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8주일설교 시편79:1-13
본문: 시편79:1-13
제목: 고난 속에서 드리는 기도
오늘은 시편79:1-13의 말씀을 가지고
“고난 속에서 드리는 기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무엇입니까?
“고난 속에서 드리는 기도”
여러분은 어떤 말씀을 좋아하십니까?
여러 말씀들이 있지만 시편23편을 많이들 좋아합니다.
시편 23:3절에서 다윗은 그의 이름 곧
주님의 거룩한 이름으로 인하여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한다고 노래하였습니다.
자신이 살아온 길을 돌아보았을 때
주님은 그런 분이라고 다윗은 노래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79편의 시인은
전혀 다른 상황이지만 동일한 근거의 호소가 보입니다.
고난 속에서 있었던 시인은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위해서라도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합니다.
신앙의 근거는 어디에 두어야 합니까?
우리나 나에게 있을 수 없습니다.
신앙의 근거는 오직 주님께만 있습니다.
믿는 이의 행위가 아무리 훌륭하여도
그 의가 신앙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놀랄만한 선한 공적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행하심을 이끌어 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부시라고 신앙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이 전부라고 고백하는 것은
우리가 그야말로 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님을
동시에 고백해야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안다고 고백하는 것은
인간인 나는 전적으로 무지하다는 고백입니다.
성령의 전능하심은 우리의 무능
곧 아무것도 할 수 없노라는 고백에 있습니다.
마치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양,
뭐라도 아는 양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악이 횡행하는 세상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하는 것은
우리가 악한 이들보다 나아서가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보다 낫다고
비교에 빠지는 순간
교만에 빠집니다.
교만한 마음만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교만을 버리고 겸손하게
아무것도 아닌 인생을 구해달라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 달라는 기도,
그것이 참된 기도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고난이 있습니까?
그 고난 속에서 어떻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바르게 기도하는 길을 찾는
성도님들이 되길 바랍니다.
1.하나님을 향한 부름과 탄원(1-4절)
1-4절에서 시인은 땅이 파괴되고
하나님이 백성이 국가적으로 모욕을 당한
비극적 사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선 1절에서 하나님을 부릅니다.
하나님을 부른 시인은
이방 나라들이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생명의 장소여야 할 주의 성전이
죽음의 장소로 만들었다고 탄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평안해야 할 장소가
극도의 비참한 죽음의 장소가 되었다고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상상이나 했을 상황입니까?
그리고 2절에서는 주의 종들과 주의 성도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주의 종들, 주의 성도라고 말은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람들을 일컫는
영광의 존칭입니다.
영광의 존칭을 받는 그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런 그들이 죽음의 칼부림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죽은 후 시체마저
적절히 수습되지 못하고 방치되었습니다.
그 거룩한 예루살렘 성에서
살아남아 시체를 수습할 수 있는 사람보다
시체가 더 많은 죽은 자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주검이 매장되지 못하고 방치되는 것은
죽은 자로서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불행이자 모독행위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악한 자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였던
이세벨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가 흘린 피를 개가 빨고
나중에는 시신의 일부분은 찾지도 못했습니다.
그 말은 가장 비참한 존재가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4절에 보면 전쟁이 끝났지만
이스라엘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폐허에 남은 백성은 육체적인 고통에
시달리는 것도 모자라 포로가 되어 이웃 국가들의
“비방과 조소 및 조롱”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2) 하나님을 향한 간구(5-12절)
5-12절은 백성의 간구를 보여줍니다.
이들은 심판의 끝이 보이지 않자 어떻게 기도합니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질투가 불붙듯 하시리이까?”라며
하나님을 질책하듯 탄원합니다(5절)
언제쯤 언제쯤 하나님이
이 고통을 멈추게 하시려는 지에 대해서
원망하듯 하나님께 탄원합니다.
그 질투의 불길은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질투는 그렇게 좋게 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질투”는 비이성적 감정이 아니라
우리와 하나님이 맺고 있는 관계가 손상될 때
드러나는 그분의 성품에 대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
우리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보존하십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하나님의 백성이 다른 신을 섬기거나 하나님을 배반하였을 때 정당한 심판을 불러들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질투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절대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어
관계 회복을 촉구하는 역할을 합니다.
백성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노”가
너무 힘들고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께서 자신을 향한 노를 그치고,
대신 그 분노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민족들에게 자신을 괴롭히는 자들에게
쏟으시라고“ 간청합니다.
3절에서는 이방 민족들이 이스라엘의 피를
쏟아부었다라고 말했는데,
여기서는 하나님을 향해 그들에게 진노를
쏟아부어 달라고 간구합니다.
