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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영의 영감의 원천Ⅰ
『영감의 원천Ⅰ』다른 분야에까지 영향을 미친 미술이야기 - ▣로스코·김환기▣팝아트▣M.C.에셔▣르네 마그리트▣피카소▣마티스▣살바도르 달리▣에드바르 뭉크▣존 에버렛 밀레이▣앙리 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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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Ⅰ https://blog.naver.com/ohyh45/222745750106
▣로스코-레드·김환기-블루, ▣팝아트-마릴린, ▣M.C. 에셔-올라가기와 내려가기, ▣마그리트-연인들II, ▣피카소-한국에서의 학살, ▣마티스-다발, ▣살바도르 달리 -켄타우로스 가족, ▣뭉크-비명, ▣존 에버렛 밀레이-오필리아,▣앙리 루소-꿈,
⊙『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Ⅱ https://blog.naver.com/ohyh45/222748434896
▣이형록-책가도, ▣르네 마그리트-빛의 제국, ▣구스타프 클림트-키스, ▣폴 세잔-생트 빅투아르 산, ▣빌헬름 함메르쇼이-젊은 여인의 뒷모습과 실내, ▣고흐-별이 빛나는 밤, ▣J.M.W.터너-전함 테메레르, ▣에드워드 호퍼-나이트호크, ▣▣
1.로스코의 『레드』와 김환기의 『블루』
- 로스코의 ‘울리는’ 미술, 디지털시대 창조성 밑거름
왜 어떤 그림은 특히 유명하고 그래서 다른 그림뿐 아니라 영화나 문학, 나아가 과학이나 비즈니스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영감의 원천이 되는 그림과 그 파장의 너울에 대하여.
“일을 하며 음악을 들으며 간혹 울 때가 있다…울리는 미술은 못할 것인가.”
롯데백화점 월드타워점의 새 전시 ‘UNIVERSE_WHANKI 1-I-21 LOTTE MEDIA PROJECT’
(1월 2일~2월 15일)에서 볼 수 있는 ‘우주’ 미디어 큐브. 문소영 기자
김환기(1913~1974)는 1968년 일기에 이렇게 썼다. 몇 년 후 그는 “총총히 빛나는 별”과 “뻐꾸기 소리”와
“죽어버린 친구들 또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친구들”을 생각하며 찍었다는 수많은 푸른 점들의 우주로 “울리는 미술”을 이루어냈다.
눈물이 맺히게 ‘울리는(make cry)’ 것뿐만 아니라, 마음과 공명해 ‘울리는(resonate)’ 것이다.
그런 정서적·음악적 특성 때문에 후대 미술가와 문인뿐만 아니라 그의 팬이라 밝힌 빅뱅의 탑과 BTS의 RM 같은 K팝 뮤지션들에게까지 영감을 주는 게 아닐까.
그 김환기의 ‘우주’(1971)가 대형 육면체를 밝히는 역동적인 미디어 아트로 재창조되어 2021년 신년 벽두에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 마당에 나타났다. 지난해 미술 프로젝트 ‘커넥트, BTS’에 참여했던 강이연 작가가 ‘K+’라는 이름으로 만든 프로젝트다.
큐브 속에서 초신성의 폭발로 성운이 된 빛의 조각들은 김환기 그림의 푸른 점이 되고, 웅장한 파도나 소용돌이 같은 산맥 역시 김환기의 우주 속 동심원으로 이어진다.
김환기의 ‘14-XII-71 #217’(1971), 코튼에 유채, 291x210㎝. [사진 환기재단, 환기미술관]
코로나19 시대에 이 우주적 작품을 물끄러미 보고 있으면 묘한 슬픔과 기쁨이 동시에 느껴진다.
무한한 우주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고 약하고 쉽게 죽는 존재인지 새삼 실감하는 데서 오는 근원적 슬픔이자,
예술에 몰입해 인간의 시공간적 유한성을 잠시 초월하는 데서 오는 원초적 기쁨이다.
그것은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말한 숭고함의 느낌이기도 하다.
“어릴 때 부모님과 미술관에 자주 갔는데 유난히 김환기 그림, 특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좋았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가슴 벅찬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어요.” 강 작가의 말이다.
“동시대 미술이 (지적 사고에 치중하는) 개념 미술에 치우치면서 미술만이 줄 수 있는 감동의 기능을 좀 잃지 않았나 싶은데, 전 그것을 미디어 아트에서 부활시키고 싶었어요. 김환기와 마크 로스코가 회화로 성취한 숭고의 느낌을 저는 미디어 아트의 몰입적 특성을 살려 창조하고 싶은 것이죠.”
마크 로스코의 ‘시그램 벽화’를 바라보는 관람객. 문소영 기자
강이연이 김환기와 함께 언급한 마크 로스코(1903~1970)는 김환기가 “내 가장 존경하는 예술가”라고 일기에 적었던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화가다. 결코 칭찬을 남발하는 법이 없었던 김환기가 로스코를 극찬한 이유는 그가 “울리는 미술”을 이루어냈기 때문이다.
로스코는 이렇게 말했다.
“내 관심은 오로지 비극, 황홀경, 파멸 같은 인간의 기본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다. 사람들이 내 그림을 대할 때 무너져 울음을 터뜨린다는 사실은 내가 인간의 기본 감정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로스코, 비극성이 예술의 원천
스티브 잡스.
로스코 그림 속 경계가 흐릿한 거대한 색면은 김환기의 점처럼 심원한 색채의 진동을 일으키며 아득하게 트인 시공간의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그 무한성 앞에서 인간은 유한성의 슬픔과 초월의 기쁨을 느낀다.
이것이 로스코에게서 창조의 영감을 받는 사람이 많은 이유다. 애플을 창업한 스티브 잡스(1955~2011)도 그중 하나다. 잡스의 누이에 따르면
“말년에 그는 자신이 전에는 잘 몰랐던 마크 로스코의 그림에 대한 책을 탐독했는데, 무엇이 미래 애플 캠퍼스(애플 본사)의 벽에 걸려 사람들에게 영감을 줄지를 생각하면서였다”라고 했다.
사실 잡스가 로스코 작품의 어떤 면에 끌렸는지는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어떤 이들은 로스코가 1943년 바넷 뉴먼과 발표한 선언문에서 그 실마리를 찾기도 한다.
“우리는 복잡한 생각의 단순한 표현을 선호한다.”
이것은 아이폰을 비롯한 애플 제품의 핵심 컨셉트이기도 하다.
그러나 잡스가 로스코에 빠져든 것은 이미 그가 애플 철학을 정립한 말년이었다.
오히려 잡스가 로스코에게 영감을 받은 것은 선언문의 마지막 부분이자 로스코 작품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비극성’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주제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며, 비극적이고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주제만이 정당하다고 단언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비극성은 인간의 연약함과 시공간적 유한성에서 오는 근원적인 것이다.
로스코가 생각하는 예술은 그 비극에 무너지기보다 끝없이 씨름을 하는 것이었다.
잡스는 죽음을 예감하고 로스코의 비극성을 되새기며 마지막 창조 작업에 박차를 가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로스코에게 영감을 받아 새로운 창조를 한 사람 중에는 영화 ‘글래디에이터’(2000), ‘007 스카이폴’(2012) 등의 시나리오를 썼던 저명한 작가 존 로건(60)도 있다. 그는 로스코의 ‘시그램 벽화’를 둘러싼 실제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한 연극 ‘레드’(2009)로 토니상을 수상했다.
뉴욕 시그램 빌딩은 50년대 말 완공하기 전부터 화제가 된 랜드마크였는데, 이 빌딩에 들어설 고급 레스토랑 포시즌의 벽화를 로스코가 맡게 되었다. 대부분의 아티스트가 탐낼 법한 프로젝트였지만, 로스코는 1~2년 작업 끝에 돌연 계약금을 반환하고 계약을 취소했다.
그리고 준비한 그림들을 후에 영국의 테이트 미술관에 기증했다. 연극 ‘레드’는 로스코가 계약을 취소할 때까지의 심적 변화를 가상 인물인 조수 켄과의 대화와 설전을 통해 깔끔하고 힘있게 풀어나간다.
존 로건이 쓴 연극 ‘레드’의 한 장면. [중앙포토]
극 중 로스코는 ‘좋아요’ ‘괜찮아요’로 점철된 세상을 비웃으며 말한다.
“나는 안 괜찮아, 우린 안 괜찮아, 우리는 괜찮은 것 말고 다야…이 그림들 봐. 봐! 어두운 직사각형 보이지, 문 같지, 구멍 같지. 그래, 하지만 이건 떡 벌린 입이기도 해. 침묵의 울부짖음을 쏟아내는 거야, 치명적이고 악취 나고 원시적이고 사실인 것에 대해!”
혼돈의 러시아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그리고 미국으로 이민 와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전해 들으면서, 로스코는 인간의 어둡고 약한 면과 시공간적 한계를 끝없이 실감했을 것이다.
그 비극성이 그의 예술의 원천이었다.
그런데 비극성의 그림이 음식점 벽화로 웬 말인가. 극 중 켄이 그걸 문제 삼자 로스코는
“난 (내 그림으로) 그 레스토랑에서 밥 먹는 개자식들 식욕을 싹 떨어뜨려 주고 싶었다”고 항변한다.
켄이 “그 얘기, 계약할 때 했어요?”라고 대꾸할 때 웃는 관객이 많을 것이다.
로스코는 실제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고, 그런 항변은 아무래도 위선적으로 들리니까.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로스코는, 나아가 모든 예술가는, 컬렉터와 관람객을 원한다.
그래서 자기 예술이 지속가능하기를,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들에게 종속되지는 않기를 바란다.
그러다 보니 예술가는 딜레마에 빠지고, 켄은 이 점을 예리하게 파고 든다. 켄이 로스코에게 한바탕 퍼붓고 나서
“이제 저 해고되는 거죠?”라고 묻자 로스코는 “해고? 넌 이제야 처음 존재했어”라고 답한다.
그렇게 로스코는 딜레마에 무너지지 않고 컨트롤을 해나간다. 이 탁월한 긴장감이 탁월한 연극을 만든다.
영감이 새 영감 일으켜 감동적
미술사학자 로버트 로젠블럼은 로스코가 19세기 낭만주의 풍경화가들처럼 우리를
“무형의 무한으로 열린 문턱 앞에 데려다 놓고…거대한 만유의 신과 무한히 작은 피조물의 극적인 대조”로
인도한다고 했다.
그 대조에서 오는 슬픔과 두려움이 섞인 쾌감이 숭고의 감정이다.
거대한 우주를 연상시키는 김환기의 70년대 점화 역시 그 숭고의 미학을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김환기는 로스코처럼 ‘비극성’이 강하지 않다. 왜냐하면 김환기는 그의 우주를 이루는 점들이 천체일 뿐만 아니라 ‘친구들’ ‘사람들’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로스코 그림의 관람객은 로스코가 명한 것처럼 화폭에서 18인치(45.7cm) 떨어진 채 그의 그림 속 무한의 시공간으로 열린 세계를 바라보아야 한다.
반면 김환기 그림의 관람객은 그 무수한 점들의 하나가 되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의 인연을 믿으며 무한 속에서 순환할 수 있다. 그래서 김환기는 말했다.
“서러운 생각으로 그리지만 결과는 아름다운 명랑한 그림이 되기를 바란다”고.
코로나19의 시대, 로스코와 김환기의 그림으로 인간 유한성의 비극과 초월의 기쁨을 체험하며, 또 그들에게 영감 받은 후세대 창조자들의 새로운 우주를 보면서, 우리는 영감이 새로운 영감을 일으키는 모습에 감동한다.
[출처] :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 1.로스코의 『레드』와 김환기의 『블루』/중앙Sunday, 2021. 1. 2.
2.팝아트 『마릴린』 - “미래엔 누구나 유명인” 앤디 워홀의 예언 현실이 되다
2020년 런던 테이트모던에서 열린 ‘앤디 워홀’전에서 ‘마릴린 2면화’(1962)를 보는 관람객.
지난해 이맘때 전 세계 인스타그램은 ‘돌리 파튼 챌린지’로 떠들썩했다.
노익장을 과시하는 스타 가수 돌리 파튼이 올린 한 장의 포스트가 시작이었는데, 4개 소셜 미디어에 각각 다르게 올릴 자신의 사진 네 가지를 모아 놓은 포스트였다.
링크트인(직업 네트워크)에는 진지한 직장인 모습, 페이스북에는 친근한 모습, 인스타그램에는 ‘갬성’샷,
그리고 틴더(데이트 상대 찾기 네트워크)에는 섹시한 모습을 올리는 식이었다.
‘맞아, 다들 저런 식으로 사진을 올리지’하는 공감 속에 낄낄 웃으며 수십만 명이 #돌리파튼챌린지 해시태그를 달고 저마다의 네 가지 모습을 올렸다.
사회학자들은 ‘돌리 파튼 챌린지’야말로 자본주의와 소셜 미디어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현대인의 ‘자기상품화(self-commodification)’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한다.
‘당신의 브랜드 가치를 올려라’ 같은 말이 일상화된 오늘날, 우리는 스스로 상품인 동시에 상품을 파는 기업가로서, 각 소셜 미디어 성격에 맞춰 ‘나-상품’의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고 홍보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달리는 팔로워와 ‘좋아요’의 숫자에 집착하게 되는 것은 ‘나-상품’의 인지도와 값어치를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 숫자는 유튜브에서 실제 돈벌이와 직결된다.
돌리 파튼 챌린지는 현대인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스스로 ‘셀럽’(celebrity의 줄임말·유명인)이 되는 현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팝아트의 제왕 앤디 워홀의 초상화 시리즈에도 등장한 적 있는 파튼은 전통 매스미디어로 뜬 대형 셀럽이지만,
그의 포스트가 큰 공감 속에 일반인 챌린지로 이어진 이유는 일반인도 소셜 미디어를 활용해 셀럽처럼 미디어 이미지 관리를 하는 최근 현상을 간파해 친근하게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소셜 미디어 시대를 예견하고 선도하다
인물 사진을 워홀의 팝아트 작품처럼 바꿔주는스마트폰 앱 ‘마릴린’(사진 왼쪽),
‘돌리 파튼 챌린지’를 일으킨 돌리 파튼의 인스타그램. [중앙포토]
만인의 ‘셀럽화’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며 2005년쯤부터 뉴욕타임스 등 여러 언론이 써온 경구가 있다.
“이제는 누구나 15명에게는 유명인이다.”
이 말은 앤디 워홀(1928~1987)이 1968년 전시 브로셔에 쓴 다음과 같은 말을 변형한 것이다.
“미래에는 누구나 15분 동안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질 것이다.” 일반인이 독특한 버전의 ‘돌리 파튼 챌린지’나 그밖에 흥미로운 포스트를 올려 잠깐 동안 세계인의 ‘좋아요’ 세례를 받곤 하는 것을 보니 워홀의 반세기 전 예언은 이제 현실이 됐다.
