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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2. 묵상글 (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 마음의 굼뜸.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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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2.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마음의 굼뜸
부활 8부 수요일-2018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마음의 굼뜸
굼뜨다는 것은 느리다는 뜻이 있습니다.
보통 동작이 굼뜨다고 하는데 오늘 주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마음이 굼뜨다고 하고,
마음 중에서도 믿는데 마음이 굼뜨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마음이 굼뜬지
오늘 복음은 아주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몇몇 여자가 깜짝 놀랄 일을 전했는데 죽은 예수의 시신이 없어졌고,
천사들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부활하셨기 때문이라는 거였으며,
여자들의 말뿐 아니라 몇몇 제자들도 가봤는데 그들도 못 본 겁니다.
그렇다면 이 제자들은 왜 이렇게 믿는 데 마음이 굼뜬 것입니까?
그리고 이들만 이렇게 믿는 데 마음이 굼뜬 것입니까?
그렇지 않지요. 사실 우리도 믿는 데 굼뜨고
특히 절망의 상황에서 희망을 믿는 것이나
죽음에서 부활을 믿는 것은 쉽지 않아 굼뜨게 마련이지요.
그러고 보면 우리 인간은 대체로 실망이나 절망은 빠르지만
그 절망에서 희망을 되찾거나 부활을 믿는 것은 굼뜹니다.
왜 그럴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얕은 희망, 곧 기대 때문입니다.
우리는 깊은 희망을 가지려 하지 않고 얕은 희망인 기대를 가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대란 대부분 손 안 대고 코를 풀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저 어려움 없이 좋은 것을 손에 넣게 되기를 기대하고
고통이라는 대가 없이 열매를 맺게 되기를 기대하며,
제자들처럼 수난 없이 영광만 있기를 기대하고,
심지어 그 좋은 것을 남이 공짜로 주기를 기대하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공짜로 좋은 것을 얻으려는 마음을 가지고서는
절망의 마음이 쉽게 희망의 마음으로 돌아서기 어렵고,
그래서 부활이나 희망의 상황을 믿는 데 굼뜨게 되지요.
사실 큰 희망이랄까 위대한 희망은 겨울을 이겨낸 이 봄의 꽃들처럼
온갖 역경과 절망을 이겨내고 피는 겁니다.
그러니 좋은 것을 쉽게 얻으리라고 기대하고 희망하던 사람이,
다시 말해서 그런 기대와 희망이 습관이 된 사람이
절망과 죽음을 이겨내야 하는 희망과 부활의 믿음을 갖기란
혹독한 추위를 각오하지 않고 봄꽃을 피우려는 것처럼 쉽지 않지요.
그래서 아무리 예언자들이 예언을 하고,
주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를 하고,
천사들이 부활을 알려줘도 믿는 데 마음이 굼뜰 수밖에 없습니다.
수난 없이 영광만을 찾는 사람에게
수난을 거쳐야만 갖게 되는 부활의 영광을 믿는 것은 굼뜬 정도가 아니라
어쩌면 아예 꿈도 꿀 수 없는 것이 아닌지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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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2.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루카 24,16)
아마 우리 모두는 실망과 절망에 빠져 본 적이 있을 것 입니다. 가던 길을 중단해버릴 만큼, 희망이 꺾인 적도 있을 것 입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버릴 만큼, 믿었던 바가 의혹과 불신으로 바뀌어버린 적도 있을 겁니다. 오늘 <복음>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과 예수님께서 동행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루카 24,16)
그들은 자신들의 희망과 믿음이 무너졌고 절망하고 슬슴에 빠져, 예수님께서 예수님께서 함께 걸으시는데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사실은 그들의 희망과 믿음이 변화되고, 깊어지고, 정화 받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먼저 말을 건네십니다.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루카 24,17) “무슨 일이냐?”(루카 24,19)
그들은 먼저 그분에게서 일어난 일이 무슨 일인지를 깨달아야 했습니다. 사실, 실망과 절망에 빠질 때가 가장 위기의 순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기회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실망하고 절망에 빠지고 슬퍼질 때, 바로 그때가 우리의 희망을 내려놓아야 하고, 우리의 믿음을 내려놓아야 할 때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바로 이 때가 우리의 뜻과 생각이 변해야 할 때입니다. 바로 이 때가 우리의 눈이 가려져 있음을 깨달아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눈이 열려야 할 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요한 20,25)
그렇습니다. 알아야 할 바를 제대로 알아야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믿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성경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설명해주시고,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빵을 떼실 때에”(루카 24,35) 그분을 알아보게 됩니다. ‘떼어내다’는 ‘분리하다’, ‘파괴하다’, 글자 그대로는 ‘으스러뜨리다’라는 의미의 동사이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눈 곧, 신비를 보는 눈은 ‘떼어냄’, ‘부수어짐’, ‘으스러뜨림’에서 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바오로 사도는 말한 그분 안에 숨겨져 있는 우리의 생명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는 까닭입니다.”(콜로 3,1-3)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우리의 생명을 부술 때 우리 안에 숨겨져 있는 하느님의 생명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실, 종교적 진술은 일차적으로 정보(information)를 위한 것이 아니라 변혁(transformation)을 위한 것임을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한계 안에 매달리는 대신 그 너머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루카 24,31)
