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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09월13일(금요일) 서울 [송파구 (책 박물관&광고박물관)&강남구 (선정릉&대한불교조계종 봉은사)] 탐방일정
탐방지 : 서울 [송파구 (책 박물관&광고박물관)&강남구 (선정릉&대한불교조계종 봉은사)]
탐방코스 : [송파역 4번 출구~송파 책박물관~(걸어서 이동)~한국 광고박물관~잠실역 7번 출구~(지하철로 이동)~선릉역 10번 출구~서울 선릉과정릉~(걸어서 이동)~대한불교조계종 봉은사~봉은사역 1번 출구]
탐방일 : 2024년09월13일(금요일)
날씨 : 가랑비가 내린 날씨 [서울 송파구 잠실동 최저기온 25도C, 최고기온 32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5시간24분 소요)
09:11~10:21 연신내역에서 지하철 3호선을 타고 가락시장역으로 가서 8호선으로 환승하여 송파역으로 간 후 송파역 4번 출구로 나옴 [1시간10분 소요]
10:21~10:40 서울 송파구 송파대로 345 번지에 있는 송파역 4번 출구에서 탐방 출발하여 서울 송파구 송파대로37길 77 번지에 있는 서울 송파 책박물관으로 이동
[송파책박물관
요약 : 서울특별시 송파구에 위치한 구립박물관. 도서 관련 전시, 교육, 보존, 학술연구 사업을 진행한다.
소재지 : 서울특별시 송파구 송파대로 37길 77
문의 및 안내 : 02-2147-2486
규모 : 연면적 6,212㎡
관람시간 : 오전 10시~오후 6시 (오후 5시 30분 입장마감)
휴관일 : 매주 월요일, 1월1일, 추석 당일, 설 당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송파구에 위치한 송파구청 운영의 공립 책 전문 박물관으로 2019년 개관하였다. 조선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아우르는 각 시대별 도서를 소장하고 있으며 도서 관련 전시, 교육, 보존, 학술연구 사업을 진행한다. 연면적 6,212㎡ 규모로 지하 1개 층, 지상 2개 층을 갖추고 있다.
주요 시설
상설전시실은 박물관 지상 2층에 위치해 있다. 상설전시실은 “향유-선현들이 전하는 책 읽는 즐거움,”, “소통-세대가 함께 책으로 소통하는 즐거움”, “창조-또 하나의 세상, 책을 만드는 즐거움” 등 3개 주제로 구성된다.
제1부 “향유: 선현들이 전하는 책 읽는 즐거움” 상설전시실은 조선시대의 독서문화를 보여주는 공간으로서, 생활 속 조선 사대부의 독서, 조선의 독서광, 조선의 장서문화, 조선의 장서가, 조선 후기의 독서환경, 수진본 등 6개 소주제를 통해 조선시대 독서문화를 조망한다.
제2부 “소통-세대가 함께 책으로 소통하는 즐거움” 상설전시실은 1910년 일제 강제 병합 이후 100여년 간 전개된 독서문화를 보여주는 공간으로서, ‘조부모-부모-나’로 구성된 가족 3대(식민지·전쟁경험세대, 베이비부머·산업화세대, 디지털·영상세대)의 경험을 공감하고 이해하는 장을 마련하였다.
제3부 “창조-또 하나의 세상, 책을 만드는 즐거움” 상설전시실은 책을 집필하는 작가의 방, 책을 기획하고 편집하는 출판 기획자의 방, 출판 편집자의 방, 책을 디자인하는 북 디자이너의 방 등 4개 소주제를 통해 도서 제작 과정을 소개한다.
2024년9월 현재 진행 중인 기획전시
전시명 : [다시 보는 전시] 노래책, 시대를 노래하다
전시기간 : 2024.05.29 ~ 2024.12.31
전시장소 : 1층 로비
● 관람: 오전 10:00~오후 6:00 / 월요일 휴관
● 비용: 무료
송파책박물관에서는 개관 5주년을 맞이하여 2019년 첫 번째 기획전시로 큰 사랑을 받았던 ‘노래책, 시대를 노래하다’를 재구성하여 선보인다. 이번 전시에서는 근현대의 노래책을 토대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경험을 담은 한국 대중음악 100년의 역사를 살펴보려 한다.
노래책에는 노래뿐만 아니라 인기 가수의 화보와 시대별 인기 순위, 애독자 참여 마당 등 다채롭고 풍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시대를 풍미하는 노래에 마음을 기대어 노래책에 깃든 다양한 사연을 이해하고 애환에 공감하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란다.
지상 2층에는 도서문화 관련 특별전이 개최되는 기획전시실도 위치해 있다.
2024년9월 현재 2층 기획전시실에서 진행 중인 기획전시
전시명 : 인쇄, 시대의 기억을 품다
전시기간 2024.01.31 ~ 2024.10.27
전시장소 송파책박물관 2층 기획전시실
- 전시 내용
책은 인쇄로 만듭니다. 현대에는 인쇄 기계를 사용해 비교적 쉽게, 대량의 책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계가 없던 과거에는 어떻게 책을 만들었을까요? 인쇄 기계가 등장하기 이전에도 인쇄술의 발명은 지식과 정보를 보급하는 데 획기적인 일이었습니다. 인쇄술이 등장함으로써 비로소 원본과 똑같은 책을 여러 권 만들어 낼 수 있었고, 더 많은 이들이 책을 나누어 가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통 시대에는 지식과 정보를 얻는 유일한 수단이 책이었기에 우리 선조들은 최선의 인쇄 기술을 찾고자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인쇄, 시대의 기억을 품다’라는 주제로 고려 시대부터 현대까지 우리나라 책 인쇄의 역사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책에 담겨 있는 인쇄의 흔적을 살펴보면 우리의 삶과 생각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시대의 기억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인쇄의 이야기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전시 자료
고려 시대부터 현대까지 인쇄 관련 자료 약 140여 점
- 관람 비용: 무료
전시시설 외에 디지털 콘텐츠 열람공간인 미디어 라이브러리, 도서 관련 창작 활동 공간인 북스튜디오가 지상 2층에 마련되어 있다. 지상 1층에서는 어린이 책 체험전시실과 전시 연계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키즈 스튜디오가 운영된다. 지하 1층 오픈 스튜디오에서는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수장고를 관람할 수 있다.
주요 소장품
구마라집(鳩摩羅什, 344~413) 역, 계환(戒環) 주해의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1433년 편찬된 종합의학서인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 1480년 간행된 『춘추집전대전(春秋集傳大全) 』, 지석영이 출간한 국한문(國漢文) 단어집인 『언문(言文)』 등의 서적과 책장, 책 반닫이, 백자연적 등의 유물이 알려져 있다.
부대시설
전시 및 교육시설 이외에 행사 및 강연을 위한 어울림홀, 카페, 야외 정원이 운영된다.]
10:40~11:00 송파책박물관 2층에 위치해 있는 상설전시실에서 “향유-선현들이 전하는 책 읽는 즐거움,”, “소통-세대가 함께 책으로 소통하는 즐거움”, “창조-또 하나의 세상, 책을 만드는 즐거움” 등 3개 주제의 상설전시를 관람
[조선 5대 독서광 : 세종대왕, 이황, 이이, 김득신, 이덕무]
[다독 시인 백곡(栢谷) 김득신(金得臣)
노력하는 자가 성공한다
공부하는 사람들 중에는 천재도 있고 둔재도 있다. 한 자를 가르치면 열 자를 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열 번을 가르쳐도 한 자를 깨우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지능이 떨어진다고 해서 공부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 토끼와 거북이의 우화에서 알 수 있듯이 노력하는 자가 오히려 성공한다.
백곡(栢谷) 김득신(金得臣)은 1604년(선조 37년)에 태어나 문명을 크게 떨친 인물로, 화가 김득신과는 동명이인이다. 그는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아 지각이 발달하지 못해 노둔한 편이었다. 김득신의 아버지 김치는 이러한 아들을 질책하기보다 격려했다. 김치가 김득신에게 당부했다.
"학문의 성취가 늦는다고 성공하지 말란 법이 없다. 그저 읽고 또 읽으면 반드시 대문장가가 될 것이다. 그러니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마라."
"그래, 열심히 읽다 보면 반드시 외울 수 있을 것이다."
김득신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했다. 김득신은 그때부터 책을 잡으면 수없이 반복하여 읽었다. 『사기열전』 중 「백이전」을 11만 3천 번을 읽었고, 다른 책들도 1만 번 이상 읽었다.
한유 문장 사마천 『사기』를 천 번 읽고서야 韓文馬史千番讀
금년에 겨우 진사과에 합격했네 菫捷今年進士科
김득신은 스스로 시에서 『사기』를 천 번 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득신은 많은 시를 남겼는데 「용호(龍湖)」 「구정(龜亭)」 「전가(田家)」 등의 시가 유명하다. 어촌이나 산촌과 농가의 정경을 그림같이 묘사하여 한문 사대가로 불리는 이식으로부터 "그대의 시가 당금 제일이다"라는 말을 들으면서 문명이 널리 알려졌다. 그는 『백곡집(柏谷集)』을 남기고 80세에 죽었다.]
[이덕무(李德懋)
자국 중심의 세계관을 가진 고증과 박학의 대가
출생 – 사망 : 1741 ~ 1793
조선후기 서울 출신의 실학자 그룹인 이용후생파(利用厚生派)의 한 가지를 형성한 이덕무는 박제가(朴齊家), 이서구(李書九), 유득공(柳得恭)과 더불어 청나라에까지 사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으로 문명(文名)을 날린 실학자이다. 그는 경서(經書)와 사서(四書)에서부터 기문이서(奇文異書)에 이르기까지 박학다식하고 문장이 뛰어났으나. 서자였기 때문에 출세에 제약이 많았다. 그러나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하여 서얼 출신의 뛰어난 학자들을 등용할 때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 등과 함께 검서관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박물학에 정통한 이덕무는 사회 경제적 개혁을 주장하기 보다는 고증학적인 학문 토대를 마련하여 훗날 정약용(丁若鏞), 김정희(金正喜) 등에 학문적 영향을 준 인물이라 평가할 수 있다.
정조에게 발탁된 서자 출신의 규장각 검서관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정종(定宗, 조선의 제2대왕)의 서자인 무림군(茂林君)의 10세손으로 본관은 전주이다. 자는 무관(懋官), 호는 아정(雅亭)인데 이 밖에 형암(炯庵)ㆍ청장관(靑莊館) 또는 동방일사(東方一士)라는 호도 사용했다. 특히 즐겨 사용한 청장(靑莊)이라는 호는 일명 신천옹(信天翁)으로 불린 해오라기를 뜻하는데, 청장은 맑고 깨끗한 물가에 붙박이처럼 서 있다가 다가오는 먹이만을 먹고 사는 청렴한 새라고 한다. 청장으로 호를 삼은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의 성격을 상징한 것이라 하겠다.
이덕무는 서울 출신으로 아버지는 통덕랑 성호(聖浩)이고 어머니인 반남 박씨는 토산현감 사렴(師濂)의 딸이었다. 할아버지 필익(必益)은 강계부사를 지낸 인물이었다. 6살에 아버지가 아들인 이덕무에게 한문을 가르치고자 중국 역사책인 [십구사략]을 읽혔는데, 1편도 채 끝나기 전에 훤히 깨우친 영재였다. 16세에 동지중추부사 백사굉의 딸 수원 백씨와 혼인하였고, 20세 무렵에는 남산 아래 장흥방(현재 종로구 부근)에서 살았다. 이 무렵 집 근처 남산을 자주 오르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를 많이 지었다.
이덕무는 가난한 환경 탓에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학문에 비상하고 시문에 능해 젊어서부터 이름을 떨쳤다. 사후에 그의 행장을 지은 연암 박지원은 시문에 능한 이덕무를 기리며 “지금 그의 시문을 영원한 내세에 유포하려 하니 후세에 이덕무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또한 여기에서 구하리라. 그가 죽은 후 혹시라도 그런 사람을 만나볼까 했으나 얻을 수가 없구나”하며 그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이덕무는 청장이라는 별호에 어울리는 호리호리한 큰 키에 단아한 모습, 맑고 빼어난 외모처럼 행동거지에 일정한 법도가 있고 문장과 도학에 전념하여 이욕이나 잡기로 정신을 흩뜨리지 않았으며, 비록 신분은 서자였지만 오직 책 읽는 일을 천명으로 여겼다고 한다. 가난하여 책을 살 형편이 되지 않았지만, 굶주림 속에서도 수만 권의 책을 읽고 수백 권을 책을 베꼈다. 이덕무의 저술총서이자 조선후기 백과전서라 할 수 있는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 볼 수 있듯이, 사실(史實)에 대한 고증부터 역사와 지리, 초목과 곤충, 물고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지적 편력은 실로 방대하고 다양하여 고증과 박학의 대가로 인정받았다. 그의 묘지명을 지은 이서구(李書九)는 이덕무를 두고 “밖으로는 쌀쌀한 것 같으나 안으로 수양을 쌓아 이세(利勢)에 흔들리거나 마음을 빼앗기지 않은 인물”이라 평했다.
이덕무는 1766년 그의 나이 26세 때 대사동으로 이사한 후, 서얼들의 문학동호회인 백탑시파(白塔詩派)의 일원으로 유득공ㆍ박제가ㆍ이서구를 비롯하여 홍대용, 박지원, 성대중 등과 교유하였다. 학문적 재능에 비해 신분적 한계로 천거를 받지 못하다가 1779년 그의 나이 39세에 정조에 의해 규장각 초대 검서관(檢書官)으로 기용되면서 벼슬길이 열렸다. 1789년에는 박제가, 백동수와 함께 왕명에 따라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편찬하기도 했다. 검서관 이후에 사도시주부, 광흥창주부, 적성현감 등을 역임했다.
중국 시단에 알려진 조선의 시인
이덕무는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와 함께 사가시인으로 중국 청나라 문인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의 시가 중국 시단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777년부터이다. 친구이자 유득공의 숙부이기도 한 유련(柳璉, 柳琴으로 개명, 1741~1788)이 1776년 중국을 방문하면서 훗날 사가(四家)로 불린 이덕무를 비롯한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 4명의 시를 담은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을 청나라 시인이자 학자로 이름 높았던 이조원(李調元, 1734~?)과 반정균(潘庭筠,1742~?)에게 소개하였고, 1777년 청나라에서 [한객건연집]이 간행되었다. 이 시집에 실린 이덕무의 시는 총 99수로 그 내용은 자연과 여정, 인물, 송별, 역사에 이르기까지 실로 매우 다양하다. 중국에 가 본적도 없던 이덕무였지만, 그의 시는 중국 시단에 이미 널리 알려진 상태였다.
[한객건연집]이 소개되고 2년 뒤 이덕무는 연행단을 따라 중국을 방문했다. 이미 지명도를 쌓은 이덕무는 반정균을 비롯하여 이조원의 동생인 이정원, 기균, 옹방강, 축덕린 등 청조의 문인들과 폭넓은 교류를 하였고, 이들을 통해 그의 시명(詩名)은 청조 시단에서 더욱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조원은 이덕무의 시를 가리켜 “건실하고 격조를 갖추어 네 사람 중에서 가장 노련하다”고 평했다.
시에 대한 그의 재주는 정조도 익히 인정한 바였다. 한번은 정조가 규장각 신하들을 불러놓고 [성시전도(城市全圖)]에 대한 백운시(百韻詩)를 짓게 하고는 각각 점수를 매겼는데, 이덕무가 1등을 차지했다. 정조는 “신광하의 시는 소리가 나는 그림 같고, 박제가의 시는 말하는 그림, 이만수의 시는 좋고, 윤필병의 시는 풍성하고, 이덕무의 시는 우아하고, 유득공의 시는 온통 그림 같다.”고 평했다. 정조는 이덕무의 시권(詩卷)에 우아하다는 의미의 ‘아(雅)’자를 썼는데, 이후로 이덕무는 아정(雅亭)이라는 호를 지어 사용하였다.
18세기 그들이 나누었던 우정
청나라에 소개된 [한객건연집]의 저자들인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는 백탑파 혹은 이용후생파로 불리는 실학자이며, 지기(知己)의 정을 쌓은 벗이기도 하다. 특히 박제가ㆍ유득공과는 서자라는 비슷한 처지에서 오는 신분적 공감대가 있었다.
이덕무가 천애지기(天涯知己) 박제가를 알게 된 것은 24세 되던 1764년이다. 이덕무의 처남인 무인 출신 백동수의 집에 갔다가 현판 위에 써진 박제가의 ‘초어정(樵漁亭)’이라는 글씨를 인상 깊게 본 것이다. 3년 후 이덕무는 백동수의 집에서 박제가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는데, 그와의 첫 만남을 두고 “너무 맘에 들어 즐거움을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고 말했을 정도로 기뻐했다. 이덕무와 박제가의 우정은 1793년 이덕무가 죽을 때까지 근 30년간 이어졌다. 30년 동안 이덕무가 있는 곳엔 박제가가 있었고 박제가가 있는 곳엔 항상 이덕무가 있었다.
