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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04
#벨기에신앙고백서 12.#천지창조 (1)
We believe that the Father created heaven and earth and all other creatures from nothing, when it seemed good to him, by his Word-- that is to say, by his Son.
우리가 믿는 바는 성부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 하늘과 땅과 다른 모든 피조물들을 창조하신 것과, 그것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것과, 그것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컫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천지만물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오로지 한 분 하나님의 세 위격들과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밖에 계시지 않았을 때,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창조하셨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실 성도들을 선택하시고 구원하실 방법을 논하시고 실행에 옮기시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해서 누구 말마따나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홀로 계시기에 외롭고 적적하셔서 그러신 것은 아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는 굳이 세상을 창조하시지 않으셨어도 완전충만하게 자족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구속사역을 계획하시고 세상을 창조하셨는지 그 근본적인 원인과 이유는 아무도 알 수 없고 오로지 하나님과 그리스도만이 아신다. 때문에 이에 대해 지나치게 호기심을 갖는 것은 신앙에 유익이 되지 않고 도리어 해가 된다.
고백서에는 성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성부만이 창조하신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세 위격들이 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부의 뜻은 성자와 성령의 뜻이기도 하다. 또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 전부터 성자 하나님과 연합하셔서 성부의 독생자로 태어나셨고 성령 하나님을 당신의 인성의 영으로 삼으셨으므로 한 분 하나님과 세 위격들의 뜻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의 뜻이기도 하다. 게다가 성부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기로 하셨어도 그 실행 권한을 성자와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맡기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부께로부터 받으신 권한으로 당신 자신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의 능력으로써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것이다. 다만 성부께서는 세 위격들 중 처음이시고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참 아버지 되시므로 창조자의 대표가 되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신 둘째날을 제외한 나머지 날의 창조사역에 대해서는 보시기에 좋으셨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고 둘째날의 사역이 좋지 않으셨다는 것이 아니라, 둘째날의 사역은 셋째날부터의 창조사역을 위한 기틀이 되기 때문에 함께 어우러져서 보시기에 좋은 사역이었다고 여겨야 한다. 창세기의 창조사역 중에서 여전히 우리에게 드러나지 않은 비밀 중 하나는, 빛과 어둠을 만드신 첫째 날 전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은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께서 수면 위를 운행하셨던 때와 그 상태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어떤 학자는 세상의 창조 전에 모종의 창조가 있었는데, 사탄을 비롯한 타락한 천사들이 그리스도께 반역을 저질렀다가 패배해서 하늘에서 쫓겨나 첫 창조의 땅에 떨어졌고 그들에 의해서 그 땅이 더럽혀지고 훼손된 상태를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사탄과 타락천사의 반역과 전쟁은 물질세계가 아니라 셋째 하늘인 천상계 또는 영계이므로, 영적 존재들인 사탄과 타락천사들이 물질계를 주관하지는 못한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따라서 땅이 혼돈했던 상태는 물질세계를 만드시기 위한 원 재료였을 것 같다. 그렇다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이 허위가 되지 않는 것은, 그 원 재료 자체도 그리스도께서 무에서 만들어내신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우주의 시작이 빅뱅이라는 대폭발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빅뱅 시의 우주를 이루는 물질들이 어디서 기원한 것인지, 빅뱅부터 우주가 빛보다 빠른 속도로 팽창할 때에는 시간이 역행하는 것인지, 우주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때 어느 시점부터는 우주 전체가 블랙홀이 될텐데 어떻게 빛도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블랙홀에서 물질들이 방출될 수 있는지 등에 대해서는 밝혀내지 못한다. 또한 과학에서 제시하는 우주 생성 순서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창조의 순서와 현저히 다른 부분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씨앗이 뿌려진 길가와 같은 자들은 성경의 창조기록을 헛소리로 치부해버리고, 돌밭이나 가시덤불밭 같은 자들은 성경진리보다 과학지식을 더 우선순위에 두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화의 방식으로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유신진화론이라는 정신나간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령을 보혜사로 받은 성도들은 아무리 세상에서 미련하고 어리석다는 비방과 조롱을 당하더라도 과학계에서 주장하는 빅뱅 우주이론보다 성경의 창조사역을 참된 진리로 믿게 된다.
#20200104
#성경묵상 #창세기 #Genesis 17장.
