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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연구 윤내현 교수 "중국의 역사왜곡보다 우리 학자들 태도가 더 문제"
중국의 한국 고대사 왜곡보다 우리 학자들의 태도가 더 문제”
인터뷰_ 1980년대 파격적 고조선 연구 제출했던 윤내현 단국대 명예교수
2012년 09월 25일 (화) 11:27:25 최익현 기자
교수신문 링크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5913
▲ 공고를 나와 과학도가 되려했던 윤내현 명예교수는 특허만도 수십개를 갖고 있는 ‘과학자’ 역사학자다. 단국대에서 박사를 했으며, 하버드대 대학원 동아학과에서 연구하기도 했다. 『한국고대사신론』으로 학계에 파장을 일으켰지만, 그의 고조선 연구는 안타깝게도 계승되지 못했다.
중국의 동북공정, 즉 중국의 한국 고대사 왜곡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 역사학자들의 떳떳하지 못한 학문적 태도입니다.”
1980년대 초중반 「고조선의 강역」, 「중국문헌에 나타난 고조선 인식」, 「위만조선의 재인식」 등을 발표했던 윤내현 단국대 명예교수(72세)의 지적이다. 2005년 정년퇴임을 한 그는 지금 파킨슨씨병으로 말도 어눌하고 거동까지 불편한 상태다. 중국 고대사를 전공한 그가 한국 고대사의 예민한 부분을 거론하고 뛰어든 것은, 1983년 44세의 나이에 「箕子新考」를 발표하면서부터다. 그리고 30여년이 지났다. 그는 지금 잊혀져가고 있다.
현행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 실린 고조선 관련 내용을 보면, 위만이 준왕을 몰아내고 고조선의 왕이 됐으며, 이후 漢의 침략으로 왕검성에서 1년 동안 항전하다 지배층의 내분으로 고조선이 멸망했고, 한 군현이 설치(낙랑군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곧 사라짐)됐다고 기술돼 있다. 이러한 교과서의 설명 어디에도 그가 힘겹게 연구한 내용은 반영돼 있지 않다. 위만이 몰아낸 준왕은 ‘기자의 후예’이며, 위만이 권력을 차지한 곳도 고조선의 일개 변방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고 한 군현은 한반도에 설치되지 않았다는 것 등 주장 하나하나가 주류 학계의 시각과 첨예하게 구별됐다.
중국문헌 연구를 배경으로 제출된 윤 교수의 학설은 학계 ‘소수 의견’으로도 남지 못하고 그야말로 변방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10여년 전부터 중국측이 만리장성의 동단 기점을 압록강까지 무리하게 확장하는 공정을 펼쳐온 데는 만주 요동이 중국 영토라는 인식이 깔려있다. 그러나 30여년 전 이미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을 ‘중국문헌’을 중심으로, 중국의 시각에서 확인한 윤 교수의 시각에서 본다면, 중국측의 역사왜곡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태풍 산바가 비바람을 몰고 오던 지난 17일 서울 보라매공원 자택 근처에서 그를 만났다.
△ 중국 고대사 전공인데, 1980년대 고조선 강역, 기자조선, 한사군 등과 관련 독특한 주장을 했다. 이때부터 주류학계와 불편해진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재야 사학자들과 주류 사학자들과의 마찰이 굉장히 컸다. 그들이 주류 사학계 학자들을 ‘식민사학’으로 비판을 많이 했다. 학자들이 국회에 불려가서 망신도 당하고 하는 사건도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내가 새로운 것을 발표하니, 재야 사학자들이 나를 굉장히 지지했다. 주류 사학계에서 나온 자신들 편으로 생각해 지지했던 것이다. 주류사학계는 지금도 그렇지만, 일본 총독부에서 만들었던 한국사, 그 기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원래 중국 고대사를 했던 사람이다. 중국 문헌을 보다보니까, 우리 역사가 일제가 가르쳤던 내용과 다른 것을 알게 됐다. 우린 흔히 중국인들이 역사왜곡 한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우리 역사를 잘 못 쓰는 것도 있다. 그런 것도 많다. 자기네가 자기 역사도 바로 잡지 못하면서, 남한테만 자꾸 책임 전가하는 것은 안 되지 않나.”