가녀리고 큰 키의 이덕무는 고상하고 조용했던 반면에, 박제가는 작은 키에 박력있고 자기 주장과 고집이 강한 인물이었다. 두 사람의 외모와 성격은 달랐지만, 뜻이 맞았고 항상 서로를 그리워했다. 눈이 내린 어느 겨울날, 착암 유연옥의 집에서 해금 연주를 듣던 박제가는 한밤중에 자신의 벗 이덕무가 보고 싶어졌다.
“올 적엔 달빛이 희미했었는데 취중에 눈은 깊이도 쌓였네. 이러한 때 친구가 곁에 있지 않으면 장차 무엇으로 견딜 것인가. 내게는 즐겨 읽던 [이소]가 있으니 그대는 해금을 안고 야심한 밤 문을 나서 이덕무를 찾아가세.”
- 박제가의 [정유각집(貞蕤閣集)] 중에서
두 사람은 1778년 중국 연행에도 함께 갔을 정도로 인연이 깊었고, 1779년에는 규장각 검서관에 동시에 등용되어 십수년간 동료의 정을 나눴다. 잦은 숙직과 힘든 근무 속에서도 두 사람은 의지해가며 규장각 도서들을 편찬해 갔다. 사실 이덕무는 박제가 보다 9살이나 연상이었으나, 이들에게 나이차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덕무와 박제가는 아주 가난한 삶을 살았다. 하루는 빈곤을 겪던 이덕무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집안에서 제일 값비싼 것을 팔았는데, 그것이 [맹자(孟子)]였다. 글을 하는 선비가 책을 내다 판다는 것은 가지고 있던 전부를 내놓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덕무는 책을 팔아 밥을 해먹고는 유득공을 찾아가 크게 자랑했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유득공 또한 이덕무와 마찬가지로 ‘그대가 옳다’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좌씨전(左氏傳)]을 팔아 이덕무와 함께 술을 마셨다.
이덕무와 유득공은 “맹자가 친히 밥을 지어 나를 먹이고, 좌구명(左丘明,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의 학자)이 손수 술을 따라 나에게 술잔을 권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며 박장대소했다. 두 사람은 밤새 술을 마시며 맹자와 좌구명을 칭송했다. 1년 내내 굶주리며 책을 읽기만 한다고 해서 살 방도가 나오지 않는다면 차라리 책을 팔아 끼니를 마련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것의 그의 생각이었다. 그의 말에는 평생 글을 읽어봐야 과거시험에도 응시할 수 없었던 서얼들의 신분적 한계가 자조적으로 담겨 있다. 그러나 그의 기구한 현실은 유쾌하고 장난스런 태도로 승화되었고, 세상의 출세와 명예로부터 한 꺼풀 벗어난 자유인으로서의 경지로 나아갔다.
갑작스런 죽음과 남긴 저술
1793년 1월 25일 이덕무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본래 체력이 약한 데다가 규장각 검서관 생활에서 오는 고된 직무와 생활고를 겪다가 감기와 함께 폐렴 증상이 겹치면서 타계한 것이었다. 갑작스런 비보를 들은 박제가와 이서구, 박지원, 남공철은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그를 기리는 글을 지었고, 정조는 내탕금(內帑金: 임금이 개인적 용도로 쓰는 돈) 5백냥을 하사하여 그의 유고(遺稿)를 간행하게 하고 아들 광규를 규장각 검서관으로 특차했다.
이덕무의 박학다식은 이용후생파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가난하여 책을 사 볼 수 없어 집에는 비록 책이 없었으나, 책을 쌓아 둔 것과 다름없었다. 평생 동안 읽은 책이 거의 2만 권이 넘었고, 손수 베낀 승두세자(蠅頭細字: 파리만큼 작은 글자) 또한 수백 권으로서 자획이 방정하며 아무리 바빠도 속자(俗字: 원래 글자보다 획을 간단하게 만든 글자) 하나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쓴 책은 10여 종에 달하는데, “나의 글이 진귀하지 못한 것이라, 한번 남에게 보이면 사흘 동안 부끄러워진다. 상자 속에 깊숙이 넣어 두었는데 스스로 나올 날이 있을 것이다.”하여 처음 쓴 초집(初集)의 이름을 [영처고(嬰處稿)]라 하였다 한다. 또한 청장이라는 물새 이름을 자호(自號)한 뜻을 삼아 두 번째 문집을 [청장관고(靑莊館稿)]라 이름 지었다. 또한 듣는 대로 쓰고 보는 대로 쓰고 말하는 대로 쓰고 생각하는 대로 썼다는 의미의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예절에 관한 [사소절(士小節)] 등이 있고, 그 외에 [청비록(淸脾錄)], [기년아람(紀年兒覽)], [청정국지(蜻蜓國志)], [앙엽기(盎葉記)], [한죽당섭필(寒竹堂涉筆)], [예기억(禮記臆)], [송사보전(宋史補傳)], [뇌뢰낙락서(磊磊落落書)] 등이 있다.
북학을 거부한 자국 중심의 세계관
북경유리창. 이곳은 이덕무와 박제가가 북경 연행 중에 중국 문인들과 만났던 장소이다. 이덕무는 박제가와 달리 청나라의 선진 문물에 경도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출처: 신영담, 한중연행노정답사연구회 대표>
조선후기 특히 18세기는 실학자들의 중국 방문이 활발하게 이뤄지던 시기였다. 홍대용과 연암 무리의 문인들인 박지원,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가 모두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중국 여행에서 돌아온 뒤 연행록(燕行錄)을 남겼는데, 이덕무는 [입연기(入燕記)]라는 연행록을 남겼다. [입연기]는 1778년 3월 17일 서울을 출발하여, 윤6월 14일 의주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담은 연행록이다.
이덕무는 중국을 다녀온 연암파 실학자들과 달리 청 왕조의 지배체제를 부정적으로 인식한 인물이었다. 박제가와 절친한 사이였지만, 이덕무는 그의 친청적(親淸的) 세계관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을 다녀왔지만, 조선 선비들이 청을 오랑캐로 폄하하는 것을 비판한 박지원ㆍ박제가와는 서로 다른 중국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덕무는 청나라의 선진 문물에 경도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중국은 중국일 따름이고 조선도 나름대로 장점이 있으니, 중원만 모두 옳겠는가? 비록 도회지와 시골의 구분은 있을망정 모름지기 평등하게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대용과 박지원, 박제가와는 또 다른 자국 중심의 상대주의적 세계관을 가진 그는 청나라와 조선을 자주적이고 평등한 관계로 인식하였다. 사실 청나라에 대한 이덕무의 생각은 전통적인 보수성을 띠면서도 자국 중심적이고 평등한 것으로 점차 변화해 나갔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 대명의리(大明義理)와 존주양이(尊周攘夷)의 생각이 팽배했던 시기에 조선 선비들이 가졌던 청에 대한 고민과 갈등을 이덕무를 통해 읽을 수 있다.]
11:00~11:10 1층 로비에서 진행 중인 기획전시인 “[다시 보는 전시] 노래책, 시대를 노래하다”를 관람
[기획전시 : [다시 보는 전시] 노래책, 시대를 노래하다
전시기간 : 2024.05.29 ~ 2024.12.31
전시장소 : 1층 로비
● 관람: 오전 10:00~오후 6:00 / 월요일 휴관
● 비용: 무료
송파책박물관에서는 개관 5주년을 맞이하여 2019년 첫 번째 기획전시로 큰 사랑을 받았던 ‘노래책, 시대를 노래하다’를 재구성하여 선보인다. 이번 전시에서는 근현대의 노래책을 토대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경험을 담은 한국 대중음악 100년의 역사를 살펴보려 한다.
노래책에는 노래뿐만 아니라 인기 가수의 화보와 시대별 인기 순위, 애독자 참여 마당 등 다채롭고 풍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시대를 풍미하는 노래에 마음을 기대어 노래책에 깃든 다양한 사연을 이해하고 애환에 공감하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란다.
11:10~11:25 2층 기획전시실에서 진행 중인 기획전시 [인쇄, 시대의 기억을 품다]를 관람
[기획전시 “인쇄, 시대의 기억을 품다”
전시기간 : 2024.01.31 ~ 2024.10.27
전시장소 : 송파책박물관 2층 기획전시실
- 전시 내용
책은 인쇄로 만듭니다. 현대에는 인쇄 기계를 사용해 비교적 쉽게, 대량의 책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계가 없던 과거에는 어떻게 책을 만들었을까요? 인쇄 기계가 등장하기 이전에도 인쇄술의 발명은 지식과 정보를 보급하는 데 획기적인 일이었습니다. 인쇄술이 등장함으로써 비로소 원본과 똑같은 책을 여러 권 만들어 낼 수 있었고, 더 많은 이들이 책을 나누어 가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통 시대에는 지식과 정보를 얻는 유일한 수단이 책이었기에 우리 선조들은 최선의 인쇄 기술을 찾고자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인쇄, 시대의 기억을 품다’라는 주제로 고려 시대부터 현대까지 우리나라 책 인쇄의 역사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책에 담겨 있는 인쇄의 흔적을 살펴보면 우리의 삶과 생각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시대의 기억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인쇄의 이야기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전시 자료
고려 시대부터 현대까지 인쇄 관련 자료 약 140여 점
- 관람 비용: 무료]
11:25~12:10 걸어서 서울 송파구 올림픽로35길 137 번지에 있는 서울 한국 광고박물관으로 이동
12:10~13:00 한국 광고문화회관 3층에 있는 한국 광고박물관을 관람
[한국광고박물관
한국 근현대 광고를 한 번에 조망할 수 있는 국내 유일의 한국광고박물관
소재지 : 서울 송파구 올림픽로35길 137
한국광고박물관은 한국 광고계의 숙원사업으로 한국 근현대 광고 120년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가 2008년 11월 7일에 서울 송파구 잠실에 개관한 교육.문화 인프라시설이다.
광고는 대량생산.소비되고 사라져버리는 단순 창작물이 아니라 광고는 정보이고 예술이며 또한 엔터테인먼트이면서 우리의 문화이다.
한국 근현대 광고역사는 1876년 강화도조약, 즉 한 · 일수호조약(병자수호조약) 체결이후 서구문물이 유입되면서 신문발행과 같은 시대적 변화와 함께 시작되었다.
1883년 11월 20일『한성순보(漢城旬報)』제3호 회사설(會社設)에 ‘광고’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이후, 한국 최초의 근대 광고는 1886년 2월 22일『한성주보(漢城周報)』 제4호에 게재된 ‘덕상세창양행고백(德商世昌洋行告白)’이라는 광고였다.
이와 같이 한국의 근현대 광고는 19세기 후반 개항기와 함께 시작한 이래 100년을 훌쩍 넘어섰고, 이제는 세계10위권 안에 드는 광고대국이 되었다. 이렇게 100년이 넘는 한국 근현대 광고가 21세기 문화 · 예술, 정보 · 기술의 시대에 모든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생활 콘텐츠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한국광고 박물관은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한국광고박물관은 광고를 사랑하는 모든 광고인들에게는 광고정보와 콘텐츠를 공유하는 교류의 장이 되며, 한편 생활 속에서 광고를 접하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광고의 참가치를 이해하는 교육 · 체험의 장이 될 뿐만 아니라 여가와 휴식의 공간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설립목적 및 연혁
박물관 설립목적
한국 근현대 120년 광고역사를 조망할 수 있는 공익적인 교육ㆍ문화 인프라 시설 구축
일반인들에게 광고를 이해할 수 있는 교육 공간이면서 삶의 활력소가 되는 휴식ㆍ여가의 공간으로 자리매김
사장되어 가는 다양한 광고자료를 수집·보존하여 광고계에 필요한 광고 디지털 아카이브를 구축, 광고문화 및 산업발전에 기여
광고의 순기능 홍보를 통해 방송과 광고의 이미지 제고
규모 및 장소 : 912.40㎡(276평), 광고문화회관 3ㆍ4층 〔전시장 : 667.77㎡(202평)/수장고ㆍ준비실 : 244.63㎡(74평)
전시장 구성 : 광고의 유래, 광고로 보는 한국사회문화사, 광고체험, 세상을 움직이는 광고, KOBACO와 공익광고 등 8개 전시 Zone
개관 : 2008.11.7.
박물관 연혁
한국광고박물관 설립 계획 수립(‘05. 3. 22)
한국광고박물관 설립공사 착공(‘08. 2. 22)
한국광고박물관 설립공사 완료(‘08. 10. 31)
한국광고박물관 개관(‘08. 11. 7)
전시관 안내
한국광고박물관은 광고산업과 광고문화 발전을 위한 광고인프라시설로서 2008년 11월 7일에 개관하였다. 광고박물관은 한국의 광고역사, 광고의 순기능, 광고제작과정 등을 유물, 광고자료, 멀티미디어 체험을 통해 이해 할 수 있는 광고 전문박물관으로서 국내 유일의 디지털아카이브관을 구축하여 사라져 가는 역사적인 영상 인쇄광고 자료를 보존하고 있다.
안내 데스크를 기준으로 시계방향으로 광고의 유래, 광고로 보는 한국사회문화사, 세상을 움직이는 광고, 광고제작 이야기, 광고 체험,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와 공익광고, 광고의 미래, 디지털 아카이브가 있다.
광고박물관 관람 안내
오늘날의 광고로 발전해오기까지의 역사적 변천과정을 설명하는 영상으로 실사ㆍ애니메이션ㆍCG기법 등을 이용한 최첨단의 원형영상[Circle Vision]이며, 한국 최초의 근대 상업광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광고로 보는 한국사회문화사
9세기말 개항기부터 시작되는 한국의 근현대 광고 120년의 역사를 7개 시기로 구분하여 유물ㆍ영상ㆍ패널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마련한 역사공간으로 각 시기별 광고를 통해 당시 사회와 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광고제작 이야기
현대 광고의 흐름을 인쇄광고와 영상광고 또는 국내광고와 해외광고로 이해할 수 있는 광고 갤러리와 같은 전시공간으로 광고가 존재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순기능과 우리 생활속에 광고가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광고로 보는 한국사회문화사
광고의 생산에서 소비까지, 즉 각 매체별로 광고의 제작에서 소비과정을 광고주ㆍ광고 회사ㆍ광고매체ㆍ소비자의 광고 네 주체를 중심으로 이해할 수 있고, 광고제작을 위한 실무자들의 작업진행 방식을 영상과 모형으로 확인할 수 있다.
광고체험
관람자 스스로가 ‘광고사진촬영’과 ‘광고사진편집’을 통해 간편하게 간접적으로 체험함으로써 광고를 이해할 수 있고,모형 오토바이 시승과 영상을 통해 옥외광고를 체험할 수 있으며, 세계 3대 국제광고제인 ClioㆍNYFㆍCannes 광고제를 포함한 세계 10 대 광고제의 수상작품을 관람자 본인이 직접 감상할 수 있다.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와 공익광고
방송의 공공성 확보와 전파수익의 사회환원, 국민의 건전한 문화생활과 방송문화 발전 및 방송광고진흥 등의 기능을 수행하는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의 역사와 역할 그리고 이 사회를 맑고 밝게 만드는 공익광고를 이해할 수 있다.
광고의 미래 영상관
21세기 광고의 미래 모습은 광고매체, 과학기술의 발달, 소비자의 소비행태, 산업의 변화, 문화의 변화 등에 따라 어떻게 변화할지 예측할 수 있도록 영상을 통해 이해할 수 있고, 그 외 다양한 영상을 통해 광고를 이해할 수 있는 영상교육관이다.
광고 디지털 아카이브
TV광고, 라디오광고, 인쇄광고, 옥외광고, 인터넷광고 등 4만5천여 점의 한국 근현대 광고를 디지털로 전환하여 아카이브를 구축, 관람자들이 검색할 수 있도록 한 디지털 광고도서관으로서 광고를 전공하는 대학생과 광고산업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이 광고 제작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한 디지털 광고자료 센터이다.
광고역사
한국에 근대 광고가 도입된 것은 1876년 강화조약 체결과 함께 서구문물이 들어오면서 신문이 발행되고 광고도 등장했다. 한국 최초의 근대 광고는 1886년 2월 22일 자 제4호에 게재되었다. 그 뒤 현재까지 1세기를 넘는 기간의 한국 광고는 크게 해방 이전 2개, 해방 이후 5개, 모두 7개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개항에서 1910년 한일합병 때까지가 첫 시기이고, 그 다음 시기는 1945년 광복까지다. 1910년부터 10년간은 일제 무단정치 시기인데 우리말 신문이라고는 조선총독부 기관지 하나뿐이었다.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 이른바 일제의 문화정치로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광고는 번창했다. 그러다가 1940년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강제 폐간되며 광고가 쇠퇴하기 시작하다 1945년 일제 패망에 이르러 광고가 거의 사라졌다.
광복 이후는 5개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해방에서 1968년까지인데 우리말 신문이 나오고 민간상업방송이 시작된 시기이다. 둘째 시기는 1968년에서 1980년까지인데 이 10여 년 사이에 한국 광고는 급성장을 했으며 광고회사가 자리를 굳힌 시기이다. 셋째 시기에는 1980년에서 1988년으로 언론통폐합이 있었고 컬러 TV가 등장했다. 넷째 시기는 88 서울 올림픽에서 1995년까지로 언론자유의 회복에 따라 언론의 수가 폭증하고 아울러 광고도 비약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 마지막 시기는 1995년 한국에서 인터넷이 상용화된 시기부터 현재까지인데 정보기술(IT)과 뉴미디어의 등장이 매체와 광고를 포함한 마케팅 그리고 나아가서는 사회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시기이다.