워홀의 ‘말’뿐만이 아니다. 인스타그램에서 사람들이 셀럽 같은 분위기로 찍은 사진들이 격자 구조로 모여있는 걸 보면, 워홀 특유의 셀럽 초상화 연작 즉 알록달록 여러 색깔로 반복되는 스타의 정사각형 초상화들이 한데 모여 격자 구조를 이룬 모습과 놀랍도록 닮았다.
자신의 사진을 워홀의 셀럽 초상화처럼 만들어 인스타그램에 올릴 수 있게 해주는 효과 앱도 이미 여러 개 있다.
이들 이미지에는 공통점이 있다. 워홀 시대엔 신문지와 TV화면에, 지금은 모두의 손에 들린 스마트폰에,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 쉴 새 없이 보여지고 즉각적으로 소비된다는 것이다.
워홀은 마릴린 먼로의 얼굴, 엘비스 프레슬리의 포즈, 캠벨 수프 깡통, 코카콜라 병 같은 것들이 모두 끊임없이 반복해서 눈에 들어오는 이미지이자 잘 팔리는 상품이라는 공통점에 주목했다.
그래서 그는 실크스크린을 이용해 그들을 반복적인 이미지로 표현했다. 조수들을 동원해 쉴 새 없이 실크스크린을 찍어냈고, 그런 자신의 스튜디오를 아예 ‘공장(The Factory)’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팩토리’ 에 다양한 연예계 스타와 스타 지망생을 불러 모으고, 그들을 작품에 등장시키며,
자신 또한 은빛 가발과 튀는 언행으로 브랜딩해 미디어에 부지런히 노출시켜 가며 스스로를 셀럽화했다.
앤디 워홀
워홀은 미디어와 자본주의의 시대에는 많이 보여지는 것 자체가 힘이 되고 돈이 된다는 것을, 가치가 있어서 유명해지는 것보다 유명해지면 가치가 있어지는 세상이 됐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현대의 소셜 미디어 셀럽들은 워홀의 이같은 전략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2018년 워홀 회고전 때 CNN 등 언론은
"소셜 미디어 시대를 예견한 미술가”
"리얼리티쇼 스타(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이 시대에 봐야 할 전시”라고 했다.
앤디 워홀이 미디어와 유명세와 돈의 역학 관계를 꿰뚫어 보게 된 것은 1962년 최초의 ‘캠벨 수프 캔’ 그림을 발표해 팝아트의 총아로 떠오르기 이전부터였다.
미국 피츠버그의 가난한 슬로바키아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본명이 ‘앤드루 워홀라’였는데, 카네기 공대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49년 뉴욕으로 진출하면서 훨씬 미국적이고 발랄한 ‘앤디 워홀’로 개명했다.
셀프-브랜딩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알았던 것이다.
뉴욕에서 그는 보그와 하퍼스 바자 등 유명 패션잡지의 일러스트레이터로 활약했고, 백화점 디스플레이 및 음반 커버 작업을 맡기도 했다. 화가로 전환할 무렵에는 이미 성공한 디자이너였다.
그의 산뜻한 팝아트에는 디자이너 경력에서 비롯된 뛰어난 감각이 녹아 있다. 하지만 그의 디자이너 경력이 더욱 중요한 이유는 미디어와 셀럽과 소비문화가 만나는 최전선에서 일하면서 그 속성을 통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워홀이 본격적으로 미술에 뛰어든 60년대는 추상표현주의가 미술계를 지배하던 때였다.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은 물론 숭고의 미학을 추구하며 진지하게 창작을 하고 있었지만, 일반 대중은 그냥 물감을 뿌려놓은 것 같은 캔버스가 작품 못지않게 난해한 평론가의 설명으로 칭송받으며 비싼 값에 팔리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심지어 미술계 내부에서도 추상화가 ‘교양을 과시하는 부자들의 장식품’이 되는 현상에 대한 반발이 커졌다.
그래서 어떤 작가들은 결코 장식품이 될 수 없는 개념 미술과 행위 예술에 몰두했고,
또 어떤 작가들은 대중문화를 작품에 끌어들여 ‘고급 취향’을 비웃는 팝아트를 추구했다. 워홀은 후자였다.
“미국이 대단한 건 가장 부유한 소비자가 가장 가난한 소비자와 똑같은 것을 사는 전통을 열었다는 것이다. 우린 모두 TV를 볼 수 있고, 거기엔 코카콜라가 나오고, 대통령도 코크를 마시고, 리즈 테일러도 코크를 마시고, 당신도 코크를 마실 수 있다…돈을 더 많이 준다고 더 좋은 코크를 마실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워홀이 이렇게 대중 소비와 대중문화의 민주적 속성을 찬양하는 말을 했을 때 ‘알아먹지 못할’ 고급 전위예술에 지친 사람들은 카타르시스를 느꼈으리라.
디자이너로서 소비 민주화의 매력을 읽다
워홀의 시대에 소비는 민주화되었지만, 대중문화의 창작과 생산은 대기업과 대형 셀럽들에 의해 독과점 되었다.
반면 현대에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수많은 컨텐츠 크리에이터들과 소형 셀럽들이 “15분 명성”을 얻으면서 창작과 생산도 민주화되는 것처럼 보인다(물론 미디어 플랫폼의 독과점을 지적하며 이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견해도 많다).
문제는 민주화라는 빛이 있는 한편, 많이 보여지고 많이 팔려야 살아남는 대중문화의 속성상 사람들의 관심 구걸과 얄팍한 상품화를 가속화하는 어둠이 있다는 것이다. 워홀은 그 점 또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워홀은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뭐라고 글을 쓰든 신경 쓰지 마라. 그저 글이 몇 인치인지(얼마나 긴지) 따져라”
라는 말을 남겼다.
“무플보다 악플이 낫다”의 선구적 발언이다.
연예인과 정치인은 물론 사생활을 노출해 인기를 얻는 무직의 인스타그램/유튜브 스타까지, 셀럽들의 중요한 자본은 사람들의 관심이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소셜 미디어 조회 수로 숫자화 되는 관심을 모으기 위해 애쓴다.
때로는 ‘어그로’라고 불리는, 물의를 빚을 언행까지 하면서. 즉 ‘보여짐’의 질보다 양이 중시되는 것이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1925~2017)이 개탄한 것처럼 “나는 보여진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의 시대인 것이다. 질에 상관없이 그 보여짐의 양은 유튜브 광고 수입 같은 돈으로 연결된다.
2020년 런던 테이트모던 '앤디 워홀' 전에서 '해골'(1976)과 '마오'(1972)을 보는 관람객들.
이런 문화에서 모든 것의 가치 기준은 얼마나 관심을 끌 수 있는지, 즉 얼마나 잘 팔리는 상품이 될 수 있는지로 획일화된다. 워홀의 초상화에는 연예인뿐 아니라 재클린 케네디, 엘리자베스 2세, 그리고 공산주의 지도자 레닌과 마오쩌둥까지 들어있다.
그들 모두 대중에게 끝없이 노출되고 관심을 모으는 유명인이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 유명세가 결국 누군가의 돈벌이로 이어질 테니 말이다. 결국 워홀의 그림에서 그들은 모두 얄팍한 상품이 된다. 그는 이것을 긍정한 것인가, 아니면 냉소한 것인가?
2020년 런던 테이트모던 '앤디 워홀' 전
에서 '100개의 캠벨 수프 캔'(1962)과 '초록색 코카콜라 병'(1962)을 보는 관람객.
심지어 죽음조차 그렇다. 워홀은 60년대 초 한동안 ‘죽음과 재앙’ 연작에 매달렸는데, 자동차 사고 현장이나 고층건물에서 투신자살하는 찰나의 소녀, 사형수가 앉을 전기의자 등을 ‘마릴린’이나 ‘코카콜라 병들’처럼 반복적으로 찍었다.
이것은 비극조차 미디어로 끝없이 재생산되며 상품화되는 현실을 비판하는 것인가, 아니면 워홀 자신이 팝아트라는 이름으로 이를 구경거리 상품으로 만드는 데 동참한 것인가?
워홀은 언제나 이에 대해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였고, 때문에 지금까지도 워홀에 대한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현재 시대를 정확히 예언하며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출처] :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 2.팝아트 『마릴린』- “미래엔 누구나 유명인” 앤디 워홀의 예언 현실이 되다/중앙Sunday, 2021. 1. 23
3.M.C. 에셔의 『올라가기와 내려가기』(1960)
-‘수포자’ 에셔의 그림, 수학자 일깨워 노벨상 원동력 됐다
불가능한 무한 계단
M.C. 에셔의 ‘올라가기와 내려가기’(1960). [사진 위키피디아]
노벨 수학상은 존재하지 않지만 노벨상을 타는 수학자들은 존재한다. 게임이론을 발전시킨 공로로 199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존 내시(1928~2015), 블랙홀이 현실에 존재할 수 있음을 증명한 공로로 지난해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영국의 로저 펜로즈(89)가 대표적이다.
블랙홀은 별이 스스로의 중력을 이기지 못해 극단적으로 수축돼 빛조차 탈출하지 못하게 된 상태인데, 그 안에서는 시공간도 휘어진다고 한다. 100여 년 전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 파격적 중력 이론인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한 후에, 이 이론을 바탕으로 블랙홀의 수학적 솔루션이 나왔다.
그 후 블랙홀이 수학적으로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있느냐를 놓고 학자들 간에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재미있는 것은 아인슈타인조차 블랙홀은 아주 특수한 조건에서만 가능해서 현실성이 없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불가능한 3차원 세계, 2차원 지면에 표현
영화 ‘인셉션’(2010)의 한 장면.
그러나 64년 펜로즈는 일반상대성이론이 적용되는 우주에서 특수한 조건이 아니라도 블랙홀이 필연적으로 생긴다는 것을 밝혀냈다. 다른 학자들처럼 복잡한 수식 계산을 하는 대신, ‘형상과 위치의 학문’이라는 위상수학(topology)을 이용해 시공간의 기하학적 구조를 그려봄으로써 말이다.
그는 평소에 불가능한 도형을 그리는 취미가 있었는데, 덕분에 블랙홀 연구에서 그런 참신한 접근법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취미의 원동력은 흔히 ‘M. C. 에셔’라 불리는 네덜란드의 화가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1898~1972
)다.
펜로즈가 에셔의 작품을 처음 본 건 54년 케임브리지 대학원생으로서 수학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암스테르담에 갔을 때였다. 그곳 미술관에서 열린 에셔의 개인전을 보고 펜로즈는 “그 독창성, 예술적 기교, 수학적 이해, 정확성에 충격을 받았다”고 회고한다. 특히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에셔의 석판화 ‘상대성’(1953)이었다.
이 작품 속에는 같은 계단을 걷고 있는 두 사람이 나오는데, 놀랍게도 서로에게 90도 직각을 이루면서 계단의 서로 다른 면으로 걷고 있다. 함께 있지만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처럼 중력이 다르게 작용하는 것이다.
이 그림에는 3개의 중력 세계가 겹쳐져 교묘하게 연결돼 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세계이지만, 현실의 비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람들이 서로 다른 사고방식의 바닥을 딛고 서 있고, 어느 바닥이 진짜 바닥인지 쉽게 알 수 없는 현실 말이다.
에셔의 ‘구체에 비친 자화상’(1935). [사진 위키피디아]
이 그림에 감동한 펜로즈는
“나도 뭔가 불가능한 것을 그려보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불가능한 방식으로 맞물려 있지만 부분적으로 보면 정상인 것을 그려보려고 애썼어요.
하지만 잘 되지 않았죠. 결국 단순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불가능한 삼각 형태의 구조물을 그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3차원 공간에서는 불가능하지만 2차원 평면에서는 가능해 보이는 ‘펜로즈 삼각형(Penrose Triangle)’이다. 펜로즈는 이것을 저명한 정신과 의사인 아버지에게 보여주었고 아들 못지않게 재미를 느낀 아버지는 이 삼각형을 바탕으로 계단 등을 그려냈다.
그리고는 부자가 함께 이에 관한 논문을 써서 학술지에 발표했다. 그들은 논문에서 에셔를 언급했고, 논문 카피를 에셔에게 보냈다. 그러자 에셔는 그의 신작을 보내 답례했고, 펜로즈 부자와 전화로 교류를 시작했다.
펜로즈 삼각형에 영감을 받은 에셔는 또 다른 대표작 ‘올라가기와 내려가기’(1960)를 창작했다.
이 석판화에서 한 줄의 수도사들은 계단을 올라가고 다른 한 줄은 내려간다…. 아니, 그런 것 같지만 사실은 아니다! 그들은 일정한 방향으로 가는 것 같지만 끝없이 원점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물론 현실의 3차원 공간에서는 불가능한 모습이다. 3차원의 세계를 2차원 지면에 표현하면서 사물의 비례를 정교하게 비틀어 착시를 일으키는 에셔의 솜씨 덕분에 이 불가능한 세계가 얼핏 현실적으로 보이게 되었다.
이처럼 펜로즈와 에셔는 서로에게 영감을 주고받았다. 마치 에셔의 ‘그리는 손’(1948)처럼 서로가 서로를 창조하는 상황이라고 할까.
과학자·철학자·영화 감독 등에게 영감 줘
로저 펜로즈가 고안한 ‘펜로즈 삼각형’. [사진 위키미디아 카몬스]
종이에서 튀어나와 서로를 그리고 있는 두 개의 손을 나타낸 ‘그리는 손’은 민음사의 호르헤 보르헤스 단편집
『픽션들』의 표지에도 등장한다. 철학적 소설가 보르헤스의 작품세계, 특히 단편 ‘원형의 폐허들’에 잘 어울린다.
이 단편 소설에서 불의 사제는 정교한 꿈을 꾸어 제자를 창조한다. 마치 디지털 가상세계 속에 인공지능 캐릭터를 창조하듯. 사제는 사랑하는 제자가 스스로 진짜 인간이 아닌 환영임을 깨닫고 절망할까 봐 걱정한다.
하지만 막판에는 자기 자신도 누군가의 꿈에서 창조된 존재임을 알게 된다. 이러한 보르헤스 단편과 펜로즈 삼각형, 에셔의 ‘올라가기와 내려가기’로부터 영감을 받은 영화가 크리스토퍼 놀란의 유명한 SF ‘인셉션’(2010)이다.
이처럼 에셔에게 열광한 이들은 동료 예술가나 미술 평론가보다 수학자, 과학자, 영화감독들이었다.
그중에 인지 과학자 더글러스 호프스태터가 있다. 그는 명저 『괴델, 에셔, 바흐』(1979)에서 에셔의 판화를 통해 ‘이상한 고리(strange loop)’라는 개념을 설명했다.
‘이상한 고리’는 마치 에셔의 ‘올라가기와 내려가기’처럼 어느 한 방향으로 계속 진행하는 것 같지만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 부분 부분 볼 때는 이상하지 않지만 전체로 볼 때는 이상한 모순인 것을 가리킨다.
유명한 ‘거짓말쟁이 역설’대로 크레타인이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라고 말할 때, 그 명제가 참인지
거짓인지 결론 내려면 끝없이 순환하며 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도 ‘이상한 고리’다.
