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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자기 부정
(아사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컨대 사랑으로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대하 14:11)
유다왕 아사는 어느 날 복음을 전하는 모든 목회자들이 섰던 바로 그 장소에 서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사악한 원수들과 마주 대하고 있을 때 그는 그들의 지도자였습니다. 목사의 직분을 수행하는 순간순간이 모두 격렬한 갈등으로 가득 찼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휴식의 순간들은 전투보다 더 놀랍습니다. 위대한 목자께서는 그의 양떼를 이리 가운데 살도록 보내셨습니다. 이 영광스러운 주권자께서는 ‘그의 원수들 가운데서’ 그분의 영원한 나라의 제반사를 지휘하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교회를 지옥문 곁에 세우시고 사탄의 구역에서부터 자기 몸의 신입 회원을 모집하십니다. 그때 모든 설교자들은 흑암의 지배자들의 세력을 대항하여 진리와 의를 수호하여야 함은 필연적입니다.
구스[에디오피아] 사람 세라가 유다를 공격하였던 것처럼 우리 회중에서도 공격이 가하여집니다. 인본주의, 물질주의, 쾌락주의가 소수의 신자들을 향하여 진군하는 압도적인 세력으로 열거됩니다. 지상의 교회는 전쟁 상태에 있습니다. 교회는 항상 전투하고 있습니다.
아사는 세라가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원수를 맞이하기 위하여 진격하였습니다. 600,000 군사를 이끌고 아사는 침입자를 포위하였습니다. 병거(그 당시 병기 가운데 날쌔고 두려운 죽음의 기계) 300승을 이끌고 백만 대군이 진격하여 왔습니다. 아사는 침입자를 확실하게 격퇴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강림하셔서 유다를 위하여 싸우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에디오피아 군사들은 ‘여호와 앞에서 패망하였고’, ‘여호와께서 사면 모든 성읍 백성을 두렵게 하셨습니다.’ 적대 세력은 단지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니라 회복할 수 없도록 분쇄되었습니다. 재공격을 하기 위하여 재편성을 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불신과 죄의 세력이 패주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을 목사가 있겠습니까? 지옥의 포 진지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은 참 하나님의 사람의 바람입니다. 우리의 바람은 우리 주님과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지상에서 참 승리로 높임을 받는 것입니다. 아, 지극히 높으신 분이 자기 백성 가운데 아직도 거하심을 깨닫고 두려워하는 무리들이여! 오직 전능자만이 자기 팔을 드러내셔서 그분과 우리의 원수를 분쇄하시고 악의 세계가 그분의 말씀 앞에서 비틀거리게 하심이여!
역대기 기자 에스라는 우리를 위하여 고대 전쟁을 종료시킬 수 있는 요소를 설명합니다. 그의 설명은 만군의 여호와를 위한 거룩한 열심을 불태우는 모든 가슴을 사로잡습니다. 마레사에서 거대한 접전이 있었습니다만 칼과 활을 다루는 이스라엘의 솜씨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의심할 바 없이 아사와 그의 군장들은 그들의 전투 계획을 주도면밀하게 세웠습니다. 아마 에디오피아 사람을 위하여 매복도 하였을 것입니다. 아마 세라는 측면을 포위당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사용된 전략에 대하여 침묵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투에서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 전투의 이러한 요소들을 지나쳐버리는 것이 혹 목사들을 실망케 할는지는 모릅니다. 에스라는 승리의 모든 소망이 공격 무기를 다루는 우리의 솜씨에 있다고 확신하는 자들을 낙심케 합니다. 그들이 주목 하는바 모든 것은 인간의 칼을 학구적으로 다듬고 정교한 설교 기교를 습득하는 데 쏠려 왔습니다. 에스라는 방법론에 집착하는 새로운 이단들을 철저히 격노케 하였습니다. 새로운 프로그램과 계획에 숙달된 ‘어떻게’의 전문가들은 전략에 관하여 읽을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침묵은 유능한 목회자는 행동주의라는 금으로 만든 송아지 우상을 분쇄해야만 한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전투가 승리하였던 곳에는 비판적인 기동 훈련이 시행되었다고 나는 여러분에게 말할 것입니다’라고 대승리를 기록하는 하나님의 종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필름을 거꾸로 돌려서 선혈이 낭자한 실제 접전 직전의 한 순간으로 되돌아가 옛 제사장을 따라가 봅니다. 최초의 궁수는 아직도 그의 활시위를 당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가들이 노트북을 들고 전술과 전략을 기록하려고 기다리고 있는 최전선 뒤로 다가가야 합니다. 우리는 에스라가 손 신호를 보내는 천막으로 인도되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한 남자, 고독한 사람, 그의 얼굴에는 기도하는 모습이 역력한 사람이 있습니다!