개화기-광고 도입기. 1886-1910
1883년 11월 20일 자 한성순보 제3호 회사설(會社設)에 <광고>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하고 3년 뒤에 세창양행의 광고가 최초로 한성주보에 실렸다. 그 후 광고는 급속히 발전해서 신문, 잡지, 전봇대, 전차, 간판이 광고 매체로 이용 되었고 할인판매. 통신판매, 현상광고 등 광고 방법도 다양해졌다. 활자만으로 된 광고에 테두리 장식, 일러스트레이션, 검은 바탕에 흰 글자, 옆으로 누인 광고, 거꾸로 세운 광고 등 표현이 다양해지고 광고 카피도 점차 전문성을 띄게 되었다. 1906년에는 일본전보통신사가 광고대행업을 시작했고 1910년에는 한국인이경영하는 광고회사가 생겼다.
일제시대 - 광고의 성장과 쇠퇴기. 1910-1945
광고의 입장에서는 이 기간을 3개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째가 1910년 한일합병 이후 1919년3.1 독립운동까지 무단정치 시기로 언론 통제가 심했던 어두운 시기였다. 광고는 계속되었으나 광고제도는 일본식으로 바뀌었다. 둘째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한국인에게 신문 발행을 허가한 시기로 1940년 이 두 신문이 강제 폐간되기까지 약 20년간 일본광고가 절반을 차지했다. 1920년대 중반부터는 신문이 8면으로 증가했고 1930년대 중반에는 12면까지 증가했는데 광고가 늘었기 때문이다. 신문사가 주최하는 광고상, 광고강좌, 광고 해설 기사 등이 신문에 실리기도 했으며 연희전문 상과(商科)에서는 광고 강의를 했었다. 셋째 시기는 광고 쇠퇴기이다. 태평양전쟁의 영향으로 광고는 심한 통제를 받았고 신문지면도 2면으로 줄었다. 민간회사가 전쟁 선전광고비를 부담하기도 했다. 상업광고는 거의 사라졌다.
광복, 광고 복구, 민간상업방송의 정착. 1945-1968
광복으로 국권을 찾았고 우리말을 찾기는 했으나 남북분단, 3년간의 한국전쟁은 광고에도 치명적이었다. 신문은 하루에 고작 4면이 발행되었으며 광고할 제품도 의약품과 영화 이외에는 거의 없었다.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한국경제가 눈부시게 성장하고 1960년대 초부터여러 민간상업방송이 등장하면서 광고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강의 기적>, 광고의 급성장, 현대적 광고의 정착. 1968-1980
60년대 말 광고대행업이 신종 산업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TV 보급은 가구 대비 2%에서 80%로 폭증하면서 사치품에서 필수품이 되었다. 따라서 TV는 강력한 광고매체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100억 원도 안 되던 광고비가 2,186억 원으로 천문학적으로 증가했다. 광고회사가 광고의 주축이 되는 시대로 바뀌었으며 광고단체와 시장조사회사가 생기고, TV광고 감독이 등장했다. 매체사가 주최하는 광고상이 제정되고 일본의 ACC, 미국 CLIO 광고상이 소개되었다. 대학에는 광고전공학과가 생겼다. 70년대에는 신문에 컬러광고가 등장했다. 광고주, 매체, 광고회사의 3자가 광고산업을 구성하는 현대적 광고시대로 정착한 시기였다.
언론통폐합, TV 컬러화,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창립. 1980-1988
제5공화국이 탄생하면서 언론기본법이 제정되고 언론이 통폐합되었다. 민간방송은 공영화되고 1981년에는 TV가 컬러화되었다. 그리고 모든 방송광고 판매를 대행하는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가 설립되었다. 신문은 하루 8쪽에서 12쪽 발행으로 증가했다. 한국 광고비는 국민총생산의 1% 선에 이르는 선진국형이 되었고 아시아에서 일본다음으로 큰 광고비 보유국이 되었다. 한국 광고시장 개방에 대한 압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개방 시대. 1988-1995
1987년 언론기본법이 폐기되면서 1988년 이후 일간신문의 수는 2배, 3배로 늘었다.신문 발행 면수의 제한도 풀렸으며 민간방송이 부활했다.1991년에는 한국 광고시장이 개방되었다. 한국은 세계 10대 광고비 보유국이 되었다.
인터넷, IT의 뉴미디어 시대. 1995 이후
1995년부터 인터넷이 상용화되면서 IT(정보통신) 시대가 열리고 뉴미디어시대가 왔다. 매체는 물론 마케팅과 광고, 광고 표현까지도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1998년 한국은 IMF를 맞으면서 광고시장도 큰 타격을 받았다. 당시 한국 광고시장은 전년 대비 35%나 줄었다가 다시 회복되었지만 성장을 계속하던 광고시장은 90년대 말부터 저 성장기로 접어들었다. 현재 한국광고의 시장 규모는 2007년 기준 8조원 대로 세계 10위권이다.]
13:00~13:09 잠실역 7번 출구까지 도보로 이동 [9분, 531m 이동]
13:09~13:18 잠실역에서 선릉역으로 가는 2호선 전철 승차 대기
13:18~13:30 2호선을 타고 잠실역에서 선릉역으로 이동한 후 선릉역 10번 출구로 나옴 [12분 소요]
13:30~13:42 선릉역 10번 출구에서 선정릉 지구관리사무소까지 도보로 이동 [12분, 0.8km 이동]
13:42~14:30 서울선릉과정릉을 탐방
[서울 선릉(성종과 정현왕후)과 정릉(중종)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위치 : 서울특별시 강남구 선릉로100길 1
선정릉은 조선 제9대 왕 성종(1457-1494)과 그의 계비인 정현왕후 윤 씨(1462-1530) 그리고 성종의 둘째 아들인 제11대 왕 중종(1488-1544)의 왕릉이다. 성종은 제7대 왕 세조의 손자이자 덕종(추존)의 둘째 아들로 세조 3년(1457)에 태어나 13세(1469)에 즉위했다. 그는 교육과 문화 진흥에 힘을 기울여 조선 전기의 문물제도를 완성시켰다는 평을 받으며 25년간 재위하였다. 정현왕후는 성종 11년(1480)에 책봉되어 중종 25년(1530)에 69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성종의 둘째 아들인 중종은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1506)으로 왕위에 오른 이후 개혁을 연산군의 폐정을 개혁하고자 했다. 선릉은 성종대왕과 정현왕후의 능으로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태이다. 정릉은 조선 11대 중종의 능으로 단릉의 형식으로 왕 한 분을 모신 능이다. 이외에도 각각의 능에 홍살문, 정자각, 비각이 있고 재실, 역사문화관도 능역 안에 있다. 선정릉은 수도권 지하철 선릉역 10번 출구, 선정릉역 3번 출구에서 아주 가까운 강남 도심에 위치해 있음에도 잘 알려지지 않아 한적하며, 조용히 산책을 즐길 수 있다. 또한, 능을 둘러싸고 있는 철망 울타리를 철거하여 숲이 있는 구간에는 고풍스러운 담장을 쌓아 돌담길을 만들었다. 도보 15분 거리에 봉은사와 코엑스몰이 있다.
이용안내
이용시간
- 3월~10월 06:00~21:00 (입장마감20:00)
- 11월~1월 06:30~17:30 (입장마감16:30)
- 2월 06:00~18:00 (입장마감17:00)
쉬는날 : 매주 월요일
주차시설 : 가능
문의및안내 : 02-568-1291
관련 홈페이지 : https://royaltombs.cha.go.kr
상세정보
화장실 : 있음
입 장 료
- 개인 1,000원
- 단체(10인 이상) 800원]
[성종(成宗)
조선 제9대 왕(재위 1469∼1494).
출생-사망 : 1457 ~ 1494
재위기간 : 1469년 ~ 1494년
가족관계 : 왕비 공혜왕후(恭惠王后), 정현왕후(貞顯王后), 아버지 덕종(德宗), 어머니 소혜왕후(昭惠王后)
휘(諱)는 혈(娎), 시호(諡號)는 성종강정인문헌무흠성공효대왕(成宗康靖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이다.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懿敬世子) 이장(李暲)과 한확(韓確)의 딸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1461년(세조 7)에 자산군(者山君), 1468년에 잘산군(乽山君)으로 봉해졌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사예(射藝)와 서화(書畵)에도 뛰어났으며 매사냥도 즐겼다고 한다.
아버지인 의경세자가 1457년에 20세의 나이로 요절하여 세조의 둘째아들인 해양대군(海陽大君) 이황(李晄)이 왕위에 올라 조선의 제8대 예종(睿宗, 재위 1468~1469)이 되었다. 그러나 예종도 왕위에 오른 지 14개월 만에 죽자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尹氏)와 신숙주(申叔舟), 한명회(韓明澮) 등 훈구대신의 뜻에 따라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 이정(李婷)과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齊安大君) 이현(李琄) 등을 제치고 성종이 13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 1469년부터 1476년까지 할머니인 정희왕후 윤씨가 섭정으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성종은 1467년(세조 13) 한명회(韓明澮)의 딸인 공혜왕후(恭惠王后) 한씨와 결혼했으나 그녀가 1474년(성종 5)에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1476년(성종 7)에 봉상시(奉常寺) 판사 등을 역임한 윤기견(尹起畎)의 딸 제헌왕후(齊憲王后) 윤씨를 계비(繼妃)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1479년(성종 10)에 세자 융(imagefont, 뒷날의 연산군)의 생모인 제헌왕후 윤씨를 폐비하고 윤호(尹壕)의 딸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를 다시 계비로 맞이하였다. 그리고 1482년(성종 13)에 폐비 윤씨를 사사(賜死)하였는데, 이 일은 뒷날 연산군 때에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가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성종은 이외에도 명빈 김씨(明嬪 金氏), 숙의 김씨(淑儀 金氏) 등 수많은 후궁(後宮)을 두었으며, 그들과 20여 명의 자녀를 낳았다.
성종은 13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집권초기에 신숙주, 한명회, 홍윤성(洪允成), 김질(金礩) 등 9명의 원로 대신들이 원상(院相)으로서 정책 결정에 자문으로 참여하여 실질적으로 국정을 좌우하였다. 그러나 1476년(성종 7) 친정(親政)을 시작한 후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등 사림(士林派) 세력을 등용하여 훈구파를 견제하였다. 그리고 1478년 홍문관(弘文館)을 예문관(藝文館)에서 다시 분리하여 왕권을 호위하는 정치기구로 만들고, 새로운 인물을 과감하게 발탁하는 등 왕권 강화의 정치적 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성종은 교육과 문화의 진흥에 힘을 기울여 세종과 세조 연간에 기틀이 형성된 조선 전기의 문물제도를 완성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승려들을 엄하게 통제하고 사찰을 폐쇄하는 등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철저히 시행하였으며, 법령의 정비에도 힘써 유교적 통치 질서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1474년(성종 5)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완성하여 반포하였고, 1492년(성종 23)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더욱 보충하여 《대전속록(大典續錄)》을 간행하였다. 1491년 문신 중 덕과 재주가 있는 사람을 뽑아 직무를 쉬면서 학문에만 전념케 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라고 불리는 호당(湖堂) 제도를 실시하였고, 서적의 간행도 활발히 추진하여 《여지승람(輿地勝覽)》, 《동국통감(東國通鑑)》, 《동문선(東文選)》, 《오례의(五禮儀)》, 《악학궤범(樂學軌範)》 등을 편찬·간행하였다.
여진족의 침략에 대비하는 등 북방 방비에도 힘썼다. 1479년(성종 10) 윤필상(尹弼商) 등을 통해 압록강 인근의 여진족을 소탕했으며, 1491년(성종 22) 허종(許琮)을 통해 두만강 일대의 여진족을 진압하였다.
성종은 재위 25년째인 1494년 음력 12월 24일에 38살의 나이에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에서 사망했다. 죽은 후 서울시 강남구에 위치한 선릉(宣陵)에 매장되었다.]
[정현왕후(貞顯王后)
조선 성종의 계비
재위 1480년 11월 8일 ~ 1494년 12월 25일 (음력)
전임 폐비 윤씨
후임 폐비 신씨
조선의 왕대비
재위 1494년 12월 29일 ~ 1530년 8월 22일 (음력)
전임 인수왕대비 한씨 (소혜왕후), 인혜왕대비 한씨 (안순왕후)
후임 성렬왕대비 윤씨 (문정왕후)
이름
휘 창년(昌年)
별호 자순왕대비(慈順王大妃)
시호 정현(貞顯)
존호 자순화혜(慈順和惠)
휘호 소의흠숙(昭懿欽淑)
신상정보
출생일 1462년 7월 30일 (양력)
출생지 조선 충청도 신창 관아
사망일 1530년 9월 23일(68세) (양력)
사망지 조선 한성부 경복궁 동궁 정침
가문 파평 윤씨
부친 영원부원군 윤호
모친 연안부부인 담양 전씨
배우자 성종
자녀 1남 1녀 (1남 3녀)
순숙공주 · 중종
능묘 선릉(宣陵) 서울특별시 강남구 선릉로100길 1
정현왕후 윤씨(貞顯王后 尹氏, 1462년 7월 30일 (음력 6월 25일) ~ 1530년 9월 23일 (음력 8월 22일)는 조선 성종의 세번째 왕비이며 중종의 모후이다.
생애
출생과 가계
1462년(세조 8년) 6월 25일, 충청도 신창의 관아에서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 윤호(尹壕)와 연안부부인 전씨(延安府夫人 田氏)의 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이며 이름은 창년(昌年)이다. 당시 아버지 윤호가 현감으로 부임중이었던 신창(新昌)에서 '창(昌)'자를 떼어 지었다.
정현왕후의 할아버지인 윤삼산은 성종의 할머니인 정희왕후와 6촌이며, 성종과 정현왕후는 윤척(尹陟)을 공통 조상으로 하는 10촌지간이다.
┌─→ 윤승례 → 윤번 → 정희왕후 → 덕종 → 성종
윤척
└─→ 윤승순 → 윤곤 → 윤삼산 → 윤호 → 정현왕후
또한 정현왕후의 증조모이자 윤삼산의 어머니인 근순택주 한씨는 한상질의 딸이며 한명회의 고모이다. 따라서 한명회는 윤삼산의 외사촌 동생이 되고, 성종의 첫번째 왕비 공혜왕후는 정현왕후의 아버지 윤호와 6촌이 된다.
입궁과 왕비 책봉
1473년(성종 4년) 6월 14일, 내명부 종2품 숙의(淑儀)에 책봉되어 입궁하였다. 1478년(성종 9년)에는 순숙공주를 낳았다.
당시 왕비였던 폐비 윤씨가 투기와 미신, 저주 행위등의 부도덕함을 이유로 폐위되어 사가로 쫓겨난 후, 성종은 대신들을 불러 숙의 윤씨를 새로운 왕비로 택했음을 전교하였다. 정현왕후는 공혜왕후와 폐비 윤씨에 이어 성종의 세번째 왕비가 되었다.
왕비 시절
1480년(성종 11년) 11월 8일, 창덕궁 선정전에서 교명과 책보를 받고 왕비에 책봉되었다. 폐비 윤씨가 사사된 이후 폐비의 아들인 연산군을 돌보았는데, 연산군은 성종의 묘지명을 읽어 보기 전까지 자신을 정현왕후의 아들로 알고 자랐다.
성종과의 사이에서 순숙공주를 비롯한 공주 3명과 진성대군(중종)을 낳았는데, 공주 2명은 조졸하였고 순숙공주 또한 11세로 요절하였다.
1486년(성종 17년), 선정전에서 양로연을 베풀었다. 1489년(성종 20년)과 1494년(성종 25년)에도 양로연을 베풀었으며 1492년(성종 23년)과 1493년(성종 24년)에는 내외명부를 이끌고 후원 채상단에서 친잠례를 거행했다.
왕대비 시절
성종이 승하하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다. 1496년(연산군 2년), 자순(慈順)의 존호를 받았고, 이후 화혜(和惠)의 존호가 가상되었다.
연산군은 즉위 후 성종의 지문을 읽다가 자신의 생모가 폐비 윤씨임을 알게 되었고, 이후 갑자사화를 일으켜 폐비 윤씨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들을 고문하고 처형하였다. 이때 계모인 정현왕후의 침전 밖으로 가서 장검을 들며 밖으로 나오라고 행패를 부렸으나, 왕비 신씨(폐비 신씨)가 연산군을 극구 말려 보호하였다.
시어머니인 소혜왕후가 죽고 연산군이 상의 기간을 줄이려 하자 정현왕후는 "삼년복은 천자(天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똑같은 천하의 공통된 상사인데 어찌 단상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감히 따르지 못하겠다." 하였다. 이에 연산군이 화를 내며 "부인은 삼종(三從)의 의리가 있는 법인데, 임금의 법을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는가?" 하자, 마지못해 이를 따랐다.
1506년 9월, 중종반정으로 아들 진성대군이 중종으로 즉위하였다.
