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공민왕의 개혁정치가 주는 교훈
14세기 후반 중국 대륙에서 원나라가 명나라로 교체되는 대륙정세의 어수선한 시기를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고려를 바로 세우려는 공민왕은 반원 자주 정책을 추진하였다. 반원 자주정책을 추진한 공민왕은 고려의 제31대 왕으로서 재위기간은 1351년부터 1374년까지 23년 동안 고려를 통치하였다.
공민왕의 처음 이름은 기(祺)이고, 뒤에 전(顓)으로 고쳤다. 몽고명은 빠이앤티무르[伯顔帖木兒]이고, 아호는 이재(怡齋)·익당(益堂)이다. 충숙왕(忠肅王)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명덕태후(明德太后)이다. 왕비는 원나라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이다. 공민왕은 12세가 되던 1341년(충혜왕 복위 2)에 원나라에 들어가서 10년 동안 머물러 있다가 1351년 충정왕(忠定王)의 뒤를 이어 왕위에 즉위했다.
< 고려 공민왕의 영전 >
공민왕이 추구한 개혁정책의 궁극적인 목표는 대외적으로는 적극적으로 원나라에 반대하는 반원정책을 펴 몽고적 잔재를 제거하고, 원에 의해 잃어버린 국토를 회복하기 위한 북진정책을 실시하였으며, 또한 대내적으로는 고려왕실을 허약하게 만든 친원파를 제거하고 국가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한 자주성 회복의 개혁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공민왕이 실시한 주요 개혁정책은 원나라의 배척운동, 영토회복, 친명정책, 인사행정 쇄신과 노비해방정책 등 일곱 차례에 걸친 제도 개혁이었다. 이를 위해 공민왕은 혁신적인 새로운 신진 사대부 세력을 기반으로 명의 흥기로 원이 쇠퇴하는 정세 변화에 때맞추어 개혁정치를 추진하였다.
공민왕은 제도개혁으로 1352년 변발·몽고식 의복 등의 몽고풍속을 폐지하였으며, 또 원의 간섭으로 격하되었던 고려의 관제를 3성 6부의 구관제로 복구하고 권문세족의 관직 독점의 중심기관이었던 정방(政房)을 폐지하여 원래 모습으로 되돌려 놓았고, 이와 같이 공민왕은 대내외적으로는 개혁을 추진하여 부패한 권문세족들의 힘을 약화시키고자 하였다.
그래서 먼저 무신 정권 시대 최우가 설치하였던 정방(政房)을 없애 버렸다. 그 이유는 무신 정권 이후 인사권을 장악하여 왕권을 약하게 만든 정방을 없앰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고, 또 정방을 폐지함으로써 공민왕이 직접 인사권을 가지고 권문세족에 대항하는 신진 사대부를 기용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래서 신진 사대부가 고려 말의 유력한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들 권문세족과 인연이 없는 승려 신돈을 전민변정도감의 판사로 임명하여 과감한 개혁론을 내세워 권문세족들이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본래의 소유주에게 넘겨주거나 양민으로 해방시켜 주었다.
