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21
11월26일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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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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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qv3LZtyLa4 (김만희 요셉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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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기도로 하느님께 몰입하면 매 순간이 기쁨과 감사의 성사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종말, 그리고 어쩌면 또 다른 종말인 우리 각자의 죽음 앞에서 취해야 할 태도를 집약하고 또 집약하셔서, 딱 한 문장으로 만들어 건네십니다.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복음 21장 36절)
그냥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하루 한 번씩, 일주일에 한 번씩 깨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늘 깨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늘 깨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권고 말씀을 두고, 그럼 대체 언제 자고, 언제 일하고, 언제 자질구레한 일상사를 해결하라는 것인가? 반문할 수도 있겠습니다.
늘 깨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밥도 먹지 말고, 사람들도 만나지 말고, 일상의 삶을 포기하며 살라는 말씀이 절대 아닙니다. 삶을 기도화하라는 말씀입니다. 일상을 기도하듯이 해나가라는 것입니다.
가족들의 아침 식탁을 준비하는 어머니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식탁을 차리는 것이 늘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의무감에서 억지로, 마지 못해 식탁을 차리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기쁜 얼굴로, 식사를 하게 될 가족들 한명 한명의 얼굴을 떠올리고, 그들을 축복하는 마음으로 식사를 준비하면, 그곳이 곧 늘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잠자리에 들 때, 아무 생각 없이, 아니면 잔뜩 취해서 주저리주저리 술주정을 하면서 잠자리에 드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진지하게 돌아보고 성찰하고 감사하면서, 성모송이라도 한번 바치고 잠을 청하는 것이 늘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갑작스레 난데없이 닥쳐온 큰 고통과 시련 앞에서도 절대 낙담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찾고자 노력하며,
고통과 시련을 통해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곧 늘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나타나는 것을 매 순간 볼 줄 안다면, 우리 마음이 갈망할 수 있는 모든 것도 거기서 얻게 된다. 현재는 늘 무한한 보배로 가득 차 있다. 기도로 하느님께 몰입하면 매 순간이 기쁨과 감사의 성사가 된다. 그 순간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뜻을 사랑으로 수용하면 성사가 이루어진다. 현 순간의 관상을 받아들이고 기도 중에 정직하고 솔직하게 자신을 대면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의 갈망을 채워주신다. 마음은 많이 사랑할수록 많이 갈망하고, 많이 갈망할수록 더 많이 받는다.”(장 피에르 코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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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한 해의 끝자락에서>
저희 한국 살레시오회 출신 몽골 선교사인 이호열 시몬 신부님께서 얼마 전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주관한 개발원조의 날 기념행사 때 영예로운 해외봉사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올 여름 잠시 몽골을 방문했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신부님은 마치 몽골 아이들의 자상한 친 아버지 같았습니다.
신부님의 머릿속은 어떻게 하면 몽골 아이들을 기쁘게 해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몽골 아이들 삶의 질을 높여줄 수 있을까 하는 고민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런 신부님이기에 아이들은 하루 온 종일 신부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역사상 유례없이 짧은 기간에 원조를 받던 국가에서 원조를 하는 국가로 탈바꿈한 나라가 우리나라라고 합니다. 그런데 경제적인 원조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원조가 인적 자원의 원조입니다.
하루하루 생사마저 보장되지 않는 위험한 분쟁 지역에서,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혹독한 가난과 그로 인한 고통뿐인 세상의 끝에서 자신의 삶 전체를 바쳐 헌신하고 있는 수상자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정말이지 큰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대표로 두 분의 소감을 듣게 되었습니다. 말씀 한 말씀 한 말씀이 무뎌질 대로 무뎌진 제 마음을 크게 건드렸습니다.
“나이 마흔이 되었을 때 인생을 좀 더 보람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고민하던 끝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큰 걱정과 두려움이 앞섰지만 여기 오기를 정말 잘 했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저를 이 오지의 전쟁터로 보내주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사람을 세우는 일이 세상을 세우는 일이며 사람을 구하는 일이 세상을 구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은 생애도 그곳 형제들을 세우고 구하는 일에 전념하겠습니다.
해외봉사 시작할 때 내가 뭔가 그들에게 준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큰 착각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실은 그들이 제 큰 사랑과 소중한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들 사이에서 다정한 친구가 되어 그들 사이에서 머물고 싶습니다.”
교회 전례력으로 우리는 한해의 끝자락에 서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은총의 선물인 ‘새해’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고민할 때입니다.
세상의 끝으로 나아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젊음을 바치고 있는 분들과 견주어 보니 그저 내 발밑만을 바라보며 나만을 위해 허덕이며 살아온 지난 삶이 정말 부끄럽습니다.