여기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보는 믿음의 눈이 열리는 세 과정을 봅니다. 곧 우리의 생각이 열리게 되고(open mind), 가슴이 열리게 되고(open heart), 우리의 뜻이 바뀌게 되는(open will) 과정입니다. 곧 말씀에 대한 개방과 말씀의 수용과 말씀으로 말미암은 변형입니다. 말씀을 듣고서 깨달아 알아듣고, 알아들은 바를 마음으로 받아들여 믿으며, 믿는 바를 그분의 뜻에 따라 실현함으로서 변화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외적인 눈이 열리고, 속눈이 열리고, 영의 눈이 열리고, 마침내 그분을 뵙게 되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루카 24,16)
주님!
저는 고통을 없애주기를 바라지만,
당신은 고통을 함께 지라 하십니다.
저는 평화롭기를 바라지만,
당신은 평화를 위해 일하라고 하십니다.
저는 세상의 부패를 비난하지만,
당신은 세상의 부패를 막는 소금이 되라 하십니다.
저는 세상의 어둠을 탓하지만,
당신은 세상의 빛이 되어 밝히라 하십니다.
주님, 오늘도 당신 빛 안에서 걷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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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2.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마음의 눈이 열려야 한다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것은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무슨 특별한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나를 위한 사람이 내 옆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사할 뿐입니다. 마음에 있는 얘기는 기회가 되면 할 것이고 지금은 묵묵히 있는 것이 좋습니다. 큰일을 치르고 난 후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할 말이 없습니다. 몸도 마음도 다 지쳤습니다. 가족을 품에 안을 갈망만이 남았습니다. 시간은 무심히 가고 속수무책입니다. 순간이 안타깝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의 마음도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의 무기력한 죽음에 모든 기대와 희망이 무너졌습니다. 그 상황에서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이를 잃은 허망함은 사랑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참히 돌아가시고 더더욱 그 시신까지 없어졌으니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늘같은 스승이 힘없이 사라졌으니 거기에 있다가는 어떤 불똥이 튈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사흘이나 기다렸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서둘러 그 자리를 떠야 했습니다. 사실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은 ‘고난을 겪은 다음에 자기 영광 속에 들어가리라’는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었지만, 그것을 알기까지는 아직 눈이 뜨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더 큰 실망과 좌절만이 더하였습니다. 실망이 큰 만큼 기쁨이 크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생환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도 이러한 부활의 기쁨이 담겨 있기를 마음 모아 소망합니다.
주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동행하시면서 성경 말씀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음에 뜨거운 감동을 일으키고 결정적으로 제자들은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자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습니다. 지금 당장 주님을 알아보지는 못하였지만,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깨우침이 남아있었는가 봅니다.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천사를 대접’(창세18,1-15)하였듯이 나그네를 묵어가라고 붙들었으니 말입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마침내 나그네와 함께 식탁에 앉게 되었고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눈이 열렸다는 것은 마음의 눈이 열린 것이고, 그분께서는 곧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는데 당신의 목적 달성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알 것을 알고 절망이 기쁨으로 채워졌으니 더 이상 거기 남아계실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또한 제자들도 곧바로 일어나 기쁨을 지니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하였고 거기서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 뵙게 된 일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에 새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결국 주님께서 먼저 알려 주셔야 그분을 알 수 있고, 우리도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눈이 뜨인다는 가르침을 얻게 됩니다. 또한 나그네를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가르침을 실천하는 가운데 주님을 새롭게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절망 한가운데에서도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하였던 제자들처럼 주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시련과 고통의 어두움 속에서도 주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다만 내 아픔이 커서 그분을 알아보지 못할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나와 동행하시면서 마음을 열어 주시고 뜨겁게 해주시지만 지금 당장은 눈이 가려져서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열어 주님을 붙잡으십시오. 어둠 속에서도, 절망 가운데에서도 주님을 붙잡으십시오. 주님은 결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붙잡기만 하면 언제든지 함께 묵으십니다.
