기문록(記聞錄)-문인 장경우(張慶遇)
나는 어렸을 때에 선생을 보은(報恩)의 아문(衙門)에서 모셨는데, 선생은 벼슬을 버리고 돌아오실 때에 도중에서 도원량(陶元亮)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외도록 명하였다. 그리하여 구름과 새의 글귀에 이르자, 선생은 다시 외게 하시고는 돌아보고 웃으셨다.
내가 말씀드리기를, “도팽택(陶彭澤)은 돌아갈 적에 세 오솔길이 있었으나 선생은 돌아감에 한 집도 없으시니, 그 담박함이 옛 사람에 비하여 어떠합니까?” 하니, 선생이 말씀하시기를, “도팽택은 처자식들로 하여금 집에 있게 하였는데, 나는 이제 처자식들을 거느리고 관아에서 밥을 먹었으니, 이는 수치스러운 일이다.” 하였다.
경모록(敬慕錄)-문인 김휴(金烋)
선생은 체모(體貌)가 크고 얼굴에 광채가 충만하고 윤택하여 사람을 대할 때에 화기(和氣)가 넘치셨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 엄숙하여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점이 있었다.
초취(初娶)는 곧 한강(寒岡) 정 선생(鄭先生)의 질녀(姪女)였는데, 한강은 평상시 선생을 호칭할 때에 이름과 자(字)를 쓰지 않고 반드시 여헌(旅軒)이라고 하였으니, 선생이 한강 선생에게 존경받고 소중하게 여겨짐이 이와 같았다.
선생은 무릇 음식을 드실 적에 채소와 담박한 물건을 취하시어 비록 혹 좋은 음식이 소반에 있더라도 즐기지 않으셨다. 휴(烋)가 일찍이 여러 달 동안 냉산(冷山)에서 선생을 모시고 있었는데, 절의 승려들이 산나물을 얻어 공양하면 반드시 흔연(欣然)히 젓가락을 드셨으며, 항상 승려들로 하여금 입에 맞는 산나물을 뜯어오게 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이 물건이 바로 나의 창자와 위(胃)에 알맞다. 고량진미는 비록 맛이 좋으나 먹은 뒤에는 시원하고 깨끗한 기운이 전혀 없으니,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하셨다.
본댁(本宅)에 계실 때에 아침저녁의 공양을 매우 간략하게 하셨으며, 빈객(賓客)에 대하여는 신분의 귀천(貴賤)을 따지지 않고 종들을 경계하여 공급하는 물건을 되로록 많이 준비하고 깨끗하게 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또한 가산의 있고 없음에 따르시고 굳이 억지로 허례허식(虛禮虛飾)을 갖추지는 않으셨다.
무릇 의복은 거칠고 굵은 무명과 삼베를 좋아하였으며 평상시 거처할 때와 출입할 때에 입는 의복은 모두 직령(直領)을 사용하셨는데, 제도가 매우 예스러웠다.
선생은 신장이 8, 9척(尺)으로 키가 크고 훤칠한 장부였다. 높은 관(冠)에 큰 옷을 입고 손을 모으고 똑바로 서 계시면 온화하여 볼 만하고 엄숙하여 존경할 만하고 의연(毅然)하여 범할 수 없는 기색이 있었다. 그리하여 보는 자들이 모두 선생을 대하면 마음이 도취되어 스스로 가득히 채우고 돌아갔으니, 선생은 바로 하늘이 낸 호걸이라 할 것이다.
신유년(1621) 계하(季夏)에 휴의 아들 만웅(萬雄) 아명(兒名)이다.이 태어난 지 겨우 몇 달 안 되었는데, 선생께서는 나그네의 우거하는 곳으로 왕림하시어 아이를 안고 나오라고 명하시고는, 인하여 그 어미에게 당부하시기를,
“이 아이는 골격이 깨끗하고 준걸스러우며 신채(神彩)가 사람을 놀라게 하니, 축하할 만하고 축하할 만하다. 그러나 부디 너무 지나치게 보호하여 기르지 말라. 너무 지나치게 보호하면 후일 질병의 빌미가 될까 두려우며, 또한 교양하여 성취하는 방도가 아니다. 나는 어렸을 때에 곤궁한 집안에서 자랐으며 또 성품이 소탈하여 따뜻하게 입고 배불리 먹으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리하여 일찍이 옷을 두껍게 입지 않고 또한 일찍이 음식을 잘 차려서 먹지 않았으며, 추워도 버선을 신지 않고 맨발로 눈을 밟으며 겨울을 났고, 아침저녁 밥을 다만 채소와 거친 밥을 먹으면서 장성함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지금에 이르도록 몸에 질병이 없고 오장육부(五臟六腑)가 깨끗하니, 네가 아이를 기를 적에도 이 노부(老夫)가 한 것처럼 한다면, 병이 없고 장수할 뿐만 아니라 덕(德)을 이루고 훌륭한 일을 하는 기본이 또한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하였다.
경원록(景遠錄)-문인(門人) 이주(李주)
봄에 따뜻한 바람이 불어서 온갖 물건이 다 자라남은 선생의 기상(氣象)의 온화함이요,
깊은 바다처럼 모두를 포함하여 가득하고 줄어듦을 볼 수 없음은 선생의 도량(度量)의 웅장함이었다. 한 줄기의 도맥(道脈)을 찾아 천고(千古)의 경지를 밟음은 도(道)에 나아감이요, 총명한 지혜를 운용(運用)하여 귀신의 묘리를 탐구함은 이치를 밝힌 것이었다. 여러 현자(賢者)들을 절충하여 진실로 대성(大成)하였으나 또 있으면서도 있는 체하지 아니하여 겸손하고 또 겸손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 중에 선생을 아는 자가 드물었다.
유계화(柳季華 유진(柳袗)을 가리킴)가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선생을 따라갈 수 없는 점은 오직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 있을 것이다.” 하였다.
경원록(景遠錄)-문인 권봉(權崶)
선생은 언제나 친구들과 문답하는 편지를 손수 쓰셨는데, 상대방의 학식(學識)과 재기(才器)에 따라 증세에 맞게 약(藥)을 쓰듯이 해서 가르쳐주는 뜻을 깊게 얻었으며, 대면하여 가르치실 때에는 사람들이 모두 덕(德)을 보고 심취(心醉)하여 몸을 단정히 하고 공경하였다.
밥풀로 편지를 봉함하신 뒤에 혹 손바닥에 남은 밥풀이 있어 창 밖으로 내놓으면 산새가 날아와서 이것을 쪼아 먹고 의심하지 않았으니, 이는 비록 하찮은 일이나 물건을 해칠 마음을 잊은 지가 오래임을 징험할 수 있다.
선생이 강학(講學)하시는 규칙은 속담을 곁들여서 자세히 타이르고 풀어주시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힘들여 말씀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쉽게 의심이 풀렸으며, 혹 정신이 피로하고 기운이 나른해지면 서당 아래 수석(水石)의 사이를 산보하여 스물여덟 곳의 여러 명승지를 휘파람을 불며 구경하시곤 하였다.