호프스태터는 인간의 뇌에서 자아 혹은 ‘나’라는 정체성이 형성되는 것에 인식의 ‘이상한 고리’가 작용한다고 보았고, 같은 원리로 인공지능이 탄생할 수 있다고 보았다.
에셔야말로 ‘이상한 고리’ 개념을 “시각적으로 가장 아름답고 강력하게 실현한 사람”이라고 호프스태터가 책에 쓴 게 과연 틀린 말이 아니다.
2015년 BBC 다큐멘터리에서 에셔의 ‘상대성’ (1953)을 설명하는 로저 펜로즈. [사진 유튜브 캡처]
에셔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열린 감각으로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퍼즐을 바라보고 내가 본 것들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수학이라는 분야를 접하게 됐다. 과학에 대한 엄밀한 지식은 없지만, 종종 수학자들이 동료 미술가들보다 가깝게 느껴진다.”
에셔는 본래 건축을 공부했고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건축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또 다른 중요한 연작 ‘테셀레이션(tessellation)’은 알함브라에서 영향을 받았다.
테셀레이션이란 한 가지나 몇 가지의 도형을 보도블록처럼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빈틈없이 맞물려 공간을 가득 채우는 것을 말한다.
에셔는 중세 이슬람 궁전 알함브라의테셀레이션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로저 펜로즈와 교류하며 새로운 테셀레이션을 함께 고안하기도 했다.
놀랍게도 에셔는 학교 다닐 때 거의 ‘수포자(수학 포기자)’였다고 한다. 펜로즈는 이렇게 말했다.
“에셔가 말하길 자신은 학교 다닐 때 수학 실력이 좋지 않은 학생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기하학적 이해는 분명히 매우 깊다. 그가 학창 시절에 자신의 재능을 깨닫지 못한 것은,
아마도 많은 학교가 생각 없는 방식으로 수학을 가르치기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수포자’를 양산하고 있는 한국에서도 새겨들어야할 말 아닐까.
[출처] :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 3.‘수포자’ 에셔의 그림, 수학자 일깨워 노벨상 원동력 됐다/중앙Sunday, 2021. 2. 20.
4.르네 마그리트의 『연인들II』·『빛의 제국』
-흰 천 뒤집어쓰고 키스, 코로나시대 사랑법 예견한 듯
마그리트 ‘연인들’‘빛의 제국’
르네 마그리트의 ‘연인들II’(1928). 뉴욕 현대미술관 소장. [사진 MoMA 웹사이트]
방독면처럼 생긴 마스크를 낀 채 키스하는 프랑스 커플. 영국 BBC 방송이 ‘2020년의 가장 강렬한 이미지’ 중 하나로 뽑은 사진이다. BBC는 “초현실주의 그림을 연상시킨다”면서 르네 마그리트(1898~1967)의 ‘연인들 II’(1928)를 언급했다.
마스크 커플이 키스하는 대형 그래피티가 미국 해변에 나타났을 때도 사람들은 이 100년 전 그림을 떠올렸다.
하얀 천을 얼굴에 온통 뒤집어쓴 채 키스하는 마그리트의 연인들은 ‘코로나19 시대의 사랑법’이라는 농담과 함께 지난해 해외 언론과 소셜 미디어에 유난히 많이 소환됐다.
사랑과 죽음의 공존? 또는 속고 속이기?
그전까지 마그리트의 ‘연인들 II’는 ‘언캐니(uncanny)’한 그림의 대명사였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어떤 것이 친숙하면서 동시에 낯설 때의 그 불편하고 섬뜩한 느낌을 ‘언캐니’라고 했다.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남녀의 옷차림, 흰 수건, 입맞춤이라는 행위는 따로따로 떼어놓고 보면 사실 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기이하게 합쳐지니 낯설고 두렵게 느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무엇보다 하얀 천으로 덮인 얼굴을 불편해한다. 시신과 죽음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평론가들은 마그리트 어머니의 죽음이 이 모티프를 탄생시켰을 것으로 추측해왔다.
그는 벨기에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어머니는 오랜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그가 사춘기 소년일 때 강물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 시신이 건져 올려졌을 때 입고 있던 하얀 잠옷이 얼굴을 감싸고 있었고 그것을 소년 마그리트가 목격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그리트 자신은 ‘연인들’ 연작이 어머니의 죽음과 아무 관련이 없다고 했고, 최근 연구에 따르면 그가 소년일 때 어머니의 시신 회수 현장을 목격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라 한다. 그럼 이 그림은 무슨 뜻일까?
지난해 3월 방독면 같은 마스크를 끼고 키스하는 프랑스 커플의 사진. [AFP=연합뉴스]
마그리트는 이렇게 썼다.
“내 그림은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다. 불가사의(mystery)를 불러일으킬 뿐이다…‘무엇을 의미하는가’
라고 사람들이 묻곤 하는데,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불가사의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것,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말장난이 아니다. 마그리트의 ‘연인들 II’는 어떤 메시지를 주는 것이 아니라 때로 우리 삶에서 체험하지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언캐니한 느낌, 친숙하면서도 낯설어 섬뜩한 그 느낌 자체를 형상화한 것이니까.
또는 프로이트가 말한 에로스(Eros)와 타나토스(Thanatos), 즉 성(性)과 생(生)의 충동과 죽음의 충동이 공존하는 것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겠다.
흰 천을 뒤집어 써서 시신과 죽음을 연상시키는 커플이 생의 욕망을 가장 잘 보여주는 행위인 입맞춤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코로나19 시대 마스크 키스 커플들은 저 ‘연인들’의 후계자다.
하지만 전혀 다르게 볼 수도 있다. 이 그림을 소장한 뉴욕 현대미술관(MoMA)측은 이렇게 말한다.
“좌절된 욕망은 마그리트 작품의 공통된 주제다. 여기에서 (얼굴을 덮은) 천은 장벽이 되어 두 연인의 내밀한 포옹을 가로막고 열정의 행위를 소외감과 낭패감으로 바꾸어버린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반려자라 하더라도 상대방의 진정한 본질을 완전히 들춰볼 수 없다는 것을 표현하는 그림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것을 마그리트 자신의 삶에 적용해 보면 재미있다. ‘연인들 II’를 그렸을 때 마그리트는 이미 결혼한 상태였는데, 아내는 어릴 때부터 친했던 조르제트 베르제였다. 조르제트는 마그리트의 뮤즈로서 여러 그림에 등장했고 둘은 평생을 함께했다. 이렇게만 쓰면 아주 훈훈하고 이상적인 부부로 보일 것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1954). 브뤼셀 벨기에 왕립미술관 소장. [사진 MoMA 웹사이트]
하지만 두 사람은 이 그림이 그려진 지 10년쯤 후에 바람과 맞바람으로 이어지는 최대 위기를 맞았다.
그때 마그리트는 동료 초현실주의 화가 여성과 바람이 난 상태였다. 아내 조르제트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매우 찌질하게도) 그는 친구인 초현실주의 시인 남성에게 조르제트와 적당히 친하게 지내 주의를 돌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시인 친구는 그 역할을 너무 잘 수행한 나머지 조르제트와 진짜로 바람이 났다.
아내를 놓치기는 싫었던 마그리트는 ‘어, 이게 아닌데’하며 당황하고 격분했다.
우여곡절 끝에 아내 조르제트와는 화해했는데, 시인 친구와는 영영 절교했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를 염두에 두고 마그리트의 1960년 그림 ‘심금’을 보면 많은 생각이 든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탐스러운 하얀 뭉게구름 한 덩이가 거대한 샴페인 글라스에 앉아 있는 상쾌하고 사랑스러운 작품인데, 아내 조르제트에게 주는 선물로 그린 것이다.
마그리트 부부는 그 위기를 겪으며 얼굴을 천으로 감싼 ‘연인들’처럼 서로를 완전히 알 수 없다는 것을 실감했겠지만, 삐걱거릴망정 40년을 함께 걸어와서는 이제 샴페인 잔에 하늘과 구름을 담아 축배를 드는 것이다.
아. 이것이 인생인가?
광고 아티스트 출신 화가의 신비한 그림
영화 ‘엑소시스트’ 포스터. [사진 위키피디어]
‘심금’ 역시 ‘연인들’과 마찬가지로, 풍경과 구름과 샴페인 글라스를 따로 따로 떼어 놓고 보면 평범한데 합쳐놓고 보면 기이하다. 이것이 바로 20세기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즐겨 사용한 ‘데페이즈망(dépaysement)’ 기법이다.
어떤 대상을 상식적으로 있어야 할 곳이 아닌 이질적인 맥락과 환경으로 옮겨 모순되는 것과 결합시키거나 크기를 왜곡해 충격과 신비감을 주는 기법을 말한다.
살바도르 달리 같은 다른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개개의 사물이나 인물 자체를 기괴하게 일그러진 모습으로 나타내거나 몽환적으로 표현하곤 했다. 그러나 마그리트의 경우 개개의 사물은 지극히 사실적이고 덤덤하게 표현하되 이것들을 엉뚱하게 배열하거나 서로 결합해 더욱더 충격을 준다.
마그리트 특유의 건조하고 깔끔한 스타일은 그가 광고 그래픽 아티스트로 일했던 영향이 크다.
브뤼셀에서 살 때 집 뒷마당 창고에 상업미술 스튜디오를 운영했고, 파리에 가서 초현실주의 예술가들과 합류했을 때도 생계를 위해 광고 디자인 일을 병행했다.
낯익은 것들의 낯선 결합이 불편하고 섬뜩한 ‘연인들’과 달리 ‘심금’ 같은 그림은 기발함의 쾌감과 발랄한 느낌이 강한데, 이 또한 마그리트가 대중친화적인 광고를 디자인해본 영향이 클 것이다.
공포영화 감독들도 마그리트를 사랑했다. 마그리트에 영감 받은 가장 유명한 공포영화는 ‘엑소시스트’(1973)다. 영화 포스터는 악마에 씌운 소녀를 전면에 드러내는 대신, 어둠에 싸인 소녀의 집과 이상한 빛을 내는 창문과 가로등과 퇴마사 신부의 실루엣을 내세워 신비롭고도 불길한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감독 윌리엄 프리드킨은 이렇게 말했다. “MoMA에서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을 보게 됐어요.
그 후 그 그림을 계속 마음속에 두고 있었죠. 내가 소녀의 집으로 이 집을 고른 것도 마그리트 그림에 맞추기 위해서였어요. 가로등도 그렇고요.”
‘빛의 제국’에서 하얀 뭉게구름이 떠 있는 위쪽의 푸른 하늘은 분명히 햇빛 가득한 낮의 하늘이다.
반면 아래쪽에 있는 거리의 집과 숲은 그 햇빛을 전혀 받지 않는 밤의 상태에 있고, 가로등과 실내등까지 켜져 있다. 하늘 부분과 집 부분을 따로따로 봤을 때는 그로테스크하거나 환상적인 데라고는 없다.
하지만 그 두 가지가 공존하면서 이 평범하고 익숙한 것들이 낯설게 변모한다.
마그리트는 ‘빛의 제국’ 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낮과 밤을 동시에 불러내는 것은 우리를 놀라게 하고 홀리게 하는 힘을 가진 것으로 내게 보였다.
나는 이런 힘을 시라고 부른다.”
그는 일상의 것들의 우연하고 이상한 만남이 하나의 시를 만들어낼 수 있고, 그렇게 그림은 시가 되어야 하며, 시의 핵심은 불가사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언캐니함을 이제 훨씬 자주 볼 수 있게 된 코로나 시대에, 그러한 일상을 시로 승화시키고 싶은 우리에게, 마그리트가 더욱 자주 소환되는 것은 당연하다.
[출처] :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 4.르네 마그리트의 『연인들II』·『빛의 제국』 -흰 천 뒤집어쓰고 키스, 코로나시대 사랑법 예견한 듯 /중앙Sunday, 2021. 3. 20.
5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1951)
- ‘6·25 참상’ 묘사 피카소 그림, 자유·공산 진영 모두 불평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1951), ⓒ 2021-Succession Pablo Picasso-SACK (Korea).
파블로 피카소(1881~1973)의 ‘한국에서의 학살’이 최초로 우리나라에서 전시된다(5월 1일~8월 29일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거장이 한국전쟁을 소재로 삼은 그림인 데다가 정치적으로 민감한 작품이라 화제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
사실 미학적 차원에서 대표작으로 꼽히지는 못하지만,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피카소를 논할 때는 빠지지 않는 그림이다. 이 작품이 1951년 파리 살롱 드 메에서 처음 공개되었을 때의 반응을 미술사학자 정영목의 논문 구절로 보자.
“양 이데올로기의 진영이나 일반인들의 관심은 냉담했다. 제2의 ‘게르니카’에 해당하는 이 작품은 우선 미학적으로 ‘게르니카’를 능가하지 못한다는 평가였고, 프랑스 공산당은 공산당대로 학살의 주체가 선명하지 않다는 데에 불만을 품었고, 미국을 위시한 자유진영은 한국전쟁에 관한 공산주의자들의 프로파간다로서 피카소가 미국을 이 전쟁의 원흉으로 몰고 간다고 비난했다.”
즉 프랑스 공산당은 가해자를 미군으로 나타내지 않아 불만이었고 미국은 가해자를 미군으로 암시했다고 불만이었다. 왜 이런 생각들을 했을까? 그것은 피카소가 공산당에 가입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44년 파리가 나치로부터 해방되자 그는 공산당에 가입하며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나 소비에트 연방에서나 나의 조국 에스파냐에서나 (나치와 파시즘에 대항해) 가장 용감하게 싸웠던 것은 공산주의자들 아닌가요?”
예술의전당서 내달 1일 국내 첫선
이것은 당시 많은 프랑스 문화예술인이 공유한 생각이었고, 제2차 대전 당시 유럽 상황에서 틀린 말도 아니었다. 더구나 피카소는 37년 고국 스페인의 게르니카 지역이 우익 파시스트 프랑코를 지원하는 독일 나치에 의해 무차별 폭격을 당한 후 분노에 차 걸작 ‘게르니카’를 그렸었으니 더욱 그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피카소와 여러 프랑스 지성인들은 스탈린이 장악한 공산주의 러시아 또한 파시즘 국가로 변모하고 있는 상황을 잘 모르거나 알면서도 애써 외면했다.
프랑스 공산당은 유명 인사 피카소의 입당을 대환영했지만, 사실 피카소 미술은 소련이 주도하는 공산주의 예술의 이상에 맞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스탈린 정권은 일반 노동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그림(북한 그림을 생각하면 된다)만이 참다운 예술이라며 전위 예술을 탄압했다.