우리에게 진노하지 말고
적들에게 진노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방 나라는 예루살렘을 먹어 치우는
탐욕스러운 짐승과 같기 때문입니다.
8절에 나오는 ”우리 조상들의 죄악“은
바로 ”우리가 과거에 저지른 죄악“을 가리킵니다.
이 구절은 이 시에서 유일하게
죄의 고백을 담고 있는 부분입니다.
백성은 은혜를 간구할 뿐 정의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죄에 따른 합당한 심판을 받고 있는 그들은
진노 가운데서도 긍휼을 기억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비만이 죄인들의 머리 위에서
타오르는 진노의 불을 끌 수 있습니다.
그리고 9절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이렇게 간구하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곤궁한 상태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믿는 하나님의 명예, 곧 이름 때문입니다.
그분의 백성이 대적들로 인한 고통에서 구원받고
궁극적으로 죄를 용서받아야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이어서
이방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복수를 요청합니다.
이방 나라 곧 침략자들은 이스라엘을 향해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며
빈정대며 조롱하였습니다.
침략자들이 행한 악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귀한 주의 종들을 죽여 피흘리게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전쟁 포로로 강제로 끌고 갔습니다.
그렇게 끌고간 주의 백성들을
공개적으로 모욕하였습니다.
정의의 하나님께서 그런 그들의 행동을 보고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은 절대고 묵과할 수 없는
파괴적인 행동입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정의에 호소합니다.
그래서 칠 배의 보복을 말합니다.
7이라는 숫자는 완전 충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에
칠 배의 보복은 철저하고 완전한 보복을 상징합니다.
3.하나님에 대한 찬양 맹세(13절)
이렇게 처절한 간구를 한 시인은
하나님께 대하여 갑작스럽게
찬양의 맹세를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찬양할 수 있습니까?
시인이 이렇게 찬양하기로 맹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리라는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형편에 처해 있다고 해도
하나님께 기도했다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으로 믿고
우리는 그렇게 해 주실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이 시는 구원과 보복을 요구하는 호소들이 계속되다가
갑자기 ”찬송“으로 바뀌면서 마무리 됩니다.
즉 희망과 신뢰로 끝을 맺는 것인데
이를 통해 시인이 현재적 경험이 아닌
하나님의 의로움을 의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믿을 때
찬송하고 감사하고 좋아합니다.
하지만 오늘 시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하나님께 소망이 있기에
하나님의 의로움을 의지하기에 찬양하기로 합니다.
이것이 신앙이지 않을까요?
지금 현재 어떤 것 때문에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하나님께서 해 주실 것을 믿기에
감사하고 찬양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한
바로 그 순간에 고백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앞으로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미래지향적인 믿음을 통해서도
찬양이 싹틀 수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그런 신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를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시인의 간구는 단순한
보복의 요구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잘 살펴보면
하나님의 명예와 통치를 지키고 싶어하는
시인의 마음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대적하는 무리들
그래서 주의 백성들이 고통을 받게 하는 그들이
합당한 보복을 받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이런 보복의 기도는
극단적인 위협 상황에서 주로 사용됩니다.
얼마나 사적으로 보복하고 싶겠습니까?
이런 끔찍한 고통을 당할 때
다 보복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사적 보복 의지를 내려놓습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의롭게 판결하시는 하나님께
그 권한을 전적으로 넘겨줍니다.
왜 그렇습니까?
보복을 당한 사람이 한다면 얼마나 하며
어떤 결과가 오겠습니까?
또 다른 복수가 이어질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보복은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리 억울하고 비참한 상황 속에 있더라도,
자신이 직접 보복에 나서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적절한 시간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대적들을 처벌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모든 것을 온전히 맡겨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니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12:19)
우리는 그 말씀을 기억하고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믿는 자가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참기 힘들고 감당하기 어려운 억울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요?
먼저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내 상황을 하나님 앞에 다 말해야 합니다.
밖에 나가 억울한 일을 당한 아이가
엄마에게 와서 하소연하듯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것 할 것 없이
그저 우리의 상황을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형편을
하나님께 다 아뢰어야 합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반드시 하나님께 아뢰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내자신을 내어놓은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분명 하나님은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다고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은
하나님 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할 일은 내가 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고
관용하라고 하셨고
겸손하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내가 할 일은 안 하고
하나님이 하실 일은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잘못된 일입니다.
내일을 내가 하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도록 하는 것
그것이 우리 가져야 할 바른 길입니다.
우리의 고통이 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상황이 억울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억울함이 감당키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의 길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고
그래야 우리는 복된 길을 선한 길을 누릴 수 있습니다.
고난 당하는 때에
그것이 우리의 모습임을 기억하고
그렇게 기도하고 행하는 성도님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