△ 「箕子新考」는 정말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왜 ‘기자’를 언급했나.
“나는 중국 사료를 보면서, 기자가 중국과 한국에 걸쳐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 의문을 가졌다. 그래서 기자를 이해하면 우리 고대사를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중국의 갑골문을 조사해보니 기자가 언급된 갑골문이 10~20여개 나왔다. 그가 조선에 갔다는 이야기는 없었지만, 기자가 생존했던 인물이라는 근거 자료는 됐다. 기자에 대해 더 조사 해보고, 갑골문, 청동기 조사해보니, 기자의 청동기가 중국의 동북부에서 발전한 청동기로 밝혀졌다. 그렇다면 기자가 우리나라 쪽으로 왔을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기자신고」를 써서, 도대체 기자는 누구였으며, 그가 정착한 곳이 어디였는지를 밝혔다.
내 결론만이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지만, 기자는 중국으로부터 고조선 서쪽 변경으로 이주해온 실제 인물이며, 그가 고조선 사회의 중심 세력이 된 것이 아니라, 작은 자치국가 형태의 小國을 유지했다고 본다. 즉, 기자나 기자국은 한국고대사의 주류에 위치할 수도 없으며 ‘기자조선’이라는 용어는 전연 부당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학술 발표회장에서 이런 내용을 발표했더니 원로 선배 사학자들이 막 화를 냈다. 영토만 넓어서 뭐 할 거냐고. 영토의 문제가 아니라 사료의 문제, 역사 연구의 문제였는데 말이다.”
△ 그런 마찰이 어떤 불이익으로 돌아왔나.
“그 이후 자주 어울렸던 많은 분들과 거리가 멀어졌다. ‘윤내현이 이상해졌다’라고 학술 모임에도 부르지 않았다. 주류사학계로부터 멀어졌다. 그 뒤부터 아예 연구비 신청도 하지 않았다. 모두 자비로 연구했다. 언젠가 단국대에서 100만 원 연구비를 내 명의로 줬는데, 이것도 학교에서 준 것이지 신청해서 받은 건 아니다. 하버드 옌칭 연구소로 공부갈 때, 단국대가 지원해줬다.”
△ 결국 역사 연구의 기본 원칙이랄까, 태도 문제가 중요할 것 같다.
“역사 연구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하나는 사료이고 다른 하나는 해석이다. 두 가지가 충족될 때 역사가 된다. 사료에 근거해서 일단 사실을 밝히고 이게 확실하게 밝혀진 다음에 해석의 문제가 따른다. 오늘날 역사 연구가 반성할 부분이 많다. 해석을 사료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순된 모습이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우리의 근대사학 연구방법이 들어왔는데, 일본이 강조했던 게 실증사학이다. 실증사학이야 독일에서 시작했고 옳은 거다. 그런데 일본이 우리에게 실증사학을 가르칠 때, 그것을 왜곡해서 사료를 올바르게 해석하는 것을 가르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중국기록의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 그러나 신하는 아니었다’라는 기자 관련 대목에서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건 말하지만, 신하는 아니었다는 부분은 의도적으로 빼버렸다. 고조선의 국경 문제도, 先學들은 일본사람들이 말한 것을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에 문제가 됐다. 앞뒤 문맥을 조금만 맞춰보면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 너무 많다. ”
△ 중국의 한국 고대사 왜곡이 반복되고 있다. 10년 전부터는 만리장성의 동단 기점을 압록강으로 잡고 있을 정도다.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지혜로울까.