물에 닳은 흰 돌 한 조각을 가져다 성명(姓名)과 표덕(表德 자(字)를 가리킴)을 쓰시고 네 친구들을 차례로 써서 입암(立巖)에 보관하여 길이 잊지 않을 뜻을 보였으며, 동해(東海)로 들어가 숨으려는 은미(隱微)한 뜻이 계셨다.
선생은 글을 쓰고 시를 읊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입암(立巖)의 산수(山水)가 동방(東方)에 으뜸이라고 할 만하였으나 다만 정사시(精舍詩) 몇 편이 있을 뿐이다.
선생은 일찍이 소자(小子)에게 가르치시기를, “시(詩)는 뜻을 말함에 불과한데 평담(平澹)함을 소중하게 여기니, 귀신이 깎아놓은 듯한 기이한 표현은 굳이 법받을 만한 것이 못 된다. 옛날에 주 부자(朱夫子)는 장남헌(張南軒)과 남악(南嶽)에 노셨는데, 시를 짓지 말 것을 경계하는 명령을 놀이를 끝마치고 돌아오는 날에야 비로소 푸셨으니, 우리들은 굳이 시에 전념하여 실천하고 탐구하는 공부를 분산(分散)할 것이 없다.” 하였다.
추정록(趨庭錄)-아들 응일(應一)
선군(先君)께서는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훼방과 칭찬은 사람이 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밖으로부터 이르는 것을 가지고 어찌 내 마음을 동요할 것이 있겠는가. 오직 나에게 있는 도리를 스스로 다할 뿐이니, 그렇다면 훼방과 칭찬은 또한 부질없는 짓일 뿐이다.
우리 인간은 자연 참다운 사업이 있으니, 저 명성과 이익의 사이에서 분주하고 입과 몸의 봉양에 급급하여 능사(能事)로 삼는 자는 참으로 가련하다.
자상하고 온화하고 공경하는 자는 한결같이 남을 사랑함을 일삼는데 자신에게 있어서도 또한 자연 복(福)을 구하는 유익함이 있으며, 음험(陰險)하고 시기하고 남을 이기려 하는 자는 언제나 남을 해치려는 마음을 갖는데 반드시 자신에게 손해를 부른다.
慈祥愷悌者。一以愛人爲事。在我亦自有求福之益。陰險忌克者。動以害物爲心。未必不招損於己。
사람마다 똑같지 않은 것은 기질(氣質)의 편벽됨이요, 변화하는 것은 학문(學問)의 공효(功效)이다. 지금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기질에 편벽된 부분을 알지 못하고 또 학문에 뜻을 두려고 하지 않으니, 어느 때에나 변화하여 좋은 기질을 얻겠는가.
훼방과 칭찬은 사람이 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밖으로부터 이르는 것을 가지고 어찌 내 마음을 동요할 것이 있겠는가. 오직 나에게 있는 도리를 스스로 다할 뿐이니, 그렇다면 훼방과 칭찬은 또한 부질없는 짓일 뿐이다.
배우는 자는 하루에는 모름지기 하루의 공부가 있어야 하고 일 년에는 모름지기 일 년의 공부가 있어야 하니, 하다 말다 하는 것은 곧 공부가 아니다.
용모(容貌)와 사기(辭氣)의 즈음에는 되도록 화평(和平)하여야 하니, 화평한 가운데에 온갖 선(善)이 갖추어지고 온갖 복(福)이 생겨난다.
마음가짐과 처사를 마땅히 광명정대(光明正大)하게 해서 남들이 모두 볼 수 있고 자신이 모두 말할 수 있게 하여야 한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가슴속의 깨끗함이 청천(靑天)의 백일(白日)과 같게 된다.
언론(言論)하는 사이에는 모름지기 분명하고 확실하게 할 것이요 돌리거나 과격하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니, 큰소리치거나 고담준론(高談峻論)을 일삼는 것을 군자는 하지 않는다.
마음은 다만 하나의 물건인데 성현의 천 마디 말씀과 만 마디 말씀이 모두 마음에 대하여 간곡히 말씀한 것은, 어찌 예리한 칼날과 사나운 말[馬]과 같아서 제재하기 어려우며 하늘에 날고 못[淵]에 빠져서간직하기 어렵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배우는 자가 시험상아 성현이 마음을 논하신 부분을 가지고 살펴보아야 비로소 마음의 병통을 알 것이다.
사람은 물욕(物欲)에 있어 가장 초탈하기가 어렵다. 만약 일푼이라도 물욕의 찌꺼기가 이 마음속에 있게 한다면 이미 눈을 열어서 한 물건을 볼 수가 없으니, 또 어찌 발을 들어서 한 걸음인들 향할 수 있겠는가.
사치가 가장 학문함에 해로우니, 배우는 자가 만일 살찐 말을 타고 가벼운 갖옷을 입으려는 생각을 마음 한쪽에 간직하고 있으면 곧 마음이 밖으로 달려간다. 그리하여 점점 그 가운데로 들어가서 자연 학문과는 상관이 없게 될 것이다.
남을 해치려는 마음을 가장 경계하여야 한다. 남을 해치려는 마음이 오늘 한 번 일어나고 다음 날에 또 한 번 일어나서 일을 만날 때마다 곧 나오고 있는 곳마다 곧 나온다면 끝내 험하고 편벽되어 측량할 수 없는 사람이 될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책을 읽을 때에는 모름지기 자세히 이해하여야 하니, 만약 단지 글줄을 찾고 글자를 셀 뿐이라면 비록 만 권의 책을 모두 읽은들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이는 이른바 ‘상자만 사고 구슬은 돌려준다[買櫝還珠]’는 것이니, 배우는 자가 깊이 경계해야 할 것이다.
자품(資稟)이 영오(穎悟)한 자는 공부가 이미 반을 넘은 것이다. 그러나 재주만 믿고 착실히 공부하지 않으면 그 폐해가 도리어 심하니, 이는 또한 배우는 자가 알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뜻을 세움은 모름지기 원대(遠大)함을 기약하여야 하니, 우리 인간의 한몸이 이 어떠한 포부(抱負)인데 쓰러지고 어둡고 나태하여 스스로 하류(下流)에 돌아감을 편안히 여긴단 말인가.
배우는 자들은 대부분 자뢰하고 도와주는 유익함이 없는 것을 한탄하는데, 책 속에 자연 엄한 스승과 어진 벗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일은 준절(峻截)하게 할 때를 당해서는 준절함을 잃지 않고 완곡(婉曲)하게 할 때를 당해서는 완곡함을 잃지 않아야 한다. 이 두 가지 일은 실로 두 가지 도리가 있는 것이 아니요, 준절한 가운데에 자연 완곡한 부분이 있어야 하고, 완곡한 가운데에 자연 준절한 부분이 있어야 하니, 때에 맞게 조처함을 삼가지 않으면 안 된다.
선조(先祖)를 받드는 것은 자손의 큰 예절이다. 한갓 제수(祭需)만을 올리는 것은 지엽적인 절차요 한갓 의식(儀式)만을 주장함은 헛된 문식이니, 오직 지극한 정성과 공경을 다함을 주장하여야 한다.