공산혁명을 열렬히 지지한 추상미술의 선구자 말레비치도 탄압을 면하지 못했다. 한때 유럽을 선도한 러시아 전위예술은 몰락했다. 소련 미술사학자 케메노프는 피카소의 작품을 두고도
“퇴폐적인 부르주아 예술”이라고 욕했고, 심지어 ‘게르니카’에 대해서도 “영웅적인 에스파냐의 공화주의자들을 그리는 대신 그의 다른 작품에서와 같은 비참하고 뒤틀린 형태들만 그렸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프랑스 공산당은 피카소를 붙들어 놓고 싶어 비난을 삼갔다. 피카소 역시 자신의 작품을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바꿀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구소련에서 일어나는 전위예술 탄압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자신이 속한 공산당의 의지에 좀 더 타협하는, 일종의 서비스 차원인 일련의 그림을 내놓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한국에서의 학살’인 것이다.
그러니 미국은 이 그림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국에서의 학살’은 전쟁의 가해자와 희생자를 완벽한 이분법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림 오른쪽에 있는 군인들은 모두 성인 남성이며 갑옷과 헬멧, 총과 칼로 중무장한 데다가 그 형태가 각지고 기계적이다.
반면 그림 왼쪽에 있는 민간인들은 모두 성인 여성과 남녀 아이들이며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체로 표현되어 무력함과 순수함이 강조된다. 군인들은 칼과 총을 모두 여인들과 아이들에게 겨누고 한 발을 대각선으로 뻗어 무자비한 침략자와 공격자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마네 ‘막시밀리앙의 처형’(1868~9), 만하임 미술관 소장.
그런데 이 단순할 정도로 명쾌한 대비와는 달리 다른 요소들은 애매모호하다. 일단 배경이 특별히 한국적이지 않고 희생자들의 얼굴도 특별히 동아시아인 같지 않다. 실제로 피카소는 한국에 한 번도 온 적이 없으며 한국이라는 배경에도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심지어 군인들의 복장은 고대와 중세 유럽의 전사들을 섞어 놓은 모습이다.
사실 ‘한국에서의 학살’의 구도는 19세기 스페인 거장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의 그림 ‘1808년 5월 3일’과 프랑스 모던아트의 선구자 에두아르 마네(1832~1883)의 ‘막시밀리앙의 처형’에서 따온 것이다.
고야 ‘1808년 5월 3일’(1814), 프라도 박물관 소장.
고야의 그림은 스페인을 점령한 나폴레옹 군대가 스페인 민중 봉기자들을 학살하는 장면이다.
마네의 그림은 프랑스가 멕시코를 점령할 야욕으로 꼭두각시 황제 막시밀리앙을 세웠다가 멕시코 공화주의자들에게 밀려나 퇴각한 후 프랑스에게도 버려진 막시밀리앙이 멕시코 공화국 군대에게 처형당하는 장면이다.
두 그림은 각각 전쟁의 폭력과 제국주의의 아이러니를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나타내 칭송받고 있다.
반면에 ‘한국에서의 학살’은 이 그림들의 구도를 따왔으면서도 이 그림들의 생동감은 배제한 채 전쟁의 폭력과
희생자를 그저 원론적이고 단순한 대비 구조로 나타냈기에 미학적으로 크게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이 ‘자타공인 천재’가 이렇게 단순하게 원론적이고 생동감 없는 전쟁 테마 그림을 내놓은 것은 정치적 논란이 두려웠기 때문일 수도 있다.
가해자 군인들의 모습이 그토록 모호한데도 미국이 극심한 거부 반응을 보이자 피카소는 설명했다.
“전쟁이란 무엇일까?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하고 회상할 때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괴물이라는 것밖에 없었다. 더구나 미군이나 어떤 다른 나라 군대의 헬멧이나 유니폼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미국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 나는 인류의 편에, 모든 인류의 편에 서 있다.”
이 말에서 피카소의 진실한 인류애를 읽는 사람도 있지만, 냉소하는 사람도 있다. 의식 있는 사회주의자로 행세하되 생활과 비즈니스는 철저히 자본주의적이었던 피카소가 미국 시장에 그림을 팔아야 해서 이렇게 원론적이면서 디테일은 모호한 그림과 말을 남겼다는 것이다.
어쨌든 미국은 피카소의 입국을 금지했고, 정보 당국이 그를 사찰했다. ‘한국에서의 학살’은 80년이 되서야 미네아폴리스와 뉴욕에서 처음 전시됐다. 이때도 뉴욕타임스는 이 작품을 “스탈린 프로파간다”라고 비웃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에서의 학살’은 한국전쟁을 직접 겪은 한국에서 더더욱 터부시될 수밖에 없었다.
2011년에는 이 그림이 교과서에 실리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신천 학살’ 모델로 했는지 논란도
특히 ‘신천 학살’을 모티프로 한 것인지를 둘러싼 논란이 거셌다. 신천 학살은 전쟁 중이던 50년 말 황해도 신천에서 전체 군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만 5000여 명이 살해된 사건을 말한다.
북한은 이 사건이 해리슨이라는 장교가 이끄는 미군에 의해 일어난 일방적 학살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국내외 연구에 따르면 당시 미군은 평양을 선점하려는 경쟁이 붙어 신천에 오래 머물지 않았으며,
신천에 진주한 미군 장교 명단에 ‘해리슨’이라는 이름도 없다.
미군과 상관없이 당시 한반도 내 좌우 대립과 상호 보복의 악순환 속에서 발생한 쌍방 살해라는 것이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견해다.
한국전쟁의 기원
이 그림이 미국의 사학자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1981) 초판본의 표지로 사용되면서, 그리고 한국의 일부 운동권이 이 책을 ‘미국의 남침 유도설’ 혹은 ‘북침설’의 책으로 왜곡해 전파하면서, 우리나라에서 더욱 정치적으로 민감한 그림이 되었다
(참고로 커밍스의 주장은 한국전쟁 전부터 한반도는 내란 상태로서 한국전쟁은 단순히 그 확전이라는 것이었는데, 구소련 기밀문서가 해제되면서 김일성이 구소련을 설득해 지원을 받아 일으킨 철저한 계획 남침임이 밝혀진 후,
커밍스는 주장을 일부 수정했다).
어쨌든 피카소 자신은 그림 속 가해자가 미군이라고 말한 적도 없고, 신천 학살을 모델로 했는지에 대해서는 더더욱 말한 적이 없다. 이 그림이 그저 보편적인 반전(反戰) 반폭력 그림으로 받아들여지면서 56년 헝가리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났을 때 소련 공산정권의 무력 진압에 항의하는 의미로 그 복제판이 게시되기도 했다.
결국 예술을 받아들이는 것은 관람자의 몫이다.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은 한국전쟁 중에 인민군, 국군, 미군 등 양측 군대 모두에 의해 일어난 여러 민간인 학살의 비극을 떠올리게 한다. 좌우 불문하고 이러한 민간인 학살은 지속적으로 진상을 밝혀 희생자들을 위로해야 한다.
그리고 이 참극의 근본 원인인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들, 즉 김일성과 북한의 여러 정치인들에 대해, 통일 후 그들을 전범(戰犯)으로서 엄정히 다뤄 평화를 위한 반면교사로 삼는 것이 이 그림을 보며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닐까.
[출처] :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 5.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1951) - ‘6·25 참상’ 묘사 피카소 그림, 자유·공산 진영 모두 불평 /중앙Sunday, 2021. 4. 10.
6.앙리 마티스의 『다발』(1953)
- 마티스 색종이 오리기, 이브 생로랑 드레스로 재탄생
패션이 된 그림
앙리 마티스의 ‘다발’(1953) 종이 컷아웃을 세라믹 설치로 구현한 작품.
미국 LA카운티뮤지엄(LACMA)에 있다. [사진 문소영]
루마니아 민속 의상 풍의 블라우스, 알록달록한 식물 무늬의 아플리케(천 조각을 오려 붙인 것)로 장식된 드레스…. 패션 디자이너 이브 생로랑(1936~2008)의 1980년 오트 쿠튀르(고급 맞춤 의상) 쇼는 옷으로 재탄생한 앙리 마티스(1869~1954) 작품의 향연이었다.
이 패션과 미술의 만남은 아주 생소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생로랑은 이미 65년에 피에트 몬드리안의 삼원색 직각 추상화를 발랄한 일자형 원피스로 만들어서 명성을 떨쳤고, 또 “언제나 미술 작품을 동경하고 거기에서 영감을 받는다”고 밝혔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마티스는 생로랑에게 좀 늦게 소환된 감이 있었다. 왜냐하면 마티스야말로 가장 패션 친화적인 20세기 미술 거장으로 꼽을 만하기 때문이다. 그가 패셔니스타였다는 것은 아니고(그의 사진들로 보면 오히려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의 그림에 무늬가 화려하고 인상적인 옷, 특히 민속 의상을 입은 인물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기에 그렇다는 얘기다.
‘마닐라 숄’(1911), ‘노랑 드레스’(1929~31), ‘루마니아 블라우스’(1940)처럼 아예 의상이 그림 제목인 경우도 적지 않다. 게다가 마티스는 1920년 러시아 발레단(발레 뤼스)의 무대 의상도 담당했다.
그때 그가 한 말을 보면 왜 그가 의상과 패턴에 관심이 많았는지 알 수 있다.
“나는 의상을 움직이는 색채로 표현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물이 내게 주는 감정을 그린다”
마티스의 ‘다발’에 영감을 받은 이브 생로랑의 이브닝 드레스 (1980, 사진 왼쪽),
마티스의 ‘달팽이’에 영감을 받은 이브 생로랑의 이브닝드레스 (1980,사진 오른쪽).
실내외 풍경화, 정물화, 초상화부터 신화 그림까지 아우르는 마티스의 회화를 보면 언제나 음악적 흐름이 강하게 느껴진다. 색채들이 명암과 음영을 무시하고 평면적으로 배열돼 있으면서 리드미컬한 형태를 띠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티스가 말년에 집중한 컷아웃, 즉 과슈로 색칠한 종이를 여러 형태로 오린 뒤 핀으로 고정해 구성한 작품에서 극대화된다. 생로랑은 80년 오트 쿠튀르 쇼에서 마티스의 컷아웃 중 ‘다발’과 ‘달팽이’로부터 영감을 받은 드레스를 내놓았다.
마티스가 색칠한 종이를 오려 붙였듯, 알록달록한 새틴 조각을 오려 붙여 “움직이는 색채의 의상”을 만든 것이다.
컷아웃 이전부터 마티스에게 있어서 그림이란, 작가의 감정을 담은 색채를 배열해 화폭 안에다가 하나의 새롭고 독립적인 세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니 르네상스 이후부터 모던아트 이전까지 서구 화가들이 추구한 것, 즉
‘어떻게 하면 명암법과 원근법을 잘 구사해 3차원 현실 세계를 2차원 화폭에 그럴듯하게 재현해낼까’와
정면으로 대치되는 셈이었다.
이것은 마티스가 많은 영향을 받은 인상주의 및 신인상주의와도 다른 길을 간 것이었다. 빛에 따라 시시각각 다르게 보이는 사물의 색채를 객관적으로 그려내는 것은 마티스의 관심사가 아니었으니까. 마티스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문자 그대로 테이블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내게 일으키는 감정을 그린다.”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에 소장된 마티스의 컷아웃 ‘달팽이’(1953).
색채에 대해서는 이런 말을 했다.
“색은 단순할수록 내면의 감정에 더 강력하게 작용할 수 있다. 가령 파랑은 강렬한 보색을 동반할 때 날카로운 징 소리처럼 감정에 영향을 미친다. 빨강이나 노랑도 마찬가지다. 화가는 필요한 경우에 적절한 소리를 낼 줄 알아야 한다.”
1905년 살롱 도톤(Salon d’Automne) 전에서 마티스와 그의 친구들의 그림을 본 평론가 루이 보셀은 그 격정적 색채가 징 소리보다 야수의 부르짖음처럼 들렸는지 이들에게 ‘야수파(Fauvism)’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이렇게 주관적이고 강렬한 색채의 사용은 ‘붉은 실내’ 연작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디저트; 붉은 조화’(1908)나 ‘붉은 아틀리에’(1911)를 보면, 짙은 빨간색이 화면 대부분을 지배한다.
어느 집 벽과 테이블과 바닥이 이 그림들처럼 실제로 온통 빨간색이겠는가. 그럼에도 마티스가 이 모든 것을 붉게 칠한 이유는 이 실내가 그에게 불러일으킨 감정과 활기와 생명력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그런데 마티스는
“색채 못지않게 선도 중요하다”고 했다. 꿈틀거리는 선을 통해서 색채가 춤을 추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남달리 춤을 좋아하고 춤을 통해서 많은 것을 본다. 표현력이 풍부한 움직임, 율동감 있는 움직임, 내가 좋아하는 음악 같은 것을…춤은 내 안에 있다.” 이 말을 그대로 구현한 것이 그의 대표 걸작인 ‘춤’(1909)이다.
이 그림 속 인물들은 손에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아가며 춤을 추는데, 우리나라에 강강술래가 있듯 이것이야말로 동서고금 존재해온 가장 원초적인 춤일 것이다. 이런 춤의 형태에서, 또 벌거벗은 인물들의 건강한 붉은 피부에서,
그리고 겅중겅중 뛰며 돌아가는 그들의 팔다리와 몸통에서, 약동하는 힘과 거칠고 순수한 즐거움이 느껴진다.
그 폭발적인 원시적 에너지는 폴 고갱의 타히티 그림들도 따르지 못할 정도다(참고로 마티스 또한 타히티에 다녀왔고 영감을 받았다).
죽음 앞두고도 멈추지 않은 변주
‘춤’처럼 동적이고 원시 신화적인 그림뿐만 아니라 실내 정경 그림들에서조차 약동감이 느껴지는데, 이는 벽면과 가구의 패턴, 또 등장인물의 옷 무늬가 춤추듯 꿈틀거리며 반복되기 때문이다.
마티스는 모로코를 방문하고 이슬람 미술의 식물 패턴과 기하학 패턴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그리고는 그것을 자신의 실내 풍경화에 응용해 지중해 연안의 아르카디아(전원적 낙원)적 삶의 활기와 즐거움을 구현했다. 유럽 화가들을 관통해온 아르카디아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한 화가 중 하나로 자주 뽑히곤 한다.
하지만 마티스도 인간의 운명인 ‘병마와 노쇠’를 피해갈 수 없었다. 일흔을 넘긴 41년에는 십이지장암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는 “작품을 마무리하기 위해 3~4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의사들에게 부탁했다.
다행히 수술이 성공적이어서 그는 13년을 더 살 수 있었다.
“그 무시무시했던 수술은 나를 완전히 소생시켰을 뿐 아니라 나를 철학자로 만들었다.”
노쇠와 후유증으로 그는 붓을 제대로 들 수 없어 그림을 그리기 힘들게 되었지만, 그는 그것을 한탄하며 누워 지내는 대신 자신이 그전부터 조금씩 실험해오던 컷아웃을 본격적으로 창작했다. 그래서 평론가 로버트 휴즈의 말처럼
“대부분의 화가들이 과거의 작품을 우려먹거나 붓을 놓고 임종을 기다릴 시기에 마티스는 아방가르드의 흐름에 다시 들어가 세련된 방향으로 발전시켰다.”