“원론적이지만, 원전을 철저하게 해석하고 연구하는 것, 중국 사람이 봐도 이것은 뒤짚을 수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해석과 연구를 내놓아야 한다. 우리한테 유리하다고 왜곡하면 그런 것은 중국이 보면 금방 알지 않겠나. 문헌을 사실대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오류 없도록, 그렇게 해서 거기에 의견을 달아야 하지 않을까. 고고학 자료도, 해석을 정확하게 해야 한다. 중국에서 고고학 조사 자료를 발표하면 우리 학계에서는 그걸 그대로 따른다.
정치한 해석을 하고, 합리적 설명이 가능해야 인정할 수 있는 데도 말이다. 연진장성에서 유물이 출토됐다고 한다면 이것도 논리적으로 따져봐야지, 중국측 발표를 그대로 믿는 건 아니라고 본다. 한 번은 중국 중학교 역사시간 수업을 견학해본 적 있다. 중국 지도를 그려놓고 설명을 하는데, 거기에 청천강까지 만리장성이 그려져 있다. 그 근거가 한국의 유명한 역사학자가 고증한 내용이라고 가르친다. 이런 태도가 중국의 역사 왜곡을 불러왔다고 본다.
또 하나, 학계에서는 주류사에 반하는 학설도 들여다봐야 하는데, 그걸 폐쇄해버리면 학문의 발전은 어렵다고 본다. 나 같은 사람은 주류학계의 주장과 전혀 다른 주장을 해왔다. 그렇다면 한번쯤 불러서 ‘당신 얘기도 해보시오’ 해야 하지 않나. 동북아역사재단은 단 한 번도 내 얘기를 경청한 적이 없다.”
△ 학계 일부에서는 고대사 특히 고조선 관련 자료가 너무 적다라고 말한다.
“사료가 적다라고 말하는 것은 학자가 자기 학문을 스스로 낮게 평가하는 거다. 사료가 얼마나 있어야 풍부하단 말인가. 하나나 둘?犬? 있는 것으로 연구하는 것이다. 『삼국유사』에서 고조선을 많이 언급하고 있지만, 거기에 있는 내용을 국사책에서 어느 정도 인용하고 있는가? 단군왕검이라는 이름 말고는 전혀 인용이 없다. 어떤 국사책에서는 고조선 도읍이 왕검성이었다고 기록했다. 그것은 ‘위만조선’의 도읍이지 고조선의 도읍이 아니다. 어디에도 그런 기록은 없다. 왜 있는 사료를 놓고 그렇게 가르치나. 그러니까 사료가 없다는 게 아니라 있는 것도 안 쓰면서, 사료가 부족하다는 이야기 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고조선의 영토는 우리 기록에는 없어도 중국기록에는 나오지 않는가. 중국과 경계를 하고 있다고. 그럼 서쪽 국경을 알 수 있다. 중국이 우릴 위해 쓴 게 아니라 자기네 국경을 알리려고 쓴 거다. 그런 식으로 사료를 알아가야 하지 않을까. 고대사는 우리 역사의 뿌리에 해당한다. 역사는 지식도 키우지만 의식을 키우는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역사가 제대로 교육이 안 되면 민족의식이 바로 설 수 없다.”
경기도 교육청과 동북아 역사재단의 갈등 무엇이 문제인가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 2012-10-01 3.4부
이덕일 소장 출연 인터뷰 내용 녹취한 내용입니다.
방송일 : 2012년 10월 1일
진행 : 손석희
출연 : 이덕일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장
◇ 손석희 / 진행 :
동북아 평화 교육 자료집. 이걸 놓고 두 단체가 해석차로 갈등을 빚고 있다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 손석희
이덕일 소장님 무엇이 가장 문제인가요? 갈등의 핵심은 무엇인가요?