마지막 날에 저희에게 건네시는 주님의 메시지도 오늘따라 가슴을 치게 만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 21장 34절)
바오로 사도는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서 설명합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로마서 13장 12~13절)
우리가 전혀 준비하고 있지 않은 순간에 마치 섬광처럼 다가오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몸과 마음으로 준비해야겠습니다. 지나온 한 해 동안의 내 삶을 진지하게 한번 성찰해봐야겠습니다. 진흙탕처럼 흐려진 영혼의 상태를 진정시켜야겠습니다. 아직도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이나 사건이 있다면 하느님의 크신 자비에 맡겨드려야겠습니다. 좀 더 영적이고 좀 더 단정하고 품위 있는 하루를 살아가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좀 더 자주 성체 앞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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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그 도성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가 있어”
<어린양은 없고 어좌만 있는 이유>
인터넷 뉴스를 뒤지다 보니 나이지리아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단체인 보코하람에 납치됐다가 극적으로 탈출했다는 ‘18세 소녀의 고백’이란 기사가 올라와 있었습니다. 보코하람이 갑자기 학교에 들이닥쳐 276명의 아이를 납치해 숲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중에 목숨을 걸고 트럭에서 뛰어내려 극적으로 탈출한 몇 명의 아이 중 하나입니다. 이슬람교도들이 다 그렇게 나쁜 사람들은 아닙니다. 사실 대부분 사람은 평화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일부 극단주의자들이 그렇게 테러를 자행하는 것입니다. 테러는 자신의 힘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이들입니다. 그것이 종교라면 그들이 믿는 신의 모습이라면 그 신에게 누가 가고 싶겠습니까? 나를 이용하고 폭력을 행사하여 노예로 만드는 그런 무서운 곳이 아니겠습니까? 자신들이 아무리 천국이라고 하더라도 그곳은 지옥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가 ‘드록바가 신으로 불리는 이유’란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드록바는 코트디부아르 축구선수로서 2008년 첼시에서 뛸 때 축구선수로서 가장 큰 영예인 발롱도르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축구를 잘해서 신으로 불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한 사람으로서 남북 간의 종교전쟁을 종식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2005년 월드컵 예선전에서 코트디부아르가 본선 진출을 확정 지은 승리를 거둔 후 드록바는 “1주일만 전쟁을 멈추자”라는 이야기를 무릎 꿇고 TV 생중계에서 합니다. 이때 2002년부터 남부 가톨릭과 북부 이슬람 간의 전쟁이 치열했던 코트디부아르는 실제로 드록바의 이 발언을 계기로 잠시 전쟁을 멈췄다가 재개합니다.
이후 드록바는 2008년 발롱도르를 수상하자 그 상을 들고 코트디부아르로 갑니다. 이때 남부(베트) 지역 대통령이 축하만찬을 열어주며 생중계를 하는데 이때 드록바가 폭탄 발언을 합니다. “이 상은 코트디부아르 전체의 영광이니 이 상을 북부 이슬람에 전달하기 위해 대통령이 나와 같이 가줬으면 좋겠다.”
한 마디로 이건 6.25 전쟁 시절에 이승만에게 “나와 같이 김일성을 만나러 가자”라고 한 것과 다름없는 수준의 발언이었습니다. 당시 상황이면 잘못하면 즉결 총살당할 수도 있는 그런 분위기였지만, 당시 드록바는 코트디부아르의 스타가 아니라 그야말로 세계의 스타였고, 또 생중계 중이었으니 대통령도 못 하겠다고 할 수가 없어서 결국 진짜로 북부 반군 거점 도시에 같이 가게 되었습니다.
북부(부아케) 이슬람 도시도 그야말로 난리가 납니다. 이 계기로 남북 단일팀이 만들어졌고 또 그렇게 내전이 사라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더욱 놀라운 점은 드록바가 코트디부아르에 산 것은 겨우 5살 때까지고 그 이후엔 쭉 프랑스에서 살았던, 사실상의 프랑스인입니다. 그런데도 가난하고 전쟁으로 고통 받던 조국을 위해 분연히 일어선 것이죠. 이후에 어떤 기자가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행동하셨습니까?”라고 묻자 “그저 옳다고 믿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축구에 대해 문외한이던 자신의 조국을 2006년부터 3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올려놓은 것도 드록바이고, 내전을 멈추게 영향력을 행사한 것도 사실이며, 이후 조국 국민들의 교육/의료 및 복지 개선에 자신이 번 돈을 많이 기부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축구를 좋아하는데 드록바가 경기장에 입장할 때 땅에 손을 대고 성호를 긋고 들어가는 장면을 보며 저런 위대한 선수가 가톨릭 신자라는 것에 큰 감사를 느끼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내가 누군가를 이용해 자신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죽이고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이 있는 신이라면 하늘나라에서조차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기보다는 우리를 위해 내어주시는 모습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랑 자체이신 분의 모습이라야 우리가 안심하고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다행히 오늘 독서에서 보면 하늘나라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가 있다고 나옵니다. 어린양의 어좌에서는 생명수의 강이 흘러나와 온 도성을 풍요롭게 합니다. 그 생명수의 강 옆에는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번 열매를 맺습니다. 그 나뭇잎은 민족을 치료하는데 쓰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상징을 이해해야합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희생을 해야만 합니다. 요한 묵시록에 나오는 어린양은 목이 잘려 피가 나오고 있는 모습입니다. 즉 어린양은 죽은 것입니다. 그 죽어서 흘러내리는 피가 곧 생명수입니다.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온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 생명수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 생명수가 곧 그리스도의 살과 피, 혹은 성체와 성혈, 혹은 그냥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우리가 구원받았는데, 천상 예루살렘에서는 그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천상에서도 그리스도의 우리를 위한 희생은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참 신랑으로서 신부인 교회에 당신 생명을 계속 나누어주시는 분이 하늘나라에서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편안한 마음으로 그분께 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린양이 어좌에 앉아 군림하지 않고 그 백성을 위해 죽임을 당하고 있는 그런 곳이라면 안심하고 가도 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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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오늘은 교회의 전례력으로 한해를 마감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내일부터는 새로운 한해를 시작합니다. 