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3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4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6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1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12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13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15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16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17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18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19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20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21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22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23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태어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포피를 베었으니
24 아브라함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구십구 세였고
25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십삼 세였더라
26 그 날에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고
27 그 집의 모든 남자 곧 집에서 태어난 자와 돈으로 이방 사람에게서 사온 자가 다 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더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과 계시를 받아 친족을 떠난 75세 때부터 지금 99세 까지 24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단 4번만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에게 베푸신 언약을 확증하셨는데, 그럴 때마다 조금씩 점진적으로 언약의 내용을 더 깊고 명확하게 밝혀오셨다. 이번에 나타나셨을 때는 드디어 사라를 통해 아들을 주시겠다는 언약을 이루시기 위한 최종 버전이며 그 아들을 통해 새로운 언약을 시행하신다는 시작 버전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는 아마도 영광과 권능의 모습으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을 것이며 당신 스스로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칭하시고 아브라함에게 거룩할 것을 지시하신다. 게다가 처음에 주셨던 언약을 재차 확증하시고 먼 훗날에 있을 일들을 밝히시며 아브라함과 사라라는 새 이름을 주시고 그 언약의 증표로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행할 것을 명하신다. 반면에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친족을 떠나 백 세를 눈 앞에 둔 지금까지 정처없이 떠돌아 다녔으나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라고는 사랑하는 아내를 빼앗기고 친아들처럼 아끼는 롯과 결별해야만 했으며 포로로 붙잡힌 롯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했고 원하지 않는 첩을 둠으로써 불화를 겪는 등 힘든 고생길 뿐이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인정하신 믿음의 조상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 힘든 일만 닥치게 된다면 일말의 회의가 드는 것은 당연지사일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연약해지고 어느 정도는 불만이 섞인 듯한 말투로 하갈에게서 낳은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한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아브라함의 연약함을 제일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의 투정에 화내시지 않으시고 1년 후에 사라를 통해 아들을 주실 것이니 그의 이름을 이삭이라 지을 것까지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아들을 얻을 그 날이 멀지 않았으니 여기서 쓰러져 멈추지 말고 연약해진 무릎을 일으켜 세워 끝까지 경주를 힘써 행하라고 하신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그저 체념하듯이 툭 내뱉은 이스마엘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는 흘려듣지 않으시고 그도 또한 한 큰 민족으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될 것임을 더불어 말씀하신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이 확실함을 증표로 삼으시기 위해서 아브라함과 그의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시행할 것을 명령하신다. 할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이라 인정하시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의아한 것은 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언약의 증표를 다른 신체 부위가 아니라 굳이 남자 성기의 끝부분을 뒤덮고 있는 잉여 피부를 잘라낼 것을 요구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이 할례는 첫 사람인 아담과 하와가 금지된 열매를 먹고난 후에 눈이 밝아져 서로의 벗은 몸을 보고 부끄러워 하였다는 것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첫 범죄 후에 가장 먼저 발동된 것이 성에 대한 인식과 원초적인 부끄러움과 성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간 특히 남자에게 있어서 성욕이라는 것은 원죄를 나타내기 때문으로 보인다. 