거기서 여러분은 유다의 비밀스러운 무기를 소유하게 됩니다. 바울이 에베소서 6장에서 그리스도의 전신갑주를 고찰하면서 그는 영적 전투의 이 무기를 사모하면서 ‘모든 기도’라고 이름 하였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힘을 방출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원자 무기도 하찮은 것에 불과합니다. 순간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위대한 추구를 하여 왔으며 바로 이 기도의 대포야말로 신앙의 정열을 지닌 사람들이 항상 점검하는 무기입니다.
이 막강한 전투 장비의 완벽한 역사는 모세, 엘리야, 아사와 다니엘의 이름을 상기시킵니다. 그것을 익숙하게 사용한 영예의 으뜸은 우리의 거룩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분의 시절 이후 사도들과 루터, 칼빈, 틴데일, 녹스, 에드워즈 같은 사람이 배속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명단은 거대합니다. 그 명단에 의하면 이름 없는 수많은 목사들이 하나님 나라에 크게 영향을 미쳤던 승리를 쟁취하였습니다. 그들이 오직 하나님과만 함께하였던 시간은 언급되지 않습니다. 알려진 기도의 사람들이 이 비밀스러운 병기를 사용하였던 곳에서 그들의 영혼이 실행에 옮겼던 것은 너무나도 성스러워서 완전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거룩한 시절들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하나하나 열거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모든 기도’의 영광스러운 연보(年譜)를 고찰할 때 우리의 얼굴들은 부끄러움으로 붉어지기 시작합니다! 이 무기를 통달하였던 위대한 전사들 옆에서 우리는 다만 왜소할 따름입니다. 불신의 세력과 뻔뻔스러운 죄가 왜 우리 세대에서 추방되지 않을까요? 우리 마음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우리가 구하지 않음이라”는 것을 압니다(약 4:2). 우리 주님은 과거에 발굴된 유적의 신기한 부조물이 안치된 박물관에서 ‘모든 기도’에 지쳐버린 채 안치되어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 손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능숙하게 사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1651년에 스코틀랜드 교회의 목사들은 목회에서 범하는 죄를 겸손하게 인정하는 글을 기초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하나님에게 하는 고백이었습니다. 양심의 가책이라는 부분에서 ‘대중 앞에서 드리기에 합당한 것을 제외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은밀한 기도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런 때에도 많이 무시하거나 피상적이 되곤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부분에서는 그 고백은 기도하지 않음을 노출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우리의 겸손을 요구하실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쾌락을 추구 하였습니다’, ‘탐심과 세상을 향한 마음과 이생의 것을 추구하는 무절제한 욕심으로 우리의 소명의 의무들을 무시하였으며 우리의 존재는 이생의 것들로 모두 채워졌습니다.’
오늘날도 그때처럼 신학적인 혼란과 시대적인 부도덕을 애도하기 쉽습니다만 겸손하게 기도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우리 손으로 승리를 쟁취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원수를 정복하지 못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라는 이사야의 불평은 우리 시대에도 합당합니다(사 64:7).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는 고통스러운 인정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이상의 질문이 제기되어야만 합니다. 왜 우리는 우리의 원수들을 황폐하게 만들 수 있는 이 위대한 기도를 사용하지 않을까요?
