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을 좀 건너뛰어서, 1970년대 중반에 지방 소도시에서 음악다방의 디스크자키를 했던 사람을 만나서 그의 디스크자키 입문담을 들어보기로 한다.
1954년생인 김동욱 씨의 고향은 강원도 원주다. 그는 1974년부터 2년 동안 원주 버스터미널 근방에 있던 ‘지구 음악다실’에서 DJ로 꽤 유명세를 탔다. 그가 이른바 ‘팝송’에 눈을 뜨게 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재수를 하러 올라가서였다.
하지만 1972년에 상경하여 마포구 염리동에 있는 고향 친구의 자취방에 옷가방을 부려놓았을 때까지만 해도, 그가 입에 달고 다니던 애창곡은 김상진의 ‘고향 아줌마’였다.
그에게 팝송의 ㄱㄴㄷ을 가르쳐준, 그리고 음악 감상실이라는 별천지를 구경시켜준 사람은 (대개 그렇듯이) 먼저 상경하여 ‘서울물’을 맛 본 자취방 친구 조용식이었다.
조용식이 강원도 촌놈에게 서울 맛 보여주겠다며 그를 끌고 간 곳은 무교동의 한 음악 감상실이었다.
“그저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그런 곳인가 보다 하고 들어갔는데 그게 아니고, 하루 종일 시끄러운 음악을 쉴 새 없이 틀어주는 곳이었어요. 100원인가 150원인가를 내면 콜라를 한 잔 주거든요. 고놈 마시면서 두세 시간 동안 음악만 듣다가 나오는 거지요. 친구가 내 귀에다 대고 설명을 한답시고 무슨 록이다 로큰롤이다 아는 체를 했는데, 그 노래들을 왜 그런 이름으로 부르는지 그것만 이해가 됐어요. 나한테는 그야말로 강원도 뒷산에서 바윗돌(rock)이 깨져서 굴러 내리는 그런 소리로 들렸으니까요.”
‘수울잔을 들다 마알고 우는 사람아…’로 시작되는 ‘고향 아줌마’를 구성지게 뽑아대던 그에게는 너무 파격적인 체험이었다. 음악 감상실의 스피커에서 울려나오는 요란한 소리에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는데, 하지만 김동욱은 이렇게 덧붙였다.
“두어 시간 뒤에 밖으로 나왔을 땐 벌써 그 분위기가 그리워지는 거예요. 마약 같았어요. 그 다음 날엔 내가 졸라서 자취방 친구를 끌고 갔을 정도로…. 일부러 대형 스피커 쪽으로 다가가 앉아서, 세상을 부술 듯이 두들겨대는 타악기 소리에 젖어들다 보면 아, 이 맛에 팝송, 팝송 하는구나, 실감이 나더라니까요.”
이 마당에 대학이 다 뭐냐, 입시공부를 팽개친 그는 팝송 공부를 시작했다. 학원 다니려고 사두었던 공책에는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 클리프 리차드(Cliff Richard)…따위의 가수 이름들과 그들이 부른 노래 제목들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당시 고등학생들을 비롯한 청소년들은 반드시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도, 팝송 한 줄 외워 부르지 못하면 친구들 사이에서 괜히 주눅이 들었다. 그 무렵, 밤 10시 이후의 심야시간대에는 각 라디오 방송사에서 청소년 대상의 음악 방송을 경쟁적으로 내보냈는데, 팝송은 물론이려니와 국내 가수들의 포크송 한 곡 변변히 부를 줄 모르는 시골 아이들에게는, 엽서 한 장 보낼 엄두를 낼 수 없는 프로그램이었다.
가령 ‘영시의 다이얼’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조미미의 ‘바다가 육지라면’이나 이미자의 ‘삼백리 한려수도’ 따위의 노래가 흘러나온다면 그건 ‘대형사건’이될 것이었다. 남진이나 나훈아의 노래도 물론이고.
그러다 보니 고등학교 교실에서는 쉬는 시간마다 팝송 가사의 발음을 한글로 뚜덕뚜덕 공책에 적어서는, 그걸 들여다보고 노래연습을 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신기한 것은 영어 성적이 나쁘다고 핀잔을 듣는 학생들이 팝송 가사 외우는 데는 발군의 실력을 과시하곤 했다는 점이다. 발음 역시 우등생의 그것보다 훨씬 더 그럴듯했다.
입시공부를 완전히 작파한 채, 영어 참고서 대신에 ‘월간 팝송’을 끼고서 음악 감상실이나 다방을 전전하던 김동욱은 결국 원주로 내려갔다, 당시 원주에도 음악다방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전고석이라는 친구가 그에게 제안을 했다.
“내가 다방을 하나 차리려고 하는데 네가 DJ를 좀 맡아줄래?”
이상락 소설가
Black Sabbath - She's G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