◆이덕일
경기도 교육청에서 발간한 이 자료집은 현직 선생님들이 17분이 모여서 만든 자료집입니다. 자료집에 나와있는 내용에 문제가 있다고 해가지고 동북아 역사재단에서 교육부와 외교부를 통해서 수정권고로 문제제기를 한 내용들입니다
◇ 손석희
굉장히 여러 분야에서 해석 차이가 있네요. 그럼 우선은 왜 경기도 교육청은 이러한 자료집을 내놨을까요?
◆이덕일
그 자료집이 나온 배경까지는 잘 모르겠구요. 어쨌든 제가 보기에는 선생님들이 현재 국사 교과서에 상당한 문제점이 있었다는 인식을 하고 있지 않았는가 많은 문제제기가 되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선생님들이 모여가지고 이런 자료집을 만들었는데 그 자료집에서 나온 내용에 대해서 말하자면 동북아역사재단이 선제적으로 공세를 펼친 겁니다.
◇ 손석희
그거 하나하나에 대해서는 다는 시간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일단 들어가보죠. 단군이 신화냐 역사적 사실이냐 하는 부분 양쪽의 의견이 갈리는 거 같은데 경기도교육청에서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얘기했고 여기다 역사학자들이 참여하고 계실텐데요. 의견들이 갈리고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덕일 소장은 어떻게 보십니까?
◆이덕일
핵심이유는 어떤 누구의 프레임으로 역사를 보는가 라는게 가장 중요한 건데요. 단군을 신화다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 식민사학자들입니다. 그런데 일제시대에는 이게 별로 성공을 못거뒀어요 워낙 일본사람들이 역사를 왜곡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데 해방이후에도 일제 식민사학의 후예들이 계속 역사권력을 장악하면서 이 사람들이 소위 자기들은 신민족주의 사학자라고 하면서 단군 사화를 계속 신화로 밀어붙이니까 일반국민들이 우리 역사학자가 주장하는거니까 근거가 있지 않겠느냐라고 생각해서 해방이후에 오히려 신화라는 인식이 더 퍼져나가는데요
◆이덕일
신화냐 아니냐는 일단 첫 번째 역사사료에 일연의 삼국유사에 나와 있구요
그 다음에 두 번째로는 유물을 봐야 하는데 단군조선의 강역이 지금의 내몽골 만주까지 다 걸쳐져 있던 겁니다. 거기에 제가 최근에도 답사를 가봤는데 중국 내몽골 적봉이란 곳에 가면 석성 , 돌로 만든 성이 있는데 이건 완전 고구려 백제성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중국쪽에서 나온 자료집을 보니까 지금부터 4천년 전의 석성이라고 나와 있어요. 그럼 지금으로부터 4천년 전에 중국과 전혀 다른 우리와 똑같은 계통의 돌로 쌓은 석성들 그게 머냐 이거죠. 그게 바로 단군조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군조선은 일본이나 중국의 시각에서 바라보지 않고 우리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거죠
◇ 손석희
그렇게 하면요 저희가 얘기를 나눌 고인돌,간도문제,백두산 정계비문제 이런 모든 것들이 같은 프레임에서 얘기하는 수 밖에 없는데.. 문제는 역사적 사실로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얼마나 되는 문제냐인데 동북아 역사재단 쪽에서는 그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국내 사학계의 일반적인 시각을 너무 뛰어넘는 것이 아니냐 그래서 이것이 자료집이 문제가 있다고 얘기를 했는데.. 그럼 제가 이덕일 소장님의 말씀을 대신해볼까요? 일반적인 시각이라는 것이 그동안의 우리 사학계를 주도해왔던 이른바 식민사관을 가진 사람들의 인식이 아니냐 그건 당연히 뛰어넘을 수 있는 거 아니냐? 라고 말씀하실거죠?
