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三國遺事)는 왜 무슨 까닭에 지었을까. 그 대답은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에 있지 않을까 한다. 흔히 기이편의 기이를 신이한 이야기로 풀이한다. 물론 그런 부분이 상당하다. 그러면 기이에서 기이할 기(奇)자 기이편이라 해야지 무엇 때문에 벼리기(紀)를 썼을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여기 기이의 기(紀)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신라와 고구려, 그리고 백제의 본기의 기(紀)라고 본다. 삼국사기에 실린 삼국의 본기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 우리 역사의 뿌리인 고조선 부분이며 위만과 부여, 고구려와 발해, 백제 부분이 빠져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아울러 가락국기(駕洛國記)의 가락의 역사가 빠졌다고 본 것이다. 김부식(金富軾)이 엮은 삼국사기의 찬술 시기가 고려 인종 23년(1145)이고 일연(一然)의 삼국유사가 고려 충렬왕 7년(1281) 무렵이니 시점의 거리가 136년에 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이유로 새로 삼국유사를 지은 것이다. 여기 유사(遺事)라 함은 삼국사기에서 빼놓은 사실들을 이른다고 볼 수 있다. 두 사서의 같고 다른 점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우리 역사의 출발 시점이 다르다. 삼국유사에서 우리 역사의 출발이 고조선인데 삼국사기에서는 신라로부터 출발한다. 고조선을 세운 단군왕검은 기원전 2333년(B.C. 2333) 무렵이다. 단군왕검이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1908세에 아사달의 산신이 되어 생을 마감했다고 서술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외세에 의한 식민사관이나 동북공정의 담론들은 이는 역사가 아니고 그냥 승려들이 만든 신화라고 치부해 버린다. 따라서 일본의 역사가 4백 년이나 앞서 있다는 강변이다. 광복된 지 70여 년이 지났는데도 내로라하는 학계에서조차 식민사학자들과 같은 논조를 이어가고 있다. 발생과 발전은 다를 수 있다. 삼국유사가 편찬된 지 겨우 80여 년이 지난 고려 공민왕 12년(1363) 계묘년에 당시 수문하시중이던 행촌 이암(李嵒) 선생이 지은 단군세기(檀君世紀)에 고조선 임금의 세계를 47분의 임금을 적고 있다. 이는 조선조 세종 11년(1429) 평양에 단군사당을 세우고 단군을 국조(國祖)로 천명하였다. 세종 당시 좌우정이던 이원(李原)은 행촌 선생의 손자였다. 그 시간의 거리가 66년에 불과하다. 최근 들어 2015년 중국 국무원에서는 산서성 도사유적에서 요(堯) 임금의 궁성 터와 문자가 출토되었음을 밝히고 중국의 역사 기술의 시발점을 4백 년 앞으로 당겨서 기술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삼국유사의 경우, 단군왕검이 나라를 세운 시점이 요 임금이 나라를 다스린 지 50년 년 되는 경인년이다. 요 임금과 단군은 같은 시기의 인물이다. 단군은 이때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이란 나라를 세웠다고 적고 있다. 고구려를 이은 발해에 대한 기록이며 가락국에 대한 역사와 향가와 같은 고유한 우리나라 문화의 태백산맥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2) 왕력(王曆)의 순서가 다르다. 삼국사기의 본기에서는 신라-고구려-백제 순으로 28권에 걸쳐 올라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고조선-위만조선-부여-고구려-발해-백제 순으로 상고사를 기술하고 있다. 삼국사기의 경우, 고조선 시대가 없으니까 신라를 머리로 삼아 본기를 엮은 것으로 보인다. 3) 삼국사기는 왕명으로 나라에서 추진한 공식적인 관찬 역사서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일연 스스로가 평생을 바쳐 자료를 모아 본인의 사관으로 엮은 사찬 대안사서다. 삼국사기의 경우, 왕명으로 김부식을 비롯한 11명의 사관들이 3년 동안에 만든 나라가 인정한 대표적인 정사다. 중국의 기전체 역사 기술 형식으로 편찬된 최초의 한국 역사서라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한편 일연은 평생 동안 혼자서 자료를 모아서 삼국유사를 개인적으로 만든 사찬 사서요 대안사서다. 4) 삼국사기의 역사관을 보면 김부식은 왕과 귀족의 역사적인 사실을 중심으로 하되 당과 송나라를 우선시하는 사대적(事大的)인 연대기로 엮었다. 예로써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 원인이 당나라를 섬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삼국유사에서는 고조선을 하늘의 자손이 세운 나라로 상정하였다. 올린 인물의 경우, 왕에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단군에서 통일 신라까지 자주적(自主的)인 역사관이었다. 5) 삼국사기의 열전에서는 충신과 역신, 그리고 효자와 열녀 등을 다루고 있다. 삼국 모두가 나라의 종교가 불교인데 김부식의 유교사관으로 원광이나 자장, 원효나 의상과 같이 승려이면서 호국애족에 앞장 섰던 고승 대덕 등을 일절 다루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삼국유사에서는 해동고승전이라 할 만큼 의해 부분에서 14분의 승려의 행적을 올리고 있다. 일종의 불교사를 기술하였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6) 두 역사서에서 다룬 자료의 내용을 볼 때, 삼국사기는 집필자의 견해를 밝힌 사론(史論)을 제외하고는 어디까지가 역사적인 사실이고 아닌지가 불분명하다. 이에 대하여 삼국유사에서는 다양한 사료들을 갈라서 다루었고 이에 대한 편찬자의 견해를 밝히는 식으로 서술하였다. 이들 사서들은 모두가 사료편찬의 고전적인 술이부작(述而不作)하는 태도로써 사료편찬의 객관적인 방식을 취하였다. 7)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는 모두가 나라가 겪었던 내우외환의 시련 속에서 태어났다. 삼국사기는 고려 17대 인종(1122-1146) 무렵 나라 안에서는 이자겸과 묘청의 반란 등 피튀기는 권력 다툼이 있었고 나라 밖으로는 금(金) 나라와 군신의 관계를 맺는 등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 민족의식에 기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임금에게 올리면서 적은 삼국사기 앞부분에 올린 진삼국사표(進三國史表)에 고려의 학자들은 중국 역사는 잘 알면서도 정작 우리 역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함을 지적하면서 이 책을 쓰게 되었다는 찬술 동기를 적고 있다. 한편 삼국유사는 고려 고종 18년(1231)부터 9차례에 걸쳐 몽골의 침략에 맞서는 대몽항쟁과 최씨 무신 정권의 위기 상황에서 민족의식이 더욱 절실하게 싹이 텄다. 이에 일연은 온몸으로 민족정기를 살리기 위하여 삼국유사는 물론이고 고려대장경을 마무리하는 증의(證義)로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하였다.
첫댓글 https://youtu.be/jedEhNc5Bj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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