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버 알 애비슨 Oliver R. Avison(1860 ~ 1956)】 "제중원 원장 의료 지원”
1860년 6월 30일 영국 요크셔주 웨스트 라이딩(West Riding)에서 시므온 에비슨(Simeon Avison)과 엘리자베스(Elizabeth Bray)의 3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이명은 어비신(魚丕信)이다. 1866년 캐나다로 이민을 가, 1876년 알몬트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887년 토론토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모교 강사를 거쳐 교수가 됐고, 개업도 했으며, 토론토시장의 주치의로도 활동하였다. 초교파적 선교에 관심을 가져 YMCA와 조선연합선교회(Corean Union Mission) 등에서 활동하였고, 1892년 의과대학에 선교 관심을 환기코자 안식년 중 선교 동원 운동을 하던 언더우드를 토론토로 초청하였다.
감리교 교인이었지만 당시 캐나다 감리교회는 한국선교에 관심이 없었는데, 1893년 언더우드가 미북장로회 선교부에 선교사로 추천하여 면접을 거쳐 2월 6일 한국선교사로 임명되었다. 토론토대학교 교수로 재임용 결정이 났었으나 선교지로 출발하여 1893년 7월 16일 부산에, 8월 하순 서울에 도착하였다.
1893년 10월에 알렌(H. N. Allen)으로부터 고종 시의를 인계받고 11월부터는 제중원(濟衆院)에서 근무를 시작해 헤론 사망 이후 빈튼의 지도하에 운영의 어려움을 겪던 병원을 정상화하였다. 제중원이 정부 합작병원으로 출발했으나 1894년 9월 제안하여 미북장로회에 이관하였다. 1895년에는 재중원에서 의학교육을 시작했고, 교육을 위해 교재를 번역하였다. 같은 해에 콜레라가 유행하자 방역국장에 임명되었고,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위기에 처한 왕실을 보호하고자 외국인 국왕보호대에 참여하였으며, 영국 공사관의 공의도 겸하였다.
안식년 중이던 1900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에큐메니컬선교대회(Ecumenical Missionary Conference)에서 ‘의료선교에서의 예양(Comity in Medical Missions)’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는데, 이로 인해 세브란스(Louis H. Severance)가 기부를 시작하였다. 세브란스병원은 1902년 정초식에 이어, 1904년 개원식을 가졌다. 1908년 6월 제중원(세브란스병원) 의학교 첫 졸업식을 거행하고 7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세브란스병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1917년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인가를 받아 두 학교의 교장을 겸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3월 9일 총독부 내무부장관 우사미 가츠오(宇佐美勝夫)의 초청으로 소집된 회합에 참석하여 한국인의 불만사항을 열거하고 한국인의 청원을 들어줄 것을 요구하였다. 3월 13일 귀국 중 일본 요코하마에 머물고 있던 캐나다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 암스트롱(A. E. Armstrong)에게 전보를 보내 즉시 서울로 되돌아와 16일 아침부터 17일 저녁까지 서울에 머물면서 선교사 30여 명이 모인 선교사 대책회의에 참석하게 하고, 만세운동의 실상을 해외에 알리도록 부탁하였다.
3월 17일 일제 경찰이 세브란스병원과 의학전문학교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을 벌이자 이에 항의하였다. 3월 29일 웰치 감독과 함께 학무국장 세키야(Sekiya)를 면담하고, 한국인에게 언론 집회 출판의 자유를 주고 의견 표현의 기회를 줄 것을 요구하였다. 4월 10일 헌병이 병원에 입원한 부상자들을 연행하려 하자 이에 항의하고 보고서를 작성하여 해외에 알렸다. 이 보고서는 1919년 7월 미국기독교연합회의 동양관계위원회에서 발간한 『한국 상황(The Korean Situation)』에 실렸다. 4월 14일 일제 헌병경찰이 연희전문학교를 수색하자 이들의 행위가 불법이라고 항의하여 중지시켰다.
5월 26일 민족대표 가운데 한 사람인 양한묵(梁漢黙)이 서대문감옥에서 옥사하여 그 시신이 유족에게 인도되자, 동료 선교사 2명과 함께 자동차로 그의 집을 방문하여 시신을 다시 검안하고, 유족들과 조문객들을 위로하였다. 1919년 여름 소래 해변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면서 8월 15일 미 북장로회 총무 브라운에게 편지를 써서 한국의 상황을 알리고 한국 문제가 10월 워싱턴에서 열릴 국제연맹 총회와 가을 캐나다 국회에서 다루어질 것이라는 정보가 있는데, 국제연맹 미국 대표들과 연락하여 확인해 달라고 하면서, 8월 5일 자 일본 언론에 신임 총독으로 해군대장 출신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임명될 것이라는 보도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였다.
한국에 선교하는 선교부들의 연합단체인 재한선교사연합공의회(The Fed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에서 신임 총독 사이토가 부임하기 몇 달 전부터 저다인(Gerdine)과 로즈(Rhodes)로 한 위원회를 구성하여 기회가 될 때 총독에게 제출할 진정서를 준비하게 하였는데 마펫을 비롯한 원로 선교사들과 함께 그 초안을 만드는 데 자문을 해주었다. 이 진정서를 인쇄하여 총독 및 각국 공사관에 보내기로 결의한 9월 29일 노블 선교사 집에서 모인 선교사 비밀회합에 참여하여 향후 대책을 협의하였다. 동양관계위원회 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1920년 5월에 발간한 『한국 상황(The Korean Situation)』 두 번째 책의 핵심적인 자료를 제공하였다.
1934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 교장직에서 물러나 명예 교장에 추대되었고, 선교사에서 은퇴하여 1935년 12월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귀환하였다. 미국에 귀환해서도 1942년 10월 워싱턴에 기독교인친한회(The Christian Friends of Korea)를 설립하고 실행위원장을 맡았다. 회원은 우선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한 모든 사람들과 그 자녀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같은 해 10월 5일 친한회의 설립 경위와 목적을 설명하고, 동참 가입을 호소하는 600여 통의 편지를 한국 선교사와 그 자녀들에게 보냈다.
1943년 2월 12일 “Bulletin No. 2”라는 편지 형식의 소식지를 발행하고 한국이 다시 천부인권으로서 종교의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연합국이 “일본의 한국에 대한 속박을 깨뜨리고, 한국의 독립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회원 모집의 범위를 종래 선교사나 선교사의 자녀에서 선교사가 아니더라도 “한국 국민의 복지와 일본의 패배에 관심 있는 모든 이들”로 확장하였다.
이 무렵 기독교인친한회의 실행 총무 겸 재무를 맡아 법인등록을 마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과 독립운동을 지원할 것을 호소하는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미·영·중 3개 연합국 수뇌들이 1943년 11월 카이로에 모여 회담한 후 발표한 카이로선언 보도에 접하고, 1944년 1월 20일 편지에서 즉각적인 한국 독립 승인과 연합국의 일원으로 인정해 줄 것을 주장하였다. 기독교인친한회는 1945년 8월 해방될 때까지 활동하였으며, 기부금을 낸 회원은 약 300명이었고, 격월로 소식지(Bulletin)를 발간하였으며, 상원의원들과 백악관 등에 특별 편지들을 보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5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