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황수관 박사
신바람 건강법으로 유명한 황수관 박는 1945년 해방 되던 해 일본 히로시마에서 모태신앙으로 태어났고 그의 부모는 한국으로 돌아와 경주 부근 안강에 정착했다. 그가 2세 때 홍역으로 인한 고열로 그만 죽고 말았다. 그의 아버지는 지게를 받쳐놓고 죽은 아들을 산에다 묻기 위해서 기다리는데 어머니는 아들을 놓지 않고 기도하고 있었다. “하나님, 우리 수관이 살려주세요!” 그리고는 진물이 나는 아들의 얼굴을 혀로 핥고 있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눈물과 침으로 범벅된 죽은 아들의 얼굴에 핏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어머니의 기도와 사랑으로 살아났다.
그는 어렵게 초등학교 졸업했으나 중학교에 다닐 형편이 못되어 지게 지고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하고 있었다. 그때 한 친구가 포항의 영일중학교에서는 등록금 없이 가난한 학생들을 공부시켜 준다는 것이었다. 단숨에 달려가서 그 학교에 입학했다. 선생님이 물으셨다. ‘어디서 왔니?’ ‘안강에서 왔습니다’ ‘어떻게 왔니?’ “달려서 왔습니다‘ ’계속 그렇게 학교 다닐 거니?” ‘합격만 시켜 주신다면요“ 영일중학교 3년 동안 14 Km를 산 넘고 물 건너 3시간을 매일 새벽 4시에 집을 나서 달음박질을 쳐야만 했다. 그의 어머니는 눈물의 기도로 아들을 매일 학교에 보냈다. 중학교 2학년 때 착하고 예쁜 영어 선생님이 그에게 꿈을 심어주었다. ‘수관아! 넌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꿈을 가지고 도전하며 살거라. 특별히 영어 공부를 많이 하여라.’ 그때 그는 ‘아무리 어려워도 꿈을 가지고 도전하며 살리라!’고 인생 방향을 결정했다.
중학교 졸업 즈음에 안강에 농업고등학교가 생겨서 장학생으로 공부했다. 그러나 워낙 입학 학생이 없어서 50명 입학에 13명이 졸업하고는 그 학교 문은 닫았다. 황수관을 공부시키기 위한 학교였다. 대학은 학비면제 조건인 2년제 대구교육대학에 입학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부잣집에 입주해서 세 명을 차례로 가르치면 12시가 다 되었고 그때부터 본인 공부를 해야 했다. 이렇게 대구교대를 졸업하고는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10년을 교사로 근무했다.
그러나 그의 꿈은 멈추지 않았다. 4년제 대학을 나오고 싶었다. 교사로 근무하면서 대구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야간부에 입학하여 공부를 계속하였다. 나이가 차서 결혼은 하였으나 살집에 없어서 13평 주공아파트에 사는 이모 집 방 한 칸을 얻어 살았다. 그러나 꿈만은 접지 않았다. 교사를 그만두고 경북대학교 교육대학원 체육학과에 입학 공부하면서 의대 청강생으로 등록금도 안내고 공부했다. 의대 교수들은 그에게 온갖 수모를 줬고 중간고사 때 시험지도 안줬으나 겨우 얻은 시험지에 의대생들보다 더 훌륭한 답을 써서 교수들을 놀라게도 했다. 그렇게 10년 동안 졸업장도 못 받는 의학수업을 했다. 그리고 국민대학에서 생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는 의과 대학 졸업장도 없으면서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교수가 되었다. 주경야독으로 식어지지 않는 꿈을 가지고 지칠 줄 모르고 공부해서 얻은 결과였다.
그의 가정은 일찍이 부터 믿음의 집안이었다.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중고등학교 때부터 슬금슬금 주님과 멀어져 아예 담을 쌓고 살았다. 이런 그가 살아계신 주님을 만났다. 경북의대에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 집 옆에 조그마한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 외국인선교사의 특별전도집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고는 회개의 눈물을 하염없이 쏟아내곤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 어눌한 한국말로 ‘참 크리스천 이라면 하나님의 가르침대로 순종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평범한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 가슴을 치며 회개 헸다.