교회의 전례력은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는 대림시기를 지내고 있으며, 대림시기는 예수님의 탄생 4주전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오늘은 예수님의 탄생 4주전입니다. 2022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올 한 해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감사드리며, 주님 앞에, 이웃들에게 부족한 점이 있다면, 잘못한 것이 있다면 겸손하게 뉘우치면서 주님의 자비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지난 10월에 대한민국에서는 이태원 참사가 있었습니다. 사고의 원인은 많은 인원이 모이는 것을 예상했지만 안전대책을 세우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예전에는 핼러윈 축제를 즐기러 오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예상했고, 경찰들이 질서유지를 했다고 합니다. 지난 2년 동안 코로나 팬데믹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 못했기에 이번에는 더 많은 인파가 몰릴 것을 예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시와 구청 그리고 경찰은 그에 대한 안전대책을 세우지 못했다고 합니다. 예전에도 별 일없이 끝났으니 이번에도 별일 없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백조가 호수 위를 우아하게 떠 있는 것은 물 밑에서 힘차게 노를 젓는 오리 발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중이 모이는 축제가 안전하게 마무리될 수 있는 것 또한 질서 유지를 위해서 활동하는 안전요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후의 약방문일 수 있지만 다시는 이런 참사가 생기지 않도록 책임있는 사람들은 안전대책을 숙지하고 실행하도록 해야 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봉화의 아연 광산의 갱도가 무너지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광부 두 사람이 매몰되었지만 9일 만에 극적으로 구조되었습니다. 캄캄한 갱도에서 9일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20년 경력의 노련한 광부의 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습기가 많은 갱도에서 위험한 것은 저체온증이라고 합니다. 광부는 입사한 지 5일된 신임광부와 비닐을 모아서 작은 천막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천막 안에서 지내면서 저체온증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주변에 있는 나무를 모아서 불을 피웠다고 합니다. 습기를 먹은 나무를 산소 용접기를 사용해서 불을 피웠다고 합니다. 늘 가지고 다니던 커피포트의 플라스틱 부분을 떼어내고 물을 끓였다고 합니다. 일하면서 먹는 커피믹스는 허기를 견디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아연광산은 통풍이 잘되었고 호흡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고 합니다. 주변의 물건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기에 캄캄한 갱도에서 9일을 버틸 수 있었고 마침내 밝은 세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적성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본당에 25인승 버스가 있었습니다. 차량을 운전하기 위해서는 대형버스 면허가 있어야 했습니다. 본당 교우 두 분과 함께 운전학원에 등록했습니다. 열심히 연습했지만 교우분들은 합격했고, 저는 시간 초과로 불합격했습니다. 다시 한번 도전하려고 준비를 했는데, 아버님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은 노력할 만큼 했으니 이제 운전면허 시험은 그만두고, 합격하신 분들이 버스 운행을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아버님은 제가 불합격한 것도 다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저는 차량 봉사자들을 위해서 주일 아침이면 커피를 준비해드렸고, 잘 다녀올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대신에 저는 9인승 승합차를 운전하였고, 동네의 약수터에서 물을 떠 오곤 했습니다. 신발은 발의 크기에 맞추어야 하듯이, 제게는 9인승이 적합했던 것 같습니다.
스키를 배울 때도 그랬습니다. 강사는 스키를 잘 타는 법을 가르치기 전에 넘어지는 법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넘어졌을 때 일어나는 법을 알려 주었습니다. 몸의 균형을 잃어버리면 억지로 스키를 타려고 하지 말고 넘어지는 것이 안전을 위해서 더 좋다고 하였습니다. 넘어진 다음 다시 일어나는 법을 배우면 스키를 재미있고 안전하게 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강사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잘 넘어지고 곧 일어날 수 있으면 스키를 즐길 수 있습니다.” 재물, 권력, 명예, 성공이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끄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학자, 바리사이파 사람, 부자청년, 대사제, 빌라도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였고, 오히려 예수님을 박해하였습니다. 그러나 몸을 팔았던 여인도, 눈이 멀었던 소경도, 나병 환자도, 하혈하던 여인도, 중풍 병자도, 듣지 못하던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실패한 것처럼 보였지만, 죄인으로 불렸지만 예수님을 만났고, 그들은 살아서 참된 행복을 느꼈고, 영원한 삶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지키고 따른다면 그곳이 바로 ‘꽃자리’입니다. 우리가 일상의 근심으로 마음이 물러진다면 그곳이 바로 ‘가시방석’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한다면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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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21,34-36: 늘 깨어 기도하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34절) 영원하신 임금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는 술의 위험과 또한 ‘술 중독’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아무리 술을 많이 먹는 사람도 의사가 술을 먹으면 이제 죽는다고 하면 모두 술을 끊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제 영혼과 육신의 의사이신 주님께서 만취와 방탕과 일상의 근심에 빠지지 말라고 하신다. 그렇게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에 빠져 살면서 아무 탈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기에 만취는 모든 것을 망치는 원인이다. 육신과 함께 영혼까지 약하게 하는 유일한 병이다. 사도 바오로는 육신이 약할 때 영은 강해진다(2코린 12,10)고 하였다.
