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수재집(寒水齋集)
한수재선생문집 제29권 /묘지(墓誌)
《승지(承旨) 이공(李公) 인(土寅) 묘지명 병서》
<번역문>
내 젊었을 때에 선배 장자(先輩長者)들의 말씀을 들으니, 한 세상에 강직하고 준엄하며 방정하여 이해에 따라 조금도 좌절하지 않는 자를 들 때에는 반드시 이공 인(李公(土寅))을 첫 번째로 꼽곤 하였다.
공의 자는 야수(野叟)요 호는 소옹(素翁)이니, 성주인(星州人)이다. 신라 말엽에 벽진 태수(碧珍太守)를 지낸 총언(悤言)이 고려 태조를 도와 장군에 임명되었는데, 이후로 큰 벼슬이 서로 이어졌다.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평정공(平靖公) 약동(約東)이 청렴결백함으로써 역사에 드러났으며, 여러 선비들이 제향(祭享)하고 있다. 두 대를 지나 휘 석명(碩明)이란 분이 계신데, 덕천 군수(德川郡守)로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니, 공의 증조이시다. 조고의 휘는 희선(喜善)인데, 교관(敎官)으로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선고의 휘는 상급(尙伋)인데, 병조 참지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는바, 중형인 충숙공(忠肅公) 상길(尙吉)과 함께 강직한 절개로 한 세상에 추앙을 받았다. 선비는 밀양 박씨(密陽朴氏)로 부친은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박주(朴胄)이시다.
공은 만력 무신년(1608, 선조41) 9월 30일에 출생하였다. 겨우 15세쯤 되자 이미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하였으며, 장성하자 계곡(谿谷) 장 상공(張相公 장유(張維))에게 수학하였는데, 장 상공은 공의 총명함을 칭찬하였다. 기사년(1629년) 자친상을 당하였는데, 여묘(廬墓)하여 예를 다하였으며, 을해년(1635년)에는 사마시에서 생원ㆍ진사에 모두 합격하였다. 병자호란에 판서공(判書公)은 남한산성으로 대가(大駕)를 호종하였는데, 충숙공이 강도(江都)에서 순절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구부(求裒)의 정(情)을 견디지 못하여 병을 무릅쓰고 가마를 타고 서쪽으로 가다가 도중에서 별세하였다. 이때는 병란을 당하여 경황이 없는 즈음이었는데, 공은 밤낮으로 슬피 부르짖으며 상례와 장례를 주선하여 정(情)과 예문(禮文)을 극진히 다하였다.
임오년(1642년)에 대과에 급제하고, 분관(分館)하기도 전에 곧바로 한원(翰苑)으로 들어갔으니, 이는 최고의 선발이었다. 검열로 있다가 대교와 봉교로 승진하였는데, 이때 윗자리에 있는 자가 사사로운 사람을 등용하려는 데 급급하여 예문관의 규칙을 깨뜨리고자 하였으나 공이 이에 따르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분쟁이 일어나자 모두 파면되었다. 얼마 안 있다가 다시 서용되어 전적과 감찰로 옮겼으며, 지평으로 전직되었다.
이때 권신인 이명(李溟)이 오랫동안 호조를 맡고 있었는바, 탐욕스럽고 포악한 행동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공은 급히 그의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며 아뢰기를 “이명을 삶아 죽임에 백성들이 기뻐하지 않는다면 제 스스로 팽형(烹刑)에 나아가겠습니다.” 하였다. 상은 진노하여 특별히 체직하도록 명하였다. 양사(兩司)에서는 서로 글을 올려 간하였으나 임금의 노여움은 더욱 격해졌다.
승지로 있던 조공 석윤(趙公錫胤)은 아뢰기를 “하찮은 신진이 자기 몸을 잊고 용감히 간하였으니, 골경(骨鯁)의 풍도가 옛날의 강직한 신하에 뒤지지 않습니다.” 하였으며, 뒤에 또 상소하기를 “이인(李(土寅))의 말은 온 국민들의 공론인데, 그는 남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에 용감히 말하였으니, 마땅히 강직하고 준절한 기풍을 권장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내 도리어 꺾어버리고 폐치시킴은 어째서입니까?” 하였으나, 상은 이에 답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공의 이름이 한 세상에 진동하였으나 또한 이 때문에 세상에 매몰되었다.