1507년(중종 2년), 정현왕후는 세종과 세조, 소헌왕후와 정희왕후, 소혜왕후 등 역대 왕과 왕비들이 불교를 숭상하고 사찰을 건립한 일을 언급하며 불교를 옹호하고 사찰을 세우려 하였다. 이에 대간과 홍문관을 비롯해 여러 대신들이 극렬히 반대했으나 중종은 대비의 사찰 건립을 옹호하였다.
1517년(중종 12년), 병을 앓아 제안대군의 집으로 잠시 이어하였다. 기묘사화 이후 도교의 영향을 받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소격서의 폐지를 두고 중종과 대신들간의 의견 차이가 벌어졌는데, 중종은 정현왕후가 소격서에 자주 행차하였음을 이유로 윤허하지 않았다.
사망
1530년(중종 25년) 8월 22일, 동궁의 정침에서 사망했다.
정현왕후의 졸기
신시(申時)에 대비(大妃)가 동궁의 정침에서 훙(薨)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대비는 인자하여 족속들과 화목하였으며 외척을 위해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왕세자(인종)가 탄생한 지 열흘도 못되어 장경왕후(章敬王后)가 훙서하였는데
대비가 어루만져 보호하면서 하지 않은 일 없이 다 했다.
— 《중종실록》 69권,
중종 25년(1530년 명 가정(嘉靖) 9년) 8월 22일 (기묘)
시호와 능묘
시호는 정현(貞顯)이며, 원대한 생각을 잘 성취시킨 것이 '정'(貞)이고 행실이 중외에 나타난 것이 '현'(顯)이다.
존호와 휘호를 합치면 자순화혜소의흠숙정현왕후(慈順和惠昭懿欽淑貞顯王后)이다. 능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선정릉 내에 위치한 선릉(宣陵)으로, 남편 성종과 동원이강의 형태로 같이 묻혀 있다.]
[정현왕후 (貞顯王后)
조선전기 제9대 성종의 왕비. 계비.
시호 : 정현(貞顯)
출생 연도 : 1462년(세조 8)
사망 연도 : 1530년(중종 25)
본관은 파평(坡平). 우의정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 윤호(尹濠)의 딸이다.
신창(新昌) 공아(公衙)에서 출생하여 1473년(성종 4) 대궐에 들어가 처음 숙의(淑儀)에 봉하여졌고, 1479년 6월 연산군의 생모인 왕비 윤씨가 폐위되자 이듬해 11월에 왕비로 봉하여졌다.
1497년(연산군 3)에 자순(慈順), 1504년에 화혜(和惠)라 존호되었다. 1530년(중종 25) 8월 경복궁에서 죽었으며, 1남1녀를 두었다.
시호는 자순화혜소의흠숙정현왕후(慈順和惠昭懿欽淑貞顯王后)이고, 능호는 선릉(宣陵)으로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에 있다.]
[중종 (中宗)
제11대 조선 국왕
재위 1506년 9월 2일 ~ 1544년 11월 14일 (음력)
즉위식 경복궁 근정전
전임 연산군
후임 인종
이름
휘 이역(李懌)
별호 진성대군(晉城大君) · 진산대군(晉山大君)
시호 공희휘문소무흠인성효대왕
(恭僖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
능호 정릉(靖陵)
서울특별시 강남구 선릉로100길 1
신상정보
출생일 1488년 3월 5일 (음력)
출생지 조선 한성부 경복궁 교태전
사망일 1544년 11월 15일(56세) (음력)
사망지 조선 한성부 창경궁 환경전
부친 성종
모친 정현왕후 윤씨
배우자 단경왕후 신씨
장경왕후 윤씨
문정왕후 윤씨
자녀 9남 11녀 (14남 12녀)
중종(中宗, 1488년 4월 25일(음력 3월 5일) ~ 1544년 12월 9일(음력 11월 15일))은 조선의 제11대 국왕(재위: 1506년 ~ 1544년)이다.
휘는 역(懌),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낙천(樂天)이며, 성종의 여덟째 아들이자 적차남으로, 어머니는 정현왕후 윤씨이다. 이복 형인 연산군이 반정으로 폐위되자 박원종, 성희안 등 반정공신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중 훈구 공신과 사림의 갈등으로 정쟁이 심화되었으며, 이로 인해 사화와 옥사, 저주와 주술, 익명서 투서, 무고 등의 궁중 암투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삼포왜란이 발생하였으며, 남쪽의 왜구와 북쪽의 여진족의 침탈로 인해 발생하는 국방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임시기구인 비변사를 설치하였다.
이 밖에 《속삼강행실도》(1514년),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등 다방면에 걸친 책들이 중종 시대에 편찬, 간행되었으나 기묘사화 이후로는 문화 발전 정책이 거의 정지되었다.
생애
탄생과 즉위 이전
1488년(성종 19년) 3월 5일, 성종과 정현왕후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은 이(李), 휘는 역(懌), 아명은 구등은금이(仇等隱金伊)이다.
1494년(성종 25년) 4월 6일, 진성대군(晉城大君)으로 봉해졌다. 이후 신수근의 딸인 신씨(단경왕후)와 혼인하였고 13세가 되던 해에 출궁하였다. 신수근은 연산군의 왕비인 폐비 신씨의 오빠이므로, 연산군과 중종은 이복형제임과 동시에 처고모부와 조카사위의 관계가 되었다.
1506년(연산군 12년) 9월 2일, 연산군의 폭정에 반발한 성희안(成希顔) · 박원종(朴元宗) · 유순정(柳順汀)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이 성공함에 따라 조선의 새 임금으로 추대되었다.
즉위와 개혁
재위 초반
1506년(중종 1년), 9월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하였다. 반정 세력들은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의 딸 신씨를 궁에서 내쫓을 것을 주장하였고, 중종은 결국 왕비 신씨를 폐위하여 사가로 내보냈다. 이후 윤여필의 딸인 장경왕후를 왕비로 책봉하였으나, 장경왕후는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승하하였으며, 다시 윤지임의 딸인 문정왕후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반정 세력의 정치적 의도로 즉위한 중종은 집권 초기에 반정 공신들의 위세에 눌려 실질적인 권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였다. 그런 와중에서도 연산군의 폭정으로 말미암아 문란해진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연산군이 폐지시켰던 모든 법제를 복귀시켰으며, 국왕의 자문을 담당하는 기관인 홍문관의 기능을 대폭 강화하고 신하들의 월과 춘추과시, 사가독서 등을 시행했다. 또한 중종은 왕도정치를 앞세워 공신들의 세력 팽창을 억누르려고 시도했으나 공신들의 힘이 막강하여 성공하지는 못했다.
박원종, 홍경주 등의 공신 세력의 권력이 강화되고 왕 이상의 권한을 행사하려 하자 그는 사림 세력을 다시 등용하기로 결심한다.
사림파의 등용과 개혁 정치
큰어머니 월산대군부인의 남동생이자, 경빈 박씨의 양아버지인 박원종, 희빈 홍씨의 친정아버지 홍경주 등의 세력을 경계한 중종은 당초 박원종과 성희안의 월권행위를 비판하다가 이들의 눈밖에 났던 남곤을 등용한다. 이어 훈구 공신들의 질병과 연이은 죽음, 그리고 훈구 공신의 지도자인 박원종, 성희안의 죽음으로 훈구파가 주춤한 틈을 타 사림파 인사를 홍문관과 사간원, 사헌부, 춘추관 등의 하위직에 등용함으로써 사림파를 다시 정계로 끌어들인다.
중종은 조광조 등 갑자사화로 밀려났던 사림파를 중심으로 현량과를 실시하는 등 철저한 유교적 개혁 정치를 행하여 공신세력을 누르고자 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과격한 조광조의 개혁 정책은 보수적 기득권층인 훈구 세력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그를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지지하던 중종마저도 싫증을 내게 된다. 특히 조광조 등 급진 사림파의 위훈 삭제로 다수의 공신들이 명단에서 이름이 삭제되는 일이 벌어지자 훈구파들의 위기감은 극에 달한다.
기묘사화
조광조와의 갈등
중종 반정으로 추대 받아 즉위한 중종은, 공신 세력에게 좌지우지 되어 실권을 행사하지 못하였고, 본인의 뜻과 상관 없이 왕비 신씨를 폐위하고 이복 형인 견성군을 사사하였다. 중종은 훈구 공신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사림을 등용하였고 비대해진 훈구파 척신들의 전횡에서 벗어나 보다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조광조는 도학 정치 실현이 목적이었기에 중종과의 정치적 노선이 달랐다.
또한 사림파의 지치정치, 군신 공치 역시 중종에게 거부감을 주었다. 조광조는 도학정치가 펴지길 꿈꿨고, 중종은 힘센 군주가 되길 갈망한 것이다. 조광조는 임금 역시 성리학적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사류가 되기를 원했고, 성리학 사상에 입각한 사류와 군주가 공동으로 다스리는 세계 또는 임금 역시 한 사람의 선비가 될 것을 여러 번 권고하였다. 중종은 피로를 느낌과 동시에 거부감을 갖게 되었다.
조광조는 중종에게 일종의 천거제인 현량과를 실시할 것을 청했고, 성리학적 이데올로기 하에 향촌사회의 자치규약인 향약을 널리 보급하여 유교 윤리를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 사회를 구현하려 하였다. 이러한 조광조와 사림들의 사상은 후에 조선 내에서 성리학적 질서가 강화되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조광조는 불교와 미신을 믿지 말것을 청하였으며 도교의 영향을 받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업무를 관장하던 소격서를 폐지할 것을 강하게 주장하여 마침내 폐지시켰다. 조광조와 사림파들은 중종반정에서 거짓 공로(僞勳, 위훈)로 공신이 된 자들을 가려내 이들을 공신에서 제명할 것을 주청하였다. 이 위훈삭제로 인하여 조광조와 사림은 훈구파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주초위왕 사건
중종은 당초 조광조의 개혁정치를 지지하고 그를 총애하였으나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도학적인 조광조를 점차 기피하고 불신하였다.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의 훈구세력은 홍경주의 딸이자 중종의 총희(寵姬)인 희빈(熙嬪)을 사주하여 궁궐 후원 나뭇잎에 꿀을 바른 붓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 조씨(走+肖=趙氏)가 왕(王)이 됨(爲)'이라는 네 글자를 썼다. 벌레가 나뭇잎 위를 기어다니며 꿀을 바른 부분의 글자를 파먹자 '주초위왕'의 형상이 파인 나뭇잎을 들고 중종에게 호소하였다. 마침내 주초위왕 사건을 이유로 중종은 조광조를 실각시키고 많은 사림들을 사사하였다. 동시에 그가 추진하던 개혁들도 폐지하였다.
작서의 변과 가작인두의 변
1527년(중종 22년), 세자(인종)의 생일 무렵에 죽은 쥐의 사지를 찢어 불에 지진 다음 동궁전 창가에 매달아놓고 세자를 저주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사건의 배후로 중종의 서장자이자 인종의 이복형인 복성군과 복성군의 어머니인 경빈 박씨가 지목되어 폐서인 되었으며, 경빈의 딸들이자 인종의 이복 누나들인 혜순옹주와 혜정옹주 또한 폐서인 되었다.
1533년(중종 28년), 동궁(東宮)의 빈청 남쪽 바자(把子) 위에 사람의 머리 모양을 한 물건이 발견되었다. 이 형상에 누군가가 머리카락을 붙이고 이목구비등을 새겨 목패에 단 다음, 목패에 '세자의 몸을 능지할 것', '세자 부주(父主)의 몸을 교살할 것', '중궁(中宮)을 참(斬)할 것' 과 같은 내용을 적어놓았는데, 이 저주 사건으로 인해 6년전 폐출된 복성군 모자와 혜정옹주의 남편인 당성위(唐城尉) 홍려(洪礪)가 연루되었다.
대간의 탄핵을 받은 복성군과 경빈 박씨는 마침내 사사되었는데, 나중에서야 이 사건의 배후가 인종의 누나인 효혜공주의 남편 연성위(延城尉) 김희(金禧)와 김희의 아버지인 김안로가 꾸민 일임이 드러났다. 이후 인종은 중종에게 복성군 모자의 신원 회복과 폐출된 두 옹주의 작호를 회복시켜줄 것을 청하였다.
외척의 등장
외척 세력의 등용
조광조를 비롯한 급진적인 사림파들이 몰락한 뒤 견제 세력이 없어지자 다시 공신들의 세력이 부활할 조짐을 보였다. 중종은 공신들의 권력집중을 차단할 목적으로 외척인 윤여필, 윤여해, 윤지임, 김안로 등을 등용한다.
처음에는 이들에게 내섬서와 장악원 등의 제조 직을 제수했다가 훈련대장 등을 제수하여 도성의 숙위를 맡겼고, 이후 이들의 자녀들이자 자신의 처남격인 윤임, 윤원로, 윤원형 등이 출사하게 된다. 그러나 외척 세력은 또다른 세력을 형성하여 전쟁의 소용돌이를 만들게 된다.
외척 세력이 새로이 등장하여 중종의 치세 중기와 후기에는 외척 세력과 반정 공신들 간의 정권 다툼으로 인해 크고 작은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 혼란 정국이 지속되었다.
1531년(중종 26년)에는 기묘사화 후 집권했던 심정·이항(李沆)·김극복(金克福) 등이 화를 당했고, 1537년(중종 32년)에는 심정 일파를 모함한 김안로(金安老)·허항(許沆)·채무택(蔡無擇) 등이 주찬되는 등 재위 동안에 화옥(禍獄)이 그치지 않았다.
대윤과 소윤의 등장
윤임과 윤원형은 정희왕후의 아버지 윤번의 후손들로, 각각 인종과 명종의 외숙부들인데, 이들은 중종 말엽부터 세력을 형성하였다. 인종의 외가인 윤여필, 윤임 세력을 주축으로 하는 대윤(大尹)과, 경원대군(명종)을 지지하는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파인 소윤(小尹)이 파를 나누어 갈등하였다.
1538년(중종 33년) 10월, 중종은 본인의 재위년수와 나이가 세종의 재위년수와 세종이 승하했을 때의 나이와 비슷해지자 태종과 세종의 고사를 들며 세자(인종)에게 선위하려 하였는데, 세자가 곡기를 끊고 극구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최후 및 능묘
1544년(중종 39년) 11월 14일, 중종은 세자(인종)에게 전위의 뜻을 밝히고, 다음날인 11월 15일 창경궁의 환경전에서 승하하였다.
묘호는 중종(中宗), 시호는 휘문소무흠인성효대왕(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이다. 묘호인 중종은 연산군으로부터 나라를 구하여 중흥시켰다는 의미로 정해진 것이다.
능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정릉(靖陵)으로 본래 고양시에 위치하였으나, 풍수지리상 위치가 좋지 않고 장마로 인해 재실에 물이 차자 명종대에 지금의 위치로 천장하였다. 정릉은 임진왜란 당시 훼손되었다. 정릉에서는 시신이 나왔지만 이 시신이 중종의 것인지 아닌지를 가려내기 위해 원로 대신에서부터 궁중의 나인들까지 동원되어 살펴보았지만 중종이 승하한 지 오래 되어 외모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몇 없었고 남은 사람들도 고령이라 확인이 힘들었다. 중종 외모를 기억하는 몇몇 사람들의 몽타주 기록에 의하면 중종은 키가 크고 보통의 체격이었고 수염은 그리 많지도 않았으나 또한 적은 편도 아니었으며 수염 색은 누런 편이었다고 한다. 이마에는 녹두보다는 좀 작은 검은 사마귀가 있었고, 용안은 갸름하며 약간 얽은 흔적이 있었으며 턱의 끝이 약간 굽어 모난 턱이었으며 코가 높고 길되 살짝 굽었다고 한다. 하지만 시신의 모습은 비대하고, 키는 포백척으로 3척 2촌으로 작았다. 남아있던 기록과 시신의 모습이 달랐고 중종이 승하할 당시가 더운 여름이었는데 시신이 부패하지 않고 남아있다는 점 때문에 왜군이 왕릉을 욕보이기 위해 가져다 둔 시신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이후 중종일 지도 모른다는 의견 때문에 일단 시신은 선정릉 근처의 정결한 곳에 묻었다. 그 시신이 정말 중종의 시신이었는지 아닌지 확실하게 확인할 방법은 아직은 없다.
평가
조선왕조실록《중종실록》의 사관은 중종과 중종 시대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상(중종)은 인자하고 유순한 면은 남음이 있었으나 결단성이 부족하여
비록 일을 할 뜻은 있었으나 일을 한 실상이 없었다.
좋아하고 싫어함이 분명하지 않고
어진 사람과 간사한 무리를 뒤섞어 등용했기 때문에
재위 40년 동안에 다스려진 때는 적었고 혼란한 때가 많아
끝내 소강(小康)의 효과도 보지 못했으니 슬프다.
사신은 논한다.
인자하고 공검한 것은 천성에서 나왔으나 우유부단하여 아랫사람들에게 이끌려
견성군(甄城君)을 죽여 형제간의 우애가 이지러졌고,
신비(愼妃, 단경왕후)를 내치고 박빈(朴嬪, 경빈 박씨)을 죽여 부부의 정이 없어졌으며
복성군(福城君)과 당성위(唐城尉)를 죽여 부자간의 은의(恩義)가 어그러졌고,
대신을 많이 죽이고 주륙(誅戮)이 잇달아 군신의 은의가 야박해졌으니 애석하다.