“외적 인간은 쇠퇴해 가더라도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2코린 4,16) 하였다. 그러나 술에 취해 살면 육신과 영혼이 파멸한다. 육신과 영혼이 한꺼번에 타락하는 것이다. 모든 지체가 약해지면서 손과 발이 말을 안 듣고, 혀는 풀리고 눈은 어두워진다. 정신 또한 망가져서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심하면 자기가 인간이라는 사실조차 모른다. 술 중독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생의 마지막 시간을 맞이할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순간이 나에게는 아직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하고, 애써 잊으려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여도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 앞에 당당히 버티고 있으며, 언제나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다만 그때가 언제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하여간에 우리 인간은 언제고 어느 때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깨어있다는 것은 다른 의미가 아니라, 지금 당장에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 있게, 기쁘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종말론적인 삶이라고 한다. 그래서 하느님을 기쁘게 잘 만날 수 있으려면 평소에 죽는 연습을 잘해야 한다. 이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실천하기 위해서 나 자신을 이기는, 나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나의 인간적인 뜻을 죽이고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내가 죽는 연습이 잘 되어있다면, 하느님 앞에 나아갈 때, 이 세상 삶도 잘 마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종말론적인 삶이며, 우리는 그날 어떤 어려움과 고통도 이겨내고 주님을 뵐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삶은 항상 기도하는 자세와 함께 이루어갈 수 있다. 기도하면서 내가 살아가는 매 순간들의 삶이 하느님께 바쳐지는 아름다운 기도로써 바쳐질 수 있도록 한다면 진정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기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잘 새기고 실천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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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어제 복음은 무화과나무의 비유로, 시대적 징표를 잘 읽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어 오늘 복음은 ‘깨어 있어라.’라는 예수님의 권고입니다. 이 권고는 세 가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째,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이 권고를 풀어 설명하면, 신앙인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되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생각과 관심을 언제나 소홀히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 누구도 일상에서 느끼는 억압과 근심과 걱정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에 파묻혀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뜻에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는 권고입니다.
둘째,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이 권고는 아무 준비 없이 마치 밀린 숙제를 해치워 버리듯이 하느님 나라가 갑자기 찾아오도록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평소에도 늘 깨어 있으며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라는 의미입니다.
셋째,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이 마지막 권고에서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이라는 표현은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종말, 곧 예수님의 재림 때 영광스러운 심판자로 오실 그분 앞에 섰을 때 심판의 시련을 견딜 수 있도록 잘 준비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세 가지 권고 내용은 한 가지로 서로 통합니다. 그것은 세상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세상에 넘어가지 말고 하느님 나라와 그분 뜻을 새기며 살라는 위로와 격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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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손영배 미카엘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다시 오실 날을 준비하여 늘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하여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날이 우리에게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구약의 노아 방주와 롯의 이야기를 통해서 회개하지 않은 채 일상의 일에 몰입하고 있다가 멸망한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애청자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나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의 성향이 잘 변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잘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사람마다 조금씩은 차이가 있겠지만 어떤 사람이 하루아침에 마음을 고쳐먹고 새롭게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평소에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가득차 있다면 이러한 습관에서 벗어나기가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알코올 중독자나 마약 중독자가 결심을 단단히 하여 하루아침에 술을 끊거나 마약을 끊는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분명 한 생의 짧은 여정을 살아갈 유한한 존재입니다. 문제는 이 유한성을 인정하지 않고 그저 세상살이 자체에 몰입한 나머지 종말의 순간을 맞는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과 그때, 곧 예수님께서 언제 다시 오실지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지를 우리가 분명하게 알고 있다면, 우리는 분명 회개하고 그때 잘 맞추어 준비할 것입니다.
저희 성당에서 얼마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 드릴까 합니다. 그때가 아마도 금요일 새벽인 걸로 기억됩니다.
늦은 새벽시간 인적이 드문 때를 이용해서 도둑이 들었는데 그는 스댄으로 만들어진 정문의 대문을 훔쳐갔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정문이 휑하고 허전했습니다.
만일 그 도둑이 언제 올지 알았더라면 그 시간에 맞추어 그를 제지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때 역시 그 도둑처럼 언제 올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린다는 것은 항상 우리의 생활을 살펴보고 항상 회개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늘 깨어 기도하는 삶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기도는 예수님과 나를 이어주는 편안하고 독보적인 대화의 장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매순간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의 주인이심을 인정하고, 기도를 통하여 나의 뜻이 관철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뜻이 관철되도록 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나의 시간이 아니라 예수님의 시간을 살게 될 것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종말의 시간이 슬픔과 공포의 시간이 아니라, 기쁨과 영광의 시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초대교회의 신앙인들처럼 마라나타, 주여 어서 오소서! 하고 외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잊지 맙시다. 그날이 오면 두 사람이 같은 침상에 있더라도, 두 사람이 등산을 같이 하더라도 두 사람이 일상에 평범한 생활을 하더라도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내버려 둘 것을 말입니다. 정말 필요하고 꼭 해야 할 것은 매일 우리의 삶을 점검하여 기도하는 습관을 지니는 데 있습니다.