수년 동안 예조의 낭관과 직강에 왔다갔다하여 혹은 두 번 역임하기도 하고 혹은 세 번 역임하기도 하였다. 을유년(1645년)에 은산(殷山)과 석성(石城)의 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병으로 사직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얼마 후 4품인 필선으로 승진하였는데, 고사에 4품의 관직을 지낸 자는 이조의 낭관에 임명되지 못하는 규정이 있었다. 이때 이명의 도당들은 전조(銓曹)를 잡고 있었으므로 이명을 위하여 공을 배제한 것이었다. 공은 또다시 직강으로 있다가 영광 군수(靈光 郡守)로 나갔는데, 전 군수인 유석(柳碩)이 상을 받을 계책으로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것을 꺼내어 스스로 장만하였다고 사칭하였다. 공은 이것을 사실대로 들어 상주하고자 하였는데, 옛날에 사서(史書)를 너무 늦게 편수하였다 하여 갑자기 파직되었으니, 이는 또한 지난번에 공을 배척한 자가 유석을 위하여 중상모략한 것이었다.
무자년(1648년)에 서용되어 예조의 낭관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교체되었으며, 가을에 개성 경력(開城經歷)으로 나갔다. 개성부의 풍속은 음사(淫祠)를 숭상하고 받들기 좋아하였는데, 공이 일체 이를 금지하고 이것을 따르지 않는 자는 엄히 죄주고 용서하지 않았다. 이에 부호들은 공을 원망하고 비방하여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유수(留守)는 그 말을 받아들이고 공을 하고(下考)에 두어 파직시켰다. 기축년(1649년)에 영암 군수(靈巖郡守)로 나갔는데, 임금의 뜻에 따라 상소를 올려 민폐에 대한 10여 가지 일을 조목조목 나열하니, 효종이 모두 가상히 받아들였다. 다음해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오니, 남녀노소들은 수레를 막고 더 유임할 것을 요청하였으며, 유임되지 않자 서로 구리를 주조하여 송덕비를 세웠다.
신묘년(1651년)에 예조 정랑으로 사명을 받들어 영남으로 가서 재상(災傷)을 살폈다. 이때 토호들의 겸병을 통렬히 다스리고, 백성을 괴롭히는 아전 몇 사람을 축출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비난하는 말이 크게 일어났는데, 마침 이명의 도당이 관찰사로 있었으므로 공을 허위로 모함하여 마침내 대질 심문함에 이르기까지 하였고, 원성(原城)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음해에 사면되어 돌아왔다.
정유년(1657년)에 직강 겸 어영청낭관(直講兼御營廳郞官)에 제수되었다. 얼마 후 북청 판관(北靑判官)으로 제수되었는데, 제조 이 상공 시백(李相公時白)이 아뢰어 다시 유임하게 하였다. 무술년(1658년)에 사예(司藝)로 있다가 양양 부사(襄陽府使)로 이임하였다. 이때 동춘 송 선생이 이조 판서로 있었는데, 안동(安東)은 지방이 커 다스리기 어렵다 하여 공에게 안동을 맡길 것을 제청하였다. 공이 안동으로 부임하자, 횡포한 짓을 자행하던 토호들이 자취를 감추고, 하소연할 데 없는 어려운 자들이 두 손 모아 떠받들었으며, 창고에 쌓인 물건이 가득해졌으므로 1년의 전조(田租)를 감면하여 주었다.
기해년(1659년)에 강계 부사(江界府使)로 승진하였는데, 조정에서는 자주 교체시키는 것은 폐단이 있다 하여 강계 발령의 명령이 마침내 중지되었으나 공은 일찍이 공로가 있었으므로 그대로 통정대부로 승진되었다.
경자년(1660년)에 큰 흉년이 들었는데, 공은 정성을 다하여 백성들을 보살펴 온 경내가 온전히 살아남게 되었다. 암행어사는 “청렴하고 검약하며 마음을 다하였다.”고 조정에 아뢰었다. 이때 경내에는 중구(中冓)의 추잡한 일이 있어 옥사가 장차 일어나게 되었는바, 그의 동서로 있는 자가 언관으로 있었으므로 공의 엄하고 분명함을 싫어하여 다른 일로 칭탁하여 공을 논죄하고 파직시켰다.