남자가 할례를 받기 위해서는 마치 여자가 출산할 때 의사에게 자기 몸의 은밀한 부분을 드러내어 보여야 하듯이 할례를 받는 남자 또한 할례를 시행하는 사람 앞에서 자기 하체를 수치스럽게 드러내어 보여야 한다. 할례 시행자를 하나님의 대행자라고 본다면 피할례자는 자기 하체를 드러냄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의 근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과 같다. 성기 끝부분의 잉여 피부를 잘라낸다는 것은 원죄를 상징하는 성욕을 다소 감소하고 억제함을 의미한다. 그 피부를 잘라내지 않았다면 남자는 더 높은 성적 쾌락을 가질 수 있겠지만 이를 잘라냄으로써 지나친 성욕을 제한하고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피할례자의 원죄를 잘라내셨음을 의미한다. 할례를 받은 후에 찾아오는 도저히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의 며칠 간의 극심한 통증은 세상에서 편하게 살다가 포피처럼 죄를 끊어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데 반드시 수반되는 죄의식과 환난과 고난 등을 의미한다. 그런 극심한 통증의 기간이 지나면 비로소 잉여 피부가 덮여있던 부위는 외부 자극에 민감해지지 않게 되며 성욕도 어느 정도 억제가 되는데 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점점 더 세상에 대해서 초연해지며 세상의 유혹과 핍박에 어느 정도 담대히 대응할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요구하신 것이 아닌가 싶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는 아브라함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등교사의 지도를 받는 초등학문을 배우는 어린 학생과 같고 유업을 이을 상속자로 지정되었어도 후견인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어리고 미숙한 아이와 같은 상태였으므로 그 약속도 영적으로 이해할 수준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실제로 몸으로 체험하는 육신의 할례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당신의 구속사역을 완성하신 지금은 물로 씻는 예식인 세례를 시행함으로써 더 간결하고도 보편적이며 효과적인 방식으로 교회의 일원임을 선포하게 하셨다. 그러나 죄악 된 인간의 본성은 이런 세례의 간결성과 보편성을 왜곡하여 세례의 영적인 의미를 엄숙하게 여기기보다는 싸구려로 보이게 만들었다. 교회가 세례를 행할 때 유의해야 할 것은 형식은 간결하더라도 엄숙함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하며 할례의 숨은 의미가 세례에도 드러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할례는 몸을 드러내는 것이었다면 세례는 사람의 성기보다 더 은밀하고 수치스러우며 추악한 우리 영혼의 죄악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드러내어 죄사함의 영적인 증표를 받는 것임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하여 할례의 육체적 아픔만큼 세례를 받을 때는 우리 영혼에 죄를 끊어내는데 따른 극심한 영적 고통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 할례의 증거는 몸에 남으나 세례의 증거는 신자로서의 우리 삶의 열매로써 남겨야 한다. 할례를 받았어도 악을 행하면 심판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에서 끊어지듯이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이미 구원 받았다고 방자히 행하면 마지막 날에 세례 위조범으로 멸망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8일 만에 할례를 행하라고 하시는데 이는 아기들은 고통을 덜 느껴서가 아니다. 도리어 아기들의 감각이 더욱 예민하기 때문에 8일 된 갓난아기에게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어쩌면 트라우마로 남을 수도 있는 큰 고통을 주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아 할례는 이 아이가 무슨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전부터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을 받았음을, 즉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것에는 인간의 공로가 절대로 가미될 수 없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하여 이 아이가 안타깝게도 자기 생각과 의지대로 말하고 행할 수 있기 전에 이 땅에서의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되더라도 부모는 극심한 육적인 슬픔을 느끼는 한편 영적으로는 자기 자녀가 하나님 품에 안겨 있음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안도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유아 할례 규례는 오늘날 유아세례의 당위성을 뒷받침 해주는 근거가 된다. 따라서 교회는 유아 세례를 받는 자녀의 부모에게 그 세례가 주는 엄숙하고 확실한 의미를 반드시 교육해야 하며 부모들은 유아 세례를 그저 하나의 신앙의 보험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되고 그 자녀를 주신 이도 그리스도시요 거두시는 이도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아울러 그 자녀를 참된 신앙으로 양육하여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키우겠다는 의무를 항시 되새겨야 한다.