나의 선친께서는 뜻과 행실이 준엄하고 정돈되었으며 일을 만나면 강하고 굳세게 처리하시니, 내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내가 여덟 살에 선친께서 별세하시니, 이 때 나는 이미 종아리를 맞고 배웠다. 운명이 기박하여 일찍 부친을 여의어 가정의 교훈을 받지 못하였으나 내 생각해 보니, 내가 오늘이 있게 된 것은 실로 선친께서 적선(積善)한 남은 경사였다.
나는 어려서 글을 지을 적에 옛날의 훌륭한 인물이 되겠다고 스스로 기약하여, 오히려 문장이 조숙(早熟)함을 두려워하였다.
나는 해진 옷을 입어도 마음이 편안하고 거친 밥을 먹어도 입맛이 달아서, 종신토록 이대로 살아 괴로움을 알지 못하였다.
나는 질병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밤마다 글을 외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밤에 혹 연고가 있으면 새벽에 또다시 외워서 늙음에 이르도록 폐하지 않았다.
우리 왕부(王父)께서는 선군(先君)이 늦도록 자식이 없는 것을 걱정하시어 언제나 한밤중에 하늘에 기도하곤 하셨으니, 병란에 살아남은 잔약(殘弱)한 우리 후손들이 오늘날 보전하여 세상에 살아 있는 것은 어찌 남은 경사가 아니겠는가. 이 몸은 곧 선조의 몸이니, 우리 자손들이 어찌 그 몸을 아끼지 아니하여 선조에게 수치를 끼칠 수 있겠는가.
종가(宗家)에 아들을 두고 손자를 두어 장차 번성함에 이르게 되었으니, 내 항상 기뻐하여 종손(宗孫)을 보기를 우리집의 자제와 똑같이 여긴다.
우리 장씨(張氏)는 서로 전하여 23세(世)씩이나 오래되었으니, 이는 다만 미쳐 아는 것일 뿐이다. 또 하물며 귀와 눈으로 미칠 수 없는 그 이상의 세대에 있어서랴. 자못 선대에 선(善)을 쌓아 후대에 덕(德)을 먹는 보답이 아니겠는가. 무릇 우리 종중(宗中)에 있는 자들은 어찌 각각 선조를 받드는 효성에 힘써서 복록(福祿)의 원대함을 더욱 터 닦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선조의 묘소는 8세(世) 이상은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하여 보고 살피는 정성을 펼 수 없으니, 이는 내가 언제나 한을 품고 있는 것이다. 세대의 수가 점점 멀어져서 제사 또한 폐지하니, 그렇다면 잊음에 이르지 않음이 드물 것이다. 나는 생각건대 무릇 묘도(墓道)에 비갈(碑碣)을 세우는 자들은 선대의 묘소가 있는 곳을 함께 기록하여 후손들로 하여금 이것을 알게 하여야 하니, 이 또한 효도를 생각하는 한 방법일 것이다.
우리 외가(外家)는 영락(零落)함이 너무 심하다. 나는 외가의 자손이 성취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나의 자식과 차이가 없다.
세대가 내려옴에 풍속이 나빠져서 가문(家門)을 분할(分割)하여 처음에는 뿌리가 같던 사람들이 원수가 되기까지 하니, 집안을 망치고 종족(宗族)을 전복시키는 일이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나는 비록 남의 집안 이야기라도 이러한 것을 듣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하니 우리 동성(同姓)들은 어찌 ‘신(愼)’이라는 한 글자를 가지고 서로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 선대(先代)는 심히 청빈하지 않았는데 나의 몸에 이르러 이와 같이 청빈하다. 나는 비록 청빈하나 또한 이대로 나의 일생을 마칠 수 있으니, 분수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평소에 스스로 분수를 편안히 여기는 뜻이 많음을 깨달았다. 이 때문에 분수 밖에 경영하는 일이 절대로 없다.
청천당이 보는 아버지 여헌선생
선생은 매일 닭이 처음 울면 세수하고 빗질하고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띠를 매고는 대부인(大夫人)을 뵙고서 기거(起居)를 여쭌 다음 인하여 술과 음식을 올렸으며, 물러와 서실(書室)로 돌아와서는 손을 모으고 단정히 무릎 꿇고서 책상을 대하고 책을 읽다가 아침밥이 준비되었다고 알려야 비로소 들어와 모시고 밥을 먹고는 서실로 나아가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 점심때에 또 들어와 살피고 다시 술과 음식을 올렸으며 물러가서 또한 아침과 같이 하였다. 저녁이 되면 대부인의 부엌에 나아가서 점화(點火)를 점검하여 덥고 찬 것을 적당하게 하며 모시고 저녁밥을 먹기를 아침과 같이 하고는 마침내 잠자리를 정해 드리고 물러나와 다시 학업에 침잠(沈潛)하여 밤이 깊어서야 비로소 주무셨다.
그 자처하는 것을 살펴보면 정제하고 엄숙하여 범할 수 없을 듯하였으나, 대부인(大夫人)의 앞에 있을 때에는 온화한 용모와 안색으로 말씀하고 웃는 것이 편안하여 위로하고 기쁘게 함이 골고루 지극하였다.
방문한 빈객(賓客)이 있으면 안부를 서로 묻는 것 이외에는 외간(外間)의 일에 대해서 한 마디 말씀도 언급함이 없었다.
선생은 후덕하시어 종전에 서로 알고 지내던 자가 죽으면 비록 마을의 천한 자라도 반드시 종을 보내어 위문하고 또 부의(賻儀)하였다.
언어를 간략하고 신중하게 하며 행동거지에 절도가 있어서 사람들과 구차히 영합하지 않았다. 사람 중에 혹 웃고 희롱하며 서로 대하는 자가 있으면 선생은 음성과 안색이 변하지 않고 스스로 지키기를 더욱 견고히 하였으며 겸손하고 공손하고 순하여 성대한 덕(德)이 날로 드러나니, 끝내 교화의 범위(範圍)에 들어오지 않는 자가 없었다.
또 한번은 회시(會試)에 응시하러 가는 중이었는데 누암(樓巖)에 이르러 배가 풍랑을 만나서 장차 배가 난파(難破)하는 변을 당하였다. 이에 온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넋을 잃고 쓰러져 있었으나 선생만은 홀로 안색이 변치 않고 사람들을 진정시켰는데, 마침 돌아가는 배가 와서 구원하여 위태로움을 구제하였다.
하인들을 부림에 있어 은혜와 위엄이 아울러 행해져서 믿고 감동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비록 무더운 여름철이라도 일찍이 옷을 벗고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으며, 비록 친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더라도 일찍이 말을 함부로 하여 서로 희학(戱謔)하는 것을 듣지 못하였다.
누님에게 들으니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조모(祖母)께서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선군(先君)은 선비(先妣)와 함께 조모를 부축하여 언제나 이불을 갈아 펴드렸는데, 눈물이 두 뺨을 적시고는 수염을 타고 내려오니, 이와 같이 하시기를 반년이 넘게 하였다.
