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경환의 명시감상 제1권에서
박쥐 머릿장
최금녀
골동품 많은 인사동
전통찻집에서 차를 마신다
찻잔에 어리는
어스름한 세월 속으로 들어간다
누군가, 연장을 들고
대갓집 안방마님 머릿맡에 놓을
박쥐 머릿장을 짠다
먹빛이 잘 결은 먹감 나무로 짠다
목질에 노릿 노릿 기름기 돌고
먹빛이 산허리를 휘감으며
구름무늬를 띈 놈으로 골라
먹줄을 튕겨 톱질을 한다
귀에 꽂았던 몽당연필로는
실금을 그어
귀이개, 뒤꽂이, 동침 넣어둘 서랍도
몇 개 만들어 앙증맞게 끼운다
아침 저녁
마님의 손길이 분주하다
마님의 벗이 되어
날마다 마님의 부름을 받아
마님의 살 냄새 은은히 배어드는
머릿맡에서
박쥐모양의 백통장식이
손결에 닳아 윤기나는
전생의 내 박쥐 머릿장 하나
골동품 많은 인사동
전통 찻집에서 차를 마신다.
----최금녀, [박쥐 머릿장]({시안}, 2007년 봄호) 전문
우리 인간들은 누구나 다같이 귀족이 되어서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리고, 수많은 시녀들과 시종들을 거느리면서 살아가고 싶어한다. 귀족은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이며, 모든 특전과 특권을 향유하고 있는 인간이다. 그는 늘, 항상,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며, 그가 속한 국가와 그 국민들의 영광을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자 한다. 그는 충忠과 효孝의 다툼이 있으면 언제, 어느 때나 충을 선택하고, 또한 그는 눈앞의 사소한 이익과 전체의 이익과의 다툼이 일어나면 언제, 어느 때나 전체의 이익을 선택한다. 그는 도덕군자이며, 늘, 항상, 솔선수범하는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이다. 그는 늘 국력과 민심을 결집시키는데 뛰어난 재주가 있으며, 그 자비롭고 친절한 인품으로 살아 있는 성자로 불리우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다른 한편으로는 더없이 그가 속한 지배계급의 사고와 판단과 취향의 체계를 사회화시켜 나간다.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이 그 민족과 국가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은 그 민족의 지도자이며, 그의 말 한 마디에는 전 민족을 복종시킬 만한 힘이 담겨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권력은 타인의 권력을 인정하지 않고, 또한 타인의 의견도 인정하지를 않는다. 그는 독창적인 명명자이며, 모든 가치의 창조자이다. 그는 알렉산더나 나폴레옹처럼 영원한 제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언제, 어느 때나 호전적이고 전투적인 정신을 연마하기에 여념이 없는 것이다. 그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은 “겁많은 인간, 전전긍긍하는 인간, 소심한 인간,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하는 인간, 편협하고 의심 많은 인간, 비굴한 인간, 학대를 감수하는 개같은 인간, 거지같은 아첨꾼, 그리고 특히 거짓말쟁이들을 경멸(니체, {선악을 넘어서})”한다. 또한 그는 자기 자신이 더럽고 추한 평민계급의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출신성분을 극복하고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는 모든 인간들을 경멸한다.
우리 인간들은 누구가 다같이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이 되어 갈 수가 있다. 실내수영장과 영화감상관과 실내 공연장을 갖춘 대저택에서 살 수도 있고, 또한 그의 영지에서 언제, 어느 때나 골프와 수상스키와 사냥마저도 즐기면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수많은 시녀들과 시종들이 그의 의전儀典과 진수성찬을 위해서 수고를 아끼지 않으며, 언제, 어느 때나 값비싼 황금도포와 황금의자에 앉아서 그가 속한 국가와 민족의 영광을 위해서 깊고 깊은 사색에 잠길 수도 있는 것이다. 그는 힘 있는 자로서 스스로 명령해야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알고 있으며, 그의 고귀하고 굳센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언제, 어느 때나 피비린내 나는 전쟁마저도 서슴지 않게 된다. 그렇다. 주인과 노예, 부자와 가난한 자의 대립 이전에, 우리 인간들은 누구나 다같이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최금녀 시인의 시적 경향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고전적인 세계이며, 나머지 하나는 현대적인 세계이다. 고전적인 세계에서는 우리 인간들의 아름다운 삶을 옹호하고, 현대적인 세계에서는 문명의 이기利器들을 통하여 자기 자신의 정체성과 우리 인간들의 존재의 기원을 찾아 나선다. 그의 [박쥐 머릿장]은 고전적인 세계에 속하며, 그는 고귀하고 우아한 시인의 탈을 쓰고 “골동품 많은 인사동/ 전통찻집에서 차를 마신다”. 그는 그 차의 아름답고 감미로운 맛을 음미하면서, “찻잔에 어리는/ 어스름한 세월 속으로 ” 빠져 들어가게 된다. 이때에 ‘찻잔에 어리는 어스름한 세월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는 것은 전통찻집의 복고적인 분위기에 젖어서, 이 ’박쥐 머릿장‘을 바라보고 그 옛날의 과거 속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나간다는 것을 뜻한다. 골동품은 중국 요리에서 뼈를 장시간 고아 만든 국물을 지칭하는 말이었는데, 그러나 후에, 그 뜻이 변용이 되어서, 그 옛날 사람들이 애용하던 고물古物을 지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쨌든 골동품은 오랜 시간의 풍화작용 속에서도 그 빛을 잃지 않고 있는 유서깊은 기물器物이나 예술품을 지칭하며, 이 ’박쥐 머릿장‘도 예외는 아니다.
