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레터 56/처가妻家모임]소쇄원-가사문학관-죽록원-추월산
살다보면 형제모임, 사촌모임, 처가모임 등 이런저런 모임이 있게 마련이다. 이런 모임들은 일종의 ‘계契’라고 할 수 있겠다. 그중에서 100% 참석을 해야 하는 것은 처가모임이 ‘영순위’임을 모두 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혹시 처가 인척(처형, 처제, 처남, 동서 등)들이 마음에 안든다고 빠졌다가는 ‘가족불화’가 십상일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여자파워, 아내파워가 무지무지하게 세졌다는 얘기이다. 우리 아이들만 봐도 그렇다. 무조건 고모姑母보다 이모姨母가 몇 배 더 친하고 가깝게 느껴질 것이다. 이런 현상이 나쁘거나 잘못됐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고속도로를 과속으로 질주하는 승용차를 보면 ‘장인이나 장모가 돌아가셨다 보다’는 우스갯말이 떠오른다. 친부모 상을 당했으면 저렇게 엑셀을 밟지 않는다는 게 세태世態라는 말도 생각난다.
1년에 두 번 봄, 가을에 만나는 처가妻家 6남매(3남3녀) 모임이 벌써 여러 해 되었다. 큰 처형이 해방둥이이고 막내인 아내가 환갑을 넘겼다. 이제 모두 피붙이를 더욱더 살갑게 느끼고 찾을 때가 된 것이다. 그중에 3남인 처남은 한때 나와 절친한 친구였다. 친구를 잘 만나 짝꿍을 만난 것이니 고맙게 생각해야 할 것이나, 실제론 그렇지 않다. 요즘엔 그저 영혼없는 얘기만 몇 마디 나눌 뿐이다. 그렇다고 아내 앞에서 처남이나 처형 흉을 보는 것은 최고의 금기禁忌사항. 남편을 아무리 사랑한다해도 '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친정의 피붙이를 폄훼하는 것은 사랑하는 가족끼리도 금기중 으뜸이다. 아내는 ‘처가모임’ 제목만 봐도 ‘또 주변 이야기를 쓰려 하느냐’고 화를 낼 것이 뻔하지만, 처가 누가 어쩌고저쩌고 시시콜콜 신변잡기를 쓰려는 것은 아니니 안심하시라.
이번 모임의 숙소는 담양의 ‘산토리니 펜션’이고, 행선지를 소쇄원과 가사문학관 그리고 관방제림과 죽록원 산책으로 잡았다. 펜션 이름이 재밌는 것은 지붕과 문을 그리스 산토리니섬의 어느 마을처럼 온통 파란 색으로 칠한 것이다. 형제가 모여 깊어가는 가을 속 어느 ‘파란 마을’에서 일박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나의 표현으로는 ‘삶이 윤택해지는 지름길’이다. 그렇다. 우리는 왜 사는가? 혹자는 '죽음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고 하지만, 나는 나날이 윤택潤澤해지려고 산다고 생각한다. 하루를 신선같이 생각하고(깨끗하고 맑은 마음) 살아간다면(한가롭고 넉넉하게) ‘하루의 신선’이 되는 것이다. 일일청한일일선一日淸閑一日仙이 그것이다. 날마다 그렇게 살아간다면 ‘날마다 신선日日淸閑一日仙’이 되는 게 아니겠는가. ‘날마다’를 ‘매일每日’이라고 했더니, 한 한문학자가 ‘日日일일’이라고 해야 맞다하여 부끄러운 적이 있었다.
아무튼, 처가모임에 빠질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나(더구나 나는 약방의 감초격이어서, 내가 없으면 분위기가 너무 드라이해지므로 빠져선 안된다고 한다. "최서방 쵝오" 흐흐), 전반적인 기분은 언제나 썩 좋지 않다. 당연히 나의 친가모임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우리 7남매(4남3녀) 전체 가족모임이 언제 있었던가? 생각하면 까마득하다. 어쩌다 그리됐는지는 말할 수도 없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러니 어찌하겠는가? 안타깝지만, 7남매 가족모임은 앞으로도 100% 없을 것이다. 처형, 처남가족들과 아내가 환하게 웃으며 노는 1박2일의 모임이 보기에 저렇게 좋은데, 우리는 세 분 형님네와 세 명의 여동생네, 모두 모이면 14명, 왜 모이지 못하고, 모일 생각도 하지 않는 걸까? 아지 모게라(그 이유를 너무나 잘 알면서도 '그것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라고 말하는 것이 슬프다)!
소쇄원瀟灑院을 가보신 분들이 많으리라. 조선시대 최고의 원림園林을 조성한 소쇄옹瀟灑翁 양산보梁山甫(1503~1557)는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주창하다 36세에 사약을 받은 정암靜庵 조광조의 여섯 살 아래 막역한 제자였다. 능주(현 화순)에서 사약을 마시고 숨지는 스승을 지켜보며 현실정치에 절망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스승의 묘(나중에 용인으로 이장)를 쓴 후 이곳에 은둔하여 후학들을 길렀다. 하서 김인후는 이곳을 자주 찾으며 유명한 ‘소쇄원 48영詠’의 한시를 남겼다. 우암 송시열은 ‘瀟灑處士梁公之廬’문패를 대자大字로 썼다. 무성한 대밭을 보면서 ‘왕대밭에 왕대 난다’는 속담을 떠올렸으나, 계곡에 물이 말라 보기가 민망했다. 올 가을가뭄 탓도 있지만, 기후위기 영향이어서 해마다 다르다니 씁쓸했다. 영조대 1755년 목판으로 새겨진 소쇄원도까지 있으니, 당시에도 유명짜한 모양이다. 소쇄원 조성 이후, 인근에 면앙정, 식영정, 송강정 등 누정樓亭들이 속속 생겨나 호남 사림문화의 교류처 역할을 했다. 국사책에서 본 면암 송순, 석천 임억령, 하서 김인후,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 등이 멋과 풍류를 즐겼다한다.