상(喪)을 당하자 장례하기 전에는 죽과 미음을 먹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빈소(殯所)를 떠나지 않았으며, 앉은 자리가 습기에 썩었으므로 바꿀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셨다. 이 때문에 난리 중에 위태로운 증세를 불러왔다.
또 일찍이 선비(先妣)에게 들으니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선생은 선고(先姑)를 섬길 적에 지극히 효성스러워 언제나 손으로 선고의 살과 몸을 어루만지시고는 노쇠하여 몸이 여윈 것을 서글퍼하였다. 무릇 음식을 공양할 적에 반드시 먼저 맛보고서 올렸으며, 베개와 자리를 마련하고 옷과 이불을 거두는 것도 몸소 하였다. 그리고 다른 지역에 시집가 사는 여러 누님들을 또 번갈아 청하여 함께 모셔서 즐거워하는 마음을 얻게 하였다.
상(喪)을 당한 이래로 선생의 얼굴을 볼 수 없었는데, 하루는 갑자기 안에 들어와서 말씀하시기를, “해구(海寇)가 육지로 올라왔다 하니, 피난하지 않을 수 없다.” 하시고는 먼저 사당(祠堂)에 나아가서 신주(神主)를 보관하고 다음에 제기(祭器)를 땅 속에 묻고 몸소 선비(先妣)의 신주를 지고 길을 떠났다. 피난가는 가운데 가지고 간 것은 오직 《주역(周易)》 고문(古文) 한 책과 상복(喪服) 한 보퉁이뿐이었다.
골짜기에서 경황 없이 지내던 날에 선생은 취사(炊事)하는 대로 비록 미음과 죽이라도 반드시 선비의 신주에 올려서 평상시 상식(上食)하는 뜻을 따랐다.
금오산(金烏山)에 피난해 계실 때에 선생이 갑자기 하산(下山)할 계획을 정하니, 여러 사람들이 다투어 만류하기를,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으니, 이 산에서 내려가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다.” 하였다. 이 날 밤 선생이 억지로 하산하여 다른 곳으로 가시니, 서로 따른 자는 종족(宗族)의 몇 집안뿐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 왜구(倭寇)의 대병력(大兵力)이 산을 수색하여 남아 있던 자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하거나 노략질을 당하였다.
비록 유리(流離)하여 곤궁한 가운데에 있더라도 손에서 일찍이 책을 놓지 않으셨다. 어떤 사람이 조롱하기를, “죽느냐 사느냐 하는 이 갈림길을 당하여 책은 읽어서 무엇하는가?” 하니, 선생은 웃고 답하지 않으시고는 다만 “자리가 차니 오래 앉아 있을 수 없다.” 하시고 사례하여 보내었다.
선생은 언제나 《주역》을 읽기를 그치지 않으셨다. 이 때문에 나 또한 귀에 익숙히 들어서 자못 《주역》의 문자(文字)를 왼다.
고을을 다스릴 적에 닭이 울면 일어나서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고 단정히 앉아 책을 읽었으며, 날이 새면 아문(衙門)에 앉았다가 해가 지면 비로소 들어오셨는데 독서하기를 또한 계속하여 밤이 깊어서야 취침하셨는바, 이것을 피곤하게 여기지 않고 도리어 즐거움으로 삼으셨다.
선생은 평소 자신을 받들 적에 담박(淡泊)함을 재미로 여기셨는바, 비록 관청에 있는 날이라도 더함이 없었다.
전후(前後)에 고을을 맡으셨을 적에 종과 하인들의 양료(粮料)를 줄이고 또 출입하는 것을 엄격히 통제하여 절대로 사사로운 일을 행하지 못하게 하시니, 해임(解任)하고 돌아오는 날에 서로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일찍이 선영(先塋)에 불길이 번지니, 선생은 당장 종들로 하여금 가서 불을 끄게 하시고는 인하여 황급히 걸어서 산기슭에 이르셨다. 이 때 하늘이 깨끗하고 해가 밝게 떠 있어서 한 점의 구름도 없었는데, 갑자기 구름이 몰려와 소낙비가 왔으나 또한 많이 내리지 않고 겨우 불만 끄고 그쳤다.
선생은 평소 거처할 때에 절대로 비단옷을 입지 않고 오직 제사 때에만 입고 제사를 행하셨다. 그리하여 비록 불난(不暖)의 나이를 지났으나 또한 이와 같이 하셨다.
선조의 기일(忌日)에는 검정색의 두건과 의복을 착용하고 봄과 가을로 성묘(省墓)할 때에는 흰 옷과 흰 띄를 사용하였으며, 사시(四時)의 길제(吉祭)와 계추(季秋)의 부친의 제사에는 검정색의 공복(公服)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언제나 제복(祭服)을 별도로 보관하여 평상복과 뒤섞이지 않게 하였다.
선생은 언제나 선친(先親)의 기일(忌日)에 곡하고 울며 슬피 사모하여 서글퍼하는 모양이 얼굴에 가득하여 종일토록 남은 슬픔이 있으셨다.
출입할 때에 반드시 사당에 아뢰었으며, 만약 오래 있다가 돌아오게 되면 또 반드시 참례(參禮)가 있었다.
난리 뒤에 가난하여 예(禮)를 행할 수 없으므로 삭망(朔望)의 참례(參禮)를 폐하였으나, 중년(中年)에 다시 행하여 거른 달이 엇었다. 그리고 만약 군주의 은혜로운 명령이 있으면 반드시 참례를 인하여 사당에 고유(告由)하셨다.
제사에 진설하는 제기(祭器)의 수를 한결같이 《가례(家禮)》의 도식(圖式)과 같이 하였는데, 없으면 혹 줄이고 있어도 또한 더하지 않으셨다.
무릇 제사가 있으면 기일에 앞서 목욕재계를 하고는 사객패(謝客牌)를 문 밖에 걸어놓았으며, 노비들을 경계하여 미리 청결하게 하고 제수(祭需)와 제찬(祭饌)을 장만함을 친히 살펴보지 않음이 없으셨다. 주무시되 옷을 벗지 않았으며, 닭울음소리를 들으면 세수하고 빗질하고 자제(子弟)와 집사자(執事者)들을 거느리고 제수를 진설한 다음 질명(質明)에 제사를 행하였으며, 장차 제사상을 치우려 할 적에도 순서가 있어서 문란하지 않았는바, 노년에 이르러서도 또한 근력이 부족하다 하여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으셨다.
누가 선물을 주면 한번도 감히 스스로 자시지 않고, 비록 제삿날이 멀리 떨어져 있을 때라도 반드시 명하여 보관하게 하였으며, 산과 바다에서 나는 물건으로 혹 생(生)으로 보관할 수 없는 것이면 또 명하여 말렸다가 후일을 기다려 쓰게 하셨다. 그리고 모든 제수의 종류를 집안 사람과 하인들의 손에 맡겨두지 아니하고 별도로 보관하여 봉함(封緘)하였다. 이 때문에 집안에는 비록 여러 번 끼니를 굶는 한탄이 있었으나 제사의 풍성함은 우리 집안과 비교할 자가 드물었다.