하루에 기도할 수 있는 일정한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도록 합시다. 그것도 어려우면 적어도 아침에 일어나서 정성껏 십자성호를 긋고 주님께서 허락하신 하루를 당신 안에서 충실히 해 나갈 수 있도록 단 몇 분간만이라도 도우심을 구합시다.
또한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루를 돌아보며 주님의 뜻에 어긋난 것에 대해 단 몇 분간만이라도 용서를 청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기도를 많이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매순간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는 날은 도둑처럼 닥칠 것입니다. 그러니 늘 회개하고, 늘 새롭게 살며, 늘 깨어 기다리는 마음을 갖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더불어 회개와 새로움과 깨어있음의 은총을 달라고 성령께 청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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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재철 안토니오 신부님]
<늘 깨어 기도하라>
오늘은 연중의 가장 마지막 날입니다. 보통 일반적으로 한해를 마무리 하는 날은 마음가짐을 차분하게 하고, 1년동안 있었던 일들을 정리해보면서 다음 해의 계획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달에는 송년회가 많이들 잡혀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송년회가 있는 12월이 정말 싫다고 얘기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송년회 때 술을 너무 많이 먹기 때문에 힘들다고 이야기하시는 분들도 계시고요. 그만큼 현대에는 송년회의 의미가 많이 퇴색된 것 같습니다.
우리 선조들에게 좋은 여러 가지 풍습들이 많이 있는데, 그것을 잘 살리지 못하고 퇴색되어 가는 것 같아 참 안타깝습니다.
그러한 풍습 중에 덕담이라는 좋은 풍습도 있습니다. 덕담이란 그 사람에게 복을 빌어주는 말입니다. 남에게 좋은 말을 많이 해줌으로써 그 사람에게 좋은 일이 생기기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또 당사자도 그 덕담 덕분에 자신의 일이 잘 되리라는 희망과 확신을 가질 수 있어 더욱 좋은 것 같습니다.
저는 이 덕담을 생각하면서 새해 첫날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하고 내일의 복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참으로 재밌는 사실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바로 내일 새해 첫날의 복음과 오늘 한해의 마지막 날 복음이 같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이럴 때 우리 신부들은 굉장히 당황하게 됩니다. 왠지는 다 아시지요? 예, 강론을 써야 하는데 이틀을 똑같은 강론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는 죄송하지만 “참, 예수님도 너무하시지.” 이런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니, 얼마나 중요한 말씀이시길래. 한해의 마지막 날과 새해의 첫날에 이틀에 걸쳐 했던 얘기를 또 하시는 것일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복음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덕담의 핵심은 늘 깨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덕담을 곧이곧대로 지키려면 참으로 고약한 덕담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잠을 안자고 깨어 기도만 하는 것은 참 힘이 들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특히나 신학생 시절 성체조배나 묵상 때면 어김없이 졸음이 쏟아졌던 저로서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참 얄굳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늘 깨어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입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우리에게는 주어져 있습니다. 바로 사랑의 힘입니다. 사랑은 늘 우리를 깨어있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이를 항상 생각하고 깨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연애 때의 휴대폰 요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더욱 확실히 알 수 있는 예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자녀가 아플 때, 자녀가 고통으로 신음할 때, 어머니는 밤새 깨어 간호합니다. 혹 지쳐서 휴식을 취할 때에도 어머니는 자녀의 상태에 늘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러다가 작은 신음에도 깨어나거나 다가가서 아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알고 그것을 해주려고 노력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예수님을 위해 할 것입니다. 항상 기쁘게 매 삶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당신이 다시 오실 때를 기다리다가 예수님을 만날 것입니다.
그렇기에 늘 깨어 기도하라는 이 말씀은 당신이 다시 오실 때까지 당신을 사랑하고 또 다시오실 때 당신을 만날 수 있게 하라는 좋은 덕담인 것입니다.
다른 것에 심취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에 내 모든 마음을 빼앗겨 버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랑의 마음을 가져라는 이 말씀은 한해를 마무리하는 우리들에게 좋은 반성의 시간을 마련해 줍니다.
나는 과연 한해 동안 예수님을 사랑하고 살아왔는지, 나는 과연 예수님을 늘 생각하며 살아왔는지, 그리고 이웃을 통해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며 살아왔는지...