담양潭陽은 또한 가사문학歌辭文學의 산실이다. 소쇄원 인근에 꾸며진 한국가사문학관이 당당히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행정명을 남면에서 가사문학면으로 바꾼 까닭이다. 한글로 써있는데도 읽기가 힘든,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의 가사가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누정문화와 어울려 가사문학이 꽃을 피운 것이다. 송순이 80세때 8남매에게 전답 및 노비 등 재산을 분배한 친필기록인 ‘분재기分財記’나 정철이 선조임금한테 받았다는 은배銀杯와 옥배玉杯 그리고 그의 저술과 유묵 그리고 규방가사의 으뜸인 허난설헌의 규원가 등을 보는 것은 우리의 교양을 풍부하게 해주는 것이리라. 잘은 모르겠으나, 이런 가사문학과 관련한 문화유산은 전승-보전과 함께 현대적으로 계승, 발전되어야 할 것같다. 하지만, 이런 분야에 취미가 없으면 박물관이든 문학관은 꼼꼼히 보기가 너무 힘들다.
일행은 보고 있으면 눈이 다 씨-원해지는 죽록원竹綠院으로 향했다. 30여만평에 조성된 대나무숲은 언제 조성됐을까? 2005년 개원했다는데, 사계절 내내 힐링의 명소일 듯하다. 대나무 잎에서 떨어지는 이슬을 먹고 자란다는 죽로차도 마시며 여유있게 돌아다녀야 한다. 그래봐야 기껏 1시간 안팎이다. 운수대통길을 비롯해 사색의 길, 사랑이 변치 않는 길, 죽마고우 길, 추억의 샛길, 성인산 오름길 등 여덟 개의 길을 시나브로 싸목싸목 걸어다녀야 한다. 성인산 정상에는 우리나라 초미니 둘레길(50m) 표지판이 우리를 슬며시 웃게 한다. 이 대나무숲 속 ‘이이남미술관’도 꼭 들러야 한다. ‘미디어아트’를 아시리라. 그림과 디지털이 만남으로써 고전의 명화를 재해석할 수 있다. 귀 짤린 자화상의 고흐가 윙크를 하고 ‘별 헤는 밤’은 실제로 별이 반짝거린다. 서걱거리는 대숲의 바람소리가 귀를 청소해준다. 26년 전, 부모님 팔순-회혼기념으로 펴낸 첫 번째 가족문집 제목이 ‘대숲 바람소리’였다. 아버지는 일흔이 돼서도 일곱 살 때 듣던 집 뒤안의 대숲에서 서걱이는 바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고 해서 따온 것이다.
여행과 관광을 다니면서 ‘맛집’이 빠진다면 진짜로 ‘앙꼬 빠진 찐빵’일 터. 토요일 점심은 광주 인근의 ‘보자기 우렁쌈밥집’이었다. 곰보배추의 쌉쏘름한 맛을 아시는가. 만찬은 관광단지내 한우맛집. 윤씨라는 주인이 현 대통령이 파평윤씨 망신을 다 시킨다는 말에 박수를 보냈다. 숙소에서의 서너 시간 한담은 ‘그렇게 하지 말자’고 했건만 ‘그놈의 정치’로 흐르고 만다. ‘찐진보’ 일색이어서 얼마나 다행이던지. 청와대에서 근무도 했던 처남댁은 ‘열바보'(대통령 멸시용어. 나는 언제나 이보다 더한 '상열의쉐끼'라고 한다. 상열의쉐끼는 '호로자식'이라는 뜻의 큰 욕이다. ) 때문에 열熱받아 못살겠다고 한다. 가족은 이렇게 ‘정치성향’이 같아야 하건만, 불행한 가족들이 또 얼마나 많은가. 우리나라 어느 특정지역의 가정들도 그럴까? 그리고는 부모님과 자신들의 추억의 일화 일색. 끝도 갓도 없을 부모님의 사랑을 되새기는 시간이다.
다음날 새벽 산책에 9명 중 5명은 그 유명한 메타세콰이어길을 걸었다한다. 단풍이 장관이다. 좋은 일이다. 78세부터 62세까지 가족 모두 다 심신이 건강하니 또 얼마나 다행인가.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신체에서 나온다는 말은 언제나 진리. 일요일 오전 10시 추월산秋月山으로 향했다. ‘가을달’ 이름처럼 아름답다. 조만간 다시 와 정상에서 백양사 가는 코스를 밟아보리라 다짐했다. 일행은 용마루길 데크산책과 보리암 산행으로 갈렸다. 1200여 개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 보리암에 올랐다. 불전암에 1만원을 넣고 간절한 마음을 담아 3배를 했다. 96세 아버지가 건강하게 2,3년 더 사시다 주무시는 듯 편안하게 돌아가시기를(9988234-99세까지 88하게 사시다 2,3일 고생하시시고 돌아가다死4의 뜻), 아내의 건강 그리고 두 아들네의 가정에 만복이 깃들기를 비는 것말고 무엇을 빌겠는가. 순창 하면 한정식 맛집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중에서도 꼭 ‘새집’을 가시라. 한 사람 2만원, 준수하다. 이제 서울로, 전주로, 임실로 모두 서둘러 가야 한다. 언제나 기다려지는 모임이다. 고맙습니다. 내년 4월 서울에서 또 반갑게 만납시다.
드높은 하늘 아래 청량한 공기를 마시며 맘껏 힐링을 한 어느 가을날의 행복한 주말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