<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묘 >
전민변정도감은 사급전(賜給田)과 농장의 발달에 따라 권문세족들이 토지나 농민을 탈점함으로써 국가재정이 고갈되자, 이들을 추쇄(推刷)·환본(還本)하기 위해 세운 임시관청이다. 따라서 이러한 정책으로 양민들이 많아지게 되면 세금을 거둘 수 있는 대상이 많아져 국가 재정이 튼튼해지고, 권문세족들은 토지와 노비가 줄어들어 힘이 약해지게 된다. 또한 1356년에는 몽고의 연호·관제를 폐지하여 문종 때의 제도를 복구하는 한편, 내정을 간섭하던 원나라의 정동행중서성이문소를 폐지하고, 원나라 기황우(寄皇后)의 황실과 인척관계를 맺고 권세를 부리던 기철(奇轍), 기식, 기철, 기원, 기주, 기륜 등의 일파를 숙청하였으며, 그리고 공민왕은 원이 고종 말년에 화주(영흥)에 설치하여 100년간이나 존속해온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한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폐하고 철령 이북 땅을 되찾았으며, 인당으로 하여금 요동 지방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홍건적 및 왜구의 잦은 침입과, 1363년 찬성사 김용의 반란, 1364년 충선왕의 셋째아들 덕흥군 옹립을 내세운 친원파 최유의 반란 등으로 국력이 크게 소모되기도 하였다. 더구나 1365년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공민왕은 실의에 빠져, 모든 국사를 신돈에게 맡기고 불공에만 전심하였다. 그러나 정권을 장악한 신돈은 권문세족들이 자신들의 세력 기반을 지키기 위한 강력한 반격에 부딪쳐 정치실정을 거듭하고 도리어 왕을 해치려 하므로, 그를 수원으로 귀양 보낸 뒤 처형하였다. 1368년 명나라가 건국되자, 공민왕은 이인임을 보내어 명나라와 협력하여 요동에 남아 있는 원나라의 세력을 공략하였으며, 2년 뒤 이성계로 하여금 동녕부를 치게 하여 오로산성을 점령하는 등 국위를 떨쳤다. 그 뒤 1372년에 공신 및 고위관직자의 자제를 선발하여 자제위를 설치했다.
그런데 자제위 소속의 미소년 홍윤(洪倫)이 익비(益妃)와 통하여 익비가 임신했다. 이를 환관 최만생이 공민왕에게 고하자, 평소 후사가 없어서 고민하던 공민왕은 익비가 낳을 아들을 자기의 아들로 삼기 위해 홍윤 일파와 최만생을 모두 죽여 사실을 은폐하고자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최만생이 먼저 홍윤·권진·홍관·한안·최선 등과 공모해 밤에 공민왕을 죽였다.
뒤에 이들은 이인임·안사기·경복흥 등에게 발각되어 효수(梟首)당했다. 이처럼 공민왕은 개혁 정치를 추진해 나가기 위해서 밖으로는 원의 세력과 싸워야 했고, 안으로는 권문세족들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공민왕의 최대의 적은 망해가는 원의 세력이 아니라 어려운 국가 혼란기에 자기 기득권만을 지키려는 권문세족들의 귀족정치세력들이었다.
공민왕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의 역사를 살펴보게 된다. 우리민족의 역사는 한마디로 외세세력들이 아닌 부패정치 세력들과의 싸움인 것이다. 우리가 우리민족의 역사 속에서 정치 귀족층들의 정치적 부패현상을 제대로 바로잡지 못하다면, 우리는 또다시 나라를 잃는 비운의 역사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공민왕의 개혁정책을 무너뜨린 고려 권문세족들에 의해서 고려가 망하듯이, 이씨조선도 귀족세력들의 부패로 나라가 망한다.
이씨조선을 세운 태조(太祖) 이성계는 그의 즉위교서(卽位敎書)에 " 조선의 의장(儀章)과 法制는 한결같이 고려의 고사(故事)에 의거한다. "고 이씨조선의 정통성을 고려에서 찾는다. 하지만 고려를 정신을 계승한 이씨조선은 고려처럼 귀족정치 세력들의 부패 현상으로 왕조가 무너진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이와 같은 똑 같은 역사를 그대로 되풀이 하고 있다.
우리는 공민왕이 친원 잔재세력을 제거하듯이 친일세력들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으며, 또한 우리민족의 영토조차 제대로 회복하지 못하고 동북공정과 독도문제의 슬픈 역사를 되풀이 하고 있다. 또한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행정쇄신을 추진하며 백성들의 복지를 위해 실행하고자 했던 공민왕의 개혁정책을 배우지 못하고, 우리의 정치권은 지금도 여전히 자신들만의 정치적 싸움에만 열중이다. 이런 모습은 고려 말과 이씨조선 말의 역사를 그대로 보는 듯하다. 우리는 우리의 비운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정치적 부패와 정면으로 싸우면서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바로 구현해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