#20220104
#사사기 #Judges 3:31
사사 #삼갈
31 에훗 후에는 아낫의 아들 삼갈이 있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였고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
삼갈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군인 6백명을 죽인 활약은 에훗이 죽은 이후에 있었던 것인지 에훗이 모압 왕 에글론을 죽이고 모압을 굴복시킨 일 이후에 있었던 것인지는 불명확하다. 사사기에 언급 된 사사들 중에서는 오로지 삼갈만이 소속 지파가 기록되지 않는데 이는 아마도 삼갈이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지파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모세 시대에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덩달아 따라나왔던 잡족들의 후손이었거나 속임수로 이스라엘과 화친을 맺은 기브온 족속의 후손이었거나 이스라엘이 진멸하지 않고 남겨 둔 가나안 족속의 후손으로서 이스라엘에 신앙적으로 귀화한 이방 족속이었을 수도 있다. 삼갈이 소 모는 막대기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그가 어떤 특출나고 존귀한 직업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목자 중 하나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삼갈이 블레셋 군인 6백 명을 쳐죽였다는 것 외에는 그에 대한 아무런 행적도 언급이 되지 않는데다가 에훗 다음의 사사로 여선지자 드보라가 언급되는 것으로 봐서 이는 아마도 그가 홀로 블레셋 군인을 대적한 후에 전사하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삼갈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그가 비록 혈통적으로는 이스라엘인도 아니었고 정식으로 추대된 사사는 아니었을지라도 명예 사사로 추대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성령의 특별한 가호를 받은 삼손은 당나귀 턱뼈로 블레셋 군인 1천 명을 쳐죽였고 다윗의 30용사 중 첫 삼인의 대장인 요셉 밧세벳은 자기 무기로 8백 명의 적군을 쳐죽였다. 그러나 삼갈은 짐승의 턱뼈나 전쟁 무기만큼 강력하지도 않은 막대기 하나만 들고서 잘 훈련된 블레셋 군인 6백 명을 홀로 쳐죽였는데 비록 숫자로는 삼손이나 요셉 밧세벳보다 적더라도 그 무용담은 그들 이상이었다고 봐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사사 삼갈은 오로지 단 한 줄 기록이 되었을 뿐이지만 그 공로와 가치는 사사기에 기록 된 모든 사사들 중에서 가장 최고의 정점을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사사기 #Judges 4:1-5:31
제 4 장
사사 #드보라
1 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2 여호와께서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으니 그의 군대 장관은 하로셋 학고임에 거주하는 시스라요
3 야빈 왕은 철 병거 구백 대가 있어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가나안 하솔 왕 야빈에게 철 병거 9백 승이 있었다고 한 것으로 봐서 이 지역은 에브라임과 므낫세 반 지파가 여호수아에게 땅을 더 달라고 해서 스스로 개척할 땅으로 지정을 받았으나 철 병거가 있어서 정복하기 어렵다고 불평한 그 지역이었을 것이다. 가나안 하솔 족속은 이스라엘이 가장 강성할 때에도 자기들의 막강한 군사력으로써 이스라엘에게 굴복하지 않았었는데 하물며 이스라엘이 여호와 그리스도께 범죄하여 세력이 약해졌을 때에는 더욱 이스라엘을 대적하기 쉬웠을 것이고 하솔 왕 야빈은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약해진 이 때에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서 뿌리를 뽑으려 했던 것 같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솔 왕 야빈의 학대와 핍박을 받은 지 20년만에야 자기들의 모든 구원과 소망은 오직 여호와 그리스도께만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분께로 돌아오게 된다. 사람의 기준에서는 이렇게 범죄와 회개를 반복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한없이 파렴치해 보이지만 여호와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신 이스라엘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이를 용납하신다. 그런데 사실 지금의 교회와 신자들이 이렇게 범죄와 회개를 반복하는 이스라엘을 두고 비난을 할 수 없는 것은 적어도 당시 이스라엘은 핍박과 학대를 받으면 여호와 그리스도께 돌아와 회개할 줄은 알았다는 것인데 이는 오늘날 교회와 신자들 중에서는 극히 찾아볼 수 없는 신앙의 덕목이다.
4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5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사사가 된 것은 교회에서도 여자 목사를 세워도 된다거나 신자의 가정에서 여자가 남자보다 앞서도 된다는 것을 옹호하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모든 여자는 남자의 지배를 받아야 된다는 것이 죄책으로 주어진 것이고 사도 바울이 가르친바와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가르쳐서는 안되고 잠잠해야 하며 가정에서는 남편에게 성경을 배워야 하는 것이 보편적으로 지켜져야 하는 원리이다. 그럼에도 성경에는 드보라와 같이 소수의 여선지자와 지도자가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는 인간의 기준과 질서와 죄책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으시고 자유로우신 여호와 하나님 그리스도만의 전권으로서 동생을 형보다 앞세우시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보아야 한다. 