최금녀 시인은 “마님의 벗이 되어/ 날마다 마님의 부름을 받아/ 마님의 살 냄새 은은히 배어드는/ 머릿맡에서/ 박쥐모양의 백통장식이/ 손결에 닳아 윤기나는/ 전생의 내 박쥐 머릿장 하나”에 빠져들어서, 그 상상의 나래를 펴고, 그 회고적인 관점으로 ‘박쥐 머릿장’을 짜는 과정을 재구성해 보인다. 마님은 대가집의 고귀하고 우아한 마님이며, 그 혈통, 문벌, 재산, 사회적 지위에 의하여 모든 특전과 특권을 향유하고 있는 고귀하고 위대한 신분의 여인을 뜻한다. 이 ‘박쥐 머릿장’은 그 마님에게는 꼭 필요한 필수품이며, 바로 그 머릿장에는 필통, 연적, 서류함, 가위, 실패, 골무, 실, 귀이개, 뒤꽂이, 동침 등을 넣어두게 된다. 따라서 “누군가가 연장을 들고” 그 마님을 위해서 ‘박쥐 머릿장’을 짜게 되고, 그 ‘박쥐 머릿장’은 또한 “먹빛이 잘 결은 먹감 나무”로 짜지 않으면 안 된다. ‘먹감 나무’는 여러 해 묵어 속이 검은 감나무이며, 그 결이 단단하고 고우므로 목공예품으로는 더없이 좋은 나무였던 것이다. 따라서 목수는 “목질에 노릿 노릿 기름기 돌고/ 먹빛이 산허리를 휘감으며/ 구름무늬를 띈 놈으로 골라/ 먹줄을 튕겨 톱질을” 하지 않으면 안 되고, 또한 그 목수는 “귀에 꽂았던 몽당연필로는/ 실금을 그어/ 귀이개, 뒤꽂이, 동침 넣어둘 서랍도/ 몇 개 만들어 앙증맞게” 끼우지 않으면 안 된다.
최금녀 시인은 고전주의자이면서도 현실주의자이다. 그가 고전주의자라는 점에서는 전통과 역사를 존중하면서도 이 [박쥐 머릿장]을 통해서 골동품의 미학을 완벽하게 선보이고 있다는 점이 돋보이고, 그가 현실주의자라는 점에서는 비록, 과거에 대한 상상 속에서의 일이기는 하지만, 목수가 ‘박쥐 머릿장’을 만드는 과정을 극사실주의적인 기법으로 재현해내고 있다는 점이 돋보인다. 그는 전통과 역사를 존중하면서도 현실을 중요시하고, 또한, 그는 현실을 중요시하면서도 언제, 어느 때나 전통과 역사와 함께, 그 보조를 맞춰 나간다. “누군가, 연장을 들고/ 대갓집 안방마님 머릿맡에 놓을/ 박쥐 머릿장을 짠다/ 먹빛이 잘 결은 먹감 나무로 짠다”라는 시구와 “목질에 노릿 노릿 기름기 돌고/ 먹빛이 산허리를 휘감으며/ 구름무늬를 띈 놈으로 골라/ 먹줄을 튕겨 톱질을 한다/ 귀에 꽂았던 몽당연필로는/ 실금을 그어/ 귀이개, 뒤꽂이, 동침 넣어둘 서랍도/ 몇 개 만들어 앙증맞게 끼운다”라는 시구는 고전주의자가 아니면 쓸 수 없는 시구들이며, 또한, 그 시구들은 현실주의자가 아니면 쓸 수가 없는 시구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누군가가 연장을 들고 먹빛이 잘 결은 먹감 나무로 박쥐 머릿장을 짠다라는 시구도 탁월하고, 목질에 노릿 노릿한 기름기가 도는 먹감나무에 먹줄을 튕겨 톱질을 한다는 시구도 탁월하다. 귀에 꽂은 몽당연필로 실금을 긋는 광경도 탁월하고, “귀이개, 뒤꽂이, 동침”을 넣어둘 서랍을 만드는 장면도 탁월하다. 