만일 외가의 제사이면 기일을 당할 때마다 반드시 제수를 보내어 제사를 도와주셨다.
종인(宗人)의 내외(內外) 자손들을 모아 시조(始祖)를 종가(宗家)에서 제사하고 말씀하기를, “이 제사는 이천 선생(伊川先生)이 의리(義理)에 따라 만들었는데 주자(朱子)는 말년에 행하지 않으셨으니, 선현(先賢)들이 비록 이미 정한 말씀이 있으나 지금 종자(宗子)가 다시 종가(宗家)를 옛터에 세우니, 비감(悲感)한 생각을 저절로 그칠 수 없다. 더구나 우리들은 시조의 묘소를 알지 못하니, 멀리 가신 선조를 추모하는 정성을 한번 펴는 것을 또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하였다.
언제나 국가의 기일을 당하면 비록 병중에 계시더라도 일찍이 소식(素食)을 행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집안 사람들이 만약 잊고서 고기를 올리면 말씀하시기를, “오늘은 아무 왕(王)과 아무 후(后)의 기일이다.” 하시고는 번번이 물리치셨다. 먼 선조의 기일과 친구가 죽은 날이나 일찍이 알던 이들이 죽은 날에 이르러서도 모두 죽은 자를 위하여 소식을 하셨다. 이 때문에 한 달 안에 고기 반찬을 자시는 날이 적었는바, 비록 노년에 이르러서도 또한 이렇게 하셨다.
거처하는 집을 모원당(慕遠堂)이라 이름하였는데, 이는 집이 선조의 옛터에 있고 선조의 묘소가 집 뒤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길이 사모하는 생각을 부치셨다.
평상시 거처하실 때에 조용히 앉아 있어 소상(塑像)과 같고 엄숙하여 무엇을 생각하시는 듯하였으며, 혼후(渾厚)하고 청수(淸粹)하며 온화하였다. 나아가고 물러나고 주선하는 절차와 동(動)하고 정(靜)하고 말씀하고 침묵하는 사이에 외면에 나타나는 것이 한결같이 법도를 넘지 않으셨다.
온 집안이 쓸쓸하여 채소와 거친 밥도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였으나 여유있게 대처하여 일찍이 한 털끝만치라도 경영하는 일이 없으시니, 집안 사람들은 선생의 이러한 뜻을 알고는 또한 감히 어렵고 궁핍한 것을 말씀드리지 못하였다.
문을 닫고 하루를 마쳐서 일찍이 독서(讀書)를 폐한 적이 없었으며, 때로는 눈을 감고 오뚝이 앉아서 묵묵하게 고요히 생각함이 있으셨다.
한밤중에 《주역》의 고문(古文)과 《중용(中庸)》, 《대학(大學)》, 주자(周子)의 《통서(通書)》와 태극도설(太極圖說), 이천(伊川)의 호학론(好學論), 명도(明道)의 정성서(定性書), 장자(張子)의 동명(東銘)·서명(西銘), 소자(邵子)의 무명공전(無名公傳), 한자(韓子)의 원도(原道) 등의 글을 묵묵히 암송하여 언제나 순환(循環)하여 그치지 않으셨는바, 별세할 때에 가까워서도 오히려 부지런히 힘쓰셨다.
언제나 상고 시대의 삼분(三墳), 오전(五典)과 팔색(八索), 구구(九丘)등의 책을 보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사람들이 선행(善行)이 있다는 말을 들으시면 종일토록 기뻐하는 기색이 얼굴에 나타났으며, 혹 옳지 못한 일이 있다는 말을 들으시면 슬퍼하여 편안하지 못하셨다.
시끄럽고 번잡한 마을에 사는 것을 싫어하시어 언제나 산사(山寺)나 강각(江閣), 학사(學舍) 등지에서 고요함을 취하여 문을 닫고 단정히 앉아서 혹 책을 보시거나 혹 글을 지으시어, 일찍이 한가하게 지낸 적이 없으셨다.
문도(門徒)들이 낙동강(洛東江) 가에 터를 잡아 강당(講堂)을 마련하니, 곧 부지암(不知巖)이었다. 한가한 날에는 언제나 가마를 타고 가시어 밝은 창문과 조용한 책상에 도서(圖書)를 좌우에 진열하여 스스로 진리를 터득하는 즐거움이 있었으며, 어른과 동자 6, 7명과 때때로 강안(江岸)에 올라가 한가롭게 바람 쐬고 시 읊는 흥취가 있으셨다.
때로는 혹 남여(籃輿)를 명하여 산에 오르고 물가에 임하여 마음내키는 대로 노닐었으며, 술에 약간 취하시면 천연(天然)의 온화함이 약간 드러났다. 그리하여 비록 농사짓는 이야기와 시골의 말이라도 응답하지 않음이 없으시어, 곧 스스로 천리(天理)를 즐겨 상하가 함께 흐르는 뜻이 있으셨다.
이웃에 한 백성이 늙은데다가 눈이 멀고 홀아비로 독신이어서 의뢰할 만한 친척이 없었다. 선생은 언제나 그에게 술과 밥을 보내주고 또 옷을 벗어 입혀 주었으며, 그가 죽자 한마을 사람들에게 명하여 시신을 묻어주게 하셨다. 그리고 언제나 노인이 있으면 반드시 안부를 묻고 선물을 보내주곤 하셨다.
매년 제석(除夕)에는 몇 말의 쌀과 병에 담긴 술과 어물(魚物) 등의 제수를 장만하여 옛날 하인 중에 후손 없이 죽은 자를 위해 늙은 종으로 하여금 제사지내게 하였다.
마을에 일찍이 계모(繼母)를 욕하는 자가 있었는데, 선생은 즉시 관청에 알리도록 명하여 법으로 치죄(治罪)하게 하였다.
백성들 중에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는 행실이 있다는 말을 들으시면 반드시 초청하여 장려하고 위로하였으며, 또 고을의 일을 맡은 자로 하여금 관청에 보고하여 상을 내리게 해서 부역을 면제하게 하기까지 하였다.
국가에서 일찍이 향약(鄕約)의 조목(條目)을 반포하여 시행하였는데, 선생은 이것을 취하여 보시고는 매우 기뻐하여 이르시기를, “말세에 인심의 각박함이 이와 같으니, 백성을 교화하고 아름다운 풍속을 이루는 방법에 반드시 도움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무릇 수령(守令)과 선비들을 만나면 이것을 시행하여 권선징악하는 방법을 가지고 간곡히 말씀하시곤 하였다.
말년에 일찍이 한숨을 쉬고 탄식하며 말씀하시기를, “세도(世道)가 나빠지고 인심(人心)이 사라졌다. 효제충신(孝悌忠信)의 도리는 진실로 하늘에서 얻었는데 사람들이 이것을 아는 자가 드무니, 이는 강(講)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였다. 그리하여 동지(同志)와 배우는 자들과 함께 의논을 정하여 옛사람 중에 이 네 가지 행실을 행한 자들을 모아 기록해서 서로 강론(講論)하여 오늘날 계(契)를 만드는 것처럼 하려고 하였으나, 불행히 이루지 못하셨다.