또한 여성 지도자가 세움받는 것은 그만큼 이스라엘의 남자들이 여호와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신앙의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수치스러운 책망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다. 이미 이스라엘에게는 모세를 통해서 여호와 그리스도의 율법과 규례가 주어졌고 레위인 제사장들이 백성들의 재판장으로 지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율법과 규례를 맡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제 역할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은 광야에서 모세가 백성들의 송사를 재판했던 것처럼 여호와 그리스도의 영이 충만한 여선지자 드보라에게 가서 재판을 의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하나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세속 사회와 조직에서 여성 지도자를 세우는 것에 대해서는 교회가 왈가왈부 할 것이 되지 못하지만, 적어도 하나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섬기는 교회와 신자들이라면 여성 목사를 세우거나 여성 교역자에게 설교를 시키거나 여성 장로를 세운다거나 여성들의 목소리가 커진다거나 하는 상황을 용납해서는 안된다. 드보라는 자신이 비록 여호와 그리스도의 영이 충만한 여선지자이자 백성을 다스리는 사사였어도 하솔 왕의 군대를 치는 것에는 자신이 직접 나선 것이 아니라 남자인 바락을 앞세우게 한 것처럼, 교회에서 특별히 성경에 탁월하고 성령에 충만한 여자라 하더라도 교회 사역에 스스로 나서서는 안되고 반드시 남자 사역자나 남자 직분자를 통해서 사역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6 드보라가 사람을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지 아니하셨느냐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
7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의 병거들과 그의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하셨느니라
8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도 가지 아니하겠노라 하니
9 이르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하고 드보라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가니라
10 바락이 스불론과 납달리를 게데스로 부르니 만 명이 그를 따라 올라가고 드보라도 그와 함께 올라가니라
바락이 드보라의 출전 명령을 받고서도 드보라와 동행하기를 요구한 것은 부정적으로는 남자답게 강건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여자에게 의존하는 어린 아이와 같은 모습을 보였다고도 볼 수 있고 긍정적으로는 비록 사사인 드보라가 여자라 하더라도 무시하지 않고 드보라의 신령한 권세와 권위를 존중하여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에 대한 믿음의 표징을 삼고자 했을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드보라는 이번 출정으로 인해서 바락이 영광을 얻지 못하고 적장 시스라가 한 여인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고 예언하는데 이 또한 바락의 여린 믿음에 대한 책망으로도 볼 수 있고 승전에 대한 영광을 얻지 못하더라도 과연 출전할 것인지에 대한 바락의 겸손과 순종을 한 번 더 시험하고자 하는 것일수도 있다.
11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중 겐 사람 헤벨이 자기 족속을 떠나 게데스에 가까운 사아난님 상수리나무 곁에 이르러 장막을 쳤더라
12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다볼 산에 오른 것을 사람들이 시스라에게 알리매
13 시스라가 모든 병거 곧 철 병거 구백 대와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을 하로셋학고임에서부터 기손 강으로 모은지라
14 드보라가 바락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넘겨 주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너에 앞서 나가지 아니하시느냐 하는지라 이에 바락이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에서 내려가니
15 여호와께서 바락 앞에서 시스라와 그의 모든 병거와 그의 온 군대를 칼날로 혼란에 빠지게 하시매 시스라가 병거에서 내려 걸어서 도망한지라
16 바락이 그의 병거들과 군대를 추격하여 하로셋학고임에 이르니 시스라의 온 군대가 다 칼에 엎드러졌고 한 사람도 남은 자가 없었더라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광야에서 모세가 해야 할 것과 가야 할 길을 조언해주고 본향인 미디안으로 가려 했으나 모세의 강권함으로 이스라엘과 동행하여 가나안 땅을 얻어 거주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바락은 드보라의 명을 받아 1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시스라를 공격하러 가는데 이에 시스라는 야빈의 군대장관으로서 야빈이 가지고 있는 모든 철 병거 9백 승과 수많은 군사들을 모으고 이참에 이스라엘을 완전히 진멸시켜 버리고자 하였다. 군사력으로만 본다면 바락이 이끄는 1만 명의 이스라엘 군사는 철 병거를 대동한 시스라의 군사에 비해 적은 염소 떼 두 무리 정도 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 그리스도께서는 바락의 1만 군사를 일기당천의 용사로 삼으셔서 우박이나 말벌 등의 아무런 기적 없이 순전히 보병으로만 시스라의 철 병거 군대를 몰살시키게 하신다. 이로써 이전에 에브라임과 므낫세 반 지파가 여호수아에게 철 병거가 있어서 정복이 어렵다고 한 불평은 그들 자신의 믿음없음과 게으름 때문이었음이 증명되었다.
