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률
'그러므로 무엇이든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주님은 '이것을 규칙으로 삼아라'란 뜻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취급해야 할까,
그들에게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너희가 '이것을 규칙으로 삼아라' 주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른 사람에 관한 것에서 시작하지 않게 됩니다.
여러분 자신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 자신을 항상 그들의 위치에 놓아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나쁜 말을 하면 그것이 싫습니까?
그러면 다른 사람에게 나쁜 말을 하지 마십시오.
우리 주님이 황금률에 관한 .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요약이라는 것입니다.
주는 무슨 뜻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주는 여전히 율법의 선생이요, 백성들의 지도자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의중에 두고 계셨음이 틀림없습니다. 주의 지대한 관심은 이 사람들에게 바른 율법관을 주시는 데 있었습니다.
우리 문제의 절반은 우리가 율법의 의미와 그 참 성격과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자녀들에게 주신 율법은 매우 긍정적인 것이요, 영적인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결단코 기계적인 것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그들을 추종한 사람들의 오류는,
어떤 사람을 실제로 살인하지 않은 한 살인에 관한 법을 지켰으며, 육체적 간음을 법하지 않은 한 도덕적으로 훌륭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그 영적 의도, 율법의 영적 의미를 보는 일에 완전히 실패했으며 특히 율법을 주신 목적과 목표를 보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율법 이면의 목적과 정신은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고,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타락의 결과로 우리는 사악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예를 들어 여러분이 이웃의 소가 길을 잃은 것을 보면 그것을 어떻게 주인에게 되돌려주는가,
혹은 여러분이 그의 농장에서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본다면 여러분이 어떻게 그에게 속히 알려줘야 하는가,
즉 '이웃 사람의 소가 길을 잃은 것을 본다면 나는 그 소를 데려다주어야 한다고 율법은 말한다. 그러므로 나는 그렇게 해야 한다'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 그가 소를 잃는다면 이것은 그에게 가혹한 일이요 손실이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이 내 소를 되돌려 주면 나는 얼마나 고마워할까. 그러므로 그를 위해서 이렇게 해야 하겠다'라고 말입니다.
환언하면 여러분은 이웃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며, 그를 사랑해야 하며, 그를 도와주기를 소원해야 하며, 그의 행복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목적은 우리로 이렇게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현대 세계의 사람들은 여전히 황금률을 순종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복음의 최초의 진술은 사람이 사악하고 왜곡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악에게 너무 지배를 받고 속박을 받은 나머지 황금률을 지킬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복음은 항상 고통의 원인은 인간의 타락과 인간의 죄입니다.
사람이 율법과 선지자의 요약인 황금률을 실천하지 않는 것은
율법에 대한 사람의 태도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율법을 사랑하지를 않습니다.
사실은 율법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증오하며 율법을 원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것을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란 말씀으로 표현하셨습니다.우리는 행하지 않으며 또 원하지도 않습니다.
그 까닭은, 우리가 자아를 너무 잘못되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자기중심적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 이외에는 아무것에 대해서도 생각하지를 않으며 자기의 복지 이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이것은 진리요,
참된 기독교인들에게서 마저도 이것이 남아 있는 것은 얼마나 비극입니까? 우리는 본능적으로 모두 자기중심적입니다.
우리가 자신에게 하는 말과 우리에 대해 하는 생각에 분개를 하기는 하면서도 다른 사람들도 우리와 같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그 까닭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줄곧 자아를 생각하며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자아 중심과 인간의 자주성을 막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를 완전히 자주적인 존재로 생각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천성으로 그분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황금률에 따라 살지 못하며,
황금률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인간이 자기중심적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음으로 자아 만족, 자기방어, 자기 관심으로 이끌어갑니다.
자아가 줄곧 선두에 있습니다.
인간은 무엇이나 자기를 위해 원하기 때문입니다.
노동쟁의에 의한 문젯거리의 원인도 이것이 아닙니까?
'나는 더 가질 자격이 있다'라고 말하며
그래서 그들 쌍방은 서로 반대하며 따라서 싸움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각각 자기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이든, 사회적이든, 경제, 국가, 혹은 국제적인 문제이든, 이것을 국가적 차원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두 나라가 같은 것을 원합니다.
모든 국가들은 자기네를 단순히 세계 평화의 수호자로, 관리자로 보려고 애를 씁니다. 애국심은 항상 이기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나라'요 '나의 권리'입니다.
우리 모두 자아 중심적이기 때문에 전쟁이 있습니다.
개인과 개인사이든, 사회의 어느 단체 끼리든, 국가와 국가군 사이든 모든 분쟁과 다툼과 불행은 결국 이것으로 귀착이 되는 것입니다.
황금률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오로지 타락과 죄 때문인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황금률을 실천하는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복음의 대답은 여러분이 하나님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해 줍니다.
가장 큰 계명은 어느 것입니까?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입니다. 순서에 주목하십시오.
여러분의 이웃에서 시작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기까지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위해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관계를 가져야만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으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모두 다툼과 문제에서 돌아서서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의 모든 자랑과 영광이 아무거도 아님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우리 자신을 죄인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성경만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알게 된 모든 사람의 체험의 확증이요, 모든 성도의 체험입니다.
우리는 그들에 대해 전혀 새로운 견해를 가집니다.
우리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우리 모두 함께 그리스도에게로 달려가 그의 놀라운 은혜를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의 은혜를 함께 즐기며 나누어 갖고 싶어 합니다.
일의 순서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에 관한 진리를 인식하고 그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인식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와 자비 가운데서 보십니다.
주는 결국 '내가 너희를 본 것 같이 너희도 그들을 보고, 너희에게 내 생명을 주기 위해 너희를 위해, 하늘에서 나를 땅으로 오게 한 것에 비추어서 그들을 바라보아라'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그들을 그와 같이 바라보십시오.
이렇게 하는 순간 여러분은 황금률을 실천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님을 발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이 지점에서 자아로부터, 자아의 무서운 횡포로부터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사람들을 새로운 눈으로 다르게 바라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바울과 함께 '그러므로 우리가 이후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고후 5:16)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사람을 영적인 방법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이렇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우리는 황금률을 이행할 수 있습니다. 실천할 수 있습니다.