작가가 말년에 새로운 재료를 써서 만든 새로운 작품이 제2의 전성기 작품으로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것은 마티스의 친구이자 라이벌인 거장 피카소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게다가 마티스의 컷아웃 작품들은 발랄하고, 생의 환희가 넘치고, 또 그 독특한 재료 때문에 디자인에 적용되기 쉬워서, 생로랑뿐만 아니라 발렌티노, 이세이 미야케, 비비안 웨스트우드 같은 기라성 같은 디자이너들에게 수많은 영감을 주고 있다.
그래도 마티스와 가장 관련이 깊은 이는 여전히 생로랑인 것 같다. 생로랑이 세상을 떠난 뒤 2009년에 열린 그의 소장품 경매에서 최고가를 기록한 것이 마티스의 정물화 ‘노란 앵초, 푸른색과 분홍색의 테이블보’이기도 했으니까.
이 그림은 3590만 5000유로(당시 환율로 약 700억원)에 팔렸다.
생로랑은 불과 21살에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수석 디자이너가 되고 20대 후반에 자신의 브랜드를 설립해 명성을 떨친 천재 디자이너였지만, 군 복무 시절의 트라우마와 지속적인 성공에 대한 압박감, 그리고 그것을 잊기 위해 복용한 코카인에 중독돼 평생을 시달렸다.
그럴수록 생로랑은 마티스의 굴하지 않는 삶의 기쁨을 동경하고 그의 기운과 영감을 받지 않았을까.
[출처] :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 6.앙리 마티스의 『다발』(1953) - 마티스 색종이 오리기, 이브 생로랑 드레스로 재탄생 /중앙Sunday, 2021. 5. 1.
7. 살바도르 달리의 『켄타우로스 가족』(1940) - 이건희 컬렉션 '켄타우로스 가족'
: 프로이트 만난 달리, 고전주의 지향…스릴러 영화 미술도
이건희컬렉션 ‘켄타우로스 가족’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 중 하나인 살바도르 달리의 ‘켄타우로스 가족’(1940).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기증의 역사를 새로 쓴 ‘이건희컬렉션’ 중에서 ‘인왕제색도’ 같은 국보와 나혜석·이중섭 등의 희귀 근대 회화 외에도 유난히 내 흥미를 끄는 작품이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7점의 외국 거장 회화 중 스페인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1904~1989)의 ‘켄타우로스 가족’(1940)이다.
달리 특유의 관능적이고 기괴한 분위기가 다른 기증작들의 점잖고 온화한 분위기와 달라서 특히 눈에 띈다.
이 그림이 컬렉션에 포함된 사연과 기증작으로 선택된 이유가 궁금한데, 국립현대미술관에 문의하니 아직 알지 못한다는 답변이었다.
이 그림의 원제는 ‘육아낭 달린 켄타우로스 가족’이다. 그리스 신화의 반인반마(半人半馬) 종족인 켄타우로스에게 캥거루처럼 육아낭이 있어서 거기로부터 아기들이 빠져나오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달리는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창시한 정신분석학에 심취해 있었는데, 프로이트의 제자인 오토 랑크의 이론에 영향을 받아서 이 그림을 그렸다고 했다.
랑크는 인간이 출생할 때 겪는 육체적 고통과 어머니의 자궁으로부터 분리되는 정서적 고통이 최초의 트라우마이며, 이러한 출생 트라우마가 인간의 불안과 노이로제의 근원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낙원 같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갈 수 있는 켄타우로스가 부럽다고 달리는 말했다.
프로이트 제자 랑크 이론에 영향 받아
달리가 ‘켄타우로스 가족’을 그린 이듬해인 1941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달리의 미국 최초 회고전이 열렸다. ‘켄타우로스 가족’은 전시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큐레이터이자 평론가인 제임스 소비는 이 그림을 전시 카탈로그에 소개하고 달리의 중대한 변화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다뤘다.
달리가 초현실주의 운동에서 등을 돌리고 르네상스 미술의 고전주의를 지향하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이라는 것이다. 매우 초현실적으로 보이는 데다가 초현실주의의 바탕인 정신분석학에 영향받은 그림인데, 어째서 그렇다는 걸까?
시인 앙드레 브르통이 주창한 초현실주의 운동은 이성의 통제를 받지 않는 무의식을 표현하는 게 핵심이고 그래서 그림에서도 의식의 개입을 최소화해야 하는데, ‘켄타우로스 가족’은 매우 의식적으로 르네상스 대가들이 사용한 삼각형 구도와 균형을 연출했기 때문이었다.
제임스 소비는 자의식 과잉인 달리가 이미 다른 초현실주의자들과 불화하면서 무의식보다 의식을 표현하는 쪽으로 기울다가, 38년 런던에서 그의 우상인 프로이트를 만나면서 변화의 결심을 굳히고 훗날 ‘켄타우로스 가족’을 그리게 된 것 같다고 했다.
당시 프로이트는 81세로서, 나치의 박해를 피해 고국 오스트리아를 떠나 영국으로 망명 온 상태였고, 달리는 34세였다. 두 사람은 프로이트의 런던 집에서 만났는데, 그때 프로이트는 달리가 가져온 그림을 보더니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고전적인 그림에서 내 관심을 끄는 건 무의식인데, 당신 그림에서 내 관심을 끄는 건 무의식이 아니라 의식이군요.” 진정한 초현실주의자에게는 욕으로 들릴 소리였지만 사실 달리의 정곡을 찌르는 소리였다.
살바도르 달리의 ‘나르키소스의 변신’(1937), 런던 테이트모던 소장. [사진 테이트모던 미술관]
그때 달리가 가져간 그림이 지금은 런던 테이트모던 미술관에 소장된 그의 37년작 ‘나르키소스의 변신’이었다.
나르키소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소년인데, 자신에게 구애하는 수많은 남녀를 냉정하게 거절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거절당한 이들 중 한 명이 ‘그도 보답 받지 못하는 사랑으로 고통받게 해달라’고 복수의 여신에게 기도하자 여신은 나르키소스에게 저주를 내렸다. 그 저주는 맑은 샘물에 비친 자기 자신의 모습에 반하는 것이었는데,
어쩌면 저주가 아니라 그의 타고난 기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르키소스는 수면의 자기 반영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닿을 수 없어 괴로워하다가, 결국 상사병으로 죽어 한 송이 수선화로 변신했다고 한다.
달리가 이 그림을 가져간 이유는 바로 프로이트가 (용어 자체는 다른 의사가 만들었지만) 나르키소스의 이름을 딴 나르시시즘(자기애)을 중요한 정신분석학 개념으로 소개했기 때문이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유아기에는 리비도(성 충동 또는 삶 충동)가 자기 자신을 향하는 일차적·근원적 나르시시즘의 상태에 있다.
그 후 성장하면서 리비도는 외부 대상으로 향하게 되지만 근원적 나르시시즘은 내부에 남아있다.
우리는 연인에게 사랑받거나 타인에게 찬사를 받으면 스스로를 사랑스럽거나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렇지 못하면 심한 경우 자신이나 상대방에게 분노와 증오를 품게 되는데, 그게 이차적 나르시시즘이라는 것이다.
달리 자신이 엄청난 나르시시즘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그가 ‘나르키소스의 변신’을 그린 건 너무나 어울리는 일이었다. 그는 나르키소스 신화를 절묘한 이중 이미지로 구현했다. 먼저 그림 왼쪽을 보면 나르키소스가 금빛 햇살을 받으며 샘물가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자신의 반영을 정신없이 들여다보고 있다.
오른쪽을 보면 그는 그 모습 그대로 창백한 화석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그 화석은 알을 든 거대한 손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 알의 표면이 깨지며 수선화가 피어난다. 그 상태에서 다시 왼쪽을 보면 이번엔 이것도 나르키소스가 아니라 거대한 손으로 보인다. 갈색 수선화 알뿌리를 들고 있는 거대한 손으로.
스릴러 영화에 달리 그림 많이 차용돼
히치콕 영화 ‘스펠바운드’(1945)에서 달리가 미술을 담당한 꿈 장면. [사진 스크린 캡처]
테이트모던 미술관에 따르면 이것이 달리의 ‘편집광적 비판 방법(또는 편집증적 비평 방법)’이다.
굉장히 어렵고 거창하게 들리는 용어인데(실제로 달리는 이 용어가 어렵게 들려서 좋아했다), 무슨 뜻일까?
편집증 환자는 아주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망상을 가진 사람을 가리킨다.
이런 편집광들은 일상의 이미지를 일반인들이 보는 것과 전혀 다른 이미지로 읽어내곤 한다고 한다. 달리가 명명한 ‘편집광적 비판 방법’은 그것에 착안해 하나의 이미지가 여러 가지로 보이게 하는 초현실주의 회화 기법인 것이다.
달리는 이 그림이 프로이트의 인정을 받길 바랐지만, 프로이트는 “당신 그림에서 내 관심을 끄는 건 무의식이 아니라 의식이군요”라고 말할 뿐이었다. 달리는 또 자신이 편집증에 대해 쓴 글이 실린 잡지를 가져갔지만, 프로이트는 잡지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달리를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달리는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잡지 글의 제목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반복해서 말했다. 그의 동요 없는 무관심 앞에서 내 목소리는 나도 모르게 더욱 날카로워지고 우기는 톤이 되었다…프로이트는(그들의 만남을 주선한 친구에게) 몸을 돌리더니 말했다. ‘이보다 더 완벽한 스페인 사람의 예를 본 적이 없어요. 완전 광신도네.’”
사실 프로이트는 그를 우상으로 삼은 초현실주의자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고전주의를 선호했기에 아방가르드 미술에 관심도 없었고, 그가 오스트리아 빈에 살던 시절, 초현실주의를 주창한 브르통이 그의 집에 초대도 받지 않고 불쑥 나타나 민폐를 끼치고 간 전례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달리는 이 만남이 완전히 망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프로이트는 달리에 대해 나쁘지 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다음날 주선자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그전까지 나는 초현실주의자들을 철저히 터무니없는 자들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어제 그 젊은 스페인인의 솔직하고 광신적인 눈과 부인할 수 없이 완성도 높은 그림 테크닉을 보니 다시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프로이트의 이 말은 달리에게 전해졌을 것이고. 그 후 달리는 정신분석학에 계속 영감을 받으며 테크닉과 구도는 좀 더 고전주의를 지향해 ‘켄타우로스 가족’ 같은 그림을 그리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달리는 르네상스적인 종합예술가가 되고자 하는 마음에 패션·공연·영화 등 여러 장르와 협업을 했다.
특히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정신분석학적 심리 스릴러 영화 ‘스펠바운드’(1945)에서 꿈 장면의 미술을 담당했다. 달리가 참여하지 않은 후대의 정신분석학적 스릴러에도 꿈 장면에 달리 그림이 차용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렇다면 다시 궁금해진다. 달리의 ‘켄타우로스 가족’은 어떤 맥락에서 영감을 주어 ‘이건희컬렉션’에 들어갔고 기증작 중 하나로 선택되었을까? 정신분석학과 관련해서일까, 아니면 고전주의로의 회귀와 관련해서일까?
오는 12월로 예정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이건희컬렉션 2부: 해외거장’ 전시에서는 그런 맥락들이 밝혀져 소개되었으면 한다.
[출처] :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 7. 살바도르 달리의 『켄타우로스 가족』(1940) - 이건희 컬렉션 '켄타우로스 가족' : 프로이트 만난 달리, 고전주의 지향…스릴러 영화 미술도 /중앙Sunday, 2021. 5. 15.
8.뭉크의 『비명』의 4가지 버전
- “끼야악” 불안한 현대인 비명, 휴대폰 이모티콘으로 소환
뭉크의 ‘절규’
1 뭉크의 유명한 회화 ‘비명’의 4가지 버전.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1893년 버전, 1893년 크레용 버전, 1910년 템페라 버전, 1895년 파스텔 버전(2012년 경매 신기록). [사진 각 소장 미술관]
에드바르 뭉크(1863~1944)의 ‘비명(절규)’은 어쩌면 역사상 가장 많이 패러디된 그림일 것이다. 물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같은 강력한 라이벌이 있지만, 그 어떤 작품도 뭉크의 ‘비명’ 같이 많은 이모티콘을 갖고 있진 못하다.
‘파랗게 질린 노란 얼굴’이 두 손으로 뺨을 감싸고 입을 크게 벌려 비명을 토해내는 이모티콘이 삼성 갤럭시, 애플 아이폰, 카카오톡, 트위터 등등에 조금씩 변주된 디자인으로 끝없이 등장하고 있다.
왜 휴대폰과 메신저 서비스마다 ‘비명’ 이모티콘을 갖추고 있고, 우리는 그 이모티콘을 소환해 대화에 넣곤 할까?
뭉크는 이 주제에 사로잡혀 있어서 여러 번 그렸는데, 회화는 총 4점이고, 판화는 더욱 많다. 그중 뭉크가 최초에 유채·템페라·크레용을 섞어 그린 가장 유명한 1893년 버전 ‘비명’은 고국인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의 국립미술관에 있다.
올해 초 이 그림에 대해 재미있는 사실이 새로 밝혀졌다. 그림 상단 왼쪽, 붉은 구름 부분에 보일락말락 희미하게 연필로 “미친 사람만이 그릴 수 있는”이라고 쓴 글귀가 있다.
발견된 지는 꽤 되었지만 누가 썼는지는 지금까지 미스터리였는데, 이번에 노르웨이 국립미술관의 정밀 조사 결과 뭉크 자신이 1895년 즈음에 쓴 것으로 결론이 난 것이다.
뭉크, 스페인 독감까지 이겨내고 장수
2 ‘비명’을 응용한 이모티콘의 애플 버전. [사진 각 브랜드]
1895년은 ‘비명’이 대중에게 처음 공개된 해였다. 젊은 뭉크는 독일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후 오슬로에서 귀국전을 열었는데, 뭉크 자신이 말한 대로 “전시회에 혹평이 빗발쳤고 보이콧 제안까지 있었다.” 심지어 뭉크의 정신 상태가 정상인지에 대한 토론이 있을 정도였다.
특히 한 젊은 의학도는 뭉크에게 대놓고 정신 건강을 물으며 “이 그림을 보니 지금 마음이 건강한 상태가 아닌 것 같다”고 했을 정도였다. 그 말을 듣고 속이 상한 뭉크가 자조하는 심정으로 이 그림에 “미친 사람만이 그릴 수 있는”이라고 썼다는 것이 노르웨이 국립미술관의 추정이다.
사실 뭉크는 실제로 자신이 미치거나 병으로 일찍 죽지 않을까 하는 불안에 늘 시달리고 있었다. 가족의 육체적·정신적 병력이 있었고, 자신도 어릴 때부터 병약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불과 5살 때 어머니를 폐결핵으로 잃었고,
13살 때 누나를 같은 병으로 잃었다.
그 상황에서 아버지는 감정 기복이 심해졌고, 종교에 지나치게 심취했으며, 뭉크에게도 종교적 생활을 강요했다.
게다가 동생까지 정신병이 생겨 정신병원을 오가게 되었다.