17 시스라가 걸어서 도망하여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에 이르렀으니 이는 하솔 왕 야빈과 겐 사람 헤벨의 집 사이에는 화평이 있음이라
18 야엘이 나가 시스라를 영접하며 그에게 말하되 나의 주여 들어오소서 내게로 들어오시고 두려워하지 마소서 하매 그가 그 장막에 들어가니 야엘이 이불로 그를 덮으니라
19 시스라가 그에게 말하되 청하노니 내게 물을 조금 마시게 하라 내가 목이 마르다 하매 우유 부대를 열어 그에게 마시게 하고 그를 덮으니
20 그가 또 이르되 장막 문에 섰다가 만일 사람이 와서 네게 묻기를 여기 어떤 사람이 있느냐 하거든 너는 없다 하라 하고
21 그가 깊이 잠드니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장막 말뚝을 가지고 손에 방망이를 들고 그에게로 가만히 가서 말뚝을 그의 관자놀이에 박으매 말뚝이 꿰뚫고 땅에 박히니 그가 기절하여 죽으니라
22 바락이 시스라를 추격할 때에 야엘이 나가서 그를 맞아 그에게 이르되 오라 네가 찾는 그 사람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매 바락이 그에게 들어가 보니 시스라가 엎드러져 죽었고 말뚝이 그의 관자놀이에 박혔더라
23 이와 같이 이 날에 하나님이 가나안 왕 야빈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 굴복하게 하신지라
24 이스라엘 자손의 손이 가나안 왕 야빈을 점점 더 눌러서 마침내 가나안 왕 야빈을 진멸하였더라
하솔 왕 야빈과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후손인 겐 사람 헤벨 사이에 어떻게 화평이 있었는지, 그 화평이 둘 사이의 신뢰에서 비롯된 것인지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것읹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건간에 모세 때 부터 이스라엘과 연관이 있어왔던 헤벨 집안이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대적하시는 가나안 족속 그것도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친히 택하신 이스라엘을 극심하게 괴롭히는 가나안 하솔 왕 야빈과 우호적이었다는 것은 긍정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어 보인다. 헤벨의 아내 야엘은 바락의 1만 군사에게 대패하여 가까스로 혼자 도망쳐 온 시스라를 극진히 접대하는 척 하다가 그가 피곤해 자는 동안에 관자놀이에 말뚝을 박아 죽이는데, 이것이 과연 그녀의 신실한 신앙에 기반한 행위인지 아니면 단지 기회주의자처럼 하솔 왕 야빈과 드보라의 이스라엘의 세력 싸움을 재어보고 이스라엘 편에 서서 저지른 행위인지도 판단하기 어렵다. 다만 이후에 드보라와 바락의 시에서 헤벨의 아내 야엘의 행위가 큰 복을 받아 마땅하게 정당화 되고 추앙 받는 것으로 봐서는 야엘은 당시에 범죄한 이스라엘보다 여호와 그리스도를 더욱 신실하게 믿고 섬기고 있었고 그녀의 남편인 헤벨이 여호와 그리스도의 대적인 가나안 하솔 왕 야빈과 우호적인 것에 대해서 매우 못마땅해 했었는데 이 참에 하솔 왕 야빈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리고 여호와 그리스도께로 돌아서는 기회로서 시스라를 죽인 것이라 볼 수 있을 것 같다.
제 5 장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
1 이 날에 드보라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노래하여 이르되
2 이스라엘의 영솔자들이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3 너희 왕들아 들으라 통치자들아 귀를 기울이라 나 곧 내가 여호와를 노래할 것이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4 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물을 내리고 구름도 물을 내렸나이다
5 산들이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니 저 시내 산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였도다
6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길의 행인들은 오솔길로 다녔도다
드보라와 바락은 하솔 왕 야빈을 무찌른 후에 이를 기리는 찬양을 부르면서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군사 6백 명을 쳐죽인 삼갈을 언급한다. 사사 삼갈의 날에 대로가 비었고 길의 행인들이 오솔길로 다녔다는 것은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족속들의 핍박과 학대로 인해 자유롭게 나다니지도 못할 정도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삼갈은 그렇게 모든 이스라엘이 겁쟁이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홀로 신령한 용기를 발휘하여 블레셋 6백 명을 쳐죽이고 장렬히 전사한 것이었다.