이에 대한 빼어난 대답은 우리가 중요한 기도에서 요청하는 날카로운 자기 부정으로부터 몸을 움츠린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기도를 드리는 장소에서 씨름해야 하는 두려움, 즉 우리를 뒤로 물러서게 하는 명확한 대가를 우리 자신에게 치러야만 합니다. 우리가 애써 힘든 기도를 드릴 때 우리 가운데 남아 있는 육신은 동정을 베풀어 달라는 호소를 비겁하게 소리칩니다. 확실히 우리의 영혼은 기도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특권을 좋아하며 거룩하신 분과 나누는 교제의 기쁨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체를 움츠러들게 하는 기도의 수고를 상기시킵니다. 아사가 하나님을 붙듦은 수고롭게 드리는 기도에서 요청되는 자기부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기부정은 기도드리는 상황에서 요청됩니다. 아사가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그것은 그가 600,000대군을 지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침공을 당하는 나라의 통치자였습니다. 그가 전열을 가다듬었을 때 생동감 넘치는 결단을 내려야했습니다. 군장들을 모으고 전쟁의 모사들과 의논하였습니다. 수많은 관심들이 그의 시간을 재촉하였습니다. 아무도 무시하거나 희생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기도해야 한다는 내면적인 충동이 있었습니다. 그는 단순하게 긴급한 사항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안이함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먹고 자고 휴식을 취하고 사기를 북돋우고 있는 동안 아사는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자아는 기도에 대한 관심과 기도 시간에 의하여 부인되어야만 합니다. 모든 기도는 시간을 드리지 않고 실행에 옮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일분 간’이 그를 거의 붙들지 않습니다. 지속적인 기도가 필요합니다. 개인적으로 추구하는 것에서부터 그것을 가로채지 않는 한 이러한 시간은 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하는 것이 합당한지도 모릅니다.
복음에 붙들린 목사들은 그들의 시간표를 쥐어짭니다. 기도에 시간을 드리기 위하여 가족들조차 돌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잘 규제된 가정이 목회자의 직분을 유지하기 위하여 선행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양 무리를 방치해 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찾아내야할 잃어버린 양도 있고, 경고해야 할 방황하는 양도 있고, 교훈해야 할 어린양도 있습니다. 이런 모든 영혼들을 위하여 설명해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공부할 시간은 포기하지 않을는지도 모릅니다. 만일 한 사람이 하나님의 양 무리를 먹이려면 묵상, 성경 읽기, 말씀의 근면한 탐구는 필수불가결합니다. 그러면 목사는 언제 기도드릴 시간을 찾을 것입니까? 내일도 더 많은 여가를 제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시간은 다만 목사가 ‘자기 시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데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도의 사람은 세계에서 가장 바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백만 명이 넘는 노예들로 나라를 건설해 낸 모세를 생각해 보십시오. 또 바벨론 제국의 국사로 다망하였던 다니엘을 보십시오. 교수요, 성경 번역가요, 목사요, 다량의 글을 저술한 저술가로서 매일 세 시간씩 기도를 드렸던 루터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으뜸이 되는 본보기는 이른 새벽이나 늦은 밤 시간을 기도드리기 위하여 사용하셨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만일 휴식을 취해서 원기회복을 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분은 우리의 거룩한 주님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자기 시간을 기도드리는 데 사용하셨습니다. 우리가 너무 바빠서 기도드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만족을 너무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그 고집을 버린다면 금식과 기도를 위한 날을 달력의 한 부분에 재껴두게 될 것입니다 - 여러분의 것으로! 휴식과 여가선용의 날들은 단축되어야만 합니다. 휴일을 줄여야만 합니다. 여러분이 무릎을 꿇기 위하여 자아를 의도적으로 부인해야만 합니다. 목사들이 너무 바빠서 하나님의 궁정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는 반면에 공휴일에는 어울려 돌아다닌다는 것이 어찌 있을 수 있습니까?