신축년(1661년)에 서용되어 정주 목사(定州牧使)로 나갔으며, 임인년(1662년)에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승진되었다. 이때 큰 장사꾼인 강몽청(姜蒙淸)이란 자는 통역관[大通官] 이일선(李一先)의 처남이었다. 그는 오랑캐의 세력을 믿고 국가의 빚을 오랫동안 갚지 않았다. 공은 그를 잡아다 유치하고 상환할 것을 재촉하니, 공갈하는 말이 사방에서 이르렀으나 공은 고집하고 흔들리지 않았다. 또 죄를 진 관속 두 사람이 오랑캐의 역관에게 부탁하여 죄를 용서받을 것을 청하자, 공은 모두 이들에게 장형을 가하여 죽게 하였다. 오랑캐의 역관이 군교(軍校)를 불러 이를 힐책하자, 군교는 방편에 따라 얼버무려 대답하였다. 이에 공은 큰소리로 꾸짖기를 “상관이 법에 따라 아랫사람을 처벌하는 것은 당연한 사체(事體)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바른대로 말하지 않고 거짓말을 한단 말인가.” 하였다. 이때 오랑캐의 역관은 한 장막의 간격을 두고 있었는데,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부윤은 어떤 분이기에 힐난하기를 이와 같이 하는가.” 하고는 끝내 그 포악함을 부리지 못하였다. 의주부(義州府)는 저 오랑캐와 물 하나가 경계로 되어 있었는데, 종전에는 양국간의 여러 번 분쟁이 있었으나 공이 부임하자 한결같이 신의로써 종사하니, 변방을 지키는 저들의 장수도 또한 두려워하고 공경하였다.
계묘년(1663년)에 일로 인하여 파직되고 돌아왔으며, 갑진년(1664년)에 동부승지에 제수되고, 우부승지로 승진하였다. 이때 민종도(閔宗道)가 사간원에 있었는데, 추악한 말로 공을 비방하자, 공은 병을 칭탁하고 스스로 면직하였다. 얼마 후 종성 부사(鍾城府使)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또 성주 목사(星州牧使)가 되었으나, 역말이 죽음으로 인하여 옥리에게 나아가 취조를 받고 양주(楊州)로 유배되었다.
병오년(1666년)에 석방되어 충주(忠州)의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일생을 그대로 마치려는 계책을 세웠다. 다음해에 형조 참의에 제수되자, 공은 상소하여 벼슬하지 않고 편안히 있을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얼마 후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임명되었는데, 이때 표류한 중국 배가 대정현(大靜縣)에 정박하였다. 이들은 일행이 90여 명이었는데, 모두 중국 복식을 입고 중국 말을 하였으며, 스스로 말하기를 “동남쪽의 해상에는 명 나라의 국통(國統)이 아직도 남아 있는바, 우리들이 바로 그 인민이다.” 하였다. 전임자가 이 사실을 이미 조정에 보고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장차 이들을 압송하여 연산(燕山)으로 보내려 하였다. 공은 부임하자 중국의 갑신년 이후의 소식을 자세히 듣게 되었고, 또 영력(永曆) 21년의 대통력(大統曆)을 보고는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말하기를 “근 백 명에 가까운 명 나라 유민들을 호랑이 입에 던지는 것은 의리상 차마 할 수 없다.” 하고, 장차 조정에 아뢰어 본토로 송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비변사(備邊司)의 낭관이 제주로 건너와 이들을 압송해 가자,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이에 공은 개탄을 이기지 못하고 정승 홍명하(洪命夏)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이 일은 굳이 조정에 계문할 것이 없는데, 전임자의 실수는 이미 어쩔 수가 없거니와 나의 도리에 있어서는 진실로 마땅히 이들을 잘 대우하고 전송하여야 할 것입니다. 설령 불행한 일이 있을지라도 책임은 일을 맡은 신하에게 있는 것이니, 이렇게 하면 행여 욕이 조정에 미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홍 정승은 답서를 보내오기를 “지금 이 의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국가에 화를 끼친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니,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부제학 이단상(李端相)은 공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저들이 이후(李侯)를 만나지 못한 것은 천명이다.” 하였다. 공은 자제에게 명하여 그 당시의 사실과 문답한 내용을 기록하여 집에 보관하게 하였다. 이해에 제주도에는 큰 흉년이 들었는데, 공은 마음을 다하여 주선해서 곡식 만여 섬을 육지에서 무역해다가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구휼이 끝나고도 오히려 수천 섬이 남자, 따로 창고에 저축하여 수한(水旱)에 대비하게 하였다. 또한 문묘(文廟)를 수리하고 선비들을 인도하였으며, 문교에 관한 일에 마음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제주도에서는 좋은 말이 생산되었으나, 군(軍)에서는 마적(馬籍)을 작성하지 않았다. 이에 공은 조정에 요청하여 5백여 명을 뽑아 훈련시켜 얼마 되지 않아 모두 정예한 기마병을 이루었다. 병기와 갑옷이 오래되고 해진 것들도 모두 수선하고 보수하여 지극히 견고하고 예리하게 하였다. 고을의 북쪽에는 예부터 망경루(望京樓)가 있었으나, 깨지고 허물어져 장차 무너지게 되었는데, 공이 지붕을 해 얹고 중수하여 서울을 바라보는 그리움을 붙이게 하였다.