3 트위터 버전. [사진 각 브랜드]
하지만 뭉크의 불안은 개인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업 미술가의 길을 걷게 된 후 파리와 베를린에서 공부하며 세기말 유럽의 격변을 생생하게 체험했다.
노르웨이로 돌아와 진보적 지식인·예술인들과 어울리고 또 싸우며 이러한 혼돈 속에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했다. 그 와중에 세기말 격변에 대한 매혹과 공포의 충돌, 그로 인한 불안을 느꼈다. 그것은 동시대인들이 공유하는 불안이었다.
뭉크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욘 우베 스테이하우에 따르면, 뭉크의 작품 스펙트럼은 넓은 편이고, 개인적인 것에 천착하기보다 당대의 현대적 급변이 가져온 사회적 집단의식과 기술의 변화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뭉크는 동시대인과 불안을 공유했지만, 또한 각자의 배경과 상황과 생각이 다른 가운데에서 소외감과 우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러는 가운데 ‘비명’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뭉크는 ‘비명’에 대해 이런 글을 썼다.
“나는 두 친구와 함께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우울함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변했다. 나는 멈춰 서서 난간에 몸을 기댔다-극도로 피곤해져서.
불타는 구름이 피와 칼과 같은 형태로 짙푸른 피오르(노르웨이 특유의 지형인 협만)와 도시 위에 걸린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친구들은 계속 걸었다-나는 불안으로 몸을 떨며 그대로 서 있었다.
그 순간 거대한, 무한한 비명(skrik)이 자연을 꿰뚫는 것을 느꼈다.”
4 카카오톡 버전. [사진 각 브랜드]
노르웨이어 원제는 ‘Skrik’고 영어로는 ‘Scream’으로 번역된다. 아주 날카로운 비명 같은 외침,
우리말 의성어로 치자면 “끼야악” 같은 소리 지름을 뜻한다. 그러니 점잖은 ‘절규’보다 ‘비명’이라고 번역하는 게 더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글을 보면 그림의 주인공이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겨서 비명을 지르는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복합적인 이유로 일상적인 “우울”과 “피곤”과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것이 어느 한순간 임계 수위를 넘어서면서 그의 눈에 비치는 세계를 왜곡하는 것이다.
평소 같으면 시적 감흥을 일으킬 아름다운 저녁놀 구름조차 “피와 칼과 같은 형태로” 자신과 세계를 위협한다!
그러나 그의 그런 상태를 알 리가 없는 친구들은 무심히 계속 걷는다. 주인공은 친구들과 소통하는 것을 포기하고 철저히 소외된 채 그대로 멈춰선다.
자신의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무서운 비명을 입을 벌려 토해내면서, 동시에 그 비명이 “자연을 꿰뚫는 거대한, 무한한 비명”으로 확장되어 메아리쳐 돌아오는 것을 견디지 못해 귀를 막으면서 말이다.
극작가 입센의 희곡에 영감 많이 받아
5 삼성 버전. [사진 각 브랜드]
그러고 보면 ‘비명’이 드러내는 내재적이고 상존하는 우울과 피로와 불안, 의사소통의 부재와 소외감은 그야말로 현대인이 보편적으로 겪는 고통이다. 특히 이 그림 속 주인공은 성별도 나이도 알 수 없는 익명성의 얼굴을 가지고 있어 누구나 쉽게 그림에 자신을 이입할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이 그림은 20세기 들어 점점 더 인기를 얻다가 이제는 이모티콘으로 일상에 정착한 것이리라.
이러한 고통은 뭉크 예술의 원동력이기도 했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모든 세월 동안 나는 깊은 불안감에 시달렸고, 그것을 내 예술로 표현하고자 했다. 이러한 불안과 질병이 없었다면 나는 방향타 없는 배와도 같았을 것이다”라고 뭉크는 말했다.
그의 정면 돌파에 영감을 준 이들 중 한 명은 노르웨이의 대(大)극작가 헨리크 입센(1828~1906)이었다.
그가 첫 귀국전에서 혹평에 시달리고 있을 때, 뭉크가 그전부터 존경하던 입센은 트레이드 마크인 흰 사자머리와 구레나룻을 휘날리며 찾아와 전시를 돌아본 후 뭉크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뭉크 씨도 내가 체험한 걸 겪게 될 겁니다. 적이 많아질수록 친구도 많아진다는 걸!”
뭉크는 입센의 희곡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고 특히 그중 ‘유령’의 주인공을 자신과 동일시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제 의식과 스타일이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불안과 소외감을 더욱 느낄 때 그다음 작품에서 타협하지 않고 더욱 강한 작품으로 정면돌파하는 입센의 행적에서 영감을 받았다.
우리는 뭉크의 ‘비명’이 녹아 들어간 이모티콘에서 그것을 상기할 수 있을까? 그러기에는 너무 귀엽게 표현되어 도리어 우리가 지금 일상에서 느끼는 불안과 공포도 희석되는 느낌이다. 물론 그 덕분에 힐링의 효과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출처] :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 8.뭉크의 『비명』의 4가지 버전 - “끼야악” 불안한 현대인 비명, 휴대폰 이모티콘으로 소환 /중앙Sunday, 2021. 6. 5.
9.존 에버렛 밀레이의 유화 『오필리아』(1852)
- 햄릿의 학대에 미쳐버린 연인, 영화·사진·뮤비로 부활
밀레이의 ‘오필리아’
① 존 에버렛 밀레이의 유화 ‘오필리아’(1852), 런던 테이트 브리튼 소장. [사진 테이트]
“그 애는 화관을 늘어진 나뭇가지에 걸려고 기어오르다, 심술궂은 가지가 부러져 화관과 함께 흐느끼는 시냇물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는구나. 옷이 활짝 펴져서 잠시 인어처럼 물에 떠 있는 동안 그 애는 자신의 곤경을 모르는 사람처럼, 아니면 본래 물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존재처럼, 옛 노래 몇 절을 불렀다더라.
그러나 오래지 않아 물에 젖어 무거워진 옷은 그 가엾은 것을 아름다운 노래에서 진흙탕의 죽음으로 끌어들이고 말았다는구나.”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1601)에서 햄릿의 어머니인 덴마크 왕비가 햄릿의 연인이었던 오필리아의 죽음을 알리는 대사다. 오필리아는 순수한 마음으로 햄릿을 사랑했지만, 햄릿은 숙부와 재혼한 어머니에 대한 배신감으로 여성 혐오에 빠져 애먼 오필리아를 정신적으로 학대했다.
그러던 햄릿이 실수로 오필리아의 아버지까지 죽이자 오필리아는 그간의 고통이 폭발해 미쳐버렸고, 머리에 꽃을 꽂고 횡설수설 노래를 부르며 다니다가 이렇게 죽음에 이른 것이다.
사실 원작에서 오필리아는 나오는 장면도, 대사도 그렇게 많지 않다. 하지만 아버지의 설교에 순종하고 남친의 폭언에 눈물밖에 흘리지 못하던 가부장제의 모범 규수가 미쳐버린 후 대담한 노래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울분을 드러내고 슬픈 해방구인 죽음으로 전진하는 모습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수많은 화가들이 오필리아를 화폭에 담은 이유다. 지난주 개봉한 클레어 맥카시 감독의 영화 ‘오필리아’(2018)처럼 ‘햄릿’을 비틀어 오필리아를 주인공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 영화의 첫 장면에서 오필리아는 수초가 우거진 냇물에 꽃을 쥐고 누워 반쯤 떠 있다.(사진4)
수많은 오필리아 그림 중에서 19세기 영국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1829~1896)의 그림 ‘오필리아’(1852)를 오마주한 것이다.(사진1)
이 영화뿐 아니라 로렌스 올리비에 감독·주연의 고전적인 ‘햄릿’ 영화(1948)에서도 오필리아 장면은 밀레이의 그림을 따랐다. 또 ‘햄릿’과 관계없는 ‘멜랑콜리아’(2011) 같은 영화 속 장면(사진3)이나 패션 사진, 국내외 가수들의 뮤직비디오에서도 밀레이의 ‘오필리아’를 차용했다.
다른 화가들도 오필리아를 그렸는데 왜 유독 밀레이의 ‘오필리아’가 유명하고 영화로, 사진으로, 뮤비로, 끊임없이 부활하는 걸까?
젊은 화가·모델의 고생과 열정이 만든 그림
④ 지난주 국내 개봉한 영화 ‘오필리아’(2018)의 한 장면.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일단 밀레이의 그림은 오필리아의 죽음을 묘사한 ‘햄릿’의 시적인 대사를 절묘하게 구현해냈다.
물에 반쯤 떠서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눈길과 살짝 벌린 입, 가볍게 펼친 손은 “자신의 곤경을 모르는 사람처럼” 죽음에 초연한, 아니 오히려 죽음을 기꺼이 맞아들이는 모습이다.
이승의 온갖 번뇌를 씻어 보내고 “본래 물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존재처럼” 태아일 때 양수로 접했던 정다운 물로 돌아가는 것이다. 게다가 사방에 있는 꽃 덤불과 수초가 마치 오필리아를 에워싸고 다정하게 감싸는 듯하다.
싱그러운 냄새와 촉감까지 느껴질 듯한 수풀의 정밀한 묘사 덕분에 오필리아가 느낄 자연의 위로는 화면 너머 관람자들에게까지 전달된다.
이처럼 밀레이의 ‘오필리아’에서 자연은 그저 배경이 아니라 그림의 또 다른 주인공으로서, 오필리아의 비극을 아름답게 승화시킨다. 바로 이 점이 다른 오필리아 그림과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심지어 밀레이는 그림을 그릴 때 오필리아부터 그리지 않고 냇물과 수풀부터 그렸다! 당시 불과 20대 초반이었던 밀레이는 다른 젊은 화가들과 함께 반항적인 ‘라파엘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 그룹을 결성한 상태였다.
미술 아카데미에서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전성기 르네상스 거장 라파엘로의 화법을 따르는 대신 그 이전의 중세와 초기 르네상스 화법을 본받자는 그룹이었다. 그 특징은 인물은 소박하고 진솔하게, 수풀 등 자연 묘사는 충실한 관찰을 바탕으로 꼼꼼하게 표현하는 것이었다.
밀레이는 1851년 여름, 런던 근교 서리(Surrey)에서 ‘오필리아’의 배경으로 적당한 강둑을 찾아 현장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한나절 짜리 사생대회가 아니라 몇 달에 걸쳐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은 결코 우아하고 한가로운 일이 아니었다.
밀레이는 그림을 그리며 날파리, 동네 주민, 거센 바람 등과 싸워야 했다. 그가 후원자에게 보낸 편지 일부를 보자. “이곳의 파리는 더 근육질이고 사람 살에 달려드는 걸 좋아하지요…게다가 바람이 거세서 물에 처박힐 뻔했어요. 오필리아가 진흙탕의 죽음으로 가라앉을 때 느꼈던 게 뭔지 알겠더라고요.
오필리아와는 달리 파리떼에게 먹혀 완전히 사라지는 느낌까지 추가해서 말입니다…
살인자에게 교수형 대신 이런 환경에서 그림을 그리라고 시켜도 되겠어요.”
이런 고생 끝에 밀레이는 마침내 극도로 핍진하고 생명력 넘치는 시냇가 풍경을 그려냈다.
다음엔 주인공 오필리아를 그릴 차례였다.
그는 자신의 런던 스튜디오로 돌아와 모델이 욕조에 담긴 물속에 누워 포즈를 취하게 했다.
모델은 모자 가게 점원으로 일하다 라파엘전파 화가들에게 스카우트되어 뮤즈로 떠오른 19살의 엘리자베스 시달.
밀레이는 빈티지 숍에서 은실 자수가 놓인 옛 드레스를 4파운드에 사서 시달에게 입혔다.
또 겨울이라 욕조 아래에 불 켠 램프를 여럿 놓아 물이 계속 따뜻하도록 했다.
그런데 하루는 램프가 평소보다 일찍 꺼져서 물이 차갑게 식었다. 하지만 그림에 몰두한 밀레이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시달은 얼어 죽을 지경인데도 화가의 몰입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말없이 계속 포즈를 취했다.
모델로서의 직업의식뿐 아니라 시달 자신도 화가 지망생으로서 예술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이렇게 젊은 화가와 모델의 고생과 열정이 만들어낸 작품이 ‘오필리아’였던 것이다.
‘햄릿’에서 오필리아는 속물적인 아버지, 탐욕스러운 왕, 권력과 쾌락의 유혹에 약한 왕비, 냉소적인 남친에 둘러싸인, 홀로 앳된 순수함을 지닌 인물이다. 그 때문에 냉혹한 세상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죽는다.
하지만 죽음으로 인해 그 순수는 더는 상처받지 않는 불멸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밀레이의 ‘오필리아’가 극도로 애처로우면서도 기이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것은 그래서다.
오필리아를 환영하듯 둘러싼 냇가의 수풀과 수초들이 그 역설적인 치유와 평화의 분위기를 더해준다.
최근 국내 개봉 영화도 밀레이 그림 오마주
② 톰 헌터의 사진 ‘집으로 가는 길’(2000). [사진 톰 헌터 웹사이트]
그렇기 때문에 밀레이의 ‘오필리아’에 영감 받은 후대 작품을 보면 그 비극성과 역설적 평화로움 중 한쪽에 초점을 맞추거나 두 가지를 새로운 맥락에서 섞거나 한다. 후자의 경우로 사진작가 톰 헌터의 ‘해크니’ 연작 중 ‘집으로 가는 길’(사진2)이 있다.
‘해크니’ 연작은 런던 동부의 서민 동네에서 일어난 사건사고를 낭만적인 옛 명화에서 따온 구도로 재현해 아이러니를 창출하는 게 특징이다. 그중 ‘집으로 가는 길’은 새벽에 귀가하다 운하에 잘못 빠져 숨진 젊은 여성의 사건을 재현한 것이다.
오필리아와 달리 낭만적이지 못한 현실 배경에 낭만적이지 못한 허무한 죽음. 하지만 그럼에도 오필리아처럼 해탈에 이른 것 같은 익사자의 고요한 얼굴. 이 아이러니가 매력적이지만, 정작 어떤 마음으로 죽었는지 알 길이 없는 고인을 생각하면, 위험성도 느껴지는 작품이다.
③ 영화 ‘멜랑콜리아’(2011)의 한 장면. [사진 iMDb]
대중문화의 경우, 밀레이 ‘오필리아’에서 자연이 주는 힐링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 많다.
파올로 로베르시 등 여러 유명한 패션 사진작가들이 이 그림을 그런 맥락에서 사진으로 재현했다.
우리가 자꾸 잊곤 하는 사실은, 인간은 자연과 떨어질 수 없고 무엇보다 자연에서 치유의 힘을 얻는다는 것이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영화 ‘멜랑콜리아’에서, 자신의 결혼식 날에도 지독한 우울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주인공은, 밀레이의 ‘오필리아’처럼 흐르는 냇물에 몸을 맡기고 수련과 수초 사이로 고요히 흘러가는 환상에 빠진다.(사진3)
물에 유유히 떠내려가듯 온갖 마음의 고통과 부질없는 근심에서 해탈하는 것, 싱그러운 자연의 품에 안겨 치유 받는 것, 이러한 것을 현대인이 갈망하는 한 밀레이의 ‘오필리아’의 인기와 재창조도 계속될 것 같다.