◆이덕일
그렇죠 그런데 가치판단 기준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을 때 일차 사료로 근거를 제시해야합니다. 그런데 간도문제에 있어서도 동북아역사재단은 우리 영토인적이 없다라고 하는데 이건 진짜 역사공부를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으면 이 사실 하나로 그양반은 숟가락 놔야 해요. 간도문제는 그 조선후기에 우리 백성들이 간도로 많이 넘어갑니다. 농사짓고 하다가 이미 1900년대 초엽에 십만명 이상이 살고 있어요 중국 쪽에서 문제를 제기하니까 간도 관리사 시찰사라고 하는 어윤중 이범윤같은 인물을 보내서 조사를 시킨 다음에 분쟁이 되니까 분쟁의 해결점은 백두산 정계비거든요. 백두산 정계비의 내용을 조사하자라고 해가지고 당시 김우식이라는 사람을 파견해서 백두산 정계비를 조사하게 합니다. 그런데 백두산 정계비문제를 생각할 때 백두산정계비는 우리에게 상당히 불리하게 설치하게 됩니다 청나라에서 목극등이라는 사람이 대표로 나왔고 조선 조정에서는 이선부라는 인물을 보냈는데 목극동이라는 청나라 대표가 조선대표에게 당신은 나이가 많으니까 당신은 따라오지 말라고 해서 이 사람이 안따라가요 목극등과 조선에서는 통역관이 올라가서 한거기 때문에 백두산 정계비 자체가 불리하게 되어있습니다만 그 불리하게 되어있는 백두산정계비에서도 간도는 우리땅이다.
동쪽으로 토문이라고 하는데 토문이라는 것은 중국의 명나라 청나라 시대에 지리집에 보면 혼강 북쪽에 토문령이라는 고개가 있다고 기록이 되어있고 중국 쪽에 있는 간도 쪽에 있는 강으로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우식이라는 사람을 보내서 정계비를 조사해보고 물길을 조사해보고 이건 우리땅이라고 해가지고..
<역사스페셜 그래픽 화면 : 백두산 정계비>
◇ 손석희
그런데 말씀은 알겠는데요. 간도라는 말 자체가 중간의 간 짜잖아요. 그 당시의 중국도 우리도 여기에 대해서 어떤 영토의식이라고 할까 국경선이라는 개념이 좀 덜했던 거 아닌가요?
◆이덕일
그 당시에 이게 문제가 되기 때문에 숙종 때도 문제가 되기 때문에 청나라 조정에서 회의를 거쳐서 목극등을 사신으로 파견했고 이문제를 확정지어라, 조선에서도 확정지어라라고 해서 사신을 파견했던 겁니다. 이미 조선 숙종때 영토문제에 관해서 두 나라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 손석희
그거를 백두산 정계비에 따르면 그 갈등 속에서도 간도는 우리땅으로 되어있으니까 그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 말씀이군요?.
◆이덕일
그런데 결국은 1909년에 우리나라를 거의 완전히 장악하고 난 다음에 동청철도 만주철도 부설권과 간도를 바꾸는 겁니다. 일본이 청나라와 불법적으로 회담을 해가지고 조약을 맺어서 일본이 바꾼거지 대한제국은 넘긴 적이 없어요. 그런데 이런 사실을 동북아재단에서는 우리땅이 없던 적이 없다고 하니까 이 사람들은 중국의 입장아니면 일본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는거죠.
◇ 손석희
재단입장에서는 백두산 정계비가 건립된 시기가 국제법이 등장한 시기 이전이기 때문에 국제법적으로 맞다 안맞다 가늠하기 어렵지 않느냐?
◆이덕일
그건 너무 저차원적인 이야기라 답변을 하기도 이런 수준낮은 질문까지 답을 해야 하나 문제인데
◇ 손석희
옮긴 사람이 무안해지게 왜 그러십니까?