— 《중종실록》 105권,
중종 39년(1544년 명 가정(嘉靖) 23년) 11월 15일 (경술)]
14:30~15:00 서울 강남구 봉은사로 531 번지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봉은사로 이동 [30분 소요, 1.8km 이동]
[빌딩숲 사이 천년 고찰 산책, 봉은사
서울 강남 대표사찰로 자리…추사 김정희 현판 등 문화재도 가득
비즈한국 기사 등록 : 2021.05.18.(화) 10:58:50
글 : 구완회 여행작가
[비즈한국] 종교와 상관없이 사찰은 아이와 함께 가볼 만한 곳이다. 무엇보다 우리 역사는 불교를 빼놓고는 이해할 수 없고,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찰 방문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석가탄신일을 즈음해서는 특히 그렇다. 우리 사회의 안녕과 개인의 소원을 빌고, 고즈넉한 분위기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은 덤이다. 코로나19로 장거리 이동이 불안해졌으니, 가까운 곳이라면 더욱 좋겠다. 서울 강남 빌딩숲 속에 자리한 천년 고찰 봉은사는 어떨까.
#도심 속 소나무 숲길 산책
조선 시대의 기본 정책이 숭유억불이었다지만, 왕실은 불당을 짓고 절을 만드는 일에 열심이었다. 신라 시대에 처음 창건된 봉은사 또한 왕실의 지원으로 성장했다. 15세기 연산군 때에 정현왕후가 절을 새로 지으면서 봉은사라는 이름을 붙였고, 16세기 명종 때 수렴청정을 했던 문정왕후는 자신이 총애하던 승려 보우를 봉은사 주지로 앉히면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후 문정왕후의 뜻에 따라 중종의 왕릉이 봉은사 자리로 옮겨오고, 봉은사는 지금의 자리로 이사하면서 큰 규모로 확장되었다. 삼존불을 봉안한 대웅보전과 관음도량의 중심 관음전, 진여문, 천왕문, 해탈문, 나한전, 심검당, 열반당 등 대규모 건물들이 속속 들어섰다. 문정왕후 사후에는 보우 선사가 제주도로 유배되는 등 봉은사도 내리막길을 걸었지만, 근현대를 거치면서 서울 강남의 대표사찰로 예전의 영화를 되찾았다.
도심 속 빌딩숲 사이에 자리 잡은 봉은사는 여전히 규모가 큰 사찰이다. 정문인 일주문을 지나면 대웅전을 비롯해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나오고, 그 뒤로는 23m 높이의 거대한 미륵대불이 사찰 전체를 굽어보고 있다. 밖에서 보기보다 훨씬 규모가 큰데, 안으로 들어갈수록 그 규모를 실감할 수 있다. 절 뒤편의 소나무 숲길은 산책 코스로 아주 훌륭하다. 평일 점심 시간이면 이 길을 산책하는 근처 직장인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복잡한 도심 속에서 이리도 한가로운 숲길이라니, 도심 사찰 봉은사는 도량뿐 아니라 휴식 공간의 역할도 겸하는 듯하다.
#추사의 마지막 작품 ‘판전’
방문자의 눈길을 끄는 건 웅장한 미륵대불이지만, 봉은사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추사 김정희가 세상을 뜨기 3일 전에 썼다는 판전의 현판이다. 얼핏 보면 비뚤배뚤, 도무지 조선 대표 명필의 글씨라고는 믿어지지 않지만, 원래 대가의 작품은 말년으로 가면서 어린아이와 같이 되기도 한단다.
추사의 글씨 말고도 봉은사에는 문화재들이 가득하다. 대웅전에 자리 잡은 목조석가여래 삼불좌상(보물 제1819호)과 고려시대에 제작된 봉은사 청동 은입사 향완(보물 제321호) 등이 대표적이다.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봉은사에서 만들어진 삼불좌상은 조선 후기 최고 조각승으로 손꼽히는 승일 스님의 작품이다. 지금도 봉은사 대웅전에 나란히 앉아 번뇌의 바다에서 신음하는 중생들을 굽어보고 있다. 이 밖에도 조선시대 승과 시험을 치르던 선불당과 장흥사 동종, 영산전 사자도와 신중도 등 수십 점의 문화유산이 서울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2021년의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봉은사에선 봉축 법요식과 점등식, 문화공연, 영화상영 등 풍성한 행사가 펼쳐진다. 당연히 방역 수칙을 철저히 지키면서 행사가 진행될 테지만, 그래도 인파가 부담스럽다면 부처님오신날을 지나서 봉은사를 찾는 것도 좋다. 아이와 함께 여유롭게 사찰을 둘러볼 수 있을 것이다.
절 입구에 있는 사천왕상과 부도, 대웅전과 탑을 보면서 아이에게 불교 문화 전반과 그것이 우리 역사에 미친 영향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건 어떨까. 삼국시대에 전래된 불교는 왕권을 강화했고, 백성의 종교가 되었으며, 문화 예술의 발달을 이끌었다는 설명과 함께 말이다. 더불어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종교들이 평화롭게 공존한다는 걸 강조했으면 좋겠다. 지금은 서울시청 앞 광장에 거대한 불탑이 서 있지만, 12월에는 크리스마스 트리로 바뀔 것이다. 앞으로 더 많은 종교가 차별없이 공존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덧붙이도록 하자.
<여행메모>
봉은사
△위치: 서울시 강남구 봉은사로 531
△문의: 02-3218-4800
△이용시간: 일출~일몰, 연중무휴
필자 구완회는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여성중앙’, ‘프라이데이’ 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랜덤하우스코리아 여행출판팀장으로 ‘세계를 간다’, ‘100배 즐기기’ 등의 여행 가이드북 시리즈를 총괄했다. 지금은 두 아이를 키우며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역사와 여행 이야기를 쓰고 있다.]
[탐매하기 좋은 봉은사, 명상길까지 걸어 봄(春)직 아니한가!
시민기자 윤혜숙
내 손안에 서울 발행일 2024.03.27. 11:00 수정일 2024.03.27. 14:35
남도에선 하루가 멀다고 봄꽃 소식이 들려온다. 특히 이맘때 지인들이 SNS에서 올리는 홍매화 사진을 보면 마음은 벌써 남도에 가 있다.
하지만 멀리 남도에 가지 않아도 서울에서 봄의 전령사, 홍매화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로 3월 중 봉은사를 방문하면 된다.
봉은사에서 가장 인기 있는 매화나무를 찾아서
봉은사 가는 길은 9호선 전철을 타고 봉은사역에 내려서 1번 출구로 나오면 된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자리 잡은 절이라 그런지 평일 한낮인데도 봉은사로 향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봉은사에서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일주문’(一柱門)이다. 봉은사에서는 이 문을 ‘진여문’이라 한다. 진여(眞如)란,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뜻한다. 따라서 진여문에 들어선다는 것은 곧 부처님의 세상에 들어간다는 의미가 있다.
진여문을 지나면 ‘법왕루’(法王樓)가 나온다. 법왕루는 법의 왕, 즉 부처님이 계시는 곳을 말하며, 대웅전과 마주하여 누각으로 세워져 있다. 법왕루를 지나면 3층 석탑이 있는 경내가 나온다.
법왕루를 나오자마자 하늘을 가득 메운 연등이 진풍경을 연출했다. 형형색색 연등 아래 기자도 잠시 멈춰서서 마음속으로 안녕을 기원하며 대웅전으로 향했다.
대웅전에는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이 있다. 조선시대 최고의 조각승인 승일 스님의 손을 거친 삼불좌상은 보물 제1819호로 지정돼 있다. 삼불좌상 모두 조각적으로 우수하고, 발원문을 갖추고 있어 17세기 중후반의 불교 조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성보로 평가받고 있다.
봉은사에서 가장 인기 있는 홍매화는 ‘영각’ 부근에서 만날 수 있다. 대웅전 오른쪽으로 난 좁은 계단을 오르면 ‘영각’이 나타난다. 오늘 봉은사를 방문한 대다수 사람은 홍매화를 구경하러 온 듯, 매화나무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로 인해 사진을 찍는 게 힘들 정도였다.
매화꽃을 자세히 살펴보면 꽃 자체는 여리여리하면서도 화려해 보인다. 모진 추위에도 불구하고 꽃을 피워내기에 강인하고 고고한 자태를 자랑한다. 그런 매화의 매력에 사람들이 끌리나 보다.
홍매화를 구경한 뒤 ‘미륵대불’이 있는 곳으로 갔다. 야외에 모셔둔 거대한 불상이다. 1996년에 완공된 봉은사 성보로서 높이 23m에 이르는 국내 최대 크기의 부처님상이다.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누구든 거대한 불상 앞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경건하게 합장한다.
미륵대불에서 왼쪽으로 가면 ‘판전’이 나온다. 봉은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데다가 판전 편액이 한눈에 봐도 그 글자체가 예사롭지 않다. 아니나 다를까. 추사 김정희 선생이 쓴 마지막 글씨라고 한다. 현재 서울시 유형문화재 84호로 지정돼 있다.
봉은사 경내에 있는 크고 작은 전각 중의 하나이기에 그냥 지나칠 법하나, 봉은사를 방문한 김에 추사 김정희가 쓴 글씨를 찾아보는 것도 봉은사를 관람하는 재미라고 하겠다.
봄꽃 만큼이나 힐링을 선사하는 봉은사 ‘명상길’
이제 봉은사 경내를 둘러봤으니 봉은사 명상길을 걸어야겠다. 봉은사 명상길은 지난 2021년 4월 강남구가 봉은사와 민간 토지 사용 및 조성에 관한 업무협약을 맺고 시민들에게 개방했다.
사찰을 방문하는 신도와 시민들이 산책을 즐기면서 명상뿐만 아니라 도심 숲속에서 휴식과 문화, 관광을 즐길 수 있어 강남의 명소로 부상하고 있다.
사람들로 번잡한 봉은사 경내완 달리 봉은사 명상길은 이름처럼 명상하기 좋았다. 숲길 주위에 듬성듬성한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을 번갈아 보면서 천천히 걷다 보니 이곳이 도심 한복판이라는 사실을 잊을 정도였다. 약 20분 가량 1.1km의 명상길을 걸으면서 한층 자연과 가까워진 듯했다.
지금 봉은사에 가면 홍매화를 볼 수 있다. 곧 산수유꽃도 만개할 테고 목련, 벚꽃도 차례대로 피어날 것이다.
멀리 남도에 가지 못한다면 반나절 시간을 내어 봉은사를 방문하는 것은 어떨까? 봄나들이 삼아 봉은사에서 봄꽃 구경도 하고 명상길도 걸어보자. 새봄, 복잡한 번뇌는 절로 사라지고 따뜻한 마음의 위안을 찾게 될 것이다.]
15:00~15:40 대한불교조계종 봉은사 탐방
[봉은사는 서울의 중심지인 강남구 삼성동에 자리 잡은 천년고찰이다. 794년 연화국사가 창건하였고 처음엔 견성사라고 하였다. 이후 1498년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가 성종의 능(선릉) 동편에 있던 이 절을 크게 중창하고 절 이름을 봉은사로 바꿨다.
봉은사는 조선조에는 조계종을 대표하는 선종 수사찰로, 근대에는 역경사업과 도제를 양성했던 동국역경원이 세워진 터전이다. 봉은사에는 보물 2점과 성보문화재 40점을 소장하고 있다. 추사 김정희가 쓴 현판이 걸린 판전에는 화엄경, 금강경 등 13가지의 불경 경판 3,479판이 보관되어 있다. 매년 음력 9월 9일에는 사부대중이 함께 경판을 머리에 이고 법성게(불교 경전의 산문 내용을 시의 형태로 되풀이해서 설명한 것)를 독송하면서 법계도를 따라 행진하는 정대불사라는 의식이 행해진다.
오늘날 봉은사는 수행 중심의 사찰 운영으로 새로운 불교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 템플스테이를 비롯한 불교대학, 경전학교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국내외적으로 양질의 한국불교문화를 널리 알리고 있을 뿐 아니라, 사회복지 또한 실현하는 도심 대찰의 위상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봉은사/전각 및 문화재
목차
1. 법당
1.1. 대웅전
1.1.1.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 대한민국 보물 제1819호 (2014년 3월 11일 보물 지정)
1.1.2. 봉은사 청동 은입사 향완 (奉恩寺 靑銅 銀入絲 香垸) - 대한민국 보물 제321호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
1.1.3. 홍무 25년 장흥사 명 동종
1.1.4. 신중도
1.1.5. 삼세불도
1.1.6. 삼장보살도
1.1.7. 감로도
1.2. 법왕루(法王樓)
1.3. 지장전
1.4. 미륵전
1.5. 영산전
1.5.1. 삼존불상(석가불, 가섭존자, 아난존자)
1.5.2. 십육나한상
1.5.3. 영산회상도
1.5.4. 십육나한도
1.5.5. 사자도
1.5.6. 신중도
1.6. 북극보전
1.7. 영각
1.8. 판전
2. 요사 및 선방
2.1. 선불당(選佛堂)
2.2. 심검당(尋劍堂)
2.3. 운하당(雲霞堂)
3. 불상
3.1. 미륵대불
3.2. 해수관음상
4. 문
4.1. 일주문
4.2. 진여문(眞如門)
5. 기타
5.1. 서래원(瑞來院)
5.2. 전통문화체험관
5.3. 매화당(梅花堂)
5.4. 연회루(緣會樓)
5.5. 종루
5.6. 종각
5.7. 날물곳
5.8. 보우당
5.9. 향적원
1. 법당
1.1. 대웅전
봉은사의 중심이 되는 법당으로, 팔작지붕에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이다. 1939년 대화재 때 소실되었다가 1941년 다시 지어졌다. 현재의 대웅전은 1982년에 진여문과 함께 새롭게 중창된 것이다. 대웅전 전면 계단에는 왕실에서만 사용되는 용을 조성해 놓았다는 것이 특이점이다. 또한 대웅전의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쓴 작품이다.
대웅전 전면에는 3층 석탑이 있고, 양 옆으로 석등이 있다. 3층 석탑의 앞으로는 초를 공양하는 제단이 마련되어 있고, 그 양 옆으로는 향에 불을 피운 후 향을 꽂는 향로가 마련되어 있다. 법당 안에는 총 6개의 문화재가 있다.
1.1.1. 서울 봉은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서울 奉恩寺 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
대한민국 보물 제1819호 (2014년 3월 11일 보물 지정)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봉은사로 531(삼성동 73)
시설 : 불상 3점
제작시기 : 1651년
대웅전 안에 모셔진 좌상(坐象) 형식의 삼존불로, 목조로 만들고 삼불 모두 금을 입혔다. 가운데에는 본존불로 석가모니, 좌우 협시불로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를 모셨다. 1651년 조각승 승일(勝一)이 수(首)조각승으로 9명의 보조 조각승들을 이끌고 제작한 상이다. 이 중 본존 석가상은 1689년에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는데, 1765년에 다시 만든 것으로, 당시의 개금발원문(改金發願文)을 통해 알 수 있다.
승일이 제작한 본존 석가상은 좌우협시상에 비해 30cm 정도 크고, 변형식 편단우견(偏袒右肩)으로 법의를 걸치고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결한 모습이어서 조형적인 면에서 구별되나 착의와 수인(手印) 등은 17세기 중엽의 불상 양식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존 석가불상은 좌우의 아미타불, 약사불과는 다른 조각가에 의해 제작되었지만, 조각적으로 우수하고 발원문과 개금문을 통해서 삼세불의 봉안과 개금에 참여했던 시주자들, 조각을 담당했던 조각승들을 알 수 있으므로 조선 후기 17세기 중후반 불교조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2007년 9월 27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26호로 지정되었고, 2014년 3월 11일에는 보물 제1819호로 지정되면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에서는 지정해제되었다. 이 삼불상은 봉은사에서는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1.1.2. 봉은사 청동 은입사 향완 (奉恩寺 靑銅 銀入絲 香垸)
보물(1963년 01월 21일 지정)
고려 말기의 향로.
이칭 : 지정4년명 고려 청동 누은 향로
소재지 :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55, 불교중앙박물관 (견지동,광교빌딩)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33.4㎝, 입지름 51㎝. 향로의 일반적 형태를 따른 통식의 향로이다. 형태는 각부(各部) 비례가 적절하여 매우 안정감 있고 아름다우며, 표면의 의장문양(意匠文樣)도 공교하여 높은 격조를 보인다.
향로의 구연부 전에는 쌍구체(雙鉤體)의 연화당초(蓮花唐草)가 장식되었고, 테두리는 둥근 태선(太線)을 도드라지게 돌려서 윗면은 당초문을 은입사하고 측면은 뇌문(雷文)을 시문하였다.