[출처] :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 9.존 에버렛 밀레이의 유화 『오필리아』(1852) - 햄릿의 학대에 미쳐버린 연인, 영화·사진·뮤비로 부활 /중앙Sunday, 2021. 7. 24.
10.앙리 루소의 『꿈』(1910)
- ‘괴작’ 조롱받던 독학 화가, 피카소의 영웅 되다
앙리 루소의 정글 그림
1 앙리 루소의 ‘꿈’(1910), 캔버스에 유채, 204.5x298.5㎝. [사진 뉴욕 현대미술관 MoMA]
“우리는 이국적이면서 무섭지 않고 색이 다채로운 정글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앙리 루소를 참고하는 게 안성맞춤이었죠. 그는 정글을 아이와 같은 눈으로 그렸으니까요. 그는 스스로를 사실주의 화가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한 번도 정글에 가본 적이 없었지요. 그의 그림이 나이브(naïve·천진난만)한 건 그 때문인 것 같아요.”
미국 애니메이션 ‘마다가스카’(2005)의 프로덕션 디자이너가 한 말이다.
뉴욕 동물원에 살던 네 마리 동물이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섬에 불시착해서 벌이는 소동인데,
‘뉴요커’ 동물들이 낯선 정글로 들어가는 장면(사진3)이 특히 인상적이다.
배경에 빽빽한 온갖 나무와 풀들이 다 같은 녹색이 아니고 청색이 감도는 비리디언부터 황색이 감도는 올리브그린까지 다채롭다. 잎사귀 모양도 가지각색이고 리드미컬하게 펼쳐져 있다. 이 발랄한 정글 장면은 세관원 출신으로 독학해서 ‘나이브 아트(naïve art)의 대가’가 된 앙리 루소(1844~1910)의 유산이다.
루소의 ‘꿈’(사진1)과 ‘뱀을 부리는 사람’을 보면 일단 그 풍부한 녹색의 다양함에 감탄하게 된다.
‘꿈’ 하나에 사용된 녹색의 종류만 50가지에 달한다고 한다. 각자 다른 녹색을 부여받은 이 식물들은 모두 자신이 주인공인양 꽃과 잎을 빳빳이 치켜들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만약 루소가 소원대로 정규 미술학교를 나왔다면 절대 이렇게 그리지 말라고 교사들이 가르쳤으리라.
하지만 루소의 그림에서는 부자연스럽게 정면을 보는 식물들이 기묘하게 어우러져 아름답게 합창을 한다.
그가 색채와 형태의 음악적 배열에 직관적으로 뛰어났기 때문이다.
미국 애니메이션 ‘마다가스카’(2005)의 한 장면. [사진 스크린 캡처]
루소의 그림에 당대 사람들은 대부분 비웃었지만, 서양미술의 보수적 전통을 깨고자 한 파블로 피카소(1881~1973) 같은 젊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열광했다.
그들 덕분에 말년에 비로소 빛을 본 루소는 그 후 수많은 예술 작품에 영향을 끼쳤다.
‘두아니에 루소(Le Douanier Rousseau·세관원 루소)’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그의 인생 자체가 영감의 원천이다. 세관원으로 일하며 마흔을 넘긴 나이에 화가로 데뷔해 투잡을 뛰고, 거의 쉰이 다 됐을 때 비로소 전업 화가가 되어 인생 제2막을 열었지만 계속 조롱만 받다가, 예순이 넘어 비로소 아방가르드 예술의 영웅이 된 그의 인생 말이다.
루소는 스물이 되기 전에 군대에 갔는데, 이때 멕시코에 파병돼 갖가지 모험을 했다고 훗날 사람들에게 자랑스레 말하고 다녔다. 루소가 말년에 얻은 팬들 중 ‘미라보 다리’로 유명한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1880~1918)는 이 말을 믿고 루소에게 즉흥시를 바칠 때
“그대의 그림은 멕시코에서 본 광경을 담고 있다-초록의 바나나 잎 사이로 보이는 붉은 태양”이라고 읊었다.
하지만 루소가 멕시코에 갔다는 건 순 허풍이었다. 그는 프랑스의 지방에서 군 생활을 했고, 한 번도 고국을 떠나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가 입대한 데에는 더 남루한 진실이 있었다.
자신이 일하던 변호사 사무실에서 푼돈을 훔치다 걸린 뒤 감옥살이를 줄이기 위해 군대에 들어갔던 것이다.
애니메이션 ‘마다가스카’에도 영향
루소는 프랑스 북부의 소도시 라발에서 태어났다. 그가 어릴 때 부친이 투기로 전 재산을 날리는 바람에 넉넉했던 집이 몰락했고, 그는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게 됐다. 이것이 루소에게 평생의 깊은 한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멕시코 이야기 같은 환상과 허풍으로 도피하곤 했을 것이다.
사실 루소는 ‘나이브’라는 단어만으로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사람이었다.
대체로 순진하고 사람들에게 친절했지만, 그 순진한 얼굴로 거짓말을 할 때도 있었다.
미술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것과 가난에 콤플렉스가 많았으며, 가끔 그게 실생활과 그림에서 폭력적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그의 정글 그림에는 무심하게 평화로운 식물들 사이에서 맹수가 피를 뿌리며 먹이를 물어뜯거나 사람을 공격하는 등의 은근 잔혹한 장면도 많다.
하지만 루소가 절대 거짓말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자연과 그림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진지함이었다.
20대 중반에 제대해 결혼을 하고 파리 센 강 부두 세관에 하급 공무원으로 취직하면서 박봉이나마 생활이 안정되자, 그는 상사의 허락을 얻어 직장에서 남는 시간에 세관 주변의 자연을 그리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월급쟁이라면 직장 주변을 그리기는커녕 쳐다보기도 싫으련만, 그는 꼼꼼히 관찰해 평화로운 풍경으로 그려냈다. “자연을 관찰해 그 관찰한 것을 그리는 일만큼 행복한 것은 없습니다.”
그는 훗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루소의 ‘카니발 저녁’(1886), 캔버스에 유채, 106.9x89.3㎝. [사진 필라델피아 미술관]
그러던 그가 미술계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마흔이 넘은 1886년 앙데팡당(Indépendants) 전시에 참가하면서였다. 이 전시는 왕립 아카데미의 정기 전시인 살롱의 보수적 기준에 반항하는 의미를 담아 조르주 쇠라 등 젊은 화가들이 조직한 것으로, 누구든 약간의 참가비만 내면 작품을 전시할 수 있었다.
그래서 파격적인 작품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루소의 ‘카니발 저녁’(사진2)은 특히 화제가 됐다.
어린애 그림 같다고 모두 웃어댔던 것이다.
현대의 눈으로 보면 소박한 형태와 세련된 색채의 조합이 무척 매력적이지만 말이다.
그 후 루소는 앙데팡당 전에 꾸준히 작품을 냈다. 그의 그림은 유명해지기 시작했는데, 좋은 쪽이 아니었다.
너무 못 만들어 ‘괴작’ 칭호를 받은 영화가 수많은 리뷰를 끌어모으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이것이 못마땅했던 앙데팡당 관계자 중에는 루소의 출품을 금지시키려는 사람까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앙데팡당의 오픈마인드를 훼손하게 된다는 반박 덕분에 루소는 계속 작품을 출품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젊은 전위 예술가 중에 그의 작품이 혁신적이라고 호평을 하는 이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여기에 용기를 얻어 루소는 쉰이 가까워진 1893년에 마침내 세관에서 조기 은퇴해 전업 화가의 길로 들어선다.
그가 1891년 처음 시도했고 예순이 된 1900년대 중반부터 집중적으로 그린 정글 그림은 특히 전위 예술가들의 지지를 받았다.
식물원·박물관서 영감 얻어 그림 그려
그런데 파리를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는 루소는 ‘동물의 왕국’ TV 다큐멘터리도 없던 시절에 무엇을 보고 정글 그림을 그렸을까. 그는 동물 박제와 열대식물 온실이 있는 파리 식물원과 파리 자연사박물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비록 박제가 되거나 화분에 담긴 동식물이었지만, 루소는 그들에게 혼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자신이 화폭에 옮겨 담는다고 생각했다. 마침 원시미술과 아프리카 미술 등에서 활로를 찾던 전위 예술가들은 그런 루소를
‘파리의 천진난만한 원시인 예술가’로 받아들였다.
명성을 갈구하던 루소는 기꺼이 그들의 숭배에 응했지만, 그 숭배의 맥락에 동의한 건 아니었다. 1908년 피카소가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루소를 위해 파티를 열었을 때의 일이다. 그때 루소는 피카소를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 둘은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화가들입니다. 선생은 이집트 스타일에서 최고이고 나는 현대 스타일에서 최고죠.”
피카소를 비롯해 거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이게 대체 뭔 소리지?’라고 생각했다.
이 말은 나이브 아트 화가다운 천진난만한 헛소리였을까, 아니면
‘너희는 나를 영감을 주는 원시인쯤으로 생각하지만 나도 모던 아티스트다!’라는 의뭉스러운 항변이었을까.
아무튼 루소는 자신을 지지하는 젊은 예술가들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대작 ‘꿈’을 그려서 1910년 앙데팡당 전에 발표했다. 그해 가을 다리의 상처가 덧나 합병증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이 그림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고 말았다. 루소 최후의 그림이 ‘꿈’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의 삶은 가난·콤플렉스·허언·남들의 비웃음으로 얼룩졌지만, 그는 그럼에도 꿈꾸기를 멈추지 않았다.
젊은 전위 예술가들의 눈에 띄지 않고 무명으로 일생을 마감했어도 그는 후회하지 않고 계속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그림을 그림으로써 꿈을 실현하는 것이 그의 삶의 원동력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삶 자체가 꿈을 잃어가고 있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출처] :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 10.앙리 루소의 『꿈』(1910) - ‘괴작’ 조롱받던 독학 화가, 피카소의 영웅 되다 /중앙Sunday, 2021. 8. 21.
9.이형록의 『책가도』(19세기)
- 정조가 사랑한 책가도, 현대 미술·디자인에 스며들다
조선시대 책장 그림
“화원 신한평과 이종현 등은 각자 원하는 것을 그려 내라는 명이 있었으면 책거리(冊巨里)를 마땅히 그려 내야 하는 것이거늘, 모두 되지도 않은 다른 그림을 그려내 실로 해괴하니 함께 먼 곳으로 귀양 보내라.”
서가 풍경을 그린 한국의 독특한 채색화 ‘책거리’. 미술사학자 강관식에 따르면, 옛 문헌에 ‘책거리’라는 말이 처음 보이는 것은 정조 12년(1788) 『내각일력』(규장각일기)에서다. 이 단어가 등장한 계기 자체가 흥미롭다.
국왕 직속의 최고 화가들인 차비대령화원이 정기 시험에서 책거리를 그려내지 않자, 책거리의 열렬한 애호가인 정조가 크게 꾸짖은 것이다. 본인이 “그림 주제는 자유다”라고 해놓고선 말이다!
이탈리아 선교사 그림에 영향 받아
사진 1. 이형록의 ‘책가도’(19세기). [중앙포토]
이런 보스를 만나면 부하 직원은 고통이다. “응, 알아서 해~”라고 해 놓고는 “알아서 하라면 알아들었어야지!”라고 뒤통수를 치니 말이다. 이는 정조의 책거리 사랑이 그토록 컸다는 것과 흔히 ‘개혁 군주’로 알려진 그에게도 꼰대 기질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재미있는 일화다.
정조는 책거리를 ‘책가도(冊架圖)’라고도 불렀는데, 초기의 궁중 책거리는 모두 서가에 정돈된 상태의 책과 기물을 묘사했기 때문이다. (사진1)
아마도 책거리는 한국의 옛 그림 중에서 현대미술과 디자인에 가장 많이 차용되는 그림일 것이다. 한 예로, 2019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디자인 위크 행사로 열린 ‘한국공예의 법고창신-수묵의 독백’ 전시에는 책가도를 꼭 닮은 전시대가 등장했다.(사진3) 예술감독을 맡은 정구호 디자이너의 아이디어였다. 그는 당시에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이탈리아 선교사로 청나라에 정착해 궁중 화가를 지낸 카스틸리오네가 투시법과 명암법을 통해 그린 그림이 우리 책가도의 원류라고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책가도는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았다는 얘기다.
때문에 이탈리아에서 우리만의 전통 책가도를 보여주자 생각했고 그 자체가 너무 화려하면 전시된 작은 소품들이 가려질 수 있어 투명한 플라스틱과 백동 장석만으로 제작했다.”
정 감독의 말처럼 18세기에 처음 나타난 궁중 책가도는 서양식 투시원근법을 받아들였다.
내용 또한 중국에 온 이탈리아인 주세페 카스틸리오네(1688~1766)를 통해 전해진 유럽의 ‘호기심의 방(Cabinet of Curiosities)’ 또는 ‘분더카머(Wunderkammer)’의 영향을 받았다.
‘호기심의 방’은 진귀한 물건을 모아놓은 작은 박물관이나 그것을 그린 그림을 가리킨다. 이렇게 20세기 이전에 드물게 서구 영향으로 탄생했으면서 한국 고유의 양식으로 발전한 독특하고 국제적인 그림인 것이다.
책가도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정조의 사랑과 후원 덕분이었다. 『홍재전서』에 따르면,
심지어 1791년 정조는 어좌 뒤에 일월오봉도 병풍을 놓는 관례를 깨고 대신 책가도 병풍을 펼쳐놓기도 한다.
그리고는 대신들에게 혹시 진짜 책장으로 착각한 사람 있냐고 묻고 “사실 책이 아니라 그림일 뿐이다”
하고 함께 웃기도 한다. 동아시아 회화 전통을 벗어난 서양화적 투시원근법의 3차원 착시 효과를 즐긴 것이다.
하지만 곧이어 정조는 이렇게 말한다.
“요즈음 사람들은 글에 대한 취향이 완전히 나와 상반되니, 그들이 즐겨 보는 것은 모두 후세의 병든 글이다. 어떻게 하면 이를 바로잡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이 그림을 만든 것은 대체로 그 사이에 이와 같은 뜻을 담아 두기 위한 것도 있다.”
그 이듬해 그가 단행할 ‘문체반정’의 불길한 그림자를 던진 것이다.
사진 2. 홍경택의 ‘서재 ’(1995~2001). [사진 홍경택]
책가도처럼 국제적이고 새로운 그림을 애호하고 발전시킨 한편, 거기에 ‘문체반정’이라는 폐쇄적이고 복고반동적인 이념을 담는 것. 대신들과 트롱프뢰유(눈속임그림) 효과를 즐기는 여유가 있는가 하면, 자신의 취향이 아닌 글은 “병든 글”로 배격하며 말 안 해도 알아들으라고 강요하는 것. 이것이 정조의 양면적이고 복합적인 면이다.