◆이덕일
지금 말하는 국제법이라는 것이 제국주의 시대때 자기들끼리 이러쿵 저러쿵 한거고 그럼 그전에 우리와 일본 사이에서도 있었고 각 여러 국경에 관한 사안들이 있는데 서로가 국경을 맺은 것은 아무 효력이 없다는 이야기인지. 너무 인제 말이 안되는 주장들을 하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도대체 어떻게 펼칠 수가 있는지 이런 주장에 까지 답변을 해야 하는지 기가막힌 노릇이죠
◇ 손석희
아무튼 제가 옮긴 그 말대로 해가지고 재단 측에서는 수정권고를 교육청 쪽에 내렸으니까요 그분들이 그런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덕일
그러니까 큰 문제라는 거죠. 동북아 역사재단이라는 데를 설립하고 매년 수백억씩 국민세금을 지원할 때는 바로 이런 문제에 대해서 우리 쪽의 입장을 서서 논리를 개발하고 제공하고 맞서라는 건데 거꾸로 중국이나 일본 극우파 입장에서 자꾸 논리를 전개하잖습니까?
◇ 손석희
그 얘기는 마무리할 때 얘기할테니까 기왕에 나온 쟁점들에 대해서 짚어보겠습니다. 고인돌 같은 경우 고조선의 고유 묘제냐 중국 동부에서도 발견된다? 이건 어떻게 봐야 할까요?
◆이덕일
고조선의 표지유물이 몇 가지가 있는데요. 고인돌도 있고 비파형 동검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유물이 출토되는 데는 다 고조선의 강역들인데. 예전에 요문제 이전에 어떤 문제가 있냐면 식민사학자들은 고조선을 평안남도에 있는 작은 국가였다 어떻게 보면 나라도 아닌 부족국가 정도였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한중수교 이후에 중국에 왔다갔다하게 되니가 그쪽 중국 지역에서 엄청나게 많은 고조선 유물유적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데 이걸 갖다가 고인돌이 그 건립된 시기가 있는데 고조선 강역이 확정되기 이전에 그리고 이후에 건립된게 있잖습니까 우리민족의 이동 경로를 따져봐야 하는건데
사마천 사기에 따르면 중국의 황제족과 우리 치우족하고 둘이 싸우는 것으로 동이족의 선조인 치우족과 싸우는 것으로 사마천 사기가 시작하는데요 처음에는 치우집단이 승리하다가 나중에는 패배해서 이동을 하는데 이동경로가 세군데입니다 하나는 중국 남방으로 가서. 백족 묘족이 되고 하나는 중국 산동반도쪽으로 가고 또 한쪽은 몽골이나 내몽골이나 만주 한반도 일본 이런 쪽으로 이동을 하는거죠.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말하는 중국에서도 동쪽에서도 나온다라는 것을 산둥반도를 말하는건데 산동방도도 저희 민족의 이동경로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나오는 겁니다
◇ 손석희
결국은 그게 고조선의 묘제로 봐야 한다.
◆이덕일
고조선이라는 부분은 단순한 부분은 아니고 고조선이라는 국가가 언제 수립되고
◇ 손석희
그런데 동북아 역사재단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비하기 위해서, 대항하기 위해서 만든 거 맞죠?
◆이덕일
설립 목적은 그런데요. 실제 동북아 역사재단의 설립 목적은..시간이 짧아서 말씀 못 드리는데 (시간충분합니다 말씀하셔도)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이라는 책을 쓴 적이 있어요 이 동북아역사재단이 얼마나 우리 역사를 저쪽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 극우파의 시각으로 해석하는가에 대해서 일차 사료적 배경을 가지고 쭈욱 책을 쓴 책이 한국사 그들이 남긴 진실이라는 책인데 이 책에 나와 있는 부분이 머냐면요. 우리와 중국 쪽에서는 지금 동북공정을 진행하는데 중국 동북공정의 핵심은 머냐면 한강 이북은 한사군 영역이었다.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했다는 한사군의 강역이었다. 고로 한강 이북은 중국의 역사 영토다라는게 중국 동북공정의 핵심입니다. 중국이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은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했던 그걸 그대로 판박이 하는거거든요.