몸체에는 여의두문(如意頭文)을 돌린 두 줄의 원권(圓圈) 안에 굵게 범(梵)자 한 자씩을 상감(象嵌)하여 4개소에 구성하고, 아래에는 긴 연꽃을 장식하였다. 나머지 바탕에는 보상당초문(寶相唐草文)을 유려하게 새겨 넣었다. 받침에는 위에 연꽃을, 밑에 연잎을 새겼으며, 2단으로 된 굽에는 연화당초문과 여의두문, 구름당초문 등을 세련되게 장식하였다.
구연부 테두리 밑에는 100여 자의 은입사로 새긴 명문(銘文)이 있는데, 일부 내용을 보면, ‘至正四年五月日敬造靑銅縷銀香爐一座奉獻于三角山重興寺大殿佛前(지정4년5월일경조청동누은향로1좌봉헌우삼각산중흥사대전불전)’이라 하여 1344년(충혜왕 5)에 제작되었고, 본래 삼각산 중흥사에 봉헌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1.1.3. 홍무 25년 장흥사 명 동종(洪武 25年 長興寺銘 銅鐘)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29호 (지정일 : 1991년 5월 30일)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봉은사로 531(삼성동 73)
제작시기 : 1392년
대웅전 안에 보관 중인 동종으로, 높이 60cm, 입지름 49.5cm이다. 종을 매다는 부분(이를 용뉴라고 한다.)이 떨어져 나가 완전한 원형을 알 수는 없으나, 몸통은 온전히 남아 있다. 본래 이 종은 경기도 여주의 장흥사라는 절에 있었다고 한다. 장흥사는 1705년(숙종 31년)에 헐렸는데, 이때 장흥사의 물품들을 봉은사로 옮겼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그래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동종도 그때 봉은사로 온 듯 하다.
종의 몸통에 양각으로 새겨넣은 글이 있다. 이렇게 새긴 글을 명문(銘文)이라 하는데, 이 명문은 제작 시기와 종을 만들 때 참여했던 사람들을 언급한 글이다.
武貳拾伍年九月拾七日川寧土 象頭山長興寺鐘造成 金三百斤以入鐘 施主 戶長 信善 施主大原 化主信雲 同願覺瓊 同願金光才 同願信哲 同願信瓊 大匠 朴□□
홍무 25년 장흥사 명 동종의 명문
이에 따르면, 1392년(태조 원년) 9월 17일에 제작했다고 한다. 명나라 연호로 환산하면 홍무 25년이다. 당시에는 중국의 연호를 사용했으므로, 저렇게 연도를 새긴 것이다. 만든 곳은 천녕(여주의 옛 지명)에 있는 상두산 장흥사라 쓰여 있다. 시주한 사람의 명단을 보면 호장이란 직책이 눈에 띈다. 호장은 고려 때 향리들 중 으뜸가는 직책으로 그 지역의 세력가였다. 즉, 천녕의 유력인사들이 힘을 합쳐 제작한 종임을 알 수 있다.
1.1.4. 봉은사 대웅전 신중도(奉恩寺 大雄殿 神衆圖)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29호 (지정일 : 2007년 9월 20일)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봉은사로 531(삼성동 73)
유물 / 불교회화 / 괘불화 / 석가불도
수량 / 면적 : 1폭
제작시기 : 1844년
봉은사 대웅전 내부 우측에 마련된 신중도로, 1844년 7월 현왕도와 함께 봉안된 것이다. 세로 200.5cm, 가로 245cm의 비단바탕에 그려졌는데 신중도로는 꽤 큰 편에 속한다.
화기에 의하면 여러 상궁들의 시주로 송암당 대원, 월하당 세원, 도운당□□, 석암당 □□, 한운당 □□ ,비구 □□, 비구 □□, 비구 □□, 비구 □□, 비구 □□ 등이 그렸는데, 이중 송암당 대원(松巖堂 大園)은 같은 해(1844년) 현왕도를 그렸다. 이 불화는 또한 1844년 상궁들의 시주로 제작된 작품으로서 조선말기 상궁들에 의해 활발하게 행해졌던 불사(佛事)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화면의 위쪽에는 구곡병(九曲屛)을 두르고, 향 우측에는 위태천과 천룡팔부 등의 신장, 향 좌측에는 범천과 제석천을 비롯한 천부중을 배치하였다. 이 신중도는 범천과 제석천, 위태천을 함께 묘사한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원래 보통은 제석천과 범천을 위쪽에, 위태천과 천룡팔부를 아래쪽에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기에서처럼 한쪽에 범천과 제석천, 다른 한쪽에 위태천을 배치하는 구도는 19세기 서울, 경기도 지역의 사찰에 있는 신중도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현등사 지장암 신중도(1790년)를 비롯하여 남양주 흥국사 신중도(1868년), 서울 사자암 신중도(1880년), 서울 흥국사 신중도(1892년), 서울 미타사 칠성각 신중도(1899년), 서울 진관사 신중도(1910년) 등이 있다. 봉은사 대웅전 신중도는 그 중 이른 시기의 작품 중 하나이다.
범천과 제석천은 네모난 신광을 두르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왼쪽에는 이마에 제3의 눈이 그려진 범천이 높은 보관을 쓰고 합장하였고, 맞은편에 황금의 보(補)가 달린 옷을 입은 제석천은 옷 속에 두 손을 넣고 서있다. 범천은 녹색, 제석천은 붉은 옷을 입고 있어 서로 보색대비를 이루고 있으며 옷에는 아름다운 문양과 화려한 금니의 채색으로 인해 이들이 신중 가운데 으뜸가는 존재임을 잘 보여준다. 얼굴과 손 등에는 호분을 칠하였으나 다른 권속들과 마찬가지로 퇴색과 박락이 심하다. 그러나 둥근 얼굴에 작은 이목구비가 단정하면서도 원만한 모습이다.
범천과 제석천 아래에는 문관복에 원유관과 경전을 얹은 관을 쓴 일궁천자와 월궁천자가 나란히 서있는데, 금색의 화려한 각대(角帶)와 금으로 장식한 보관이 천자의 위상을 나타내는 듯하다. 이들의 오른쪽으로는 비파ㆍ생황ㆍ대금ㆍ피리ㆍ장구 등을 연주하는 주악천녀와 향로를 들고 있는 천녀, 당ㆍ번을 들고 있는 천녀 및 동자가 그려져 있다. 이들은 범천, 제석천과 같이 둥글며 원만한 상호에 작은 이목구비를 하고 있는데, 하단의 피리와 대금을 부는 인물들이 서로 마주본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별 움직임이 없이 조용하게 서있다.
위태천을 위시한 천룡팔부는 칼과 창을 들고 오른쪽을 향하고 있어 마치 주악천녀의 음악을 듣는 듯한 모습이다. 위태천은 새 날개깃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투구를 쓰고 금색의 삼지창을 들고 있으며, 그 아래로 백익선(白翼扇)을 든 산신(山神)과 주조신(主竈神), 용왕(龍王), 주정신(主井神), 무기를 든 신장들이 당당하게 서있다. 천부중들과 달리 얼굴을 짙은 갈색으로 칠하고 부릅뜬 눈과 무성한 턱수염 등 호법신으로서의 특징을 잘 표현하였다.
채색은 적색을 주조색으로 하여 녹색과 흰색, 갈색, 금색 등을 함께 사용하였는데, 특히 권속들의 보관과 옷, 무기, 지물 등에 금색을 많이 사용하고 권속들의 얼굴에 흰색을 칠하여 화면이 화려하면서도 환한 느낌을 준다. 음영법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며 호법신들의 수염과 천부중의 머리 등을 세필로 세밀하게 묘사하였다.
1.1.5. 봉은사 삼세불도(奉恩寺 三世佛圖)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34호 (지정일 : 2007년 9월 20일)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봉은사로 531(삼성동 73)
유물 / 불교회화 / 사경화
수량 / 면적 : 1폭
제작시기 : 1892년
봉은사 삼세불도는 대웅전에 안치되어 있는 목조석가여래삼불상의 뒤 후불벽에 안치되어 있는 후불탱화이다. 세로 319.7cm, 가로 291.8cm의 대규모 면본 채색화로 현 대웅전의 후불벽보다는 폭이 좁지만 1892년 당시 대웅전의 후불벽 규모에 맞춰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 앞에 모셔져 있는 삼세불상이 17, 8세기경의 작품인 것을 볼 때 1892년 대웅전의 불화를 제작하면서 불상과 같은 형식의 삼세불화를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화는 인권시주(引勸施主)인 오청정월(吳淸淨月)과 민두호(閔斗鎬)를 비롯하여 여러 상궁들의 시주에 의해 조성되었으며, 이 그림을 주관한 화승 영명 천기(永明 天機)가 본사질로 참여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영명천기는 당시 봉은사에 주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림의 형식은 상단 중앙에 석가모니불, 좌측에 약사불, 우측에 아미타불 등 삼세불을 나란히 배치하고 상하 좌우로 보살 6구과 나한 8구, 사천왕, 화불 2구, 용왕, 용녀 등이 삼세불을 에워싸는 구도를 보여준다. 석가모니불은 키형의 광배를 뒤로 하고 높은 수미단 위 청련대좌 위에 결가부좌하였는데, 이마부분이 넓고 턱부분이 다소 갸름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작으며, 육계가 뾰족하다. 신체는 건강한 편으로 왼쪽 어깨에 붉은 대의를 걸친 후 대의 자락을 오른쪽에 살짝 걸친 변형된 통견식 착의법을 하고 있다. 대의의 가장자리에는 화문이 그려졌으며, 역시 동일한 화문을 장식한 군의의 윗부분이 넓은 U자형으로 처리되어 있는 점이 독특하다. 수인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결하였고 길상좌(吉祥坐)를 취한 자세가 안정감을 준다. 약사불(향우측)과 아미타불(향좌측)은 석가모니와 동일한 얼굴, 착의법, 자세 등이 동일하지만 광배는 이중륜광으로 처리하였으며 두 상 모두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을 결하고 있다. 석가모니의 아래에는 가섭존자(향우)와 아난존자(향좌)가 본존을 향해 서있고 광배 주위로 좌우 각 3구씩의 제자와 분신불이 배치되었으며, 약사불 위쪽으로는 용왕, 아미타불 위쪽으로는 용녀가 얼굴부분만 표현되었다. 석가모니의 대좌 아래쪽에는 6구의 보살들이 사선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다소 무거운 듯한 보관에 붉은색 천의를 입고 중앙을 향해 서 있다. 정중앙의 두 보살은 석가모니의 좌우보처인 문수보살(如意)과 보현보살(연꽃)이며, 옆의 보살은 머리에 붉은 해를 표현한 것으로 보아 일광보살, 반대쪽의 보살은 월광보살을, 가장자리의 두 보살은 특별한 표식은 없으나 아미타불의 협시인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묘사하였다고 생각된다.
화면의 아래, 위 네 방향에는 사천왕이 배치되어 있다. 향 우측 상단의 천왕은 비파, 하단의 천왕은 칼을 들었으며, 향 좌측 상단의 천왕은 탑, 하단의 천왕은 각각 여의주와 용을 들고 서있는데 위쪽의 두 천왕은 화면의 중앙을, 아래쪽의 두 천왕은 바깥쪽을 향하고 있어 마치 사방을 모두 호위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체적인 화면구성은 1878년에 제작된 안성 청룡사 삼세불화와 유사한데, 두 불화는 일부 권속의 가감을 제외하고는 동일한 본에 의해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삼세불의 뾰족한 육계, 착의법을 비롯하여 사이 사이에 배치된 분신불과 제자들이라든가 사방을 호위하고 있는 사천왕의 모습 등이 동일하며, 봉은사 삼세불화에서는 6보살이 표현된 것에 비하여 청룡사 삼세불화에서는 8보살과 두 천녀가 배치된 점이 다를 뿐이다. 이처럼 두 불화가 동일한 도상을 보여주는 것은 봉은사 삼세불화를 그린 화승 중 영명 천기(永明 天機), 금곡 영환(金谷 永煥). 덕월 응론(德月 應惀)이 청룡사 삼세불화 제작에도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채색은 붉은 색을 많이 사용하였으며 청색과 흰색, 녹색, 금색 등을 함께 쓰고 있다. 특히 석가모니의 신광 내부를 금색으로 칠한 것은 판전 비로자나후불도(1886년)와 같으며, 아미타불과 약사불의 신광 내부는 다양한 색대(色帶)로 표현하여 화려하면서도 장식적으로 보인다. 불, 보살의 얼굴은 음영 없이 처리하였으나 나한과 사천왕은 음영을 강하게 사용하였는데 다소 과장되면서도 능숙한 음영처리가 돋보인다. 필선은 철선묘가 주로 사용되었지만 머리카락과 수염 등의 묘사에서 세밀한 필치가 엿보인다.
이 불화는 세밀한 필치와 섬세한 음영구사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청룡사 삼세불화와 함께 서울지역의 대표적인 삼세불화이므로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한다.
1.1.6. 봉은사 삼장보살도(奉恩寺 三藏菩薩圖)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35호(지정일 : 2007년 9월 20일)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봉은사로 531(삼성동 73)
유물 / 불교회화 / 사경화
수량 / 면적 : 1폭
제작시기 : 1892년
1892년에 삼세불도, 감로도 등과 함께 제작된 탱화로서 세로 198.4cm, 가로 402.5cm에 달하는 대형의 탱화로 면본에 그렸다. 조성 당시에는 중단탱으로 조성되어 대웅전 측벽에 봉안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대웅전 후불벽 뒷면에 봉안되어 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는 볼 수 없고, 삼불상을 끼고 뒤로 돌아가야 보인다.
구도는 가로가 4m나 되는 긴 직사각형의 화면 중앙에 천장보살(天藏菩薩)과 권속을 배치하고, 향우측에 지지보살(持地菩薩)과 권속, 향좌측에 지장보살(地藏菩薩)과 권속을 배치한 전형적인 삼장보살도의 구도를 보여준다. 화면의 윗부분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채운(彩雲)이 그려져 있고 그 아래로 세 보살의 회상(會上)이 펼쳐져 있다. 천장보살과 지지보살, 지장보살은 모두 높은 수미대좌 위에 결가부좌하였는데 좌우와 아래 부분에는 많은 권속들이 이들을 꽉 둘러싸고 있다. 세 보살은 둥근 얼굴에 작은 눈, 코, 입 등이 알맞게 표현되었으며 이중륜광을 지니고 있는데, 지지보살과 지장보살의 신광 내부를 구불구불한 색대로 표현하여 마치 보살들의 몸에서 빛이 퍼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천장보살은 화면의 정중앙에 권속들과 함께 묘사되었다. 단정한 자세에 머리에는 화려한 보관을 쓰고 원문이 그려진 붉은색의 옷을 걸쳤으며, 오른손은 가슴 앞으로 들어 손가락을 마주잡고 있고 왼손은 무릎 위에 놓아 두 손가락을 마주잡고 있다. 천장보살을 둘러싼 권속들의 명칭은 알 수 없지만, 천은사 삼장보살도(1776년)의 화기에 적힌 바와 같이 좌우보처는 진주보살(眞珠菩薩)과 대진주보살(大眞珠菩薩), 그 외의 권속들은 사공천중(四空天), 십팔천중(十八天衆), 육욕천중(六欲天衆), 일월천중(日月天衆), 제성천중(諸星天衆), 오통선중(五通仙衆) 등으로 추정된다. 이들 역시 천장보살과 마찬가지로 둥근 얼굴에 이목구비가 작게 묘사되었으며 합장하거나 지물을 든 모습으로 보살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천장보살의 향좌측에 그려진 지지보살은 주위에 묘사된 권속만 다를 뿐 착의법과 보관, 영락 등이 천장보살과 거의 같다. 지지보살의 권속 역시 정확한 존명을 알 수 없으나 천은사 삼장보살도 중 지지보살의 권속인 용수보살(龍樹菩薩)과 다라니보살(陀羅尼菩薩)을 비롯하여 제견색신중(諸牽索神衆), 제금강신중(諸金剛神衆), 제8부신중(諸八部神衆), 제용왕신중(諸龍王神衆), 대약차중(大藥叉衆), 나찰파중(羅刹婆衆), 귀자모중(貴子母衆), 대하천중(大河川衆) 등이 묘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보살형의 권속이 없는 것으로 보아 용수보살(龍樹菩薩)과 다라니보살(陀羅尼菩薩)은 생략된 것으로 보인다.
천장보살 우측의 지장보살은 왼손에는 보주를 들고 오른손은 손가락을 마주잡고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하였다. 체발비구형(剃髮比丘形)으로 머리와 반가좌한 자세만 다를 뿐 얼굴이나 신체형태 등은 천장보살, 지지보살과 같이 단정하면서도 군형잡힌 모습이다. 지장보살의 권속들은 향좌측으로 치우쳐져 배치되었는데, 아래로는 도명존자(錫杖)와 무독귀왕(합장)이 협시하고 있으며, 그 옆으로 시왕과 판관, 사자, 동자, 옥졸 등이 둘러싸고 있다.
채색은 주조색인 적색과 녹색을 위주로 흰색과 황색, 청색, 금색 등이 사용되었으며, 전체적으로 적색을 많이 사용하였지만 흰색의 문양을 많이 그려 넣어 탁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또 하늘바탕을 비롯하여 권속들의 옷과 무기 등에 부분적으로 청색을 사용한 점도 눈에 띄며, 곳곳에 금색을 설채하여 화려한 느낌을 준다. 필선은 곧고 단정한 철선묘가 위주이며, 권속의 얼굴에 강한 음영법을 사용하고 수염 하나 하나까지 세밀하게 묘사하는 등 섬세한 필치를 보여준다.