한편으로 이 일화가 알려주는 또 하나의 사실은 책가도의 생산자가 뛰어난 테크닉의 궁중 화원들이었으며 소비자는 왕인 정조와 사대부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초기 책거리인 책가도는 우리가 흔히 부르는 대로 ‘민화(民畵)’라고 할 수 없었다. 학자들은 책가도를 궁중화로 분류하고 그 후 민간에 퍼진, 보다 자유분방한 도상의 책거리를 민화로 분류하곤 한다.
궁중화풍 책가도에는 책과 지식에 대한 선비들의 오랜 존경과 함께 사물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알고자 하는 개방적인 사고도 담겨 있다. 그래서 책과 벼루, 연적 같은 문방구 외에도 많은 물건이 등장한다.
고대 중국의 청동 제기, 청나라 시대 홍유(紅釉) 자기, 산호 가지에 매달린 회중시계와 안경 등 서양에서 온 신문물, 부처의 손을 닮은 남방의 열매 불수감(佛手柑) 같은 진귀한 과일 등등…. 모두 당시 조선 상류층이 동경하던 물건들이다.
이와 관련해 미술사학자 고연희는 이렇게 말한다. “책거리의 주제는 진귀한 물건들을 보고자 또 소유하고자 하는 물질적 욕망이다. 이 욕망은 도시 문화의 발달과 문화적 물품의 생산, 그리고 자본의 발달 등 사회적 배경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19세기가 되고 사대부 외에 신흥 부유층이 나타나면서, 그리고 그들 또한 “하나 갖추고 있어야 축에 빠지지 않는” 책거리 그림을 열망하면서, 책거리가 드디어 민중의 그림인 민화의 영역으로 퍼지게 되었다.
민화풍 책거리에서는 서양식 투시원근법이 사라지고, 책과 기물이 마치 둥둥 떠 있는 듯 여백에 배치되거나 원근법이 무시된 채 쌓여있다.
이것이 그림 기법의 퇴화가 아니라 대중의 취향에 맞춘 변화였다는 것은 차비대령화원 출신 이형록(1808~1883)의 그림 변천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이형록은 57세인 1864년에 이응록으로 개명했는데, ‘이응록’이라는 후기 이름으로 내놓은 책거리 병풍을 보면 서가가 사라지고 책과 기물만 공중에 둥둥 떠 있다.
더 이상 서양식 투시원근법을 사용하지 않고 전통적인 평행원근법을 사용하고 있다.
1960년대 들어 독특한 도상 재조명
사진 3. 정구호의 밀라노 디자인 위크 전시 ‘한국공예의 법고창신-수묵의 독백’의 전시대. [중앙포토]
궁중화 책가도와 달리 민화 책거리는 표현이 훨씬 자유분방하고 기발하다.
반면에 묘사된 물건들은 책가도처럼 낯선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을 반영하는 기물보다는 전통적으로 출세와 신분상승, 부귀영화의 기복적 상징으로 쓰인 과일과 꽃, 상서로운 동물이 주류를 이룬다.
근대 시민으로 발전하지 못한 당시 신흥부유층의 한계를 보여주는 셈이다.
그 후 책거리 전통은 20세기 중반 한국전쟁 등의 격동을 거치며 그 맥이 잠시 끊겼다가 1960년대에 와서 민속연구가 조자용(1926~2000)에 의해 재조명받으며 다시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90년대 말부터 책가도의 국제적 기원과 독특한 도상이 학문적으로 부각되면서, 현대미술가들과 디자이너들이 본격적으로 책거리를 작품에 응용하기 시작했다.
책거리에서 영감을 받아 창조적으로 발전시킨 여러 현대미술 작품 중에 홍경택의 회화 ‘서재’ 시리즈가 있다. (사진2) 작가는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전통 책가도를 보며 무엇보다도 그 구조에 매혹되어서 ‘서재’ 시리즈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책은 수직적·수평적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수평은 자연과 합일, 종교 등과 연관될 수 있고, 수직은 ‘개념을 세운다’는 식으로 인간이 정립하는 이념 개념 등과 연관될 수 있다. 그런 책들이 모여 하나의 우주를 이룬다. 초기작 중 책이 빽빽하게 들어찬 그림들은 인간의 지식이 만든 바벨탑에 대한 경외감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20여년간 이 주제를 발전시켜 오면서 후기로 오면 정보의 홍수와 정보의 독점을 다루는 그림도 있다.”
홍경택의 ‘서재’ 연작은 해외에서 특히 인기가 많다. 개항 이전에 드물게 국제적 영향을 받은 한국 고유의 그림 책거리가 이제 다시 현대미술가와 디자이너의 창조적 변용을 통해 세계와 만나고 있는 셈이다.
[출처] :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 9.이형록의 『책가도』(19세기) - 정조가 사랑한 책가도, 현대 미술·디자인에 스며들다 /중앙Sunday, 2021. 9. 25.
10.마그리트의 『빛의 제국』(1953-4)
- 낮·밤 알 수 없는 ‘빛의 제국’ 선악 공존 ‘가면남’ 심리 상징
‘오징어 게임’ 대해부
영감의 원천-‘오겜’의 명화 코드
②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1953-4). [사진 페기구겐하임 컬렉션]
넷플릭스 사상 최대 흥행작이 된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경찰 준호(위하준)는 실종된 형을 찾을 단서를 얻기 위해 형이 머물렀던 고시원을 찾아간다. 비좁은 책상 위에 라캉과 니체의 철학서와 함께 미술책이 여러 권 있는데,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1898~1967)의 화집이 특히 눈에 띈다.
책의 표지는 그의 대표작 ‘빛의 제국’이다. 책상 옆에 또 다른 버전의 ‘빛의 제국’ 그림엽서가 붙어있고, 창문에도 커다란 ‘빛의 제국’ 그림이 붙어있다.
실종된 형은 왜 ‘빛의 제국’(사진2)에 꽂혔을까? 드라마 후반부에서 형이 바로 456억 원짜리 데스게임을 주관하는 검은 가면의 남자 프론트맨(이병헌)임이 밝혀진다. 전직 경찰이었던 그는 몇 년 전 이 게임에 참가해 우승자가 되었고 지금은 게임의 주관자가 된 상태다. 이 그림은 그것을 암시하고 있을까.
기이한 느낌 초현실주의 기법 영화미술
① ‘오징어 게임’에서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이 나오는 고시원 장면. [사진 넷플릭스]
황동혁 감독은 중앙SUNDAY의 이같은 질문에 다음과 같은 답을 보내왔다.
“그게 빛의 제국인데 밤인지 낮인지 알 수 없는 상태죠. 화창한 하늘 아래 야경의 땅. 그게 이 세상에 대한 프론트맨의 시선이며 그의 심리상태에 대한 하나의 상징입니다.”
‘빛의 제국’ 그림 상단은 햇빛 가득한 대낮의 하늘이지만 그림 하단의 집과 가로수는 햇빛의 영향을 받지 않는 밤의 상태다. 이것을 보며 프론트맨은 세상이 아무리 밝은 공정과 평등을 외쳐도 그로부터 소외되어 어둠 속에 방치된 사람들이 있다는 걸 상기했을 수 있다.
또는, 햇빛에도 밤에 머물러 있는 집이 성악설의 인간 내면 같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외국 네티즌 중에는 ‘빛의 제국’이 선악이 공존하는 프론트맨의 내면을 상징하거나, 무엇이 빛이고 무엇이 어둠인지 혼란스럽게 된 그의 심리를 나타낸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이것을 바탕으로 프론트맨이 사실 이 게임을 분쇄하기 위해 잠입한 스파이라거나, 또는 스파이였다가 도리어 이 게임에 설득당해 추종자가 되었다는 등의 가설을 펼치고 있다.
극 중에서 프론트맨은 이렇게 말한다.
“이 게임 안에선 모두가 평등해. 참가자들은 모두 같은 조건에서 공평하게 경쟁하지. 바깥세상에서 불평등과 차별에 시달려온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싸워 이길 마지막 기회를 주는 거야.”
얼핏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사실 모순이다. 이 게임은 패배할 확률이 훨씬 높고 패배의 대가가 너무 크게 설계되어
있어서, 벼랑 끝으로 내몰린 사람들만이 ‘자발적으로’라는 명목으로 어쩔 수 없이 참가하게 된다.
또한 게임의 룰은 ‘VIP’ 관람객의 재미를 위해 무작위 추첨 대신(운이 진정한 평등인지도 모르겠지만) 물리력과 패 가르기가 작용하도록 되어 있어 약자에게 불리하다.
한 마디로 ‘현실의 대안’이라는 이 게임은 부분적으로 볼 땐 공평한 것 같지만 전체로 보면 불공평의 극치인 파라독스다. 그림 상단과 하단을 따로따로 봤을 때는 이상할 게 없지만 전체로 보면 모순인 그림 ‘빛의 제국’처럼.
‘빛의 제국’에서 밤거리 풍경에 대낮의 하늘을 병치시킨 것처럼 어떤 대상을 상식적으로 있어야 할 곳이 아닌 이질적인 환경으로 옮겨서 모순되는 것과 결합시키는 것을 초현실주의 미술의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이라고 한다.
〈중앙SUNDAY 2021년 3월 20일 본 연재 “흰 천 뒤집어쓰고 키스, 코로나시대 사랑법 예견한 듯” 참고〉 충격과 기이한 느낌을 주는 데페이즈망 기법은 ‘오징어게임’의 영화미술 전반에도 나타난다.
채경선 미술감독은 코리아중앙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유년 시절에 하던 게임들이 나오니까 전체적인 비주얼에서 기존의 생존게임 영화들과 달리 동화적인 분위기를 보여주자는 게 저와 감독님의 목표였습니다. 일부러 기괴하게 만들려고 하진 않았어요.
하지만 선물 포장처럼 생긴 관 같은 의외의 오브제들과 동화적인 공간에서 잔인한 게임이 벌어지는 것 자체에서 오는 기괴함이 컸던 것 같아요.”
이런 면에서 ‘오징어 게임’의 미장센들은 전반적으로 마그리트적이라고 할 수 있다.
놀이동산 같은 파스텔톤, 몰입 극대화
③ ‘오징어 게임’의 계단 장면(사진 왼쪽)과 ④ M.C. 에셔의 ‘상대성’(1953). [사진 넷플릭스, 에셔 재단]
한편 황 감독에 따르면 ‘오징어 게임’의 미로 같은 계단 공간은 네덜란드 판화가 M. C. 에셔(1898~1972)의 ‘상대성’을 비롯한 계단 그림들을 참고한 것이다(사진 4).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공간을 예술적 기교와 수학적 이해로 구현해낸 에셔는 수많은 영화감독과 수학자·과학자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중에는 ‘인셉션’을 감독한 크리스토퍼 놀란, 지난해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수학자 로저 펜로즈가 있다.
〈중앙SUNDAY 2021년 2월 20일 본 연재 “‘수포자’ 에셔의 그림, 수학자 일깨워 노벨상 원동력 됐다” 참고〉
⑦ ‘오징어 게임’의 한 장면(사진 왼쪽)과 ⑧ 에드바르 뭉크의 ‘비명(절규)’(1893).
[사진 넷플릭스, 노르웨이 국립미술관]
외국 팬들은 그 밖에도 여러 유명 미술 작품을 ‘오징어 게임’의 장면들과 연관 짓고 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게임에서 다른 희생자의 피를 뒤집어쓰고 비명을 지르는 참가자의 모습에서 에드바르 뭉크의 유명한 ‘비명(절규)’을 떠올리기도 하고(사진 8),
5번째 게임에서 살아남은 3인이 독특한 삼각형 테이블에 앉아 만찬을 대접받는 모습에서 현대미술가 주디 시카고의 기념비적 설치미술 ‘디너 파티’를 연상하기도 한다.(사진 6)
이들 또한 감독과 미술감독이 실제로 참고한 것인지 아니면 단지 우연한 일치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아무튼 국제적으로 열띤 숨은그림찾기가 일어난다는 것은 ‘오징어 게임’의 미장센들이 그만큼 탐구할 것이 많고
공들여 만들어졌음을 방증한다. ‘오징어 게임’의 세계적 성공에 영화미술이 큰 몫을 한 셈이다.
⑤ ‘오징어 게임’의 만찬 장면(사진 왼쪽)과 ⑥ 주디 시카고의 ‘디너 파티’(1974-9).
[사진 넷플릭스, 미국 브루클린 뮤지엄]
사실 ‘오징어 게임’의 설정과 캐릭터는 별로 새롭지 않다는 지적이 많다. 궁지에 몰린 사람들이 목숨을 건 게임을 하는 설정과 여기에 사회 비판 메시지를 담는 것은 감독 자신이 영향받았다고 밝힌 일본 만화 ‘도박묵시록 카이지,’ 소설이 원작인 일본과 미국의 영화 ‘배틀 로얄’이나 ‘헝거 게임’ 등에서 이미 한 것이다.
또 강제해고 노동자 출신 주인공을 비롯해 탈북자, 실패한 엘리트 증권맨,
외국인 노동자 등 주요 캐릭터들의 상황과 성격도 전형적이고 평면적이다.
‘오징어 게임’의 강점은 그런 뻔한 요소들을 뻔하지 않게 한국의 옛 어린이 놀이와 결합했다는 것이다.
이런 놀이들은 외국인에게는 참신하면서도 난해하지 않고 한국인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데,
그게 죽음의 게임이 되니 시청자들이 더 강하게 몰입하고 잔혹한 아이러니를 느끼게 된다.
게다가 미술감독이 말한 대로 놀이동산을 연상시키는 화사한 파스텔톤 게임 공간들이 이런 몰입과 반어적 효과를 극대화한다.
진부한 요소와 독창적인 요소를 적절히 섞어서 전 세계 대중에게 보편적으로 어필하는 콘텐트를 만드는 일은 최근까지 미국의 전유물이었다. 그런 면에서 한국의 ‘오징어 게임’이 넷플릭스의 사상 최대 히트작이 된 것은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 그 배경에는 감독과 미술 감독이 서구 미술에서 받은 영감도 한몫을 했다.
그러니 ‘오징어 게임’의 성공을 보며 “역시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고 평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오히려 ‘오징어 게임’은 한국적인 동시에 한국적이지 않기 때문에, 즉 한국의 현실과 정서에 바탕을 두되 우리가 고정관념적으로 ‘한국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억지로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성공한 것이 아닐까.
[출처] :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 10.마그리트의 『빛의 제국』(1953-4) - 낮·밤 알 수 없는 ‘빛의 제국’ 선악 공존 ‘가면남’ 심리 상징 /중앙Sunday, 2021. 10. 30.
[출처] 『영감의 원천Ⅰ』다른 분야에까지 영향을 미친 미술이야기 - ▣로스코·김환기▣팝아트▣M.C.에셔▣르네 마그리트▣피카소▣마티스▣살바도르 달리▣에드바르 뭉크▣존 에버렛 밀레이▣앙리 루소|작성자 ohyh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