자아는 기도를 위한 에너지에 의해서 부인되어야만 합니다. 오랫동안 지속된 기도에는 절망적으로 고된 그 무엇이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주님에게 복스럽게 가까이 나아가는 기쁨으로 가득 찰 때 그 사람의 힘은 모두 고갈되고 맙니다. 데이빗 브레이너(David Brainerd, 1718-1747. 북미 인디언 개척 선교사, 질병으로 혹독한 시련을 당했으며 말을 타고 3,000마일을 여행하였음. 1746년 3월까지 130여 명의 인디언을 개종케 하였음 : 역자 주)는 그의 일기장에 기도를 ‘극도로 약해지면서 이기는 것’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마틴 루터는 ‘기도를 올바로 드리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아사왕은 전심으로 하나님의 보좌에 마음을 쏟는 일에 그의 모든 정력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는 전쟁터에서 그의 첫 날을 맞고 있었습니다. 혼란에 빠뜨리는 두려움과 생각 때문에 누가 그를 비난할 수 있을까요? 그가 전투를 위하여 자기 힘을 아껴 두어야 할까요? 그가 드린 기도의 종류는 탄원자로 나선 것이라고 합니다. 모세가 르비딤에서 아말렉과 싸울 때 드린 기도에서 그의 손은 전투가 승리할 때까지 오랫동안 떨린 채 들려져 있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과 더불어 씨름하였을 때 그는 브니엘 에서부터 다리를 절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결과적으로 탈진할 때까지 여러분의 영혼을 주님 앞에 쏟아 부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할 때 여러분이 기도의 학교에서 진보가 있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기도의 시간이 다가옴에 따라 목사의 육신은 은밀한 장소에서 격렬한 노력을 요구하면서 경건한 제안을 거짓 되게 하기 시작합니다. 신학의 또 다른 장에 마음을 사로잡히고, 연약한 그리스도인을 심방하느라고 부산을 떨고, 정기 간행물들을 펼쳐 보고, 물론 시대에 뒤지지 않기 위하여 애용하는 서점을 방문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더불어 간절하게 만나는 것 이외는 어떤 것도 다 쉽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포도원 한 모퉁이를 은혜와 능력으로 방문하실 때까지 그분을 꼭 붙잡기 위하여 자아로부터 힘을 짜내게 될 것입니다.
기도가 실행에 옮겨질 때 상황을 넘어서서 엄격한 자기부정이 요청됩니다. 만일 십자가가 은밀한 기도의 장소로 통하는 출입구에서 느껴진다면 그 십자가는 은혜의 보좌 앞에서 더 예리하게 체험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은밀하게 씨름하는 수많은 시간은 자아와 더불어 싸우는 전투의 시간입니다. 우리의 무릎에서조차, 그리고 전적으로 영광스러운 왕의 임재에서조차 자아는 자기 권리를 무섭게 주장합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에스라는 다만 아사의 간구를 얼핏 보여 줄 뿐입니다. 이것은 아사가 실제로 기도를 드렸으며 하나님과 겨루었던 순간에서 연유합니다. 역대하 14:11의 말이 그의 입술에서 떨어지기 전에 아마도 노력에 노력이 잇달아 하늘을 향하였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머리에 의지하기 위하여 요청할 사항을 짜내고 끌어냈을 것입니다. 아사왕이 지녔던 마음의 자세는 이와 같은 노력으로 기도드리기 전에 정화되어야만 하였습니다.
기도의 순간에 자기 확신의 포기가 필연적입니다. 아사는 그의 군대가 ‘아무런 힘도 없음’을 술회하였습니다. 그와 그의 군장들이 이미 실행에 옮긴 놀라운 전략 가운데 그는 얼마나 자주 그의 호소를 기쁘게 말씀 드렸을까요? 그가 이미 바라고 있는 것이 성공을 거둘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전쟁 준비를 축복해 달라고 애원하는 것 이상 달리 더 할 것이 없었습니다. 아사가 사람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믿고 마음속에서 확신하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렸을까요?