이 삼장보살도는 조선말기 문신이자 세도가였던 민두호가 장수와 제액소멸 등을 기원하며 시주, 제작한 것으로, 금어인 영명 천기, 금곡 영환, 명응 환감, 경엽, 긍조, 소현, 창조 등이 제작하였다. 강한 음영법과 세밀한 필선 등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서울, 경기지역에서는 드물게 남아있는 삼장보살도의 한 예로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한다.
1.1.7. 봉은사 감로도(奉恩寺 甘露圖)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35호 (지정일 : 2007년 9월 20일)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봉은사로 531(삼성동 73)
유물 / 불교회화 / 사경화
수량 / 면적 : 1폭
제작시기 : 1892년
1.2. 법왕루(法王樓)
봉은사의 보제루로, 법왕루란 문자 그대로 법의 왕, 즉 부처님이 계시는 곳을 말한다. 맞배지붕에 전면 7칸, 측면 4칸 규모이며, 봉은사 경내에서는 가장 큰 건물이다.
본래 사천왕상을 모신 천왕문이 있던 자리였으나, 사천왕상은 1982년에 진여문으로 옮기고, 1997년에는 이 자리에 있던 기존의 법왕루를 서측으로 옮기면서 미륵전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터에는 기존 법왕루보다 규모가 큰 건물을 새로 신축하였다.
1층은 종무소, 2층은 사시예불을 올리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으며, 대법회와 기도, 수행 등이 이뤄지고 있다. 법당 내에는 3,300분의 관세음보살 원불을 모심으로 명실상부한 관세음보살 신앙의 모범적인 신행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현재 봉은사 법왕루는 대법회 등 많은 인원이 있을 경우 부족한 기도공간을 대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법왕루 아래를 통과하여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 뜰에 닿게 되므로 대웅전의 입구라고 볼 수 있다. 진여문에서 법왕루 방향으로 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공중화장실이 있다.
1.3. 지장전
대웅전 동측에 있는 법당으로, 팔작지붕에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이다. 지장전은 명부를 다스리는 보살인 지장보살을 주불로 모심으로써 죽은 이의 넋을 인도하여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전각이다.
현재의 지장전은 2002년 6월 화재로 전소된 것을 2003년 12월에 중건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본래 12평이었던 전각을 40평으로 중창하였다.
1.4. 미륵전
미륵대불과 마주보고 있는 누각 형태의 건물로, 팔작지붕에 전면 5칸, 측면 3칸 규모이다. 본래는 이 건물이 법왕루였으나, 1997년 법왕루를 신축하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 미륵전으로 사용하고 있다.
미륵전을 통과하면 곧장 웅장한 미륵대불이 나오는 구조로 되어 있다. 미륵전 안으로 들어가면 따로 미륵 불상을 놓지 않고, 유리창을 뚫어 실내에서 미륵대불을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봉은사 말고도 통도사 적멸보궁이나 낙산사 관음전 역시 따로 불상을 모시지 않고 유리창을 뚫어 야외에 있는 불상을 보게 되어 있는데, 전국에 그런 형태의 건물이 꽤 많다.
1.5. 영산전
대웅전 뒤 계단을 올라가면 있는 전각으로, 맞배지붕에 전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어졌다. 석가모니를 주불로 모시고 좌우보처인 가섭존자와 아난존자의 양 옆으로 16아라한이 옹위하고 있으며 후불탱화로 영산회상도가, 그 외에 십육나한도, 신중도, 사자도 등의 불화가 봉안되어 있다. 크기는 아담한 전각이지만, 이 작은 전각 안에 문화재가 무려 6점 존재한다.
신도들이 많이 찾는 대웅전보다는 한적한 편이기 때문에 홀로 오랫동안 집중해서 기도하고 싶다면 영산전에서 기도하는 것이 좋다.
1.5.1. 봉은사 목 삼존불상(석가불, 가섭존자, 아난존자)
奉恩寺 木 三尊佛像(釋迦佛,迦葉尊者, 阿難尊者)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27호 (지정일 : 2007년 9월 20일)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봉은사로 531(삼성동 73)
유물 / 불교조각 / 목조 / 불상
수량 / 면적 : 3구
제작시기 : 18세기 후반
영산전에 봉안되어 있는 좌상(坐象) 형식의 삼세불상으로, 본존불로 석가모니상, 좌우에 협시불로 가섭존자상과 아난존자상을 모시고 있으며, 삼존상의 좌우에는 십육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삼존불상은 목조로 만들고 본존불인 석가모니상만 금을 입혔으며, 가섭존자상과 아난존자상은 채색을 하였다. 조성 시기는 영산전 후불탱화의 화기에 1895년에 개금되었다고 하므로 최초의 조성은 이보다 이른 시기일 것으로 생각된다. 2007년 9월 20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27호로 지정되었다.
본존불인 석가모니상은 불신 좌우, 앞, 뒤로 양감이 느껴지는 체구로 무릎 폭은 체구에 비해 좁은 편이다. 세부를 살펴보면, 머리와 육계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아 마치 투구를 쓴 것처럼 두부가 둥글게 표현되었고, 그 정상에는 정상계주를, 두부의 전면중앙에는 반원형의 중간계주가 새겨져 있으며 머리위에는 나발이 촘촘하다. 얼굴은 방형에 가까운 둥근 상호에 이마의 선이 수평하고 이목구비는 다소 평면적이며 차분한 인상을 주는데 입의 양끝이 올라간 고졸한 표현이 눈에 띤다. 어깨는 둥글고 대의는 우견편단식으로 입었는데 오른쪽 어깨를 감싼 대의자락이 허리안으로 들어가는 형태의, 이른바 변형식 우견편단 착의법을 나타내고 있는데, 조선 후기에 흔히 보이는 표현이라고 하겠다. 가슴에는 군의의 윗부분이 드러나고 양쪽 무릎에는 부채꼴로 옷주름이 새겨져 있는데 매우 도식화되었다. 오른손은 촉지인처럼 아래로 내렸고 별재로 제작하여 손목에 끼워 넣은 왼손을 무릎위에 올려 손가락을 약간 구부려서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데, 오른손은 아래로 내렸는데, 이 수인은 조각승 무염이 조성한 불갑사 대웅전 목조삼세불좌상의 본존 석가불상(1635년)을 비롯한 조선 후기 석가불에서 자주 표현되는 수인이다.
본존상 좌측의 가섭존자는 머리 정상이 솟아오른 수행자의 모습으로 동안의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으며, 원령의 내의 위에 가사를 입고 복부 주변에는 요포 같은 것을 덧입었으며, 그 아래로 신대(紳帶)가 두 발 사이로 내려온다. 두손은 모아서 합장하였다. 우측의 아난존자는 삭발한 승형으로 역시 원령의 내의 위에 가사를 걸치고 군의 중앙으로 신대가 흘러내리고 있다.
1.5.2. 봉은사 목 십육나한상(奉恩寺 木 十六羅漢像)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28호 (지정일 : 2007년 9월 20일)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봉은사로 531(삼성동 73)
유물 / 불교조각 / 목조 / 나한상
수량 / 면적 : 12구
제작시기 : 1895년
영산전에 봉안되어 있는 십육나한상은 1895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삼존불상의 좌우에 8구씩 총 16구가 배치되어 있으며, 목조로 만들고 채색을 했다. 2007년 9월 20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28호로 지정되었다. 이 중 4구는 소실되어 새로 만든 것이며, 원래 있던 12구만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대체로 십육나한상의 배치는 좌측에 1, 3, 5, 7, 9, 11, 13, 15상이 봉안되고, 우측에 2, 4, 6, 8, 10, 12, 16상이 봉안되는 것이 통례이나, 현재 봉은사 영산전의 십육나한상은 그 순서가 교란되어 원 위치와 다르다. 향 우측의 제1상은 승형의 머리에 두 손으로 합장한 젊은 모습의 나한상으로서 얼굴의 형태와 이목구비의 표현은 본존석가상이나 아난존자와 매우 유사하며 원령의 내의에 가사를 입었는데, 암좌의 정면에는 괴수면이 새겨져 있다. 그 옆의 나한상은 착의형식은 앞의 나한상과 같은데, 오른쪽 무릎을 세운 윤왕좌의 자세이며 무릎위에 손을 올려놓고 있다. 향 우측 제3상은 신작(新作)으로 왼손에는 보주를 쥐고 유희좌의 좌세로 앉아 있다. 제4상은 무릎위에 올려놓은 왼손에 긴 염주를 들었고 오른손은 오른 무릎 위에 놓았는데, 손가락을 구부린 표현이 재미있다. 제5상은 두 손을 마주 포개어 배위에 올려놓은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으며, 제6상은 같은 형태의 승형 나한상으로 왼 무릎을 세운 윤왕좌로 앉아 오른손에 경권을 쥐고 있다. 제7상은 신작으로 유희좌로 앉아 등을 긁고 있다. 제8상은 두 손위에 경책을 펼쳐들고 있다.
다음으로 향 좌측의 나한상은 제1상은 가사의 앞섶을 풀어헤쳐서 상체의 나신이 드러나며 의자에 앉은 의상인데 오른손으로 동자를 안고 있다. 제2상은 가사위에 두건을 덮어쓰고 두 손을 옷속에 가린 나한상이며, 그 옆의 제3상은 신작(新作)으로 오른손에는 석장, 왼손에는 염주를 들고 있다. 제4상은 두 손위에 경책을 펼쳐 든 모습이 향 우측 제8상과 유사하다. 제5상은 오른 무릎을 세워서 몸쪽에 붙이고 두손으로 무릎을 감싼 자세로 앉았는데, 이와 같은 유형은 오대와 송대의 나한상에서 보이며 원래는 세운 무릎위에 얼굴을 기대고 앉아있는 경우도 있다. 제6상은 신작으로 무릎을 세우고 앉아 그 위에 왼손을 올려놓았다. 제7상은 제4상과 마찬가지로 두 손위에 경책을 펼쳐든 나한상이며 제8상은 손의 모습으로 보아서 원래는 지물을 갖고 있었던 듯하다.
십육나한상은 전체적으로 개성이 느껴지지 않는 획일화된 얼굴과 경직된 신체의 표현에서 조선말기 나한상의 특징을 보이고 있는데, 이 상들이 봉안되어있는 영산전 후불탱화 화기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1895년 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어 조선 말기의 기년작으로서 중요한 예라고 생각된다. 함께 섞여있는 신작(新作)의 나한상들은, 향 우측의 나한상들 가운데 세 번째와 일곱 번째 상, 향 좌측의 나한상 가운데 세 번째와 여섯 번째 상으로, 원래의 나한상들보다 체구와 두부가 크며 얼굴의 표현도 다르다.
1.5.3. 봉은사 영산회상도(奉恩寺 靈山會上圖)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37호
영산회상도
서울특별시 휘장 White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지정일 : 2007년 9월 20일)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봉은사로 531(삼성동 73)
유물 / 불교회화 / 탱화 / 기타
수량 / 면적 : 1폭
제작시기 : 1895년
1.5.4. 봉은사 십육나한도(奉恩寺 十六羅漢圖)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38호
십육나한도[편집]
서울특별시 휘장 White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지정일 : 2007년 9월 20일)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봉은사로 531(삼성동 73)
유물 / 불교회화 / 탱화 / 기타
수량 / 면적 : 12폭
제작시기 : 1895년
1.5.5. 봉은사 사자도(奉恩寺 使者圖)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38호 (지정일 : 2007년 9월 20일)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봉은사로 531(삼성동 73)
유물 / 불교회화
수량 / 면적 : 1폭
제작시기 : 1895년
1.5.6. 봉은사 영산전 신중도(奉恩寺 靈山殿 神衆圖)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39호 (지정일 : 2007년 9월 20일)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봉은사로 531(삼성동 73)
유물 / 불교회화
수량 / 면적 : 1폭
제작시기 : 1895년
1.6. 북극보전
영산전 서편에 있는 법당으로, 산신, 칠성신, 나반존자를 모신 삼성각이다. 북극보전(北極寶殿)이라는 전각의 이름은 북두칠성을 신격화한 존재인 칠성신으로부터 따온 것이다. 1942년에 영산전과 함께 건립되었다. 팔작지붕에 전면 3칸, 측면 2칸의 작은 전각이며, 전각의 주위에 아크릴판을 덧대어 기도할 공간을 확장해 놓았다.
1.7. 영각
맞배지붕에 전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전각이다. 1967년 7평으로 지어졌던 충령각을 1992년 두 배 규모로 증축하여 영각으로 개칭했다. 벽면에는 봉은사를 세웠다고 전해지는 연회국사를 비롯하여 조선 불교의 중흥조 보우대사와 서산대사, 사명대사, 남호 영기율사, 영암, 석주 스님 등 7분 스님의 진영이 모셔져 있고, 불단에 지장삼존불상과 탱화가 있다. 오른쪽 벽면으로는 6.25전쟁 전후 희생된 201위 호국영가의 영단이 설치돼 있다.
1.8. 봉은사 판전
봉은사의 건물로, 목재 경판을 보관하며 예불을 드리는 공간이다. 현재 봉은사에 있는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되었다.
1856년(철종 7년)에 지었다. 당시 봉은사의 남호 영기 스님이 《화엄경수소연의본(華嚴經隨疎演義本)》을 무려 80권이나 직접 손으로 썼다. 남호 영기 스님은 자신이 쓴 《화엄경수소연의본》을 인쇄하여 책을 만들 목적으로 목판을 제작했고, 그것을 보관하기 위해 새로 건립한 전각이 이 판전이다.
1878년(고종 15년)에 다시 고쳐지었고 2012년에 보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2018년 7월 12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제425호로 지정받았다.
단층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이다. 4단으로 쌓은 장대석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기둥은 둥글고 주춧돌은 네모나다. 정면 기둥마다 주련을 달아두었다.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용마루 끄트머리에 취두를 올렸으며 지붕마루는 기와로 마감했다. 합각 부분에는 나무로 만든 풍판을 덧대었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공포는 삼익공이다.
정면은 전부 세살창호를 한 문이 달려있는 모습이며 교창은 없다. 측면 모습은 정면과 많이 다르다. 머름 위에 붉은색 나무 판으로 만든 창이 달려있으며, 창 위에 나무로 만든 벽을 세웠다. 머름의 크기는 일반적인 다른 한옥의 머름보다 큰 것이 특징이다.
실내 벽 가장자리에 받침대를 만들어 경판을 보관하고 있다. 경판에 습기가 스며들지 않게 하려고 바닥에 온돌을 깔았다.
봉은사 판전 현판(奉恩寺 板殿 懸板)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제83호 (지정일 : 1992년 12월 31일)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봉은사로 531(삼성동 73)
기록유산 / 서각류 / 목판각류 / 현판류
수량/면적 : 1点
제작시기 : 1856년(조선 철종 7년)
판전의 현판으로, 추사 김정희가 쓴 글씨이다.
길이는 가로 181cm, 세로 77cm이다. 조선시대의 작품이므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씨를 읽는다. '전(殿)' 자 왼쪽에는 세로로 '칠십일과병중작(七十一果病中作)'이란 글씨가 쓰여있는데, 이는 '71세에 과천에서 병을 앓고 있을 때 썼다'는 뜻이다.
일설에 의하면 김정희가 사망하기 3일 또는 4일 전에 썼다고 한다. 그 말이 맞다면 김정희 최후의 작품인 셈이다. 실제로 김정희는 판전이 완공된 1856년(철종 7년)에 봉은사에 와서 잠시 머물렀다가, 그 해 10월에 과천으로 거처를 옮겼고 그 달 10일에 세상을 떠났다. 상술했듯, 현판 글씨를 과천에서 썼다고 적은 것을 보아 저 말이 사실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
1992년 12월 31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제83호로 지정받았다.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목판(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初木版0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제84호 (지정일 : 1992년 12월 31일)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봉은사로 531 (삼성동 73)
기록유산 / 서각류 / 목판각류 / 현판류
수량 / 면적 : 3,190판
판전에 두고 보관하는 목판이다. 상술한 남호 영기 스님이 만든 목판이 이것이다. 《대방광불화엄경》은 《화엄경》의 정식 이름으로, 편의상 줄여서 '화엄경'이라 부르는 것이다.
1992년 12월 31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제84호로 지정받았다. 처음 문화재가 될 때에는 3,175판이었다. 그러나 2018년에 문화재청과 불교문화재연구소가 함께 전국 사찰에 있는 목판들을 조사하던 중에 미처 문화재로 지정하지 못한 목판 15판을 새로 찾아냈다. 이에 서울특별시에서는 저 목판 15판을 2019년 10월 10일에 추가로 지정했다.