경북대학교 교수 초년시절 춘천에 있는 한림의대에서 열린 의학 세미나에 어떤 교수님 대신 논문을 발표할 기회가 생겼다. “황교수님이 이번 한림대 세미나에 가세요” ‘저는 아직 자격이 안 되는데요’ ‘아뇨, 충분히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미나 출발하면서 세미나에 가서 전도하겠다고 난생 처음 전도지를 여러 장 만들어 가방 속에 고이 넣었다. 논문 발표에 온통 신경을 쓰다 보니 논문은 잘 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전도지 돌리는 일은 까맣게 잊어먹어 주님 보시기에 죄송하기 짝이 없었다.
세미나 끝나고 경춘선 열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데 세미나에 참석했던 안면 있는 교수님 한분이 눈에 들어왔다. 옳지 저분에게 전도해야지 생각하고는 찾아가 인사를 드렸더니 그분은 이화여대 의대 교수였다. 가방을 열고 전도지를 꺼내려는데 손이 덜덜 떨렸다. 조심스레 꺼내 교수님께 드리면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어 제가 교회에 다니는데 제가 만난 예수님을 한 번 만나보세요.
그랬더니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그렇군요. 사실은 저도 교회 집삽니다" “저는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면서도 전도지 한 장 나눠 준 적이 없는데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렇게 운을 뗀 교수님은 서울까지 가는 두 시간 동안 내내 자신의 간증을 들려주셨다. 전도 하려다가 은혜만 받았다. 그 교수님은 한마디 하셨다. ‘경북대학교 어떻습니까?’ ‘대구 경북 지역에서는 좋은 학교지요’ ‘연세대학교 어떻습니까?. ’너무나 좋은 학교지요‘ ’앞으로 우리 주님이 황 교수님을 크게 들어 쓰실 겁니다.‘한마디 하고는 그 교수님과 헤어졌다.
그리고 헤어졌는데 한 열흘쯤 지나 그 교수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황박사 연세대학에서 교수 공개채용을 하고 있으니 한번 이력서를 내 보세요. 제가 힘좀 쓰지요" 얼마나 반갑던지 그 길로 얼른 이력서를 써서 연세대로 보냈다. 하지만 미국, 영국등 세계 일류대학에서 공부한 쟁쟁한 사람들도 많은데 야간에 야간을 거쳐서 어렵게 박사가 된 그가…….?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한 달쯤 있다가 연세대 교수로 합격했다는 통지서가 왔다. 전도지 한 장, 그것도 믿는 사람에게 내민 그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연세대학교수로 채용되는 축복을 내려 주신 것이었다.
연세대학 의대 교수로 밤낮 연구하였고 학생들 사이에 명 강의란 소문이 났다. KBS에서 짧게 한번 건강 강의하고 SBS 에서 시리즈 건강 강의 제의가 왔다. 첫날 방송이 나가자마자 난리가 났다. 여기 저기 방송사와 신문사 잡지사 기자들이 몰려와 너도나도 인터뷰를 하겠다고 야단들이었다. CF모델로 출연해 달라는 교섭이 오기 시작했고 술광고 등을 거절하고도 모두 27개 회사의 CF에 출연하는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 후에도 책도 내고 ‘SBS 호기심 천국’ ‘MBN 황금알’등에 고정 출연하기도 했고 각종 프로에 특별출연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인기 강사로써 대학, 기업체, 교회 등에서 강연 활동을 하던 중 너무 바빠서 정작 자기 건강은 잘 챙기지 못하였다.
강남중앙교회 담임목사, 그리고 그의 동생 황덕수씨의 인터뷰 내용에 의하면 고 황수관 박사는 자신의 몸을 무리하면서 까지 경상도로 전라도로 다니면서 부르는 곳엔 어디든지 간증과 강의를 하였다고 한다. 쓰러지는 그 주간에도 거제도에 갔다 왔다고 한다. 그러자 갑자기 건강 악화(간농염으로 인한 급성 패혈증)로 지난 2012년 12월 30일 향년 67세로 하늘로 부름을 받고 말았다.(그는 강남중앙감리교회의 장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