7 이스라엘에는 마을 사람들이 그쳤으니 나 드보라가 일어나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되기까지 그쳤도다
8 무리가 새 신들을 택하였으므로 그 때에 전쟁이 성문에 이르렀으나 이스라엘의 사만 명 중에 방패와 창이 보였던가
9 내 마음이 이스라엘의 방백을 사모함은 그들이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신하였음이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10 흰 나귀를 탄 자들, 양탄자에 앉은 자들, 길에 행하는 자들아 전파할지어다
11 활 쏘는 자들의 소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물 긷는 곳에서도 여호와의 공의로우신 일을 전하라 이스라엘에서 마을 사람들을 위한 의로우신 일을 노래하라 그 때에 여호와의 백성이 성문에 내려갔도다
12 깰지어다 깰지어다 드보라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너는 노래할지어다 일어날지어다 바락이여 아비노암의 아들이여 네가 사로잡은 자를 끌고 갈지어다
13 그 때에 남은 귀인과 백성이 내려왔고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용사를 치시려고 내려오셨도다
14 에브라임에게서 나온 자들은 아말렉에 뿌리 박힌 자들이요 베냐민은 백성들 중에서 너를 따르는 자들이요 마길에게서는 명령하는 자들이 내려왔고 스불론에게서는 대장군의 지팡이를 잡은 자들이 내려왔도다
15 잇사갈의 방백들이 드보라와 함께 하니 잇사갈과 같이 바락도 그의 뒤를 따라 골짜기로 달려 내려가니 르우벤 시냇가에서 큰 결심이 있었도다
16 네가 양의 우리 가운데에 앉아서 목자의 피리 부는 소리를 들음은 어찌 됨이냐 르우벤 시냇가에서 큰 결심이 있었도다
17 길르앗은 요단 강 저쪽에 거주하며 단은 배에 머무름이 어찌 됨이냐 아셀은 해변에 앉으며 자기 항만에 거주하도다
18 스불론은 죽음을 무릅쓰고 목숨을 아끼지 아니한 백성이요 납달리도 들의 높은 곳에서 그러하도다
19 왕들이 와서 싸울 때에 가나안 왕들이 므깃도 물 가 다아낙에서 싸웠으나 은을 탈취하지 못하였도다
20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되 그들이 다니는 길에서 시스라와 싸웠도다
21 기손 강은 그 무리를 표류시켰으니 이 기손 강은 옛 강이라 내 영혼아 네가 힘 있는 자를 밟았도다
22 그 때에 군마가 빨리 달리니 말굽 소리가 땅을 울리도다
23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거듭 그 주민들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도다
메로스가 이스라엘에 속한 어떤 족속이었는지 아니면 이스라엘에 편입된 이방 족속 중 하나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시스라와의 전투에서 승산이 없을 것으로 판단해서 바락을 따라 출전하기를 거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기회주의적이고 비열한 태도는 이후에 에브라임 족속이 사사 기드온과 입다에게 비슷하게 취하게 된다.
24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은 다른 여인들보다 복을 받을 것이니 장막에 있는 여인들보다 더욱 복을 받을 것이로다
25 시스라가 물을 구하매 우유를 주되 곧 엉긴 우유를 귀한 그릇에 담아 주었고
26 손으로 장막 말뚝을 잡으며 오른손에 일꾼들의 방망이를 들고 시스라를 쳐서 그의 머리를 뚫되 곧 그의 관자놀이를 꿰뚫었도다
27 그가 그의 발 앞에 꾸부러지며 엎드러지고 쓰러졌고 그의 발 앞에 꾸부러져 엎드러져서 그 꾸부러진 곳에 엎드러져 죽었도다
28 시스라의 어머니가 창문을 통하여 바라보며 창살을 통하여 부르짖기를 그의 병거가 어찌하여 더디 오는가 그의 병거들의 걸음이 어찌하여 늦어지는가 하매
29 그의 지혜로운 시녀들이 대답하였겠고 그도 스스로 대답하기를
30 그들이 어찌 노략물을 얻지 못하였으랴 그것을 나누지 못하였으랴 사람마다 한두 처녀를 얻었으리로다 시스라는 채색 옷을 노략하였으리니 그것은 수 놓은 채색 옷이리로다 곧 양쪽에 수 놓은 채색 옷이리니 노략한 자의 목에 꾸미리로다 하였으리라
31 여호와여 주의 원수들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 하니라 그 땅이 사십 년 동안 평온하였더라
아무리 육적으로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하더라도 그 상대가 반그리스도적인 것을 권하거나 강요할 때는 야엘이 시스라의 머리에 말뚝을 박아버린 것처럼 그 상대와의 관계의 관자놀이에 복음의 말뚝을 박아 버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