무신년(1668, 현종9) 5월에 장릉(長陵 인조(仁祖)의 능)의 휘일(諱日)을 만나자, 누대에 올라가 슬픈 감회를 일으켰으며, 저물 무렵 누대에서 내려오다가 넘어져 병이 났다. 얼마 후 장자(長子)의 부음을 듣고는 마침내 병이 심해져 9월 6일 관사에서 별세하니, 향년 61세였다. 10월에 충주로 반츤(返櫬)하였는데, 상은 연로에 호상하게 하고 치제(致祭)와 부의를 예대로 내리도록 명하였다.
처음에는 원주(原州)에 장례하였으나 병인년에 충주의 북쪽 서미동(西美洞) 간좌(艮坐)의 산에 이장하였으며, 정부인(貞夫人) 대구 서씨(大邱徐氏)를 왼쪽에 부묘하였다.
공은 지극한 행실이 있었으며, 항상 미처 부모를 봉양하지 못한 것을 종신의 애통함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서모(庶母)를 받듦에 효성을 다하였다. 숙모가 과부가 되어 살고 있었는데, 섬기기를 매우 공손히 하였으며, 송도(松都)에서 모셔다가 봉양하였다. 백씨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여러 고아들을 가르치고 어루만지기를 자기의 소생과 같이 하여 성취하게 하였으며, 서출(庶出)에 있어서도 또한 그렇게 하였다. 외로워 의지할 데 없는 생질녀를 데려다가 옷을 입히고 밥을 먹여 키웠으며, 적당한 사람을 선택하여 시집보내었다. 그 생질녀는 공이 별세하자 부모를 잃은 듯이 서글퍼 하였다. 인조와 효종의 두 차례 국상에 공은 매우 오랫동안 소식(蔬食)하였으므로 몸이 수척해져 병이 들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모두 일반인은 미치기 어려운 바였으나 공에게 있어서는 대단치 않은 일이었다. 공은 조정에 있을 때에 꼿꼿하고 아첨하지 아니하여 권문세가의 집에 한 번도 가지 않았다. 김자점(金自點)이 국정을 독단할 때에 동군(同郡) 출신이라고 칭탁하고는 여러 번 친하려는 뜻을 보였으나 공은 그를 보기를 마치 몸을 오염시킬 듯이 여겼으며, 영광(靈光)에서 돌아오자 김자점은 다시 편지를 보내어 좋은 벼슬을 주겠다고 꾀었으나 공은 또한 답하지 않았다. 고을을 다스릴 때에는 엄격함을 주장하여 도를 어기고 명예를 요구하는 일이 일체 없었다. 사람들은 혹 너무 강직하다고 하여 병통으로 여겼으나 공의 상여가 영암(靈巖)을 지나오는 날에 고을의 양반과 아전, 백성들로부터 심산 궁곡의 노파에 이르기까지 앞을 다투어 와서 곡하고 제전(祭奠)을 올렸으며, 또 일찍이 공에게 형벌을 받은 자가 있었는데 늙고 병들어 올 수 없자 그 아들을 보내어 조문하였으니, 공의 교화가 남에게 영향을 미친 것이 대부분 이와 같았다.