귀이개는 귀지를 파내는 도구이고, 뒤꽂이는 쪽진 머리 뒤에 덧꽂는 비녀 이외의 물건이며, 동침은 가늘고 긴 침 중의 하나이다. “귀이개, 뒤꽂이, 동침 넣어둘 서랍도/ 몇 개 만들어 앙증맞게 끼운다”라는 시구에서, 이 ‘앙증맞다’는 ‘1, 얄밉게 앙증맞다’, ‘2, 그 모양이 제격에 어울리지 않게 작다’라는 뜻이 있지만, 그러나 바로 이 대목에서는 ‘너무 작아서 끔찍하게 예쁘다’라는 뜻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최금녀 시인은 고귀하고 우아한 마님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박쥐 머릿장을 바라보면서, 또다시 그 옛날의 과거 속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나간다. ‘박쥐 머릿장’은 어느 새 그 마님의 벗이 되어 있고, 따라서 ‘박쥐 머릿장’은 어느 새 그 마님의 살냄새가 배어 있게 되었던 것이다. “아침 저녁/ 마님의 손길이 분주하다/ 마님의 벗이 되어”라는 시구가 그것을 말해주고, “날마다 마님의 부름을 받아/ 마님의 살 냄새 은은히 배어드는/ 머릿맡에서”라는 시구가 그것을 말해준다. 요컨대 얼마나 가까웠으면 마님의 벗이 되었던 것이고, 또한, 얼마나 가까웠으면 마님의 살냄새가 배어 있게 되었던 것일까? 이제 마님이 박쥐 머릿장이 되고, 박쥐 머릿장이 마님이 된다. 아니, 이제, 그 박쥐 머릿장이 마님이 되고 그 마님이 최금녀 시인이 된다. 최금녀 시인의 “전생의 내 박쥐머릿장 하나”는 그 황홀한 몰입의 상태를 말해주고, 그리고그 상상 속의 황홀한 몰입의 상태는 또한, 그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그 옛날의 박쥐 머릿장으로 변용시키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골동품 많은 인사동/ 전통찻집에서 차“를 마시는 시간은 참으로 황홀한 시간이며, 최금녀 시인은 그 황홀한 시간을 통하여 이처럼 아름답고 뛰어난 [박쥐 머릿장]을 쓰게 된 것이다. 황홀恍惚은 ‘1, 눈이 부시어 어릿어릿할 정도로 찬란하거나 화려함; 2, 어떤 사물에 마음이나 시선이 혹하여 달뜸; 3, 미묘하여 헤아려 알기 어려움; 4 흐릿하여 분명하지 아니함’의 국어사전적인 의미가 담겨 있지만, 내가 말한 황홀함은 두 번째 의미, 즉, 어떠한 사물과 하나가 되어갔다는 것을뜻한다.
마님의 살 냄새 은은히 배어드는
머릿맡에서
박쥐모양의 백통장식이
손결에 닳아 윤기나는
전생의 내 박쥐 머릿장 하나
최금녀 시인은 고귀하고 우아한 시인이며, 그 자태가 ‘박쥐 머릿장’만큼이나 아름답고 품위가 있는 시인이다. 또한 그는 그토록 뛰어나고 명석한 두뇌를 지녔으면서도 언제, 어느 때나 황홀하게 몰입할 수 있는 집중력을 자랑하기도 한다.
오오, ‘전생의 박쥐 머릿장’ 같은 시인이여!
“요즘 나는 오랜 수형受刑 생활에서 벗어난 것처럼 몸이 가볍다. 시와의 만남이 내 새로운 삶의 활력소가 된 것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눈부신 햇빛을 느낀다. 내가 그리던 바깥세상이다. 시의 여신이 아침부터 밤까지 나를 안내한다. 이때까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곳, 뜨거운 곳, 전쟁보다 더 긴박한 곳을 보여준다. 보는 것만으로 얼마나 경이롭고 가슴 설레고 행복한가. 나는 언제라도 날 준비가 되어 있는 수많은 고치들을 본다. 부화하여 나비가 될 꿈을 꾸고 있는 지상의 불꽃들이 너무도 아름답다.
----최금녀, [다시 만나기 위한 긴 우회로迂廻路]( {시안} 2007년 가을호)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