그때 아마도 절망과 더불어 투쟁도 이어졌을 것입니다. 그와 그의 군대는 ‘아무런 힘이 없음’을 발견하면서 기도 가운데 무엇을 느꼈겠습니까? 일단 자아에서 모든 확신을 벗겨 버리게 되면 자아에는 아무런 도움이 없으니 전혀 도움 받을 곳이 없다는 것을 논하면서 중요한 위치를 확보하려고 할 것입니다! 사람과 동시에 자아를 포함하여 아무런 힘도 없으며 주님께서 우리의 바람을 성취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을 때 이 얼마나 처절한 투쟁입니까!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는 도와줄 이가 없사오니 ….” 전능자의 손쉬운 말씀만이 이 땅의 모든 문제에서 즐거움을 베풀어 주십니다.
목사들이 영혼의 미소, 강단을 위한 준비가 벌써 끝났음에 만족하는 미소를 지으며 무릎을 꿇는 것이 얼마나 흔한 일인지요. 예화도 그처럼 평범합니다. 교리적인 공식은 확신에 차 있어야만 합니다. 구성은 철저합니다. 만일 우리 힘으로 본문을 통달할 수 있다면 다른 것은 결코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신뢰가 남아 있는 동안 천국은 놋쇠에 불과합니다. 기도가 스며들 수 있는 틈이 없습니다. 자아에 대한 신뢰가 극복될 때라야 비로소 기도드릴 수 있습니다.
설교자가 자아의 무기력함을 느낄 때 그는 가장 절망적인 행보를 내딛게 됩니다. 만일 자아가 영광을 얻을 수 없다면 아무도 시도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불신앙, 곧 자아의 마지막 보루를 설교자가 공격해야만 합니다. 언덕에 폭풍이 휘몰아칠 때, 자아가 죽임을 당할 때, 주님의 무한한 위엄과 능력이 믿음의 눈에 나타날 때에만 올바르고 간절한 기도가 시작됩니다. 그분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에게 너무 어려워서 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만일 이러한 진리가 항상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면 우리는 능력 있는 기도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기도드리는 순간 자아의 포기는 필연적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간구에서 아사의 전 관심은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그의 입술의 부르짖음은 대형 망치처럼 하늘의 기초석을 깨드렸습니다. “사람으로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성실하고 영감으로 가득 찬 기도가 얼마나 많이 새벽 시간에 하나님의 보좌에 도달하였을까요? ‘오, 주님 저는 경험이 없는 병사입니다. 제 생명을 보존하옵소서!’ ‘오, 주님, 제 가족을 긍휼히 여기시옵소서, 제 자녀들이 아비 없는 자가 되지 말게 하옵소서!’ ‘오 만군의 여호와여, 저의 첫 전투에서 범할 실수에서 저를 구해 주소서!’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아사의 개인적인 욕심은 참된 기도의 열기에 이슬처럼 녹아버렸습니다. 그의 영혼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영광을 흡수하였습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가 순수한 기도의 첫 간구입니다. 많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심에서 우러나온 열정으로 채워진 간구를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보혈을 흘리시기 전 그분께서는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6:39). 이러한 붙듦으로만 하나님을 붙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목적하는 것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올바르게 드러낼 때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게 됩니다. 그것은 기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찬양받으실 주님을 성실하게 바람으로 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명예, 행운, 생명, 성공이 하찮은 것으로 색이 바랠 때까지 기도하십니까? 주님의 영광만이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여러분의 영혼이 소멸될 때까지 기도하십니까? 그분의 영광스러운 위엄을 회중에게 정직하게 드러낼 때까지 기도하십니까? 이러한 시간에 목사들은 그들의 목회에서 사람이나 성공을 말하기 전에 더 이상 다른 것을 간구하지 않습니다. 항상 두려운 내면적 전투가 이러한 기도에 선행합니다. 왜냐하면 이기심은 설교자의 마음속에도 깊숙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역시 ‘잘못 간구할’ 수 있습니다. 정말 교회와 강단을 위한 기도는 순결하지 않은 취향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약 4:3).