일찍이 의식(儀式)을 만들어서 가범(家範)을 정돈하여 한집안 안에 행하고자 하였으나, 이 역시 끝내 실행하지 못하셨다.
옷과 관은 검소함을 숭상하여 세속에 따라 변하지 않으셨다. 임금께 등대(登對)하는 날에 성상(聖上)은 이것을 보시고 좋아하여 말씀하시기를, “상고시대의 옷과 관은 사치한 풍속을 크게 변화시킨다는 말이 있다.” 하였다.
발걸음을 뗄 때에는 반드시 왼발을 먼저 하고 허리띠를 두를 때에도 또한 왼쪽을 먼저 하며 말씀하시기를, “천도(天道)가 왼쪽으로 돌기 때문이다.” 하였다.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 《주역(周易)》에 ‘하늘의 운행은 굳세니, 군자가 이것을 보고서 스스로 힘써 쉬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는 곧 성실히 함이 사람의 도라는 것이다.” 하였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족보(族譜)가 병화(兵火)가 일어나던 날에 보전되지 못하였다. 선생은 젊었을 때에 소견과 생각이 없어서 널리 써서 보전하려 하지 못한 것을 매우 한하셨다.
선생은 덕(德)이 겸손하고 예(禮)가 공손하였으며, 행실이 공경하고 말씀이 겸손하였으며, 보고 듣는 것을 닫고 종적을 거두셨다. 그러므로 비록 혼란함이 무신년(1608,광해군즉위년) 이후처럼 심하였으나 끝내 허물이 없는 길함이 있으셨다.
일찍이 《서경(書經)》의 ‘위미 정일(危微精一)’과 《주역(周易)》의 ‘경직의방(敬直義方)’과 《중용(中庸)》의 ‘계신 공구(戒愼恐懼)·막현 막현(莫見莫顯)’과 《대학(大學)》의 ‘극명 고시(克明顧諟)’와 단서(丹書)의 ‘경승태길(敬勝怠吉)·의승욕종(義勝欲從)’을 인용하여 앉으시는 자리의 사이에 써놓으셨으며, 또 ‘도리는 무궁하니 내 늙고 병들었다 하여 스스로 포기할 수 없다. 반드시 모름지기 날마다 새로 터득함이 있어야 거의 혹 일생을 취(醉)하여 보내는 것을 면할 수 있다.[道理無窮 吾不可以耄病自畵 必須要日有新得 庶或免醉過一生]’는 스물여섯 글자를 써서 스스로 힘쓰며 말씀하시기를, “내 평소 이 뜻을 게을리함이 없었다.” 하였다.
말년에 눈이 어두워 책을 보시기에 불편하였다. 그리하여 언제나 거처하는 서실(書室)의 서쪽 창문에 햇빛이 밝게 들어올 때를 기다려 책을 보셨으며, 때로는 자제(子弟)들로 하여금 읽게 하고 들으시곤 하였다.
언제나 종족(宗族)들을 만나면 반드시 화목하고 사랑하는 의리를 권면하였으며, 곤궁하고 잔약(殘弱)하여 스스로 생존할 수 없는 자를 보시면 애처롭게 여겨 구휼해 주시곤 하였다.
선군(先君)께서는 가르치실 때에 오로지 실행을 힘쓰셨다. 그러므로 사장(詞章)으로 자제들을 인도하지 않았으며, 또한 과거(科擧)의 급제(及第) 여부를 가지고 사람을 하찮게 여기거나 귀중하게 여기지 않으셨다.
무당의 무리들이 여염(閭閻)에 성행하면서 백성들을 속이고 교화를 해침을 매우 미워하셨다. 그리하여 향교로 하여금 향사당(鄕射堂)에 통문(通文)을 보내어 일절 금하게 하였다.
조정의 정사와 명령 중에 한 가지라도 합당한 것이 있으면 기뻐하는 기색이 얼굴에 나타났으며, 혹시라도 도리에 어그러진 것을 들으시면 서글퍼하여 잃음이 있는 것처럼 여기셨다.
전후(前後)의 국상(國喪)에 학사(學舍) 등지에서 슬픔을 표시하는 의식을 행하여 성복(成服)으로부터 상(喪)이 끝날 때까지 멀리 바라보고 곡하시기를 의식과 같이 하였다. 국상을 장례하기 전에는 비록 사사로운 기일(忌日)을 만나더라도 어물(魚物)과 제찬(祭饌)을 진설하지 않고 다만 단헌(單獻)을 올렸으며, 장례한 뒤에 길제(吉祭)의 달을 만나면 제사를 행하기를 다만 명절(名節)에 올리는 의식과 같이 하여, 세 번 술잔을 올리고 음복(飮福)을 받는 예(禮)를 모두 갖추지 않으셨다.
조정에 달려가실 적에 나이가 이미 70세를 넘으셨는데도 서로 접견하는 자가 하루에 백 명에 이르렀으나 예모(禮貌)를 갖추어 영접하시는 수고로움을 관직의 높고 낮음에 따라 차등을 두지 않으셨다. 이와 같이 하기를 거의 한 달이 넘도록 하셨는데, 조금도 게을리하심을 보지 못하였다.
성상(聖上)께서 인접(引接)하시던 날에 예의가 숙달되고 진퇴가 법규에 합하니, 입시(入侍)한 여러 관원들이 모두 산야(山野)의 사람 같지 않다고 말하였다.
본부(本府)의 향교(鄕校)가 터가 기울어서 비바람이 몰아치면 무너지는 변고를 장차 헤아릴 수 없었다. 이 때 조정에서는 각 고을에 향교를 옮기는 병폐를 엄하게 금하고 있었는데, 선생은 옮기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을 도(道)를 맡은 사람에게 강력히 말씀하여 자세히 아뢰게 하여 허락을 얻었다. 그리하여 편안한 자리를 택하여 즉시 옮겨 세우는 일을 거행하였는데, 선생이 맨 먼저 앞장서서 삼베를 내어 도왔으며, 또 고을의 자제들에게 권하여 각기 울력을 내게 하셨다. 그리고 때로는 몸소 왕림하여 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였으며 지성으로 부지런히 하고 간곡히 하여 시종 하루같이 하시니, 읍(邑)이 비록 잔폐(殘弊)하였으나 공사가 쉽게 이루어졌다. 봉안(奉安)할 때에 이르러 의식(儀式)과 절문(節文)을 모두 선생께서 참작하여 정하셨는데, 며칠 후에 옛 사당이 비로 인하여 무너지니, 고을 사람들은 모두 다행하게 여겼다.
선군은 일찍이 병환이 위독하시어 문인(門人)들에게 당부하기를, “내 비록 위태로운 가운데에 있으나 항상 지극히 알맞고 지극히 올바른 도리를 생각하며 이외에는 다른 생각이 없으니, 죽고 사는 것을 어찌 걱정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불초(不肖)가 출신(出身)을 하고는 와서 선군을 뵈니, 선군은 공복(公服)을 입고 대청 가운데에 앉아서 보시며 “새로운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하시고는 인하여 경계하기를, “이로부터 너는 곧 조정에서 군주를 섬기는 사람이니, 내 너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 지난날에 비하여 절로 각별하다.” 하였다.