오늘 우리에게 들려지는 이 깨어 기도하라는 말씀을 하루 동안 묵상해 보면서 올 한해의 삶을 잘 마무리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내일부터 시작되는 대림의 시간 동안 예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예수님께서 차가운 마굿간이 아니라 따뜻한 우리 마음 안에 오실 수 있도록 준비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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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스스로>
루카 21,34-36 (깨어 있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스스로>
주님을 믿기에
불신의 세상 깊숙이
들어갑니다 스스로
주님을 바라기에
절망의 세상 깊숙이
들어갑니다 스스로
주님을 사랑하기에
미움의 세상 깊숙이
들어갑니다 스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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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방심하는 날 심판을 받는다>
때로는 풀어지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마음껏 즐겼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21,34)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간곡히 당부하셨는데 그 말씀을 외면하면 결과는 뻔합니다. 저의 마음을 꿰뚫고 계시니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마음은 참으로 흔들비쭉입니다. 사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로마 7,15)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 하여라.”(루카21,36)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은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고 육체를 따라 삽니다.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하며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가야 하지만, 마음뿐입니다. 몸은 예수님 앞이지만 마음과 생각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마음을 씁니다.”(로마 8,5) 그러나 우리 삶의 현실은 영적인 것보다는 육적인 것이 더 매력적이고 가까이 있습니다. 아파트 베란다 밑으로 휘황찬란한 네온사인들이 번쩍이며 유난히 빛나는 빨간 십자가를 등지고 유혹합니다. 유혹은 언제나 달콤합니다. 한 잔술에 몸을 맡길 수 있는 그곳에 가고 싶습니다. 그리고는 후회할 것입니다. 안 되는 줄 알면서 왜 그랬을까? 자신의 꼴을 봅니다.
“늘 깨어 기도하여라”라는 말씀을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유혹은 일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심판 가운데에서도 재앙의 길을 피하게끔 해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분께 의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고 말씀으로 물리치셨지만, 악마는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루카 4,13) 하물며 연약한 우리에게는 얼마나 자주 접근하겠습니까? 그러니 회개의 삶도 한 번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생을 통해 죽음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1베드 5,8-9) “우리의 삶은 예수님의 전 생애를 따르고 그분과 일치되기 위해 깨어 있는 시간의 연속입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그날과 시간을 모르니만큼 언제나 깨어 기도하고 잠시라도 방심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분명 방심하는 순간이 심판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늘 성령 안에서 온갖 기도와 간구를 올려 간청하십시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인내를 다하고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며 깨어있으십시오.”(에페 6,18) 세상에 너무 푹 빠져 있어도 문제요, 세상을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세상에 발을 딛고 있기 때문이고 하늘은 세상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미래의 영생을 희망하는 만큼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은 끝날 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이 결정합니다. 천국을 희망하면 여기서 천국을 살아야 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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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얼마 전에 초등학교 동창 몇 명을 만났습니다. 초등학생 때면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입니다. 너무나 긴 시간이 지난 것만 같은데, 중년의 나이에 다시 만났는데도 엊그제 만난 것처럼 친숙하고 반가웠습니다. 사회적으로 안정된 자리에 있는 친구들, 그 자리에서 나름의 위엄을 보이면서 지냈을 텐데 이곳에서는 모두 초등학생 애가 되어 목소리를 높여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저녁 식사를 하며 많은 이야기를 한 뒤, 오랜만에 노래를 부르면서 신나게 놀자고 노래방에 갔습니다. 바쁘게 일만 하면서 지냈던 친구들, 그래서인지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하는지 몰라 노래방 책자를 한참이나 뒤적이다가 겨우 번호를 찍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글쎄 모두 느린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 때도 분명히 빠른 노래도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느린 노래만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그 이유를 어느 책에서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글쎄 나이가 들면 박자 맞추기가 힘들어서 느린 노래만 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이나 행동은 다시 초등학생 때로 되돌아간 것 같은데, 역시 나이는 모두 먹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 변화를 받아들이기를 힘들어합니다. 받아들여야 “그러려니” 할 텐데, 받아들이지 않으니 세상의 모든 불공평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려니’라는 마음이 필요한 지금이 아닐까요?
마지막 주님의 날에 대해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이날은 갑자기 찾아오며,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치게 된다고 하시지요. 그렇다면 이날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혹시 ‘그날은 절대로 와서는 안 됩니다’라면서 거부하면 될까요? 아니면 그냥 포기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어야 할까요?주님께서는 그 마지막 주님의 날에 주님 앞에 설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마지막 주님의 날이라는 새로운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날은 무조건 거부하고 불평불만에 가득 차서 포기하고 좌절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받아들여야 할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변화 자체를 거부해서는 안 되고, 또 불평불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모습도 안 됩니다. 그보다 마지막 주님의 날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늘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내일 우리는 교회력으로 새해라고 말하는 대림 제1주일을 보냅니다. 이 땅에 강생하여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기간입니다. 그런데 잘 준비하는 방법은 깨어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제1독서의 묵시록 말씀처럼 주 하느님께서 우리의 빛이 되어 주시기 때문에(묵시 22,5 참조), 다른 어떤 것도 필요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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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깨어 기도한다는 것>
종말의 때에 주님께서는 두 가지를 권고하십니다. 하나는 “마음이 물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깨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주님께서는 조심하라고 하시는데 이 조심이라는 말이 제게는 마음 단단히 먹으라는 말로 바뀌어 들립니다. 왜냐면 마음이 물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조심이라는 말 자체도 마음을 잡다, 쥐다, 조종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지요. 그러니까 마음을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둬서는 안 되고 잡아줘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마음 잡고 공부하기 시작했다느니, 무엇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느니 그런 말을 하는데, 그렇습니다. 마음을 잡거나 마음을 먹지 않으면 아예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조심을 한다는 것은, 마음이 물러지게 하는 것들, 곧 방탕과 만취와 근심부터 끊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다음으로 주님께서는 깨어 기도하라고 하시는데 멸망의 때에 세상과 같이 멸망하지 않고 주님 앞에 서기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방탕이나 과음이나 세상 근심 따위를 끊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깨어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방탕이나 과음이나 세상 근심을 끊는 것도 실은 깨어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것들을 끊지 않으면 마음이 물러져서 시작도 하지 못하게 되니 깨어 기도하기로 마음을 단단히 먹은 사람은 이런 것부터 끊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방탕한 생활이나 과음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데 일상의 근심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선뜻 이해되지 않은 분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방탕이나 과음 못지않게 깨어 기도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세상 근심이라는 얘기입니다.