“저는 아프지만 죽지는 않습니다. 모든 면에서 고통을 받지만 낙담하지 않습니다. 혼란되지만 실망하지는 않습니다. 시련받지만,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내쫓기지만 멸망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의 시련은 잠시뿐이지만 다가올 삶의 영광은 영원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성녀 엘리사벳시튼).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예레1,8).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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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2.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모두가 천사라면’이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생각나는 가사는 이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가 천사라면/ 이 곳은 천국이겠지 하하하하/ 우리 마음속에 욕심도 없어지고/ 얼마나 화목해질까 하하하하/ 세상 사람들이 모두가 천사라면/ 눈물은 사라져가고 하하하/ 우린 꿈을 꾸듯 언제나 행복하게/ 이리저리 날아갈 거야.” 저의 세례명은 ‘가브리엘’입니다. 뜻은 ‘천사’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성모님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요셉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천사는 날개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사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손님이 왔습니다. 뉴욕은 처음 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업을 위해서 왔다고 합니다. 호텔을 예약해 드리고, 짐을 날라 드렸습니다. 저의 작은 정성이지만 그분들에게 저는 ‘천사’와 같았을 것입니다. 첫술에 배부르지는 않겠지만, 형제님이 하는 사업이 잘 될 수 있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저도 천사를 만났습니다. 차를 타고 가는 중에 도로에 떨어진 나무판 같은 것을 지나갔습니다. 소리가 났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차에서 기름 냄새가 난다는 말을 들었지만 역시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왔는데 누군가 차에 종이를 부쳐 놓았습니다. 종이에는 ‘차에서 기름이 떨어진다.’라고 적혀있었습니다. 차 밑을 보니 차에서 기름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고마운 사람은 차 밑에 모래를 뿌려 놓았습니다. 당황하고 있는데 종이에 기름이 새고 있다고 하던 분이 와서 ‘토잉 카’를 불러주었습니다. 저는 성격이 급한 편이라서 누군가 종이로 알려 주지 않았다면 그냥 차를 몰고 갔을 것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차에 화재가 날 수도 있었고, 고속도로에서 차가 서버리는 낭패를 만날 수도 있었습니다. 차는 무사히 토잉 카로 정비업소로 옮겼고, 고칠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는 천사와 같은 분들이 많습니다. 차에 기름이 새는 것을 발견하고 친절하게 알려준 분이 있습니다. 하느님께 감사드린 하루였습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천사’와 같은 분들이 있습니다. 아이티에서 10년 동안 사목하시는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이 뭉클합니다. 피부병 환자를 옮기다 본인도 피부병에 감염되었는데 환자가 쾌유 될 수 있기를 기도하였습니다. 10년 동안 300명이 넘는 사람들을 위해서 장례미사를 봉헌하면서 그분들이 더 이상 슬픔도, 아픔도 없는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그분들이 하느님의 품으로 갈 수만 있다면 지금까지의 고통과 아픔도 모두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지난번에 토론토로 신문홍보를 갈 때입니다. 제가 신문홍보를 잘 할 수 있도록 헌신적으로 도움을 주신 분이 있습니다. 왕복 10시간을 차량봉사 해 주었습니다. 신문홍보가 잘 되면 저보다 더 좋아하셨습니다. 신문홍보가 덜 되면 저보다 더 안타까워하셨습니다. 밤하늘에 별들이 없다면 어두운 우주만 있을 것입니다. 밤하늘은 별들이 있기에 아름답습니다. 세상은 천사와 같은 사람들이 있기에 아름답습니다.
사도행전은 ‘천사’가 되어준 사도들의 이야기입니다. 교회의 공동체는 가진 것을 모두 기쁘게 나누었습니다. 부유한 사람, 가난한 사람, 건강한 사람, 아픈 사람의 차별이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이미 부활의 삶을 살았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한 번의 설교로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고, 신자가 3000명 이상 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걸인에게 금이나 은을 주는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걷지 못하는 걸인에게 베드로 사도는 천사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함께 길을 걷던 나그네를 집으로 모셨습니다. 그 나그네는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우리가 천사의 모습으로 나그네를 집으로 모실 수 있다면, 우리가 천사의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이미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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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2.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송도에 살면서 좋은 점 하나는 대중교통을 쉽게 이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당에서 나와 20분만 걸어가면 전철역이 있어서 어디든 시간 맞춰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서울로 강의 갈 때 지하철을 이용했습니다. 저녁 8시부터 시작되는 강의라서, 30분 전에 도착할 생각으로 2시간 전인 저녁 5시 30분에 출발했습니다. 직접 운전하지 않으니 2시간 동안 좋아하는 책이나 열심히 읽어야겠다고 마음먹고 기분 좋게 성당을 떠났습니다.