공은 몸을 다스림에 빙벽(氷檗)과 같이 깨끗하게 하였다. 일찍이 평정공(平靖公)이 채찍을 남겨 두고 갑옷을 던진 일을 스스로 행하겠다고 기약하였다. 그러므로 별세하는 날 저녁에 여러 아들들에게 경계하기를 “염습(斂襲)할 때에는 집 안에 보관되어 있는 의복을 쓸 것이요, 관청에 있는 물건은 한 가지도 함부로 사용하지 말아 나에게 누를 끼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아, 세상에 어찌 다시 이런 분이 있을 수 있겠는가. 오늘날 어느 곳에서 이런 분을 찾아볼 수 있겠는가. 옛적에 우암 노선생은 일찍이 공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은산 철벽(銀山鐵壁)은 형의 집안 대대로 전해 오는 가법(家法)인데, 이제 만일 조금 몸을 낮추고 화평함을 힘쓴다면 어찌 세상 살아가는 길에 적당하지 않겠는가. 다만 한단(邯鄲)의 걸음을 배우다가 두 가지를 모두 잃을까 염려된다.” 하였으며, 공의 초상에 만사(挽詞)하기를 “평생 동안 정직한 도 지켰으나 벼슬길 막혔고, 세상에 뛰어난 재주 낮은 고을살이에 머물렀다.[平生直道名途枳 高世奇才下邑麾]” 하였으니, 후세에 의논하는 자들은 이것을 보면 또한 충분히 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부인은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서경빈(徐景霦)의 따님이요 충숙공(忠肅公) 서성(徐渻)의 손녀인데, 통달하여 여사(女士)의 풍도가 있었으며 부덕이 뛰어나 한 가문의 모범이 되었다. 부인은 물건을 주고받을 때에 특히 엄격하였으니, 공의 청렴결백함은 내조를 힘입은 바가 또한 많았다. 장남은 지술(志述)이요, 차남은 지도(志道)인데 참봉이며, 막내는 지규(志逵)인데 학행으로 현감이 되었다. 장녀는 부정(副正) 이만성(李晩成)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목사 이창령(李昌齡)에게 출가하였으며, 막내딸은 판관 유정기(兪正基)에게 출가하였다. 큰집의 아들은 세박(世璞)인데, 산림에 숨어 학행을 닦았으나 불행히도 명이 짧아 죽었으며, 사위는 최언저(崔彦著)이다. 참봉의 아들에 세련(世璉)은 사마시에 합격하여 금오랑이 되었으며 다음은 세선(世瑄)이요, 딸은 셋인데 사위는 조성필(趙聖弼)ㆍ심한선(沈漢選)ㆍ황진하(黃振河)이다. 현감의 아들은 세완(世琓)ㆍ세염(世琰)ㆍ세여(世璵)이며, 사위는 유만추(兪萬樞)이다. 나머지는 어리다. 부정의 양자는 진유(眞儒)인데 문과 급제하였으며, 목사의 아들에 명승(明升)은 좌랑이요, 명관(明觀)은 현감이며, 다음은 명겸(明謙)이요, 다음은 진사 명복(明復)이며, 다음은 명익(明益)이다. 사위는 한배후(韓配厚)이다. 나머지는 어리다. 판관의 아들에 언명(彦明)은 지평(持平)이며, 다음은 언성(彦成)ㆍ언형(彦亨)이다. 내외의 증현손은 다 기록하지 못한다.