일상의 근심이라는 것이, 실은 세상 근심이고, 세상 근심이란 것은 이미 주님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근심이나 걱정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근심 걱정하느냐고 하는데 진정 기도와 하느님께 깨어있지 않으면 기도하지 않고 근심 걱정하고, 기도하다가도 어느새 근심 걱정이나 하고 있는 것이 우리 현실이지요.
그래서 깨어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을 새삼스럽게 마음에 새기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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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늘 깨어 있어라!”>
- 깨어 있음, 천상의 꿈, 깨어 있기 훈련 -
오늘의 연중시기 끝은 내일의 대림시기 시작입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어제 설치해 놓은 대림초 화관이 벌써 마음을 대림의 기쁨으로 설레게 합니다. 연중시기를 끝맺으며 대림시기를 열어 주는 결정적 말씀 주제는 “늘 깨어 있어라!”입니다. 끊임없는 기도도 영성생활도 깨어 있음을 궁극의 목표로 합니다. 참으로 깨어 있을 때 살아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대림을 앞둔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 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 닥칠 것이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어느 말마디 하나 생략할 수 없어 복음을 통째로 전부 인용했습니다. 언젠가의 그날은 죽음일 수도, 사고일수도, 병일수도, 재난의 불행일수도, 종말일 수도 있습니다. 유비무환입니다. 그러니 그날의 불행에 대비하여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깨어 사는 것입니다.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날마다 참으로 깨어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살아 있다 하나,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며 뿌리 없이 표류하며 생각 없는 삶, 의식 없는 삶, 영혼 없는 삶, 피상적인 삶, 죽어 있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깨어 있는 삶입니다. 깨어 살 때 참으로 살아 있는 존엄한 품위의 삶이 됩니다.
깨어 있음은 기도입니다.
깨어 있음은 침묵입니다.
깨어 있음은 기다림입니다.
깨어 있음은 희망입니다.
깨어 있음은 기쁨입니다.
깨어 있음은 사랑입니다.
깨어 있음은 순종입니다.
깨어 있음은 봉헌입니다.
깨어 있음은 겸손입니다.
깨어 있음은 순수입니다.
깨어 있음은 주님의 현존입니다.
깨어 있음은 지혜입니다.
깨어 있음은 생명입니다.
깨어 있음은 빛입니다.
깨어 있음은 힘입니다.
깨어 있음은 평화입니다.
깨어 있음은 은총입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깨어 있음의 은혜입니다. 흡사 깨어 있음 예찬같습니다. 깨어 있음은 모두라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깨어 있을 수 있습니까? 답은 하나 꿈입니다. 희망입니다. 비전입니다. 셋같지만 실은 하나입니다. 꿈중의 꿈, 희망중의 희망, 비전중의 비전이 하느님 나라, 새 예루살렘의 꿈이자 희망이자 비전입니다. 이렇게 새 예루살렘 천상의 꿈이, 희망이, 비전이 깨어 있음의 원천입니다.
오늘 묵시록의 새 예루살렘의 천상 비전은, 꿈은 얼마나 아름답고 황홀한지요! 창세기 잃었던 낙원을 되찾은 것입니다. 바로 이런 꿈을 앞당겨 살 때 참으로 살아 있는 삶, 깨어 있는 삶입니다. 사도 요한이 체험한 제1독서 묵시록 많은 부분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그 천사는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나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나와, 도성의 거리 한 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이쪽 저쪽에는 열두 번 열매를 내는 생명나무가 다달이 열매를 내놓습니다. 그 도성 안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가 있어,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얼굴을 뵈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는 그분의 이름이 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도 햇빛도 필요 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들의 빛이 되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다스릴 것입니다.”
바로 성인들의 미래요, 우리 믿는 이들의 궁극의 미래입니다. 이런 아름답고 영원한 천상의 꿈, 희망, 비전이 생생할수록 깨어 있는 삶입니다. 깨어 있는 삶이 이런 천상의 꿈을 앞당겨 실현하며 살게 합니다. 바로 이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 우리 공동체가 매일 평생 끊임없이 함께 바치는 시편 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 기도입니다.
“늘 깨어 있어라!”
구체적으로 끊임없이 기도하는 영적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깨어 있음의 훈련에 끊임없이, 한결같이, 간절히, 항구히 바치는 기도보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런 기도는 감정도 기분도 마음도 아니라 끊임없는 훈련입니다. 끊임없는 기도, 끊임없는 회개의 훈련을 통해 비로소 성취되는 열정과 순수의 깨어있는 삶이요, 새 예루살렘을 앞당겨 사는 삶입니다.