저의 예상은 완전히 어긋났습니다. 전철 안에서 완전히 녹초가 된 것입니다. 마침 그 시간이 퇴근 시간이라서 사람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강의 때 나눠줄 선물이 있어서 등에 커다란 가방을 메고 있었는데, 많은 사람 틈에 끼어서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예전에 지하철 안에 성범죄 단속을 위해 CCTV를 시범적으로 설치했는데, 녹화된 영상에는 하나의 틈도 없이 빽빽하게 사람들의 머리만 찍혀 있어서 무용지물이었다는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매일 출퇴근을 지하철로 하는 사람은 얼마나 힘들까 싶더군요. 직접 체험하니 비로소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해 보지 않은 것을 두고 쉽게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쉽게 판단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남의 아픔을 나의 경험만을 내세워 말한다고 해결될까요? 그의 경험은 자기의 경험과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과 나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의 간격을 줄이는 방법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내 생각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생각도 인정하고 믿어주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복음에서 만납니다. 그들은 몇몇 여자로부터 예수님 부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고 서로 예수님의 부활이 진짜인지 아닌지 토론만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었음을 오늘 복음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제자였음에도 말이지요.
저녁때가 되어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서, 주님께서 빵을 떼실 때야 비로소 눈이 열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들의 경험을 다시금 기억할 수 있었겠지요. 빵의 기적을 일으키셨을 때, 주님과 함께하며 들었던 모든 말씀을 기억하면서 그들은 다시금 믿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믿음의 눈으로만 주님을 제대로 볼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만을 믿는 삶은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게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춘 사람만이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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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고 싶다면 사랑하라. 그리고 사랑스럽게 행동하라(벤자민 프랭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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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2.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살아 계신 파스카 주님과의 만남
-위로와 치유,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
“거룩하신 그 이름 자랑하여라.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시편105,3)
만남중의 만남이, 만남중의 최고의 만남이 부활하신, 살아계신 파스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파스카의 신비, 파스카의 기쁨, 파스카의 평화, 파스카의 선물이 참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요즘 부활시기의 말씀은 온통 부활하신 파스카 주님과의 만남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해마다 읽게 되는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불구자를 치유하는 장면은 언제 들어도 신이납니다. ‘아름다운 문’이라고 불리는 성전문 곁에서 구걸하던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걸인의 치유입니다. 성전문을 들어서려던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자선을 청하는 불구자를 유심히 바라보고 나서 불구자에게 말합니다.
“우리를 보시오.”
그가 무엇인가를 얻으리라고 기대하며 그들을 쳐다보는 순간, 말그대로 아이컨택트 눈맞춤이 발생합니다. 서로간의 만남에 아이 컨택트의 눈맞춤은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요! 아마도 요한과 함께 베드로는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한 그윽한 사랑의 눈길로, 부활하신 주님의 눈길로 태생 불구자를 바라봤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 말합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태생 불구자를 치유한 베드로의 이 말마디는 얼마나 멋지고 감동적인지요! 말하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자 그는 즉시 발목이 튼튼해져서 벌떡 일어나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니 모두가 경탄하고 경악합니다. 얼마나 신바람 나는 장면인지요! 요한과 베드로 사도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니 이런 놀라운 치유입니다. 태생 불구자의 치유로 정말 말그대로 '아름다운 문'이라는 성전 문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일치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 사도야말로 최고의 영적 부자입니다. 부활하신 주님보다 더 좋은 보물은 없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일치의 삶을 살기에 이런 치유의 선물입니다. 정말 우리가 곤궁중에 있는 이들에게 이런 부활하신 주님을 선물할 수 있다면 최상, 최고의 선물이 될것입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부활하신, 살아계신 파스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우리가 참여하는 교회의 전례가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도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임을 저는 참으로 많이 강조했습니다. 도대체 주님과의 만남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두 사도가 이런 치유의 기적을 행할 수 있음은 평소 부활하신 파스카 주님과 일치의 삶을 살았기에 가능했습니다. 행복기도중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중에
주님을 만나니
주님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살아계신 주님과 만남의 선물이 바로 위로와 치유, 정화와 성화,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입니다.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이 아니곤 세상 어디서 이런 선물을 받을 수 있겠는지요! 거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주님의 무한한 은총의 선물입니다.