나의 선조이신 부사공(府使公)은 공과 교분이 매우 돈독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어려서부터 자리에서 공을 오랫동안 모셨는데, 이제 현감이 나에게 묘갈문을 부탁하니, 의리상 사양할 수 없으므로 삼가 평소에 듣고 본 것을 기록하여 대략 위와 같이 기술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사람들은 세상에 영합하여 두루 용납하였으나 / 衆諧世而周容兮
공은 강직하고 강직하였으며 / 公諤諤也
사람들은 이익에 따라 어둡고 어두웠으나 / 人趨利而黮闇兮
공은 결백하고 결백하였네 / 公皭皭也
백 번 꺾여도 후회함이 없었으니 / 百折無悔兮
그 마음 철석 같아라 / 心鐵石也
용납하지 않은들 무슨 나쁠 것이 있겠는가 / 不容何傷兮
이름은 더욱 드날리네 / 名益烈也
아 파계의 소중한 한 말씀은 / 噫巴溪一言之重兮
공의 본말 충분히 볼 수 있네 / 可見公之本末也
[주-D001] 구부(求裒)의 정(情) : 형제가 난리에 죽으면 시신을 찾기 위하여 온 언덕과 들판을 헤맴을 뜻한다. 《시경》 소아(小雅) 상체(常棣)에 “죽음의 두려움에 형제가 서로 걱정하고 생각해 주며, 시신이 언덕과 들판에 쌓여 있을 때에도 오직 형제만이 시신을 찾는다.[死喪之威 兄弟孔懷 原隰裒矣 兄弟求矣]” 한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02] 골경(骨鯁)의 풍도 : 골경은 짐승의 뼈와 생선의 뼈. 이것들은 억세어 목에 잘 넘어가지 않으므로, 듣기 거북한 직간(直諫)을 비유하며, 직간하는 신하를 골경지신(骨鯁之臣)이라고 일컫는다. 《史記 卷56 陳丞相世家》
[주-D003] 중구(中冓)의 추잡한 일 : 근친상간(近親相姦)을 두고 한 말로, 중구는 내실(內室)을 가리킴. 《시경(詩經)》 용풍(鄘風) 장유자(墻有茨)에 “담장에 납가새 있으니 제거할 수 없네. 중구의 말이여 입에 올릴 수 없네. 입에 올린다면 말이 추잡하게 되네.[墻有茨 不可掃也 中冓之言 不可道也 所可道也 言不醜也]” 하였는데, 이는 위(衛) 나라 선공(宣公)이 죽고 어린 혜공(惠公)이 즉위하자, 그의 서형(庶兄)인 공자 완(公子頑)이 적모(嫡母)인 선강(宣姜)과 간통하였으므로 이것을 풍자한 것이라 한다.
[주-D004] 영력(永曆) …… 대통력(大統曆) : 남명(南明) 영명왕(永明王) 유랑(由榔)이 즉위하고 영력이라 연호하였는바, 1647년부터 재위하여 영력 16년인 1662년에 완전히 멸망하였다. 그러므로 영력 21년은 있을 수 없는데, 이는 당시 일부 지방에서 그대로 영력의 연호를 쓰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통력은 명 나라에서 사용하던 역법(曆法)의 명칭이다.
[주-D005] 반츤(返櫬) : 타향에서 사망한 시신을 고향으로 모셔와 장례하는 것을 이른다.
[주-D006] 빙벽(氷檗) : 빙은 얼음이며, 벽은 황벽(黃檗)으로, 얼음은 차갑고 황벽은 맛이 쓰기 때문에 사람이 지극히 청렴하여 온갖 고생을 겪는 것을 이른다.
[주-D007] 채찍을 …… 던진 일 : 이약동(李約東)이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있다가 돌아올 때에 채찍과 갑옷을 자신의 물건이 아니라고 남겨 두고 떠나온 일. 《燃藜室記述 卷6 成宗朝故事本末》