그런데 이미 조선시대때 이미 성호 이익선생은 한사군은 만주에 있었다라고 얘기합니다.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였던 석주 이상용, 백암 박은식, 단재 신채호 선생이라던지 이런 분들은 일관되게 한사군은 만주 서쪽에 있었다고 주장을 합니다. 이분들은 왜 그런 주장을 하느냐? 국수주의적 입장이 아니라 사료가 있다는거죠. 일차 사료가 중요한거죠 백년 전에 일제 식민사학자가 주장했는지 동북공정에서 머라고 주장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한사군이 설치됬을 당시의 사료들 예를 들면 사마천 사기라던지 후한서 삼국지 같은 중국 고대 사료들은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가가 중요한데 거기서 딱 하나만 말씀드리면 한사군의 중심지 낙랑군에 대해서 그 위치를 머라고 말하냐면 기지재요동在遼東 요동遼東에 있다 이게 한번 나오는 게 아니라 여러 번 반복해서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구절을 보고 요동이 어딥니까? 만주 아닙니까? 그러니까 성호 이익 선생이나 독립운동가 겸 역사학자이셨던 분들이 한사군은 만주에 있다. 중국 고대 사료에 나오지 않느냐 라고 생각한거죠.
[참고] 한사군의 중심지인 낙랑군의 위치는 어디인가? *『漢書』「薛宣 열전」‘師古曰:「樂浪屬幽州」 (『한서』「설선 열전」, 사고가 말하기를 “낙랑은 유주에 속해있다.) *『後漢書』「崔駰 열전」, 長岑,縣,屬樂浪郡,其地在遼東 . (『후한서』「최인 열전」, 장잠현은 낙랑군에 속해 있는데 그 땅은 요동에 있다) *『後漢書』 「光武帝 本紀」 ‘樂浪郡,故朝鮮國也,在遼東’ (『후한서』「광무제본기」낙랑군은 옛 조선국이다. 요동에 있다.)
☆『史記』 「夏 本紀 太康地理志」,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사기』「하 본기 태강지리지」낙랑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으며, (만리)장성의 기점이다)
*『晉書』「地理志」樂浪郡조-遂城:秦築長城之所起 *『明史』 「地理志」 永平府 : 昌黎-西北有碣石山.東南有溟海)(『명사』 「지리지」 영평부 조, 창려 서북에는 갈석산이 있고 동남에는 어두운 바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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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조선총독부나 조선사 편수회에서는 한사군은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고 주장했구요. 조선사 해방이후에 일제 시대때는 조선사편수회 관점에서 배울 수밖에 없겠지만 해방이후에 우리가 어떤 관점에서 공부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가 나오지 않습니까? 그럼 당연히 일차 사료적 근거가 있고 유물도 쏟아져 나오고 하기 때문에 한사군은 만주 서쪽에 있었다라고 주장을 하게 되면 중국에서 먼저 시작한 거 아닙니까? 그렇다고 그 영토를 , 낙랑군의 강역을 중국 사료를 가지고 조사해보면 하북성까지 걸쳐있는데 우리가 그 땅을 달라는 얘기가 아니잖습니까?
◇ 손석희
알겠습니다. 그런데 일차 사료를 이렇게 중요하다고 주장을 하시는데 일차사료는 다 같이 보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덕일
근데 제가 볼 때 안보는 거 같아요
◇ 손석희
역사학잔데 보지 않겠습니까?
◆이덕일
그럼 일차사료를 봤으면 그 내용에 대해서 설명해야 합니다. 왜 한사군 낙랑군에 대해서 기지재요동 재요동 요동遼東에 있다고 반복해서 나오면 거기에 대해서 설명해야 되지 않습니까? 가장 중요한 당시에 쓴 일차 사료인데 거기에 대해서는 못봐서 안쓰는지 아니면 보고도 못 본 체하는지 식민사학자들이 쓴 글 중에서는 이 내용 이 구절에 대해서 설명한 것을 제가 한번도 본적이 없어요.