도대체 모든 것을 지녔어도, 기쁨이 없다면, 평화가 없다면, 희망이 없다면, 자유가 없다면, 치유가 없다면, 위로가 없다면 삶은 얼마나 황량할까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바로 이 모두는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살아 계신 파스카 주님을 만날 때의 무상의 선물들입니다. 제가 참 많이 강조했던 인간 영혼의 고질적 질병인 무지와 허무의 병에 대한 유일한 궁극의 처방은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뿐이라는 사실입니다.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몰아내는 주님 말씀의 빛입니다. 이래서 무지와 허무의 병의 치유에 주님과 만남의 여정을 강조하는 까닭입니다. 참으로 영혼의 건강에 무지와 허무의 병의 치유에 주님과의 만남보다 더 결정적인 처방은 없습니다. 한마디로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은 미사를 통한 주님과의 만남뿐이다”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이래서 주님과 만남의 일상화, 생활화를 이뤄주는 우리가 평생 끊임없이 날마다 바치는, 우리의 평생 거룩한 의무인 찬미와 감사의 시편공동전례기도와 미사공동전례기도 수행이 그처럼 고마운 것입니다. 이런 거룩한 공동 전례 수행의 부단한 선택과 훈련 및 습관화보다 영육의 치유와 건강, 영적 성장과 성숙에 도움이 되는 수행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루카복음은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을 전하고 있습니다. 앞서는 성경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났고 후에는 빵을 떼어주실 때 주님을 알아뵈니 말그대로 오늘 복음은 말씀전례와 성찬전례로 이뤄진 미사전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바로 다음 두 제자의 고백은 그대로 말씀전례의 은총에 대한 고백입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어, 두 제자의 환대의 부응하여 집에 들어가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시자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니 그대로 성찬전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니 우리 믿음의 여정에 주님과의 만남을 일상화해주는 말씀전례와 성찬전례로 이뤄진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가 우리의 영적 삶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깨닫습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을 만나는 우리 모두를 끊임없이 정화하고 성화하시며, 위로와 치유,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십니다.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시편105,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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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2.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눈’이 가려져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앞을 내다볼 줄 알고, 무엇을 느낄 줄 아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에서 말하는 ‘눈’은 사람이 지닌 제3의 ‘눈’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제3의 눈이라 하니 조금 거창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제3의 눈이란 예수님을 알아보는 ‘눈’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사람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그분은 초라한 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창녀를 구하고, 걸인들과 세리와 함께 지내며, 나병환자에 손을 얻는 사람. 율법을 유대 전통 방식이 아닌 이상하게 해석하는 궤변론자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은 사람들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영의 눈으로 바라볼 때 예수님은 무한한 사랑을 지니신 분이며, 나눔이고, 용서이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은 부활하여 살아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그분을 어떤 눈으로 만나고 있습니까? 정말 여러분 각자에게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까? 이야깃거리는 아닙니까? 우리는 정말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이용하는 상인입니까? 그분과 함께 기도하며 살고 있습니까? 그분은 당신보고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영의 눈을 떠서 예수님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의 눈은 사람의 힘만으로는 뜰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영의 눈을 뜰 수 있도록 그들 앞에서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그들 또한 예수님의 말씀에 이끌려 그분을 주무시고 가시라고 초대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초대와 그분의 자비가 만나 우리는 영의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오늘 예수님이 살아계심과 더불어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알았을 때, 이렇게 영의 눈을 떴을 때 예수님은 사라지셨습니다. 그분이 사라졌다는 뜻은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은 보이지 않으셔도 우리의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레지나와 아녜스
어느 날 미사를 마치고 미사에 오신 신자분들께 인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고등학생 혹은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여학생이 제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부님! 안수 주세요.
학생이 용감하게 안수를 청하는 일은 많지 않기에 무심결에 저는 그 여학생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일로 안수를 받으려 하니?
여학생은 제게 ‘충치가 생겼습니다. 많이 아파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날은 저의 사제생활 첫 안수 날이었습니다. 충치 안수….
그런데 조용히 뒤에 머물던 다른 여학생도 제게 다가와 머리를 들이밀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신부님! 저도 안수가 필요합니다.
그대는 왜 안수가 필요한가요?
여학생은 말했습니다. ‘얼마 전 남친과 헤어졌어요.’라고 말입니다.
두 명의 여학생 ‘레지나와 아녜스’에게 안수하면서 저는 기분 나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둘을 예수님께서 얼마나 예뻐하실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작은 아픔에도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는 모습,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상처도 정성스레 보살피려는 마음은 예수님께서 즐기시는 선물일 것입니다.
작은 아픔에도 예수님께 기대보세요. 그 아픔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응답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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