[주-D008] 은산 철벽(銀山鐵壁) : 은산은 하남성(河南省) 창평현(昌平縣) 동북쪽에 있는 산. 봉우리가 높고 험준하며 항상 얼음과 눈이 쌓여 있어 백색으로 보이기 때문에 이를 은산이라 이름하였으며, 이 산의 기슭에는 모두 검은 석벽이 있으므로 철벽이라 이름하였는데, 사람의 의지가 굳고 기상이 높아 범할 수 없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주-D009] 한단(邯鄲)의 …… 염려된다 : 새로운 것을 배우려다가 새로운 것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전에 간직하고 있던 장점마저 잃을까 염려된다는 뜻. 《장자(莊子)》 추수(秋水)에 “연(燕) 나라의 수도인 수릉(壽陵)에 사는 여자(餘子)가 걸음을 배우기 위하여 한단(邯鄲 조(趙)의 수도)으로 갔으나 본성(本性)에 맞지 않아 제대로 배우지 못했으며, 또 본래의 걸음걸이도 잊어버려 엉금엉금 기어서 돌아왔다.” 한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10] 파계(巴溪) : 우암 송시열을 가리킨다. 우암이 일찍이 파곶(巴串)에 거주하였으므로 이렇게 칭한 것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성백효 (역) | 1990
<원문>
승지(承旨) 이공(李公) 인(土寅) 묘지명 병서
《承旨李公(土寅) 墓誌銘 幷序》
余少也。竊聽先輩長者之言。其數一世之剛方峻烈不以利害少挫者。必以李公(土寅)爲首。公字野叟號素翁。星州人。羅季有碧珍太守悤言。佐麗祖拜將軍。自是冠冕相望。入我 朝平靖公約東以淸白著於史。多士俎豆之。歷二世有諱碩明。德川郡守 贈兵曹參判。是公之曾祖也。祖諱喜善。敎官 贈左贊成。考諱尙伋。兵曹參知 贈吏曹判書。與仲氏忠肅公尙吉。直節重一世。妣密陽朴氏。其考僉知中樞府事胄。公以 萬曆戊申九月三十日生。甫成童已通三經四書。旣長學於谿谷張相公。相公稱其聰警。己巳丁內艱。廬墓盡制。乙亥中司馬兩場。丙子之亂。判書公扈駕南漢。聞忠肅殉節於江都。不勝求裒之情。舁疾西行。卒於道上。時當兵燹板蕩之際。公晝夜哀號。經紀喪葬。克盡情禮。壬午闡大科。未分館徑入翰苑。極選也。由檢閱陞待敎奉敎。時右位急於引私。欲破館規。公不從。鬧起俱罷。無何敍復。遷典籍,監察。轉拜持平。時有倖臣李溟久掌地官。貪虐無狀。公請亟正其罪而曰。烹溟而民不悅。臣自就烹。 上震怒。特命遞職。兩司交章爭之。 天怒益激。承旨趙公錫胤 啓曰。眇然新進。忘身敢諫。骨鯁風采。無媿古直臣。後又上疏曰𡐔之言。國人之公言。而敢言於人不敢言之中。宜奬其直截之風。而乃反摧折之廢置之何哉。 上不報。由是公名震一時。而亦以是抹摋於世。數年之間。盤桓於禮郞,直講者或再或三。乙酉除殷山石城縣監。俱以病不赴。已而陞弼善。故事經四品者礙銓郞。時溟黨秉銓。爲溟擠公也。又以直講守靈光郡。前守柳碩爲邀賞計。剔出庫藏。詭稱自辦。公欲擧實上 聞。忽以修史之遲見罷。蓋亦向擠公者。爲碩地中之也。戊子敍授禮郞辭遞。秋爲開城經歷。府俗好崇奉淫祠。公一切痛禁。不從者罪之。不貸富豪。怨詛胥動浮言。留守入其說置下考。己丑爲靈巖郡守。應旨陳疏。條列民瘼十餘事。 孝廟皆嘉納。明年棄歸。髫白擁車不得留。則相與鑄銅爲碑。辛卯以禮曹正郞奉使嶺南。覆審災傷。痛繩土豪之兼幷。逐黷吏之病民者數人。由是謗議大興。會溟黨按道。構捏公遂至置對。編配原城。翌年赦還。丁酉拜直講兼御營郞。尋拜北靑判官。提調李相公時白 啓留之。戊戌由司藝移襄陽府使。時同春宋先生長銓。以安東地大難治。 啓請移授。旣視篆。豪橫者屛戢。無告者攢戴。庫藏盈溢。蠲一年田租。己亥陞江界。朝議以遞移有弊。命遂寢。然以公曾有勞績。