◇ 손석희
어찌되었든 논쟁이 항상 있잖습니까 이덕일 소장과 다른 역사학자들 간에도 논쟁이 있어왔구요 외교부에서 그런 얘기도 합니다. 특히 이런 문제와 관련해서 오늘 얘기 나눈 문제에서 “학계에서 논쟁이 있는 사항을 역사교육 자료로 사용하면 관련국의 역공을 받을 수 있으니까 신중해야 한다.”정말 저쪽에 그러니까 중국이 되겠죠 주로. 그쪽에서도 나름 가지고 있는 사료가 있을테고 우리도 있고 그런데 관련국이 역공을 한다면 어떤 우려를 해야 하는 것인지 궁금하고 그 부분은 어떻게 보십니까?
◆이덕일
먼저 지적을 해야 할 것은 이 문제가 중국에서 먼저 문제를 지적하고 시작된게 아니란거죠. 중국에서 경기도 교육청에 자료가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 알게 멉니까? 그런데 이거를 먼저 우리가 제발 저려서 동북아 역사재단에서 문제제기를 하고 교육부 외교부까지 가세해서 얘기를 하는데 일본 외무성이나 중국 외교부라고 그러면, 일본의 교육성이나 중국의 교육부라고 하면 이해가 가는데 이게 대한민국 국가기관이 할 얘기는 아니라는 점이죠.
◇ 손석희
이덕일 소장의 기본적인 시각은 중국의 사학자들이 들고 나오는 사료 사관은 과거의 식민사관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과 비슷하고 서로 어찌보면 지원이라고는 말이 안되겠지만 서로 통하는 부분이 있다는건가요?
◆이덕일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똑같습니다. 일본 극우파와 국내 식민사학자들과 중국의 동북공정이 한편이 되어서 움직여지는 건데 문제는 우리나라가 우리나라 국민 세금이 지원이 된다는 거죠 누가 보더라도 지금 동북아 역사재단이 하고 있는 것은 우리 입장이 아니다라는 것은 명확하지 않습니까? 논쟁의 옳고 그름은 둘째로 치더라도? 그럼 가장 큰 문제는 중국은 중국을 위해서 동북공정을 하는데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 국민세금을 써가면서 중국 동북공정에 역사왜곡에 장단을 맞추냐 하는 점이라는 것이죠. 가장 큰 문제가.
◇ 손석희
동북아 역사재단은 당초 구성될 때 어떤 기준으로 인해서 구성이 된 겁니까?
◆이덕일
한국 국가기관이 만들어지면 특히 상고 역사 관련 기구가 만들어지며는 한국에는 한국 역사학계에는 소위 정설이라는게 있습니다. 인문사회계에는 정해진 설이라는 게 있을 수가 없는데 다 여러 설중에 하나죠. 정해진 설이라는 게 다 일제 식민사학인데요 이 정설을 따르는 사람만 학계에 대다수 남아있기 때문에 국민세금으로 동북공정에 맞서라고 기구를 만들게 되면 결국은 정설이라고 불리는 일제 식민사학을 지원하는 꼴이 된다하는 이야깁니다.
◇ 손석희
이런 생각이 듭니다. 평일에 또 다루기는 그렇고 언젠가 명절 특집이 돌아오면 반대편에 서계신 분과 한번 토론을 하면 좋겠습니다.
◆이덕일
좋죠. 일차사료를 기반으로 일차사료에
◇ 손석희
저희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반론을 제시할 분이 역사학계에는 이덕일 소장과 다른 의견을 가지신 분이 많기 때문에 얼마든지 나오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때 한번 해보죠. 이소장께서는 배워왔던 거와는 다르게 말씀하시니까 헷갈리는 분들도 많으실텐데 양쪽의 토론을 통해서 해소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네요
◆이덕일
바라마지 않는 바입니다.
◇ 손석희
저희가 섭외를 해보겠습니다. 네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늘 그렇지만 흥미진진한 얘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이덕일 소장과 3,4부를 함께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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