봉은사 판전 신중도(奉恩寺 板殿 神衆圖)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제230호 (지정일 : 2007년 9월 20일)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봉은사로 531 (삼성동 73)
유물 / 불교회화 / 괘불화 / 석가불도
수량 / 면적 : 1幅
제작시기 : 1857년(철종 8년) 경
판전 향 왼쪽 벽에 모신 신중도(神衆圖)이다. '신중(神衆)'은 직역하면 '신(神)의 무리(衆)'로, '신중도(神衆圖)'는 '부처님의 정법을 수호하는 신들(神衆)을 그린 그림(圖)'이란 뜻이다. 사실 신중은 원래 불교의 신이 아니었고, 불교가 생기기 전에 인도에 존재했던 다른 종교들의 신이었다. 처음에 불교는 이들과 경쟁할 수 밖에 없었지만, 경쟁 대신 이들을 감화해 귀의시키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리고 기존 종교의 신들을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호하는 신으로 삼았으니 이들이 바로 신중이다.
이 신들은 부처님이 《화엄경》을 설파할 때 나타난다고 하여 '화엄신중(華嚴神衆)'이라고도 일컫는데, 상술한 목판이 화엄경인만큼, 건물의 목적과 잘 맞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가로 224.4cm, 세로 237cm이다. 신들의 배치는 4열이고 총 39신을 빼곡하게 그려두었다.
2007년 9월 20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제230호로 지정받았다.
봉은사 비로자나불도(奉恩寺 毘盧舍那佛圖)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제232호 (지정일 : 2007년 9월 20일)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봉은사로 531 (삼성동 73)
유물 / 불교회화 / 탱화 / 불도
수량 / 면적 : 1幅
제작시기 : 1886년(고종 23년) 경
판전 내부 중앙에 있는 불상 뒤편에 걸린 탱화이다. 1886년(고종 23년)에 그렸다. 이 그림을 제작하기 위해 상궁 8명이 시주를 했다고 한다. 원래는 같은 시기에 그린 〈칠성도〉 및 〈산신도〉와 한 자리에 있었는데, 〈칠성도〉는 1942년에 새로 지은 북극보전으로 옮겼고, 〈산신도〉는 지금 없다.
이 그림 속 부처님은 비로자나불이다. 비로자나불은 '광명' 혹은 '태양'이란 뜻의 산스크리트어 '와이로짜나(vairocana)'를 음차한 말로, '두루 빛을 비추는 부처님'이라는 뜻이다. 불교의 입장대로는,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들, 모든 보살들, 모든 중생들은 비로자나불의 화신이다. 오직 불변하는 하나의 중심이 있는데 이를 '중앙 비로자나불'이라고 부른다. 우주의 중심에 있는 불국토인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에 존재하면서 우주만물을 창조하고 총괄할 뿐만 아니라, 불교에서의 최고신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이자, 우주일체 만물을 고루 평등하게 밝히고 있는 법성체(法性體)로, 안으로는 진여법계를 비추고, 밖으로는 모든 중생에게 법성을 비추어 우주를 밝히며, 항상 변하지 않고, 우주의 대생명체 바로 그 당체를 말한다고 한다.
가로 224.4cm, 세로 302.3cm이다. 가부좌를 한 채 앉아있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양 옆에 양 손을 모은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를 그려두었다. 비로자나불 아래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그림의 왼쪽과 오른쪽 가장자리에는 사천왕이 각 면에 2명 씩 있다.
2007년 9월 20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제232호로 지정받았다.
여담
현재도 예불하는 장소로 쓰이는 만큼, 실내에 들어갈 수 있다. 다만 경판을 사진 촬영하는 것은 금지이니 참고하면 좋다.
2. 요사 및 선방[편집]
2.1. 봉은사 선불당(奉恩寺 選佛堂)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4호 (지정일 : 1985년 12월 5일)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봉은사로 531(삼성동 73)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당우
수량 / 면적 : 건물 1棟, 토지 344.3㎡
제작시기 : 1941년
대웅전 동측에 있는 선방(禪房)으로, 1985년 12월 5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4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중기에는 이곳에서 승과 시험을 보기도 하였다. 때문에 참선의 '禪' 자를 쓰지 않고, '가리다', '고르다'라는 의미의 '選' 자를 쓴다.[17]
승과는 스님들이 보던 과거 시험으로,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온 것이었다. 조선 초에는 몇 년에 한 번 씩 열렸으나 성종과 연산군이 중지시키더니 나중에는 중종이 아예 폐지시켰다. 그러다 불교에 관심이 많은 문정왕후가 자신이 수렴청정을 하던 명종 시기에 승과를 부활시켰다. 승과는 크게 선종시와 교종시로 나뉘었는데, 문정왕후는 봉은사를 선종 수사찰로 지정하여 선종 시험장으로 삼았다. 이 때 쓰인 건물이 바로 선불당이다. 당시 이름은 선불당이 아니었으며, 정확한 것은 불명이다.
그러나 1565년(명종 20년)에 문정왕후가 승하한 후 승과는 폐지되었다. 그래도 선불당 건물 자체는 계속 남았으나, 1592년(선조 25년)에 임진왜란으로 불탔고 이후 재건했으나 다시 불타고 새로 짓는 것을 반복했다. 조선 후기에는 심검당이란 이름의 승방으로 기능했다. 현재 건물은 일제강점기인 1939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41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지금까지 쓰이고 있으며 명종 시기 부활한 승과 시험을 여기서 봤다는 기록을 확인한 후에는 역사성을 기려 '선불당(選佛堂)'으로 명명하여 부르고 있다. 한편, 이 자리에 있었던 심검당은 화재로 소실된 후 대웅전 서측, 선불당과 마주 보는 자리에 다시 지어지게 되었다.
정면 3칸, 측면 8칸이다. 지붕의 합각 아래에 현판을 달았는데 사실 그 부분은 일반적으로 측면으로 여기는 면이다. 하지만, 현판을 둔 곳이 정면이기 때문에 그쪽을 정면으로 보는 것이 맞다. 이런 형태는 경상북도 영주시에 있는 소수서원 강당에서도 볼 수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인데 앞면과 뒷면에도 각각 2개 씩 작은 합각을 결합시켜 매우 독특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정면 합각에는 원이삼점(圓伊三點)을, 정면과 맞닿은 측면 합각에는 '만(卍)'을 그려 넣었다. 처마는 겹처마로 공포는 초익공이다. 그리고 사방에 툇마루를 둘렀다. 툇마루는 밖과 통해있어 사람들이 편히 앉아 쉴 수 있다. 툇마루 안쪽에는 온돌방이 있고, 우측면 제일 오른쪽 끄트머리에는 부엌이 있다. 부엌문에는 신장도가 그려져 있다.
2.2. 심검당(尋劍堂)
대웅전 서측에 있는 선방(禪房)이다. 심검당은 사찰에서 선방이나 강당의 이름에 많이 붙여지는 명칭으로, 지혜의 칼을 찾아 무명의 풀을 벤다는 뜻으로 검이란 날카로움 즉 지혜를 상징하고 심(尋)은 '찾는다' 는 뜻이 있으니 심검당은 바로 지혜를 찾는 곳, 즉 선방(禪房)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심검당은 팔작지붕에 앞면 5칸, 남측면 3칸, 북측면 4칸의 규모를 하고 있다. <정릉지>의 '봉은사 사적'에 의하면 창건 때부터 있었던 건물인데 1939년 화재로 소실되고 지금 것은 1941년에 새로 지어진 당우이다. 본래 선불당 자리에 있던 전각이 심검당이라는 이름을 썼으나, 1941년 중건 이후에는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2.3. 운하당(雲霞堂)
대웅전에서 서쪽으로 20m 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선방(禪房)으로, 운하당이 올라앉은 축대도 대웅전 축대가 계속 이어진 것이다. 용도는 심검당과 마찬가지로 승방으로 쓰이며, 창건 당시부터 있었던 전각이지만 1939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41년에 중건되어 현재까지 쓰이고 있다.
3. 불상
3.1. 미륵대불
미륵대불은 봉은사 성보로써 높이 23m로 국내 최대의 크기의 대불이다. 1986년 당시 봉은사의 주지였던 영암스님이 민족 통일을 발원하며 일으킨 불사에 1만 명 이상이 동참하여 10년 간에 걸쳐 이루어진 대작불사로, 1996년에 완공되었고, 2018년에 미륵대불 주변의 벽면에 3999위의 미륵원불과 23위의 보살입상을 봉안했다.
미륵대불은 가히 봉은사, 아니 강남의 랜드마크로도 볼 수 있다. 미륵대불의 크기가 워낙 거대해서 주변 지역에서 잘 보인다. 미륵대불 앞으로 기도를 할 수 있는 광장이 마련되어 있으며, 이곳에서는 법회가 열리거나 경우에 따라 공연 등 문화 행사장으로 사용된다.
드라마에서도 서울의 야경과 함께 많이 등장하는 장소이며, 2012년에 방영된 타임슬립을 주제로 하는 드라마 신의에서도 코엑스와 함께 주요 배경으로 등장한 적이 있다.
3.2. 해수관음상
진여문의 서쪽에는 연못 가운데 한국의 전통적인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관세음보살상의 손에는 감로수를 담은 병을 들었고 보관(寶冠)에는 아미타불이 새겨져 있다. 또한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진 연못은 아미타불 극락세계의 연꽃이 핀 아홉 개의 연못 중 하나를 표현하고 있다. 본래 해수관음상(海水觀音像)이란 바다가 보이는 사찰에서 커다란 규모로 관세음보살상을 세우지만, 봉은사는 도심 속에 있으므로 부득이 연못 가운데에 관세음보살상을 모셨다고 볼 수 있다.
4. 문
4.1. 일주문
본래 봉은사의 일주문은 1886년, 지금의 휘문고등학교 자리에 세워졌다고 전해진다. 그 후 강남이 개발되기 시작하며 지금의 진여문 자리로 옮겨졌으며, 1986년 경기도 양평군의 사나사로 이건되었다. 2011년에는 경기도 양주시에 있는 석굴암[18]으로 옮겨져 불이문으로 사용되었다. 그동안은 진여문이 일주문 대신이다가, 2020년 5월 29일에 일주문이 다시 봉은사로 돌아오게 되었다. 원래 세워졌던 위치는 아니고 봉은사 입구에 복원되었다.
일주문의 좌우로는 두 마리의 코끼리 석상이 문지기 역할을 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마야부인이 석가모니를 잉태했을 때 태몽으로 코끼리 꿈을 꿨다고 해서 신성시 하고 있는데, 거기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1970년대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4.2. 진여문(眞如門)
봉은사의 천왕문으로, 일반적인 천왕문에 비해 크기가 엄청 크다. 건축 양식은 팔작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이지만 일반 건물에 비해 기둥의 간격과 높이 등에서 훨씬 크게 지어졌기 때문에 칸수에 비해 실제로는 규모가 큰 건물이다. 좌우에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60호인 봉은사 목조(木造) 사천왕 입상이 있고, 가운데 대문에는 각각 칼과 창을 든 신중상이 그려져 있으며, 천정에는 비천상이 그려져 있다.
진여(眞如)란,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뜻한다. 그러므로 진여문에 들어선다는 것은 곧 부처님의 세상에 들어간다는 의미가 있다. 지붕 아래에 걸려 있는 현판은 앞에는 '수도산 수선종 봉은사'라고 하여 봉은사가 선종의 으뜸 사찰임을 나타내고 있다. 뒤에는 '진여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봉은사라는 현판은 한때 해인사로 출가한 뒤 만해 한용운스님과 '만당(卍堂)'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던 서예가 청남(菁南) 오재봉(吳齋峯, 1908~1991년)이 쓰고, 진여문이란 현판은 봉은사 주지를 역임한 석주스님이 썼다.
봉은사 진여문은 『선정릉지(宣靖陵誌)』의 「봉은사사적」에 의하면 창건 당시부터 있었던 건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봉은사 경내에는 진여문과는 별도로 지금의 법왕루 자리에 사천왕상을 모신 천왕문이 있었다고 한다. 그 뒤 기록은 알 수 없고 1939년 대화재 때 소실된 후로 1970년대에 휘문고 근방에 있던 일주문을 옮겨와 세워 놓았다. 1982년에는 영암스님과 밀운스님이 주지를 이어 맡으며 진여문의 복원을 발원하여 1982년 일주문 자리에 진여문을 세웠다.
5. 기타
5.1. 서래원(瑞來院)
서래원(瑞來院)은 상서로운 기운이 들어오는 전각이라는 의미이다. 일주문으로 들어오면 우측에 있는데, 가운데에는 불교용품 전문점이 있는데, 염주나 향초를 판매하고 있으며, 건물 바깥에 있는 라벨에다가 기도하는 사람의 이름과 기도할 내용을 적어 초에다 붙여 대웅전 앞에 공양하면 된다.
좌측에는 베이커리 및 카페인 여여, 우측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지하에는 공양간과 꽃집인 로터스플라워가 있다. 공양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 오후 4시 30분부터 6시까지 하루 2회 운영한다. 단순히 신도들 뿐만 아니고 인근 직장인들까지 몰려들어 자리가 없을 정도다. 잔치국수, 막국수, 메밀, 순두부 등 메뉴가 다양하다.
5.2. 전통문화체험관
지장전 서측에 있는 건물로, 본래는 요사로 쓰이던 건물이 있었는데, 봉은역사공원 마스터플랜 1단계 사업으로 지정되어 그 자리에 전통문화체험관을 짓게 되었다. 2016년 6월 3일에 착공하여 2017년 7월 25일에 완공되었으며, 총 2개 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층수는 지하2층, 지상2층으로, 지하층은 철근콘크리트 구조이며 지상2층은 전통 한식목구조로 시공되었다. 지하는 식당, 신도회 사무실, 대회의실, 강의실을 갖추었고, 지상은 체험관 및 방으로 설계되었으며, 바닥 면적은 1관이 1,340㎡(406평), 2관은 1,062㎡(322평)으로 시공되었다. 이곳에서는 관광객들을 위한 사찰음식·다도·참선 등 전통문화체험 등의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진행하고 있다.
5.3. 매화당(梅花堂)
법왕루 동측에 있는 건물로, 2018년 9월에 착공하여 2020년 2월에 완공되었다. 본래 매화당은 유서 깊은 건물로, 사명대사가 머물렀던 곳이라고 한다. 1604년에 사명대사가 일본에 갔다 돌아오면서 나가사키와 사쓰마 사이에 정박하고 있던 중국 상선에서 매화를 얻어 돌아온 뒤 이곳에 그 매화를 심었다고 전해진다. 현재의 매화당은 한 차례 소실되었던 것을 복원한 것이라 한다. 현재는 전통문화를 체험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편의시설로 접수처 및 휴게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5.4. 연회루(緣會樓)
봉은사 창건주인 연회국사의 법호를 딴 전통차체험관으로, 緣(인연 연), 會(모일 회) 뜻과 같이 많은 사람이 봉은사에서 좋은 인연을 만들어 가길 바라는 마음과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불교문화와 차 문화의 우수성 알리고자 하는 취지와 의미를 두고 구 종루 위치에 리모델링하여 2018년 6월 20일 개원했다.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9시까지 운영한다.
5.5. 종루
종루에는 범종과 법고, 운판, 목어의 사물(四物)이 봉안되어 있으며, 새벽 예불과 저녁 예불을 시작할 때 사물을 치는데, 스님이 사물을 치는 모습이 장관이다. 범종은 지옥의 중생을 제도하고 법고는 가축이나 짐승을 제도하며, 운판은 공중을 떠도는 영혼, 특히 새의 영혼을 극락으로 인도하고 목어는 물고기들의 영혼을 제도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본래 종루는 지금의 연회루 자리에 있었으나, 2014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기고 옛 종루 자리에는 연회루를 세워 사찰을 방문하는 내·외국인을 위해 다도와 신도들을 위한 휴식공간인 전통문화체험관을 건립했다.
5.6. 종각
1974년에 조성된 것으로, 현재의 종루가 세워지면서 사용되지 않고 보존만 하고 있다.
5.7. 날물곳
종각과 미륵전 사이에 있는 약수터이다. 수질검사 결과 음용불가 판정을 받았다.
5.8. 보우당
보우당은 2000년 10월 아셈(ASEM) 정상회의를 위해 국가의 지원을 받아 사하촌을 정리하고 건립한 건물로 보우대사의 불교 중흥의 큰 뜻을 기리기 위해 보우당이라 이름 하였다. 각종 교육 및 신행활동 공간으로 상시 이루어지고 있으며, 일요일에는 어린이 법회가 진행되고 있다. 또한 지하층엔 무의탁자나 외국인노동자를 위한 무료진료소와 종무원 숙소로 활용하고 있다.
5.9. 향적원
400여명의 대중공양이 가능한 공간으로 매주 화요일 사찰음식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대중공양 이용시간은 오전 11시 30분에서 오후 12시 30분까지이며, 법회 및 행사에 따라서 변경될 수 있다.]
15:40~15:45 봉은사역 1번 출구로 회귀하여 탐방 완료 [17분, 1.1km 이동]
15:45~15:55 봉은사역에서 고속터미널역으로 가는 9호선 지하철 승차 대기
15:55~16:55 봉은사역에서 9호선을 타고 고속터미널역으로 가서 3호선으로 1차 환승하여 연신내역으로 이동한 후 6호선으로 2차 환승하여 구산역으로 이동 [1시간 소요]
송파 책박물관 위치도
한국광고박물관 위치도
서울 선릉과 정릉 지도
서울 강남구 봉은사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