또 훈계하기를, “신하가 이미 나라에 몸을 허락하였으면 자연 분수와 의리가 있는 것이니, 지금 내가 비록 늙고 병들었으나 너는 다만 왕래하여 서로 볼 뿐이니, 나 때문에 한결같이 물러나려고 할 것이 없다.” 하였다.
일찍이 아들 응일(應一)에게 명하기를, “옛사람의 책을 보면 어느 것인들 간절하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마는 《춘추(春秋)》한 책은 선(善)과 악(惡)에 대한 심술(心術)의 구분이 분명하고 옳고 그름에 대하여 칭찬하고 폄하하는 의리가 공정하니, 신하로서 군주를 섬기는 자들은 알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네가 《춘추》를 읽기를 바란다.” 하였다.
응일(應一)이 새로 벼슬에 임명되어 길을 떠나게 되자 훈계하는 시(詩)를 지어 주셨으며, 또 술을 권하고 말씀하시기를 “너는 마땅히 가슴속에 새겨두라.” 하였다. 내 이제 선군의 분명한 가르침을 추억하면 아직도 쟁쟁하게 귀에 가득한데, 돌아보건대 스스로 어질지 못하여 단 하루도 준수하지 못하였으니, 하늘에 이르는 애통함을 다시 어찌 말하겠는가.시(詩)는 원집(原集)에 보인다.
갑자년(1624,인조2)에 역적인 이괄(李适)의 변이 있자, 대가(大駕)가 남쪽 지방인 공주(公州)로 파천(播遷)하였다. 선군(先君)은 달려가 위로하려고 길을 떠나셨는데, 도중에 적의 괴수가 잡혀 죽어서 대가가 이미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는 다시 도성(都城)으로 달려가셨다. 그리하여 교외(郊外)에 이르러 장령(掌令)을 제수하는 교지(敎旨)를 받았으니, 2월 그믐날이었다.
3월 5일에 대궐에 나아가 사은 숙배(謝恩肅拜)하시니, 성상께서 선군을 인견하였다. 성상께서 말씀하시기를,
“속담에 당국자(當局者)는 어둡다 하였으니, 조정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국정을 담당한 자라서 혹 미처 생각하지 못할 듯하다. 예로부터 외방(外方)에 있는 선비들은 고요히 수양하는 가운데에 반드시 옳고 그름을 분명히 아는 이가 있었다.”
하니, 선군은 대답하시기를,
“먼저 큰 기축(機軸)을 정하시면 절목(節目) 사이의 일은 자연 조처하는 가운데에 하는 것일 뿐입니다.”
하였다. 성상께서 묻기를,
“이른바 큰 기축이라는 것은 무슨 일인가?”
하니, 선군은 대답하시기를,
“예와 지금에 떳떳이 행하는 도(道)와 공경(公卿)들이 모두 옳다고 하는 말씀이 바로 큰 기축입니다. 다만 분발하고 진작하여 함께 공경하고 서로 화합함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선군이 나오시자, 성상은 명하여 옷과 물자와 식량과 음식을 하사하였다.
병인년(1626,인조4)에 노친이 조정에 나아가 배행(陪行)하셨는데, 이 때 예조 판서인 이정귀(李廷龜)가 와서 절하고 시정(時政)의 급선무(急先務)를 물으니, 노친께서는 군주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을 말씀하였다. 이공(李公)은 인하여 《주역》의 몇 곳을 외면서 의심나는 부분을 질문하려 하였으나 노친은 병을 아뢰어 체직(遞職)되기를 바라고 있으므로 감히 한가롭게 강론할 수 없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묻는 대로 간단히 대답하실 뿐이었다.
정묘년(1627) 호소사(號召使)의 명에 응할 적에 충의(忠義)로써 창도하니, 사람들이 모두 흥기(興起)하여 명령을 번거롭게 내리지 않았는데도 군량(軍糧)이 이미 모여 쌓이게 되었다.
계유년(1633) 7월 천둥 번개가 밤에 일어나 대궐 안에 벼락이 치는 변고가 있으니, 성상이 놀라시어 훌륭한 말을 구한다는 분부를 내리셨다. 이에 선군은 글을 올려서 두려워하여 닦고 살피는 도리를 말씀하였으며, 《주역》의 64괘(卦) 중에 특별히 진괘(震卦)가 혹은 아래에 거하여 정(貞)이 되고 혹은 위에 거하여 회(悔)가 된 것 16괘를 뽑아서 별도로 한 책을 만들어 올리셨다.
병자년(1636) 변고를 들으신 초기에 즉시 말씀하시기를, “일이 경황이 없으니, 조정에서 비록 명령이 없으나 남쪽 지방 사람들은 의리에 분발하지 않을 수 없다.” 하시고는 즉시 고을의 선비들로 하여금 도내(道內)에 통문(通文)을 돌리게 하였으며, 또 스스로 울력을 내어 본부(本府)의 의병(義兵)을 도우셨다. 그리하여 편안히 거처할 겨를이 없어서 점점 걱정하여 파리함에 이르셨는데,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항복했다는 비보(悲報)를 들으시고는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하시어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셨다.
정축년(1637) 2월 17일, 선군은 선영(先塋)에 절하고 하직하면서 고유(告由)하는 글이 있었으며, 이미 물러나오시자 산기슭에서 쉬셨다. 수행하는 자들이 날이 저물었다고 아뢰자 선군은 말씀하시기를, “옛사람이 ‘느리고 느리다, 나의 걸음이여.’라고 하였으니, 나의 오늘이 바로 그러하다.” 하였다.
3월 19일에 영양(永陽)의 입암(立巖)에 이르시니, 이는 옛날 살던 집이 있던 곳이었다. 지역이 궁벽하고 산골이 깊어서 외부의 일이 이르는 것이 드물었으므로 편안히 여기신 것이었다. 문생(門生)에게 명하여 제문(祭文)을 지어 입암에 제사하게 하였으니, 이는 우뚝이 솟아서 미친 듯한 물결이 충돌하는 가운데에도 꺾이지 않음을 숭상하신 것이었다. 인하여 명명하시기를 입탁암(立卓巖)이라 하였으며, 또 문생들에게 명하시어 복숭아나무를 두루 심어서 한 구역의 도원(桃園)이 되게 하였으니, 또한 깊은 뜻이 있는 것이었다. 책을 보고 글을 저술하는 일을 이 때에도 폐하지 않으셨다.
강절(康節) 선생의 사사음(四事吟)을 손수 써서 벽에 걸어놓으셨다. 당(堂)과 대(臺)와 골짝을 옛날에 일찍이 명명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각기 이에 대한 시(詩)를 읊어서 흔연(欣然)히 장차 일생을 마치려는 뜻이 있는 듯하셨다.
