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는 신인가?
붓다는 기원전 6세기 무렵 네팔지역에 속해있는 까삘라왔뚜 라는 지역에서 탄생했다. 그곳의 왕인 숫도다나왕과 마야왕비 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타, 가우타마 싯타르타다. 붓다는 태어난 지 일주일만에 어머니를 잃게 된다. 붓다는 태어나자마자 죽음의 고통을 경험했다고 할 수 있다. 고타마는 마하빠자빠띠의 정성스로운 보살핌 속에 자라게 된다. 붓다는 7살 무렵, 아버지를 따라서 농경제 행사에 참여하게 되는데, 농경제 행사에서 농부가 간 밭에서 있는 벌레를 새가 쪼아먹는데, 어린 태자인 고타마는 차마 볼 수 없는 생사의 고통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때 고타마는 밭 옆에 있는 작은 나무 옆에 쉬게 되는데, 그곳에서 아주 특이하고 행복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 경험은 훗날 붓다가 될 수 있는 요인이 되는 아주 중요한 체험이 된다. 붓다는 생사의 고통을 경험한 유년기에 붓다가 감수성이 굉장히 풍부하고 예민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불교에서 자비(慈悲)라는 덕목이 강조된 것 같다.
17세의 붓다는 이웃 나라의 공주인 야소다라와 결혼을 하게되는데, 결혼을 한 해에 성 밖에 나가 세상을 보게 된다. 결혼 전에는 성 밖을 못 나갔다. 그 외출을 사문유관(四門遊觀)이라 한다. 이는 붓다가 출가 전, 태자 때 카파라성의 동남서북 4문 밖에 나가 인생의 4고를 직접 보고 출가를 결심한 일이다. 이때 노(老)병(病)사(死)의 모습을 직시하게 됐다. 또한 인간은 누구나 늙고 병들고 죽는구나! 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북문에서 본 출가사문을 보게 되고 노(老)병(病)사(死)가 없는 경지를 추구하는 자가 되기위한 결심을 하게된다. 그 결심을 실천하게 된 게 29세의 고타마이다. 이 때 출가를 실행하기 까지 걸린 세월이 12년이다. 이 시기에 출가를 앞두고 태어난 아들 ‘라훌라’가 있는데 라훌라의 탄생이 태자의 출가를 가능하게 했다고 볼 수 있다. 아버지, 이모, 아내 모두가 출가의 걸림돌이 될 수 없었지만, 아들만이 출가의 걸림돌이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 머물다가는 출가를 못 할 것 같다는 절박함에 그가 태어날 밤에 붓다는 출가를 결심하게 된다.
출가한 후에는 라자가하로 향하게 되는데, 그곳에 당시에는 자유사상가, 출가사문들이 굉장히 즐비했다. 태자는 태자시절에 수행을 한 적이 없어, 수행법을 배워야 했는데, 이때 만나게 된 웃다카 라마풋타와 알라라 칼라마를 통해 수행을 진행하게 된다. 그러나 워낙 뛰어난 붓다에 의해 이들이 도달한 경지에 금방 도달하게 된다. 그것이 본인이 추구했던 내용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두 스승을 떠나 고행림을 떠나 고행을 하게된다. 이를 6년 고행이라고 한다. 붓다는 고행을 목숨을 내걸고 하는데, 결국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붓다는 나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나와 같이 고행하는 자는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한다. 이때 고타마는 자신이 목숨을 걸고 고행을 했지만, 깨달음을 얻지 못한 것에 자신의 과거에 어떤 점이 중요한지 돌아보게 된다. 자신의 수행과정을 되돌아보는 과정에서 7살의 경험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행복의 내용을 면밀히 분석해보게 된다. 그 내용을 분석해본 결과 이것이야말로 올바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자신의 행복감을 두려워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진다. 붓다는 행복감=쾌락이라 생각했는데, 그때 그 행복은 감각적 욕망 충족의 쾌락을 벗어난 “순수한 행복”이라고 한다. 그것을 기반으로 중도라는 수행법을 만든다.
이때 붓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고, 세상에 깨달아진 자, 붓다가 출현한다. 붓다는 반열반(般涅槃), 즉 타오르는 번뇌의 불을 없애고 깨달음인 지혜, 보리(菩提)를 완성한 경지에 오를 수 있었지만, 45년간 전법의 길을 떠난다. 불교는 깨달음을 기반으로 깨달음의 사회로 만들고자 하는 붓다의 가르침이 들어가 있다. 붓다는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들어주며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고통 해결의 길을 가르쳐주었다.
80세의 붓다는 열반의 땅 ‘쿠시나가르’로 향하게 된다. 가는길 마다 사람들을 만나 설법을 하는데, 어느 날 대장장이 아들 춘다가 올린 공양을 받고 굉장한 고통을 느끼게 되었다. 이것은 붓다의 최후의 공양이 됐다. 붓다는 아난다에게 말한다. “아난다여, 그대가 가서 춘다를 위로해 주거라. 춘다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내가 공양을 잘못 올려서 세존께서 열반(涅槃)에 드시게 되었구나.” 그리고 스스로 자책할 것이니.. 그를 찾아가서 위로해 주거라. 이 세상에 가장 큰 공양이 두 가지가 있으니 ‘정각을 이루기 직전의 공양’이요, ‘열반(涅槃)에 이르기 직전의 공양’이니 이 둘의 공덕은 똑같은 공덕이 있다. 그러니 춘다는 ‘나에게 마지막 공양을 올린 공덕으로 오랜 기간 크나큰 복덕을 누릴 것이다.’라고 그를 위로해 주거라.”라고 말했다. 그 후로 붓다는 열반(涅槃)에 오르게 된다.
여기서 붓다는 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미 답은 자명해졌다. 부처는 인간이었다. 감히 신들도 범접할 수 없는 자비의 실천가인 붓다였다. 그런 의미에서 붓다는 신을 능가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원시불교의 붓다는 절대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으며, 그의 깨달음에 근거한 원시불교는 무신론적인 경향이 지배적이다.
첫댓글 역사적 인물 고타마 싯달타(가장 좋은 소)가 붓다(깨우친 자)가 되는 일생을 좇아가면서 서술하였네요. 1학년이라 전공수업 듣기가 상당히 부담스러웠을 텐데도 전체적인 맥락을 잘 파악하면서 정리하였어요. 빨리어와 산스크리트어 음가 표기가 조금 달라서 낯선 부분도 있기는 합니다. "붓다는 행복감=쾌락이라 생각했는데, 그때 그 행복은 감각적 욕망 충족의 쾌락을 벗어난 “순수한 행복”이라고 한다. 그것을 기반으로 중도라는 수행법을 만든다."라고 한 것은 어디에서 인용한 것일까요? 일반 개론에서는 잘 다루지 않는 부분인데, 다소 오해가 있을 수도 있어서요. 초기 불교보다는 비교적 후대 불교에서 부처의 깨달음을 이렇게 표기하기도 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