깨어 있음의 구체적 영적 기도 훈련을 소개합니다. 이 관상기도는 제가 40년 수도생활 하는 동안 늘 해온 기도입니다. 다시 오늘부터 심기일전 하여 새롭게 충실히 수행하려 합니다. 바로 오늘 미사중 화답송 후렴 성구를 기도말로 하여, 즉 만트라로 삼아 수시로 마음과 몸을 고요히 한 후 호흡에 맞춰 다음 만트라를 속으로 반복하는 것입니다.
“마라나타! 오소서, 주 예수님!”(1코린 16,22ㄴ과 묵시 22,20ㄷ)
'마라나타', 아람어로 우리 말로 번역하면 '오소서, 주 예수님'입니다. 마-라-나-타, 들숨 “마”, 날숨 “라”, 들숨 “나”, 날숨 “타”, 끊임없이 반복하여 바치는 아주 단순한 기도입니다. 이와 더불어 들숨 “오소서”, 날숨 “주 예수님!” 끊임없이 호흡에 맞춰 일정한 장소, 일정한 시간에 규칙적으로 훈련하는 것입니다. 수시로 언제 어디서나 늘 할 수 있는 참 좋은 깨어 있음의 기도 훈련입니다. 이 기도는 기도의 영성대가 지금은 타계했지만 영국 출신의 베네딕도회 수도사제 존 메인 신부가 강력히 추천하는 기도입니다. 순전히 하느님 현존 안에 깨어 있기 위한 기도입니다.
영성생활은 한곁같은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특히 기도 훈련입니다. 생생한 새 예루살렘의 천상 꿈이, 희망이, 비전이 깨어 있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源泉입니다. 주님의 매일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천상 꿈을 새로이 하며 늘 깨어 기도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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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 36)
<깨어있어라!>
믿는 이들이 나아가고 있는 '최종목적지'는 지금 여기가 아닙니다. 요즘 우리가 독서로 듣고 있는 요한묵시록의 말씀은 '믿는 이들의 최종목적지에 관한 말씀'입니다. 오늘 독서(묵시22, 1-7)가 전하고 있는 최종목적지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주님의 천사는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나 요한에게 보여주었다. 그 강은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나와, 도성의 거리 한가운데를 흐르고 있었다."(묵시22,1-2)
"그곳에는 더 이상 하느님의 저주를 받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도성 안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가 있어,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도 햇빛도 필요 없습니다."(묵시 22,3.4.5)
'눈으로 보아 알 수 없는 나라, 단지 믿음으로만 알 수 있는 나라인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서 정말로 기쁨과 평화와 행복을 누리고 싶은가?'
'나는 이 근본질문 안에 늘 머물러 있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깨어있어라.'는 말씀은, '이 근본질문을 놓지 않아야 한다.' '이 근본질문 안에 늘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근본질문 안에 늘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잠시 머물다 가는 지금 여기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
그들은 결코 어리석은 부자의 모습으로 살아가지 않을 것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형식에 치우쳐 있었던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처럼 살아가지 않을 것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살아보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너와의 관계 안에서, 그리고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이슈들 앞에서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는 최종목적지를 향해서 오늘도 화이팅 합시다!
'마라나 타! 오소서, 주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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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TTna4hXRn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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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 36)
늘 기도하는
삶이
깨어있는
삶입니다.
깨어있는
기도의 힘 없이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닐 수 없습니다.
너무나 많은 것에
묶여 있는
우리 삶입니다.
방탕과 만취가 아닌
절제와 질서가
필요한 우리
인생입니다.
삶의 마지막은
언제나
예기치 않게
우리 삶에
찾아옵니다.
평상시 삶이
그만큼 소중하고
특별합니다.
일상의 삶이
무절제한
근심으로
가뜩이나 지친
우리 마음이
또 다시
물러지는
일상이 아니라
소중한 가치를
나누고 실천하는
깨어 기도하는
삶이 되길
간절히 바라십니다.
사람의 아들
예수님은
특별함에서 벗어나
소박한 일상의
기쁨을 우리들과
기쁘게
나누셨습니다.
깨어있는 기도의
삶을 방해하는 것은
우리의
특별함입니다.
특별함을
내려놓을 때
우리 마음은
다시 열리고
다시 감사를
체험하는
깨어있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삶의 소중한 시간을
이끌어 오신 주님께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진심어린 마음을
나눕니다.
우리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
올바른 기도입니다.
죽음이 번개처럼
우리들의
마지막이
덫처럼
올지라도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흐릿했던 하느님을
빛같이 또렷하게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일상을
다시 점검하는
오늘입니다.
오늘이 바뀌면
내일은 더
좋아집니다.
기쁘게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저마다의
삶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특별하기에
기쁘고
소중한 것이 아니라
소중하기에
늘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시 하느님과
나누는 우리의
시작과 끝입니다.
부족함과 기쁨도
어리숙함과 사랑도
모두 선하신
하느님께
내어드립니다.
아버지 하느님!
진심으로
베풀어주신 은총에
감사드립니다.
다시 하느님을
향하는
깨어 있는
기도의
기적같은
사람의 오늘을
뜨겁게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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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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