선생은 일찍이 심의(深衣)를 만들고자 하셨으나 세상 사람들이 제각기 의견을 내어서 옛사람의 제도에 합하지 않는 것을 나쁘게 여기시어 삼베를 짜 놓았으나 만들지 않으셨는데, 이 때에 《가례(家禮)》와 《예기(禮記)》, 《의례(儀禮)》를 참고하여 문도(門徒)들에게 명하여 만들게 하셨는바, 치마는 옛제도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심법(心法) 열두 조목을 서술하여 써서 좌석의 벽에 걸어 놓으시고 모두 지목하기를 ‘좌벽제성(座壁題省)’이라 하였다.
8월 25일 경신일에 병이 드시어 9월 7일 임신일에 만욱재(晩勖齋)에서 별세하였다. 전날 밤에 폭풍과 큰 우레와 비가 내리는 변고가 있었다.
선군은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상가(喪家)에서 스스로 만장(挽章)의 삼베를 마련하여 사람들에게 널리 만사(挽詞)를 요구하니, 이는 심히 부박(浮薄)한 일이다.” 하셨다. 그러므로 불초는 감히 만사를 남에게 요구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이 스스로 갖추어 온 것이 약간 장(章)이었다.
제8회 여헌 장현광 선생 학술대회에 다녀와서
허철회
오늘 오후 2시부터 고려대학교 국제관 대회의실에서는 여헌 장현광 선생 학술대회가 열린다고 하여 참가했는데 서울문화사학회 회원 중 이용규 수석부회장, 남윤수 부회장, 장재환 총무이사, 조완희 회원, 여성 회원 두 분과 저도 참석하였다. 전체적으로 참석 인원이 200여분 정도 오셨다. 오신 분들은 유림단체인 박약회(회장 이용태, 전 삼보컴퓨터회장) 회원이 많았고 영남지역 인사 중 인동장씨 후손과 타성으로 이루어졌다. 우리 양천허가에서도 사무총장 허완 씨, 간사 허봉무 씨, 의전 허동 씨 등이 참석하였는데 미수 허목선생 학술대회가 얼마전에 수원에서 있었는데 왜 참석하지 않았느냐고 하였다. 나는 사실 정보를 몰라서 가지 못했다면서 미안하다고 답했다.
발표자는 5명이었는데 김용헌 한양대 철학과 교수는 <여헌 성리설의 연원적 고찰>, 이희평 성대 철학과 교수는 <여헌의 퇴계성리학 계승의 측면>, 박종우 전북대 교수는 <여헌시에 있어서의 '경'의 이념과 형상화 방식>, 안세현 고려대 강사의 <여헌의 인문정신과 산문의 계보>, 권혁명 고려대 강사의 <여헌시의 일국면-여헌의 현실인식과 대나무의 이미지- 등이다. 첫 발표자는 신병관계로 참석이 늦어지는 일이 발생하여 사회자가 대독하는 일이 벌어졌다. 병원에 가는 일이 생겼다고는 하나 발표자로서 너무 소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표자는 내용도 중요하지만 성심성의껏 노력하는 자세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번째 발표자인 이희평 교수는 이황의 계승자라고 하는 여헌의 입장에 회의를 품고 있다는 발표를 하면서 이이의 철학과 상동성이 있는 면이 있다고 하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퇴계학파의 계승자로서 여헌학을 보고 여헌의 계승자가 미수라고 보고 있고, 성호, 순암, 다산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오늘 발표를 통해 학문적 연원이 복잡한 사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그러나 영남지방이라는 공간에서 학파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다음 세 발표자는 여헌문학을 발표하였는데 다소 성글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본인들이 평소 연구하던 분야라면 애정이 깃들어 있으나 어느 날 주최측이 원하는 주제를 던져 주면서 논문을 쓰라고 하면 당혹스럽고 쓰기에 힘든 면이 있었을 것이다.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에서 선정한 발표자가 주로 고려대 철학과, 국문학과, 한문학과 출신들이 주류이고 그 외는 그 대학 출신으로 외부 학교에 재직 중인 분들이었다. 오신 분들에게는 <여헌선생수찰>(한국학중앙연구원, 2010, 3만원)와 <여헌학의 심층적 이해 2-여헌의 성리설과 문학세계-라는 제8회 학술발표요지집을 제공하였다. 쉬는 시간에는 다과가 제공되었다. 토론까지 끝나고 나서 저녁식사로는 소불고기백반과 소주를 제공하였다.
여헌 장현광은 대단한 성리학자인데 이른바 '여헌 장현광 평전'이 한 권 정도 나와서 장현광에 대한 전반적 파악이 될 수 있어야 하고 그 기반 위에서 장현광의 문학과 철학이 세밀하게 연구되어야 한다.(이 부분은 여헌 선생의 후손 장달수씨가 한 말) 나는 개인적으로 미수 허목과 같은 집안인 양천허가로서 여헌의 적전(嫡傳)인 미수의 입장을 염두에 두고 <여헌 장현광 평전>을 쓰고 싶다. <오천 이문화 평전>을 디딤돌로 하여 같은 영남 출신의 성리학자를 한 번 연구하고 싶다. 곧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장현광 개론서가 필요하다고 야단법석이다. 같은 인동 장씨에서도 기조 강연으로 여헌 선생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홍보와 대중적 메세지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다시 말하면 여헌 장현광 선생의 생애와 사상이 일반 대중들에게 전달되는데는 성공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5분의 발표자의 발표요지가 200여명의 청중에게 전달되는 데는 쉬운 표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나라 학술계는 전문연구자들의 문답으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한데 참석한 청중은 무엇이란 말인가? 청중을 외면한 그들만의 잔치가 되면 안된다. 다음 학술대회에는 기조 강연이라도 넣어서 여헌의 삶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나서 본격적인 논의로 들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한편 발표자 선정도 문제가 있다. 여헌 장현광을 전공하는 분을 일순위로 하고 지역적 안배가 영남지역 대학 에서 공부한 학자가 별로 없다. 그 학문적 토대가 형성된 곳이 경상북도 구미지역이라면 대구 경북에 있는 대학 출신 중 여헌에 관심을 두고 있는 분들을 등용했어야 한다. 고려대 철학연구소에서 주최하니까 편향성이 들어간 것은 사실이다. 여헌학연구회에서는 미래에 여헌학을 연구할 인력을 양성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장학금을 주어서 석, 박사과정에서 여헌학을 전공할 학자를 선발하여 꾸준한 연구 성과를 축적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여헌학자료를 영인하여서 꾸준히 제공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최근 <역학도설> (2책)과 <해동문헌총록> (1책)을 영인한 사례는 아주 훌륭한 업적에 해당한다고 본다.
한편 장씨들이 가지는 특징을 살펴보면 본관이 인동과 안동 등이라서 그런지 경상도 일대에 많이 분포하고 수도권에도 많이 사는데 장씨 여성은 적극적이고 씩씩하다. 여성들이 대부분 베풀 장(張)자가 말하듯 남에게 인정을 잘 베푸는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이타적인 면이 있고, '활이 길다'는 뜻이 있듯이 키가 큰 편이고 잘 생겼다고 한다. 대구출신 장윤정 미스코리아와 충주출신 장윤정 가수를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