仍授通政階。庚子大饑。公竭誠喣濡。闔境全活。繡衣以淸約盡心聞于朝。時境有中冓之醜。獄將起。其連袂者爲言官。忌公嚴明。托他事論罷。辛丑敍授定州牧使。壬寅陞拜義州府尹。時有大賈姜蒙淸者。大通官李一先之妻弟也。挾虜勢。逋債積久。公囚繫督還。喝言四至而執不撓。又有負罪官屬二人。囑胡譯丐貰。公皆杖殺之。胡譯招軍校詰之。軍校對以方便。公厲聲曰官以法罪其下。事體然也。何不正言而詭其對耶。時胡譯隔一幄而聞之曰。府尹何人。其難若是。終不得肆其暴。府與彼界限一衣帶水。從前屢有衅端。公至一以信義從事。彼守邊城將亦敬而畏之。癸卯因事罷歸。甲辰拜同副承旨。陞右副。時閔宗道在言地有醜詆言。公引疾自免。尋除鍾城。未赴又爲星州牧使。以馹騎致斃就吏謫楊州。丙午放還忠州故山。有終老計。明年除刑曹參議。上疏乞骸不 允。尋拜濟州牧使。時有漂船泊大靜。一行九十餘人。皆華服華語。自言東南海上。 皇統猶在。我卽其人也。前官已聞于朝。朝議將押解燕山。公到官詳得 中朝甲申後消息。又覩 永曆二十一年大統曆。汪然出涕曰。近百周餘之民。投之虎口。義不忍也。將欲 啓稟於朝。送還本土。俄而備局郞跋來押去。計無如何。則公不勝慨惋。致書于洪相命夏曰。此事不必 啓聞。舊伯之失。已無及矣。在我之道。固當款接而送之。脫有不幸。咎在任事之臣。庶不辱及朝廷。洪相報書曰今之主此論者。以貽禍 國家爲言奈何。李副學端相寄書曰。夫夫也之不遇李侯天也。公命子弟錄其時事實問答藏于家。是歲島中大無。公殫心拮据。貿粟萬餘斛於陸地以賑之。賑訖尙餘累千斛。留貯別庫。以備水旱。修治聖廟。誘掖章甫。凡係文敎。無不盡心。島產良馬。軍無籍。請于 朝點得五百餘。丁未幾皆成精騎。至於兵甲之故弊者。亦皆繕補。使極望利。州北舊有望京樓。破毀將壞。葺以新之。以寓日邊之思。戊申五月。値 長陵諱辰。登樓起感。暮下跌墜而疾作。俄聞長子訃。疾遂劇。以九月六日卒于官。壽六十一。十月返櫬忠州。 上命沿路護喪。祭賻如禮。初窆原州。丙寅改葬于忠州北西美洞艮坐之原。貞夫人大丘徐氏祔左。公有至性。常以不及養爲終身痛。故待庶母克盡其誠。從母孀居。事之甚謹。在松都迎致而奉養之。伯氏早世。敎撫諸孤如己出。俾得成立。而至於庶屬亦然。甥女之孤露無依者衣食之。擇對而嫁之。其女喪公如父母。 仁 孝兩廟大喪。食蔬甚久。以至羸憊成疾。此皆人所難及。而在公爲疏節也。立朝棘棘不阿。足不到權貴之門。自點之專國也。托以同郡。屢致款意。而公視之若浼。歸自靈光。點復致書啗以好爵。而又不答。治郡主嚴。絶無違道干譽之事。人或以太剛少之。然喪過靈巖之日。邑大夫吏民以至窮谷老嫗。爭來哭奠。又嘗有受刑者。老病不能來。則遣其子而哭之。其遺化之入人多類此。律身如氷蘖。嘗以平靖公留鞭投甲之事自期。故屬纊之夕。飭諸子曰斂用家藏衣服。無以官中一物累我。嗚呼。世復有斯人也耶。今日何處得來。昔者尤菴老先生嘗貽書於公曰。銀山鐵壁。自是兄家計。今若少濟以低平。則豈不適於世路耶。只恐邯鄲之步兩失也。及其誄公曰。平生直道名途枳。高世奇才下邑麾。後之尙論者。觀於此。亦可以知公矣。夫人僉知中樞府事景霦之女。忠肅公渻之孫。通達有女士風。婦德爲宗門式。最嚴於辭受之際。公之廉白賴內助者亦多云。男長志述。次志道參奉。季志逵以學行爲縣監。女長適副正李晩成。次適牧使李昌齡。季適判官兪正基。長房男世璞藏修林下。不幸短命。壻崔彥著。參奉男世璉。中司馬爲金吾郞。次世瑄。三女壻趙聖弼,沈漢選,黃振河。縣監男世琓,世琰,世璵。壻柳萬樞。餘幼。副正繼子眞儒文科。牧使男明升佐郞,明觀縣監,明謙,明復進士,明益。壻韓配厚。餘幼。判官男彥明持平,彥成,彥亨。內外曾玄不盡錄。余先祖府使公。與公交好甚篤。余自齠齡。周旋於牀下者久矣。今縣監託以墓文。義不敢辭。謹述平日之所聞見者。略敍如右。銘曰。
衆諧世而周容兮公諤諤也。人趨利而黮闇兮公皭皭也。百折無悔兮心鐵石也。不容何傷兮名益烈也。噫巴溪一言之重兮。可見公之本末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