확신에 차고 자기유익을 구하지 않는 왕의 기도의 결과는 모든 세대가 관찰할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알려졌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쟁터에서 아사를 수종 드셨습니다. 전투에서 아사의 공적인 노력 이상으로 더 많은 것이 행해졌습니다. 무적의 전사이신 하나님께서 아사와 함께 가셨던 것입니다. 유다의 군사 지도자는 열정적이며 눈에 보이는 활동에 자신을 드린 공적인 인물이었으므로 다른 결론이 이 역사적 사건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사는 지쳤으며 자기를 부정하였으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 하나님의 눈은 아사의 천막 문을 꿰뚫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세상은 그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보았습니다. 은밀하고 경건한 기도에 공개적인 축복으로 응답하심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그분의 약속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유감스러운 피조물은 공중 기도를 제외하고 기도하지 않는 설교자입니다. 칼빈의 신학과 스펄전의 예화, 그리고 에드워즈의 적용을 지녔다 하더라도 만일 목사가 은밀하게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으면 그는 강단에서 가련한 인물로 전락해 버립니다. 은밀한 기도 없는 목회자는 열정적인 감격이 없는 죽은 조개에 불과합니다. 성도들처럼 목사가 기도가 없는 상태에 빠질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항상 승리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기초를 지니지 않고 평범한 생각만 하는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위선자입니다. 뿌리가 없으면서 선명한 빛깔을 지닌 꽃은 생명이 없는 플라스틱입니다.
영적 분별력을 지닌 사람은 날카로운 칼날이 강단에서의 호소력에서 제거되는 시기를 목회에서 탐지합니다. 과거에 그랬던 것과는 정말 다른 무엇이 나타납니다. 왜 그런지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설교의 외적 요소도 동일하고 또한 동일한 은사를 사용하여 설교하는 것도 동일한 사람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청중의 마음속에 박히는 화살로서 말씀을 보내지 않으십니다. 그 원인은 이 이상한 무기를 자주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무기란 전쟁터에서 사용되는 도구가 아니라 은밀하게 사용되는 것, 즉 모든 기도입니다!
강단의 호소력이 감소되는 것을 탐지하게 될 때야말로 슬픔을 안고 1651년 스코틀랜드의 목사들이 하였던 고백으로 되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서 위대한 이기심이 넘친다. 우리 자신에서부터, 우리 자신을 위하여, 우리 자신에게 행한다. 그러나 은밀한 기도는 거의 하지 않는다.’
목회를 갓 시작한 젊은 목사들은 주님을 추구하려는 비전을 갖고 있습니다. 이십 년에서 삼십 년 동안 하나님을 섬겨 온 사람들과 그들의 백성들도 역시 한때는 비전을 지녔었다는 점을 그들은 알아야만 합니다. 진실한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는 말씀으로 세상의 체계를 흔들려는 희망과 한 지역 안의 모든 거주자들을 하나님을 경외하려는 사람들로 변화시키려는 희망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추구되게 하려는 희망에 가득 차서 움직입니다. 희망과 현실 사이에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도구가 되지 못하는가? 우리는 현명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대외적인 활동은 많이 하면서 은밀한 기도는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기도를 통달하는데 실패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 대답입니다.
만일 한 사람이 이 세대의 목사들을 능가하려면 그는 기도하는 것보다 설교하는 것이 쉽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은밀한 장소의 엄격한 현실 속에서 단검이 그의 손에 쥐어집니다. 소심한 사람은 그것을 사용할 때 웅크립니다. 사람이 자기 쾌락, 자기 신뢰, 자기 유익을 추구함을 버리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분하고만 씨름할 때,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공개적으로 역사하시는 것을 볼 것입니다. 또한 그분이 이 전쟁터에서 승리를 베푸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