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혜자(74)는 2년 전 연극 '오스카! 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끝내며 다시는 연극을 안 하겠다고 결심했다. 골수암 소년, 할머니 간호사 등 1인 11역을 해내고 나니 '내 나이에 이 정도면 아름다운 마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심을 했는데도 마음이 흔들렸다. 김혜자는 내달 4일 개막하는 연극 '길 떠나기 좋은 날'(작·연출 하상길, 이화여고100주년기념관 화암홀)에서 암에 걸렸으면서도 절망하지 않는 주인공 역을 맡아 다시 무대로 돌아온다. 서울 동소문동 연습실에서 만난 그는 "삶의 아름다움을 믿는 작품이기에 꼭 하고 싶었다"며 "살아있음의 가치를 믿어야 순간을 살더라도 배우는 게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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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9일 서울 성북구 연습실에서 만난 김혜자는 “한때 염세주의자였지만, 나이가 들면서 대사 한 줄에서도 새로운 진실을 발견하게 된다”며 “그 기쁨을 전하는 게 배우로서의 임무”라고 말했다. /이태경 기자
경기여고·이화여대에서 공부한 그는 1962년 KBS 공채 1기 탤런트로 시작했다. 지금도 TV와 영화 쪽에서 끊임없이 출연 요청이 오는 그에게 연극은 필수과목이 아니다. 귀찮고 힘든 데다 크게 돈도 안 된다. 게다가 매일 심판받는다. "쉬운 것만 하면 죽은 거나 진배없어요. 배우라면 좋은 얘길 전해야죠. 배우는 그렇게 쓰이려고 만들어진 거예요. 저의 임무는 우리가 잊고 있더라도 어딘가에 꼭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연기로 전하는 거예요."
삶의 가치에 대한 신념은 아프리카 구호활동을 시작하면서 확고해졌다. 1992년 해외 구호활동이 국내에서 싹을 틔우던 무렵이었다. 연예인으로서는 최초로 검은 대륙을 찾아간 그는 "처음에는 신기한 나라 구경하는 셈치고 떠났다"고 했다. 별생각 없이 갔던 에티오피아에서 열흘 내내 눈물을 쏟았던 그는 "아이들의 까만 눈망울이 나 자신의 시시껄렁함을 깨닫게 해줬다"고 말했다. 그 후로 23년간 거의 매해 아프리카를 찾는다. "아프리카 가서 아이들에게도 말해요. 얘들아, 여기가 끝이 아니야. 뭔가가 더 있어. 가치 있는 뭔가가 너희를 반겨줄 거야." 어떤 상황에서도 '아름다운 무엇이 있다'는 믿음에 지난 4월에는 지진 피해를 당한 네팔에 구호기금으로 1억원을 기부했다.
TV 드라마보다 연극이 '인생은 살아볼 만하다'는 신념을 전하기에 좋다고 말했다. "날마다 새로운 진실을 발견해요. 대사 한 줄 한 줄 사이에 몰랐던 세상이 숨어 있어요. 얼마나 신기한 줄 아세요. TV는 그런 면에서 아쉽죠. 이 나이에도 새로운 진실을 발견하는 기쁨에 무대에서 절로 기운이 나요." 이번 작품에 그를 유달리 움직인 대사가 있다. 주인공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남기는 말이다. "아침에 눈 뜨면 오늘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 벌어질까, 하루하루가 얼마나 신비로웠는지 몰라요. 많은 걸 사랑했어요. 내일은 이미 없는 흐르는 물까지도. 다가오는 미래도 도망치지 않고 사랑할 거예요."
53년째 배우이지만, 집에서는 그냥 할머니다. 손자와 손녀에게 가끔 밥을 해줄 때 마냥 행복하다. 얼마 전에는 식빵을 건네주던 손자가 칼을 떨어뜨렸는데, 엄지발가락에 박혔다. 손자는 신경이 끊어져서 4주간 치료를 받았다. "인생은 아무리 살아도 살아도 1초 앞도 모르는구나, 다시 느꼈어요. 앞으로 무슨 작품 하겠다, 이런 말도 못하겠어요. 언제 변할지 모르잖아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기에, 앞으로도 끝없이 희망적인 얘길 하고 싶다고 했다. "이 말을 꼭 전해주세요.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아름답고, 황혼으로 가는 길도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